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151화 (146/1,794)

템빨 17권 - 6화

‘둘이서 궁합이 아주 좋군.’

피아로는 원체 남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인물이다. 체다카 길드 출신 중 피아로의 가르침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로이먼은 보다 높은 경지를 꿈꾸며 의욕이 충만해 있었으니 둘이 붙어 다니면 환상의 짝꿍이 되겠다 싶었다.

‘부디 농부니 뭐니 딴 길로 새지 말고 무럭무럭 커다오.’

유니크 등급의 양산형 그리드 세트.

160레벨 제한이라고는 하나 상당한 값을 받을 수 있을 아이템이다. 특히 빠른 성장을 원하는 재벌 유저들의 등을 처먹기에 적합한 물건이었다.

그것을 투자하였으니만큼, 그리드는 로이먼이 기대에 부흥하는 성장을 이뤄주길 바랐다.

“공작각하, 저희는 이만 북부로 돌아가겠습니다.”

영주성으로 향하는 길.

스테임 후작의 기사들이 달려와 인사했다.

“장인어른은?”

스테임 후작이 보이질 않자 의아해하는 그리드에게 라덴이 설명했다.

“주군께서는 로드 공자님 곁에 더 머물고 싶다하십니다. 저희가 끝까지 모셔야함이 옳으나, 최근의 북부는 정세가 다소 불안한 바. 언제까지고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먼저 떠나려합니다. 감히 청하오건데 공작각하께서 부디 주군을 잘 보살펴주십시오.”

“뭐 나야 상관없다만 북부의 정세가 불안하다면서? 장인어른께서 자리를 비워도 괜찮은 건가?”

“주군께서 안 계시더라도 괜찮도록 저희가 먼저 출발하는 것이니까요.”

‘장인어른도 나처럼 좋은 부하를 많이 뒀군.’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다. 장인어른은 내가 잘 보살필 테니 믿고 떠나라. 그리고 만약 북부에서 힘든 일이 생긴다면 윈스톤의 쥬드를 찾아가도록 해. 놈이 비록 아무런 생각이 없기는 해도, 너 같은 허풍쟁이와 달리 실력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니까.”

“…새겨듣겠습니다. 신경써주심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중히 인사한 라덴과 기사들이 그대로 레이단을 떠났다. 1천의 병사도 함께였다.

스테임 후작을 수행할 정예 5백은 남겨놓은 것이었다.

“손주 때문에 영지를 비우다니. 일국의 후작이라는 양반이 체통도 없지.”

말은 그렇게 하지만, 그리드는 스테임 후작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였다.

로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로 귀엽고 영리하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녀석이었으니까!

“로드야, 기다려라! 이 아빠가 간다!”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허겁지겁 입성하는 그를 보는 라우엘의 시선이 썩 곱지 않았다.

“로드 공자가 태어난 이후 당신의 업무 능률이 무척이나 떨어졌다는 사실, 인지하고 있습니까?”

“윽.”

그리드도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최소 2시간씩은 로드와 놀아주느라 아이템 제작과 사냥을 다소 등한시하는 경향이 생겼다.

뜨끔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웃어주었다.

“뭐, 지금의 모습 매우 좋습니다.”

“엉?”

또 잔소리 듣겠다 싶었던 그리드가 의외의 말에 당황했다.

그에게 라우엘이 진중한 시선을 보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익숙해지심이 옳습니다. 자애를 배움으로서 보다 관대해질 수 있겠지요.”

그리드는 근본적으로 난폭하고 속 좁은 인물이었다.

이유가 뭘까?

그를 곁에서 지켜봐온 라우엘은 대강이나마 추측할 수 있었다.

‘일생 중 대부분을 타인에게 멸시당하고 살아왔기 때문일 터다.’

그리드는 지닌 능력에 비해서 자존감이 낮고 도량이 좁다. 또한 타인과의 교류에 능숙하지 못하다.

체다카 길드 출신들에게 들어보면, 과거에는 훨씬 더 심했다고 한다.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였을 뿐더러 늘 타인을 시기하였고 악에 복받쳐 있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변해가고 있었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아이린과 칸이 있었다.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는. 인간관계의 기본원리 중 하나를 체험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보다 성숙해진 것이다.

“수십, 수백 만 백성 위에 군림하며 그들이 내는 세금을 평생 연금으로 삼고 싶다면 성군이 되심이 옳겠지요. 성군이 되려면 자애를 먼저 배워야하고.”

