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9화
휴렌트는 클로즈베타 시절부터 Satisfy를 플레이해왔다.
실로 많은 모험을 하였으므로 Satisfy가 얼마나 광활한 세계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보다 강한 농부?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래, 전설의 농부라면 메테오급 스킬을 사용해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전설의 어부는 지금쯤 용왕과 친구를 먹었을 수도 있지.’
이렇게 생각해보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은둔고수는 많았다.
하지만 휴렌트는 한 가지 사실만큼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전설의 농부가 있는 건 좋다 이거다.
하지만 왜 하필 그리드의 부하란 말인가?
‘그리드, 네놈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지?’
누구보다도 빠르게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한데 이어서 이제는 또 레전드리 NPC를 부하로 거느리다니?
증오의 대상이라고는 하나 그 탁월한 능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좌절하는 휴렌트에게 피아로가 손을 내밀었다.
“나와 함께 가자.”
“…”
시체의 산을 등진 미친 농부.
수천 명을 폭살시켜놓고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휴렌트는 저항하고 싶었다.
하지만 상태이상 빈사에 빠진지라 몸이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 데려가라. 나를 그리드 앞으로 끌고 가 삶아 먹든, 구워 먹든 네 마음대로 해라.”
“아니, 너는 나와 함께 농사를 짓는다.”
“뭐?”
이거 진짜로 미친놈 아닌가?
내 입으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지만, 나는 레이단을 침공한 적군의 수장 중 하나다. 레이단의 입장에서는 대역죄인이며 또한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는 대상이기도 했다. 중요도 높은 인물로서 취급에 심혈을 기울임이 옳았다.
한데 농사를 시키겠다고?
황당하고도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그러한 마음을 읽은 것일까?
휴렌트의 일그러진 얼굴을 확인한 피아로가 조소했다.
“레이단에 도달하지도 못한 채 죽어나간 군대의 수장 따위 포로 취급할 가치도 없지. 너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밭일만 하면 된다.”
“이익…!”
휴렌트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다.
오기에 휩싸인 그가 커다란 말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나는 무수한 기밀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내게서 정보를 캐내지 못했다가는 레이단이 불바다가 되고 말걸! 그러니까 나를 중요도 높은 포로로 취급해라!!”
“호오, 그래?”
피아로의 눈빛이 진중하게 변했다.
농부 피아로에서 레이단 총사령관 피아로로 변모하는 순간이었다.
휴렌트는 아차 싶었다.
***
“커흑! 쿨럭! 쿨럭!”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밀알들의 폭발은 어마어마한 위력을 발휘했다.
2천 병사 중 절반 이상이 죽어나갔고 산 사람들 또한 대부분 중상을 입어 반송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개중에 게임BJ 바니바니가 있었다.
생명력 15퍼센트만을 남기고 간신히 살아남은 그가 끝을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사로잡혔다.
‘어마어마한 괴물이다!’
레이단의 미친 농부.
소문에 의하면 랭킹 2위 지발과 호각(?)을 겨뤘고 랭킹 3위 크리스를 압도한 뒤 농노로 부렸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다.
7대 길드의 진격을 홀로(?) 저지하였다는 소문 또한 결코 과장 같지가 않았다.
‘저런 괴물과 호각을 겨뤘다는 지발은 또 얼마나 괴물인 걸까?’
과연 세상은 넓고 강자는 많다.
바니바니는 이 넓은 세상과 무수한 강자들을 모조리 자신의 카메라에 담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시청률을 독식함으로서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려면 일단 살고 봐야한다.
온갖 특종에 발 빠르게 대처하기 위해서는 신속함이 필수였고, 신속을 갖추기 위해서는 꾸준히 레벨을 올림으로서 민첩성을 상승시켜야 했다. 사망으로 인한 경험치 다운만큼은 반드시 피해야할 덕목이었다.
‘여기서는 살아남는 게 우선이다.’
소문만 무성했던 농부의 활약상은 이미 충분히 찍었다.
순식간에 논밭을 만든 뒤 폭발의 토대로 활용, 2천 병사 중 대부분을 궤멸시킨 그 경이적 강함을 영상에 고스란히 담았다.
이제 이곳에 더 이상 볼일은 없다.
그럼 휴렌트는?
