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7권 - 5화
제1왕자 렌의 레이단 원정은 은밀하게 진행되어야만 했다.
당당하게 쳐들어갔다가는 그리드에게 소식이 전달되고 대처할 시간을 줬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렌은 소수정예의 군대를 편성, 왕실파 귀족들의 영지만을 경유함으로서 군대를 비밀리에 핸군시켰다.
그 탓에 꽤 많은 시간을 소요하게 되었으나 렌은 괘념치 않았다.
일생일대의 거사를 치름에 있어서 신중함은 옳았으니까.
***
그리드의 아들 로드가 태어나기 하루 전날.
요새도시 파트리안에서는 큰 소란이 발생했다.
제1왕자 렌의 군대 7천이 도시를 방문한 까닭이었다.
“왕자님을 뵙습니다.”
친히 마중 나온 아슈르 백작이 예를 갖췄다.
세계의 균형을 좌지우지할만한 힘을 지녔다고는 하나 가문 대대로 국가의 충신답게 신하 된 도리를 다하는 것이었다.
“백작께서 이러시면 제가 곤란합니다. 일어나십시오. 어서요.”
렌 왕자가 불편해했다.
제아무리 일국의 왕자일지라도 대마법사를 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설령 제국의 황제라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에게 이끌려 몸을 일으킨 아슈르 백작이 의문을 꺼냈다.
“왕자께서 친히 군대를 이끌어 이곳까지 방문한 이유가 뭡니까?”
렌 왕자는 솔직하게 설명했다. 처음부터 그럴 작정이었다.
“안타깝게도 국왕전하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에 저는 국가와 왕실의 안정을 책임져야할 의무를 느꼈고, 부득이하게 그리드 공작을 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그리드가 골렘 침공전 직후의 작위 수여식에서 어떤 발언을 하였었는지, 아슈르 백작 또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렌 왕자의 심정과 입장을 십분 이해했다.
하지만 난처할 따름이었다.
그 사악한 그리드 놈은 내 아들을 볼모로 붙잡아놓은 바.
레이단이 전화에 휩싸였다가는 아들이 위험할 수가 있었다.
근심이 깃든 아슈르 백작의 얼굴을 확인한 렌 왕자가 입을 열었다.
“백작의 사정은 잘 알고 있습니다. 국가의 보배 블란드 경을 레이단에 볼모로 잡히셨다지요? 수개월 전에는 그를 약점으로 이용당해 모종의 세력으로부터 그리드 공작을 도와 싸우셨고요.”
“…”
아슈르 백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륙 10대 마법사 중 하나로 군림하는 내가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사실, 입 밖으로 꺼내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렌 왕자가 그에게 다짐해보였다.
“제가 반드시 그리드 공작을 척결하고 블란드 경을 구출해보이겠습니다. 하니 저를 믿고 협조를 해주십시오.”
“뭐 좋은 계획이라도 있으십니까?”
렌 왕자 또한 그리드와 그 세력의 고강함을 잘 알고 있을 터.
한데 이러한 자신감이라니?
아슈르 백작이 흥미를 보였고, 그에게 렌 왕자는 몇 사람을 소개시켜주었다.
왕실기사단장 척슬리와 휴렌트를 비롯한 인재들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펴본 아슈르 백작이 크게 놀랐다.
‘렌 왕자에게 이만한 인망이 있었나?’
최근 검호의 경지에 올랐다고 평가받는 척슬리 단장과 화살 1발로 날아가는 새 3마리를 쏘아 맞춘다는 페럴 자작.
그들을 필두로 왕국 최고의 실력자들이 렌을 따르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눈길을 끄는 것은 휴렌트를 비롯한 유저(신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들의 전력은 아슈르 백작조차도 제대로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놀라워하고 있는 그에게 렌이 설명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백작께서 친히 제 군대에 합류해주시는 것이겠으나… 그랬다가는 그리드 공작이 블란드 경을 해코지할 수도 있겠지요. 하니 그런 부탁은 드리지 못하겠고, 알테스 산맥. 그곳으로 제 병사 중 3천을 텔레포트 시켜주십시오.”
알테스 산맥!