“…”

그리드가 일반적인 유저였다면 오글거린다는 반응을 보였을 터다.

사랑? 자애? 성군?

‘혼자 영화 찍냐? 고작 게임하면서 뭘 그리 오바야.’라며 타박을 줬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드는 일반적인 유저와 달랐다.

그리드에게 있어서 Satisfy는 단순한 게임이 아니다.

재물과 친구, 그리고 사랑하는 연인에 이어서 이제는 자식까지 얻게 된, 현실만큼이나 소중한 세계였다.

“네가 말하는 바를 잘 알겠다. 하지만 성군이라는 건 나보다 백성을 먼저 생각해야하는 거 아닌가? 함부로 세금도 못 올리고 여러모로 호구 짓을 해야 하는 거잖아?”

“제가 곁에서 잘 조율해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전 당신처럼 폭군의 자질을 타고났거든요. 우리 둘이 양면이 되어 서로를 보완해나가도록 하죠.”

“폭군의 자질… 양면…”

아무리 그리드라도 오글거렸다.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닭살을 털어내느라 고생해야만 했다.

***

열기로 들끓는 레이단의 사막.

이곳에 난폭하고 강력한 몬스터들이 득실거린다는 사실, 렌 왕자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군대를 행군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대응책이 있었던 까닭이다.

“저쪽이다.”

“저쪽에도 있다!”

왕실기사단장 척슬리.

왕국제일궁사 페럴.

그 둘을 비롯한 이름난 강자들이 소수의 병력을 나눠 통솔하고 있었다. 그들이 맡은 바 임무는 리젠되는 몬스터들의 즉각 척결이었다.

왕실의 몬스터 학자가 사막의 몬스터들이 리젠되는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월하군.”

본대로부터 사방으로 흩어진 분대들이 몬스터를 해치우고, 본대는 안전하게 레이단으로 진격한다.

일이 착실하게 진행되자 미소 지은 렌이 20명의 어쌔신에게 명령했다.

“너희들은 예정대로 먼저 레이단으로 향해라. 전쟁이 시작되고 레이단 내부에 허점이 생긴다면, 공작부인을 잡아서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정 여의치 않다면 죽여도 좋다.”

“존명!”

어쌔신들이 신속하게 군대를 이탈했다.

그를 확인하고 더욱 큰 자신감을 얻은 렌이 행군 속도를 높였다.

“서둘러라! 내일까지 레이단에 도착해야지만 휴렌트의 별동대와 일정을 맞출 수 있다!”

“우오오오오!!”

병사들이 사기를 높였다.

사막의 무더위?

머잖아 왕이 될 분을 모시고 있는 그들에겐 걸림돌이 되지 못했다.

***

“저게 뭐지?”

1천 병사를 이끌어 사막을 가로지르던 북부의 기사들.

그들이 높이 쌓인 모래 언덕 너머로 엿보이는 흙먼지를 포착하고 행군을 멈췄다.

타닷!

선두의 라덴이 언덕 위로 올랐다. 병사들이 경탄을 토해내는 것이 과장이 아닌, 무척이나 날렵한 움직임이었다.

납작 엎드려 경계하는 그의 시야로 수천의 군대가 포착되었다.

“저 깃발은…!”

라덴의 표정이 굳었다.

한쪽 날개를 펼치고 있는 실버 드래곤의 문장.

에트날 왕가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어째서 왕실군이 이곳 서부를?’

왕실군의 진군 방향은 어떻게 보나 레이단이었다.

‘로드 공자의 탄생을 기리기 위한 축하 사절?’

이라고 생각하기에는 규모가 너무 크고 진군 기세가 흉흉하다.

‘설마!’

제1왕자 렌은 그리드 공작을 싫어했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두려워한다.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무는 법!

비스바덴 국왕에게 변고가 생길 경우, 어쩌면 렌 왕자가 그리드에게 이를 드러낼 수도 있다고 스테임 후작은 늘 염려했었다.

하여 렌 왕자와 그리드를 중재하고자 그토록 왕실과 접선하며 노력을 해오셨건만.

‘주군의 그간 노력이 물거품 된 거군.’

비스바덴 국왕에게 변고가 발생했음이 분명하다.

라덴이 판단하고 있는 그때였다.