휴렌트의 그리드 복수전은 안 찍을 거냐고?
폭.
“으헉!”
폭.
“크악!!”
폭.
“커허헉!!”
“…”
농부가 3차례 휘두른 호미에 이마를 찍히고 피를 철철 흘리는 휴렌트의 모습을 보아하니, 휴렌트의 그리드 복수전은 꿈에서나 가능할 일 같았다.
‘휴렌트는 버린다!’
판단한 바니바니가 <신속의 부츠>를 착용, 그대로 전장을 이탈했다.
그는 렌 왕자의 본대와 합류할 계획이었다.
렌 왕자의 본대에는 휴렌트 이상의 실력자들이 많은 바.
그들과 템빨단의 화려한 대격돌을 영상에 담는다면?
‘돈방석에 앉겠지! 오늘 반드시 1,000억짜리 영상을 찍는다!’
바니바니의 포부는 원대했다.
***
“애들은 다 어디로 갔어? 어째 길드원들이 너 빼곤 하나도 안 보이냐?”
로드와 실컷 놀아준 후.
그리드는 대장간으로 향하기에 앞서 라우엘의 집무실을 들렀다.
그곳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서류더미가 산처럼 쌓여있었다.
“다들 바쁘니까요. 각자 맡은 바 임무에 충실하거나 사냥에 매진하느라 영지를 떠나있습니다.”
“사냥은 이제 뱀파이어의 도시에서만 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게 효율적이죠. 경험치를 많이 주는 것은 둘째 치고 흡혈 아이템과 엘릭서를 득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막의 생태계도 제법 안정화 된 상태이니 시기적으로도 적절합니다.”
“엘릭서 득한 사람 있나?”
“아직 없습니다.”
“어이구야.”
드롭 확률 한 번 최악이다.
민첩의 엘릭서를 탐내고 있던 그리드로서는 안타까울 수밖에 없었다.
입맛을 다시는 그에게 라우엘이 질문했다.
“10년 전, 레이단의 전 영주가 뱀파이어의 도시로 파견했던 원정군과 관련 된 퀘스트 혹시 못 받았습니까?”
“그런 거 못 받았는데? 그건 갑자기 왜?”
“템빨단원들이 뱀파이어 도시 곳곳을 누비고 있는데도 뱀파이어 원정군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영 거슬려서요.”
“뭐가 거슬려? 10년 전에 전멸한 군대의 흔적이 남아있으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니죠. 남겨진 기록들을 보면 뱀파이어 원정군의 숫자는 무려 1만 8천에 육박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라도 그들의 흔적이 남아있어야 정상이죠.”
“뭐, 아직 우리가 가보지 못한 뱀파이어의 도시도 많으니까. 어딘가에는 흔적이 있을 수도 있겠지. 근데 그게 중요한 문제냐?”
“현재로서는 딱히.”
“현재로서는? 나중가면 중요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거야?”
그리드가 의문을 품고 질문을 던지는 그때였다.
“라우엘 백작님!”
젊은 기사 하나가 집무실로 달려 들어왔다.
허락도 없이 백작의 집무실 문을 열다니?
라우엘은 괘씸했으나 딱히 예절 교육을 시킬 상황 같지가 않았다.
달려 들어온 기사, 온 몸이 상처투성이였기에.
“너는 스테임 후작님의 기사가 아니더냐? 무슨 일이냐?”
“그게… 헉!”
질문하는 라우엘에게 설명하려던 기사가 기겁했다.
소파에 앉아 있는 그리드를 뒤늦게 발견한 까닭이었다.
“그, 그리드 공작각하를 뵙습니다!!”
그리드가 손을 저었다.
“인사할 시간에 설명이나 해.”
“아, 예! 5천의 적군이 이곳 레이단으로 진격해오는 중입니다!!”
“5천의 적군?”
보고하는 기사의 얼굴에는 절망만이 가득했다.
“그것도 왕실 정예군입니다!”
“왕실? 에트날의?”
“예! 라덴 경이 1천의 북부군을 이끌고 적들의 진군 속도를 늦추고는 있으나 버거운 상황입니다!”
“엥?”
그리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트날 왕실군이 왜 레이단을 침공해오는 거지? 같은 편이잖아?”
라우엘이 비릿한 미소를 흘렸다.
