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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63화 (158/1,794)

템빨 17권 - 13화

그리드는 피아로를 설득하기 위한 대결에서 전력을 다했었다. 보유한 모든 패를 꺼내서 사용했고 결국 패배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보다 수준 높은 검술을 구사함에 있어서 적합한 무기는 대검이 아닌 한손 검이라는 사실이었다.

‘상대적으로 크고 무거운 대검의 궤적은 단순하고 한계가 있어.’

그리드의 기본 전투방식은 한 대 때리고, 한 대 맞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한 방 파괴력이 강력한 대검을 선호했었고 여태까지 그 선택에 문제는 없었다.

파그마의 후예는 데미지 위주의 스킬트리를 보유했으므로 대검과 상성이 무척 좋기도 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슬슬 한계를 느꼈다.

엘핀스톤과 브라함에 이어서 피아로에 이르기까지.

종전과는 비할 수 없는 강자들이 출현함에 따라서 그간 고수해온 전투 방식이 무력해졌기 때문이다.

한 방 파괴력이 강하면 뭐하는가?

상대가 맞아주질 않는데!

‘한손 검에 익숙해지는 게 좋겠다.’

대검과 비교해도 위력이 뒤떨어지지 않는 최강의 한손 검, 이야루그트도 얻은 바.

피아로와의 대결 이후 그리드는 한손 검의 수련에 매진했다.

과거였다면 내가 왜? 귀찮아. 템빨만 있으면 돼.

라고 생각했을 그리드지만 이제는 달랐다. 아이템을 제작할 때처럼 최선을 다해서 한손 검에 익숙해져갔다.

보다 강해지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기에 가능한 변화였고 노력이었다.

***

‘옛날과 비교하면 컨트롤 실력도 늘었고 수련에 소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오만이었나 보다.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된 척슬리라는 기사, 듣도 보도 못한 녀석이건만 내 기술들이 통용되질 않는다. 이야루그트가 알려주는 최선의 검로가 있었기에 그나마 호각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드는 솔직히 매우 난감했다.

갓 핸드의 보좌 없이는 척슬리를 제압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다.

언제 다른 적들이 기습해올지 몰랐으니 갓 핸드를 방어용도로 대기시켜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도중 상황이 변했다.

아군이 도착했고 적들은 혼란에 빠졌다.

그리드에게 집중되어 있었던 이목이 한층 완화됐다.

기회라고 여긴 그리드가 비장의 수단으로 아껴두었던 매직 미사일을 전개, 척슬리를 떨쳐낸 후 전장을 보다 더 헤집어 놓았다.

아군에게 호응해주기 위함이었고 이는 척슬리의 초조함을 이끌어내는 미끼가 되었다.

***

“큭…!”

살(殺)에 적중 당하고 생명력 게이지가 3분의 2까지 떨어진 척슬리.

일격에 큰 피해를 입고 주춤거리는 그의 목덜미를 붙잡는 그리드의 생명력 게이지는 가슴의 핏자국이 무색하게도 완전했다. 단 1도 소모되지 않았다.

성스러운 빛의 갑옷과 도란의 반지의 위력이었다.

그리드는 척슬리가 사용한 라이징 소드의 위력이 심상찮음을 감지하고 미리 도란의 반지를 착용했던 것이다.

도살귀의 안대가 있기에 발휘할 수 있는 판단능력이었다.

랭커들이 봐도 감탄할 정도로 완벽한 아이템 활용능력이었다.

서늘한 미소를 피어올린 그리드가 척슬리에게 속삭였다.

“템빨이라고 들어봤어?”

“템빨?”

무슨 뜻이지?

그리드가 사용하는 용어 중에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척슬리가 느끼기에는 그리드가 엄청난 지식인 같았다.

‘서민 출신이라 무식할 줄로만 알았는데 듣보잡이니 템빨이니 하는 전문 용어들을 남발하다니…!’

남의 말귀를 알아 듣지 못한다는 것, 엄청나게 답답한 일이다.

템빨의 뜻을 해석하지 못하고 복잡해하는 척슬리의 주변으로 4개의 황금 손이 날아와 손가락을 뻗었다.

‘이건!’

스스로 움직이며 검을 휘둘렀던 황금 손.

그것이 무려 3개나 더 있었다고?

위험을 감지하고 그리드를 뿌리치기 위해서 노력하는 척슬리였다.