“북부군이 왜 이곳 서부에 있지?”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라덴이 뒤로 시선을 돌려보니 3백의 기마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본대로부터 분리되어 몬스터들의 리젠 지점을 점령하고 있던 분대 중 하나.

왕실 정예기병 철풍대였다.

철풍대의 대장은 거구의 사내 베이다로서 쌍창술의 달인으로 유명했다.

“북부군이 왜 이곳 서부에 있느냐 물었다.”

다가와 재차 묻는 베이다의 시선은 한없이 고요했다.

그 어떤 적의도 느껴지지 않았고, 또한 애초에 같은 국가 소속이므로 아군이었으니 북부군 병사들은 딱히 그를 경계하지 않았다.

하지만 라덴은 달랐다.

“엎드려라!”

라덴이 선두의 병사들에게 소리쳤다.

그러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병사들의 머리 위를 창이 스쳐지나갔다.

베이다가 휘두른 장창이었다.

“히, 히익!”

간발의 차이로 살아남은 병사들이 오줌을 지렸다. 미처 피하지 못한 몇 명의 머리가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모래 위를 나뒹굴자 북부군 전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베이다의 시선이 라덴에게 꽂혔다.

“아직 앳된 녀석이 매우 좋은 눈을 지녔구나. 네놈의 이름이 뭐냐?”

“계속해서 질문만 하는가. 너는 마치 교태를 떠는 계집과 같구나.”

“……!”

두려움 없이 지껄이는 라덴의 태도가 베이다를 한층 더 자극했다.

차분한 표정 속에 숨겨두고 있던 난폭한 본성을 서서히 드러내는 그였다.

“고얀 놈…! 우선 팔과 다리를 하나씩 분질러놓은 후 다시 질문해주마. 이럇!”

베이다가 말을 달렸다.

사막의 언덕을 거침없이 질주하다니, 상식을 초월하는 기마술이었다.

북부군 전체가 경탄하며 질겁하였으나 라덴만큼은 냉정침착 했다.

“스테임 후작님의 병사를 해한 죄, 죽음으로 갚아야할 것이다.”

“흥!”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며 지껄이는 라덴의 모습이 베이다는 가소로울 따름이었다.

“머리에 피도 마르지 않은 놈이 지껄이기는 잘 하는구나!”

푸욱!

베이다의 장창이 모래 위에 꽂혔다.

조금 전까지 라덴이 서있던 자리였다.

창을 피한 라덴은 베이다의 허벅지를 향해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쩌엉!

단창으로 방어한 베이다가 콧방귀 뀌었다.

“제법 날래나 위력은 형편 없… 큭?!”

여유로 점철되어 있던 베이다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단창을 쥔 손목으로부터 선혈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놈이!!”

북부의 실력자라고 해봤자 한물 간 피닉스뿐이 아니었던가?

경악하는 베이다의 말을 베어 넘어뜨린 라덴이 북부군 전체에게 명령했다.

“이들을 모조리 죽인 뒤 레이단으로 회군한다.”

이들과 같은 왕을 섬겼던 것은 어제까지의 일이다.

스테임 후작이 렌 왕자가 아닌 그리드 공작의 편에 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은 라덴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빠르게 파악하고 있었다.

***

‘이제 머지않았다.’

산기슭까지 내려온 휴렌트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그리드에게 당했던 5초 굴욕을 되갚아줄 생각을 하자 피가 끓어올랐다.

‘진정한 오러의 힘을 보여주마.’

오러의 가장 큰 장점은 고정데미지와 형태변화다.

국가대항전 당시의 휴렌트는 형태변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상상을 곧 현실로 만드는 극의.

이 사기적인 힘이라면, 휴렌트는 필시 그리드를 찍어 누를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니, 비단 그리드뿐만이 아니다.

크라우젤을 비롯한 최상위 랭커들과 아그너스를 비롯한 숨은 강자들.

그들 모두 내가 압도하리라고 휴렌트는 의심치 않았다.

“그대들은 누구지?”

알테스 산맥을 벗어난 휴렌트와 2천 군대가 사막에 막 진입하였을 때였다.

웬 농부 2명이 무서운 줄도 모르고 질문을 던져왔다.

콧방귀 뀐 휴렌트가 그들에게 오러를 날렸다.

채찍처럼 길게 늘어나 휘어지는 오러를 목도한 농부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