“뿌려놓은 떡밥이 회수된 거지요.”
“떡밥…?”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끝까지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우엘을 부하로 둔 것이 현실 시간으로 무려 9개월 전, 게임 시간으로는 27개월 전이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그리드가 최소 인간인 이상 그 정도도 못할까?
“비스바덴 왕이 죽기라도 했나?”
“……!”
라우엘의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솔직히 그리드가 스스로 예측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까닭이다.
‘쉬지 않고 꾸준히 성장해왔다고는 하지만 일반인 수준까지 성장하실 줄이야!’
경악한 라우엘이 할 말을 잃은 동안.
“이거 상황이 재미있네.”
자리에서 일어난 그리드는 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라우엘, 아스모펠에게 병사들을 소집하라고 일러라. 폭렙 타임이다.”
그렇게 말한 그리드가 향한 곳은 개인 창고였다.
창고 안에는 <양산형 그리드 세트>가 한 가득이었다.
***
“크아악!!”
“스, 스테임 후작님… 끝까지 모시지 못하여 죄송…합… 쿨럭! 쿨럭!”
라덴과 10명의 기사가 이끌고 있는 1천 북부군.
철풍대를 전멸시킨 후 레이단으로 회군하던 그들이 위기에 빠졌다.
하필이면 검호 척슬리가 이끄는 흑귀대에게 뒤를 잡힌 탓이었다.
“대단하구나.”
검호 척슬리.
과거, 온 대륙을 호령하였던 제국의 기사 피아로와 비견되는 존재.
그리드의 대항마 중 하나로 여겨지는 그가 자신의 검을 4차례나 방어한 라덴을 극찬하였다.
“20년 후. 아니, 10년 후쯤이라면 나와 호각을 겨뤘을 수도 있겠어. 내 그대처럼 무시무시한 재능을 보유한 자는 본 적이 없다.”
“허억… 허억…”
베이다를 비롯한 철풍대와 흑귀대의 실력자들을 벌써 혼자 여럿 해치운 라덴이었다.
잔뜩 지친 상태로 척슬리까지 상대하게 되자 금세 한계에 직면한 그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솔직히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라덴은 끝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쓰러지는 순간, 주군께서 애지중지 키우신 이 1천 북부군이 전멸하리란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군께 드려야할 것은.’
기대와 신뢰에 대한 부응이지 실망과 절망이 아니다.
꾸욱!
마음을 바로잡은 라덴이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입 안 가득 고인 피를 뱉어낸 그가 애써 웃었다.
“글쎄요. 10년까지 필요할까요. 5년. 아니, 3년만 지나도 저는 당신을 초월할 것입니다만.”
“…”
척슬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라덴의 저 오만한 발언, 부정할 수 없음이 더욱 더 불쾌했다.
“어디까지나 살아있을 경우의 이야기겠지?”
“…그렇겠지요.”
“그래, 살아남을 수 있도록 발악해보아라.”
척슬리 기사단장의 가문은 대대로 왕실에 충성해왔다.
그에게 있어서 왕실을 위협할 정도의 세도가인 스테임 후작은 늘 거슬리는 존재였다.
그의 사위 그리드가 공작이 된 이후로는 더욱 더 그랬다.
한데 지금.
그리드 공작과 스테임 후작 모두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사막에서 우연히 북부군을 만난 순간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스테임 후작이 레이단에 있다는 방증이었으니까!
쩌엉!
“윽!”
척슬리 단장의 검술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정교했다.
기교보다는 기본에 충실하였고 이는 변수를 배제했다.
아직 수련과 경험이 부족한 라덴으로서는 절대로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채챙! 챙!
푸욱!
“크아아악!!”
검을 교환하면 교환할수록 라덴의 상처가 늘어나는 반면 척슬리의 기술은 보다 예리해졌다.
전투를 멈춘 채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는 북부군과 흑귀대의 심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겼다.’
‘끝났다.’
환호하며 사기를 올리는 흑귀대와 좌절하는 북부군.
그들의 시야로 5천 대군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적과도 같은 아군의 등장?
그럴 리가.
대군의 정체는 렌 왕자의 본대, 즉 적이었다.
피와 흙먼지로 더럽혀진 눈물이 라덴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군…’
부족함에 죄스러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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