그를 힘으로 억누를 수 없음에 다급해진 그리드가 지체 않고 소리쳤다.

“매직 미사일!”

지잉-!

갓 핸드가 펼치고 있는 손가락 끝으로 그리드의 마력이 집결되었고,

퍼퍼퍼펑!!

이내 백색의 섬광이 쏘아져 척슬리에게 명중했다.

“크아아아아악!!”

척슬리는 무시할 수 없는 통증을 느꼈다.

황금 손들이 발사한 매직 미사일, 최하급 마법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위력이 강력했다.

척슬리는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백은 갑옷의 저항력이 무시당하는 거지!’

척슬리가 당주로 있는 로칸 가문은 대대로 에트날 왕실을 섬겨왔다.

무수한 무훈을 세웠고 그 공을 인정받아 보구들을 하사 받았다.

그중 하나가 바로 백은 갑옷이었다.

준수한 물리 방어력과 높은 마법 저항력을 자랑하는 갑옷으로서 변수를 차단하기에 무척 용이한 물건이었다.

백은 갑옷을 무장한 척슬리는 전쟁에서 늘 무적이었다.

적의 물리 공격은 검술로 파쇄시키고 적의 마법적 기습은 백은 갑옷이 저항해주었으니까!

한데!

“쿨럭…! 쿨럭!”

최상위급 마법의 위력마저도 반감시켜주는 백은 갑옷을 최하급 마법이 꿰뚫고 들어와 온전한 타격을 주다니?

아니, 애초에 검사이면서 대장장이인 파그마의 후예가 어째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

비밀은 황금 손에 있을 터!

‘도대체 저 황금 손의 정체가 뭐냐…!’

내상을 입고 피를 토하는 척슬리의 머릿속은 뒤죽박죽이었다.

그의 이지로는 그리드라는 인물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차원이 다른 인물을 마주한 심정이었다.

그래, 라인하르트 골렘침공전 당시에 느꼈던 심정과 같다.

‘어째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검술을 단련해왔고 그 결과 검호라는 칭호를 얻었다.

한때 최강의 검사라고 불리었다가 홀연히 사라진 피아로의 재림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한데 아직도 이만한 격차가 있다니?

‘전설이란!’

이미 완성되었기에 전설이라 불리는 게 아니었던가?

그리드의 성장은 이미 끝났고 정체되어 있었어야함이 옳은 게 아닌가!

“왜…! 당신은 왜 더 강해진 거지!”

“…”

발악하듯 외치는 척슬리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눈빛이 처음과는 달리 호의적이었다.

그리드는 더 이상 척슬리를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고 있었다.

강자에 대한 예우였다.

그렇기에 솔직히 말했다.

“나는 아직도 약하다.”

“뭐?”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던 골렘 대군을 막아냈고 이제는 또 검호인 나를 제압한 자가 스스로를 나약하다 말하다니!

이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란 말인가!

동요하는 척슬리에게 그리드가 그간 느껴온 것들을 말해줬다.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아. 너도 언젠가 진정한 강자를 만나게 된다면 알게 될 거다. 내가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브라함과 피아로.

그들과 비교하면 나는 전설도 뭣도 아니다.

나는 아직 완전한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그 이유,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자위할 수도 있겠으나 그리드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전직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

퀘스트 스토리를 관조하고 주도할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유라나 후로이였다면, 나처럼 하나의 퀘스트에 오래토록 정체되어 있는 바보 같은 짓은 안 했을 터다.

‘재능이라고는 쥐뿔도 없지.’

레가스와 페이커처럼 컨트롤을 잘한다거나 지슈카와 폰처럼 레벨을 잘 올린다거나.

그리드에겐 무기가 될 만한 장점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지금의 입지를 다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집념 덕분이었다.

그 집념이라도 없었다면, 그리드는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하지도 못했을 테고 여전히 평범한. 아니, 평범보다 못한 저레벨 유저로 지내고 있었을 터였다.

“뭐, 내 말은. 더욱 더 정진하라는 뜻이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말이지.”

호의를 품었던 그리드의 눈동자에 다시금 살기가 물들었다.

강자에 대한 예우?

이 정도면 충분하다.

그리드는 감히 레이단을 침공해온 적을 용서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단순히 재물적 손실을 위협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레이단에는 2만 백성이 있다.

누구도 사랑해주지 않았던 나에게 무한한 호감을 보내는 백성들.

눈앞의 적군은 그 고마운 이들을 해하려한 존재들이다.

용서해선 안 됐다. 아니, 존재 자체를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드 님, 준비가 끝났습니다.

그리드가 날뛰는 사이 전장의 구도는 이상적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활을 쏜 레이단의 병사들이 왕실군의 숫자를 줄였고 이때 북부군을 수습한 라덴은 왕실군의 발을 묶었다.

그리고 라우엘은 3차 전직 기공사 <흐름의 주인>이 발현할 수 있는 최강의 스킬 캐스팅을 끝낸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당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임을 세계에 각인시켜주세요.

-그, 그래…

라우엘의 오글거림을 감당하기만 하면 된다.

닭살을 털어낸 그리드가 우선 페럴의 목숨을 거뒀다.

상처투성이가 된 채 숨을 헐떡이던 페럴은 저항하지 못하고 검에 찔려 잿빛으로 화해버렸다.

[에트날 왕국의 제일궁사 페럴 자작을 해치웠습니다.]

[번 가문을 영원히 적대하게 됩니다.]

[경험치 356,410,000을 획득하였습니다.]

[썬더 보우를 획득하였습니다.]

[악마력이 2 올랐습니다.]

“페럴…!”

척슬리와 페럴은 서로가 의지해온 전우였다.

그리드를 노려보는 척슬리의 시선에 증오심이 엿보였다.

그리드는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작금의 사태를 초래한 것이 누구인지 잊지 마라. 먼저 검을 겨눈 건 너희잖아. 나라를 구해준 은혜를 잊다니, 개보다 못한 놈들.”

그리드의 표정이 최초에 등장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만하고 사악하게 변모해갔다.

적에게 공포와 후회를 심어주기 위한 조건 중에는 압도적인 힘의 격차뿐만이 아니라 태도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니 의도하는 것이었고 이는 후로이에게 지속적으로 교육 받은 부분이었다.

“이놈!”

“감히 페럴 자작님을!!”

페럴 샤에바 드 번.

대대로 샤에바 영지를 다스려온 번 자작가의 당주이며 명망이 높다.

그의 죽음은 현재 왕실군에 소속되어 있는 샤에바 영지군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것이었다.

대열을 이탈해 그리드를 덮치는 기사와 병사들의 숫자가 무려 3백이었다.

“공작각하를 지켜라!!”

다급히 소리친 라덴이 군을 움직이려 했다.

하지만 그리드가 손을 들어 제지시켰다.

“우오오오오!!”

“죽어라!!”

창칼을 겨눈 채 쇄도해오는 3백 적군에게 고립 된 그리드의 시선.

호위기사들 사이에 숨어 전장을 엿보는 렌 왕자를 향해서 날카롭게 꽂혔다.

‘괘씸한 놈,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다짐한 그리드가 검무를 펼치기 시작했다.

피와 살이 난무하는 전장의 한가운데서 고고한 춤사위를 펼치는 그의 모습은 마치 매혹적인… 아니, 그냥 분위기 파악 못하는 미친놈 같았다.

“파그마의 검무, 파(波)!”

쿠르르르르르!

이야루그트는 대검과 비교해서 공격속도가 높다. 하여 지속적인 전투에서는 대검에 뒤지지 않는 위력을 발휘했으나 단발적인 스킬 공격에서는 위력이 다소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리드는 검무를 펼침과 동시에 <그리드의 대검>으로 스왑하였고 그리드의 대검은 최고의 공격력과 스킬 피해량 상승 옵션까지 보유한 지존 무기였다.

그것이 사방으로 토해내는 검기의 파도를 3백 샤에바 영지군이 감당할 수 있을리 만무했다.

‘저런 괴물 같은 놈!’

사방으로 분출되는 핏줄기 사이로 번뜩이는 그리드의 적광이 렌 왕자에게 무한한 공포심을 선사하였다.

하지만 렌 왕자는 견뎌냈다.

“무리하지 말고 버텨라! 시간은 우리 편이다!”

이제 잠시 후.

정말로 조금만 더 기다리면 알테스 산맥을 경유한 2천 별동대가 레이단 군의 후위를 덮칠 것이었다.

또한!

‘그리드! 네놈의 부인 또한 이제 곧 내 수중에 들어올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버티기만 하면 된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 거미줄 같은 전략을 펼쳐놓은 렌 왕자는 자신감으로 충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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