엄밀히 따지면 사하란 제국의 영토인 그곳은 레이단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레이단의 동쪽에 위치한 이곳 파트리안과 정 반대의 위치였다.
“양동입니까.”
“네, 4천의 병사로 사막을 넘어 그리드 공작의 시선을 끌고 3천의 병사로 후위를 급습할 것입니다.”
레이단에 뛰어난 실력자들이 많다고는 하나 병력은 고작 1천.
이 양동은 제대로 먹혀 들 공산이 컸다. 썩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아슈르 백작은 섣불리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3천 명이나 되는 인원을 메스 텔레포트 시킨다?
전설의 대마법사 브라함이라면 또 모를까, 아슈스 백작으로서는 힘든 일이었다.
‘2천 정도는 가능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가는 한 번에 모든 마력을 소모하고 자칫 심대한 내상을 입을 우려가 있었다.
최소 보름은 제대로 운신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망설이는 아슈르 백작에게 렌 왕자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왕실을. 아니, 이 나라와 블란드 경을 위해서 한 번만 희생해주십시오.”
일국의 왕자.
그것도 왕위계승서열 1위의 왕자가 수천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신하에게 무릎을 꿇었다.
이를 거부한다면 아슈르 백작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최악으로 떨어질 것이 자명했다.
아슈르 백작은 깨달았다.
‘1왕자… 순수하고 예의바른 겉모습과 달리 속은 능구렁이 같은 자였군.’
그가 실력자들을 거느릴 수 있게 된 이유를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그래, 그 사악한 그리드를 상대하려면 최소 이쯤은 되어줘야지.’
비릿한 실소를 흘린 아슈르 백작이 눈에 독기를 품었다.
그가 꺼낸 답변은 렌 왕자의 계획대로였다.
“알겠습니다. 신하 된 자로서 당신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다만 제 능력이 미천하여 2천의 병사만을 텔레포트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대단하고 충분합니다! 감사합니다!”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리는 렌 왕자였다.
아슈르 백작은 그 눈물이 거짓 된 연기임을 알고 있었으나 병사들은 달랐다.
“우와아아아아!!”
“왕자전하 만세!!”
“아슈르 백작님 만세!!”
[군대의 사기가 올랐습니다. 모든 병사들의 능력치가 5퍼센트 상승하고 스태미나 하락 속도가 줄어듭니다.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 한 이 효과는 계속 유지됩니다.]
길조다.
떠오르는 알림창이 휴렌트의 입가로 미소가 번지게끔 만들었다.
“7대 길드의 발목을 붙잡았던 대마법사가 도리어 나를 돕게 되었다. 어떠냐? 바니바니. 나와 7대 길드의 클래스 차이를 잘 느낄 수 있겠지?”
전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그리드에게 복수하고 오명을 씻겠다.
휴렌트는 그 다짐을 이행하기 위해서 세계 최고의 게임BJ 바니바니를 섭외한 상태였다.
지금까지 모든 과정을 카메라에 담아 녹화하고 있던 바니바니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클래스 차이 오지시는거 인정하는 각입니다.”
사실 지금 이 상황은 모두 렌 왕자의 공적이었지만, 그렇다고 휴렌트를 비하할 필요는 없다.
렌 왕자의 솜씨를 알아보고 퀘스트를 수락한 휴렌트의 안목을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
이름:카린
나이:21세 성별:여
직업:병사
칭호:로이먼
남장을 시작한 이후부터 사용하게 된 가명입니다. 정말로 남자가 된 기분인지라 자신감이 솟구쳐서 근력이 5퍼센트 상승합니다. 단, 매력은 크게 떨어집니다.
칭호:서부의 신성
지역을 대표할만한 천재입니다. 레벨과 능력치 상승 속도가 보통보다 20퍼센트 빠릅니다. 지형 <사막>에서 모든 능력치가 150퍼센트 상승합니다.
칭호:전설이 주시하는 자
전설 피아로의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군사훈련을 빙자한 개인 교습을 본인도 모르게 받는 중입니다. 능력치 상승폭이 매우 크며 새로운 스킬을 습득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근력:630(▲) 체력:331(▲)
민첩성:655(▲) 지력:99(▲)
신념:10
스킬:[초급 보우 마스터리(F)]/[초급 실드 마스터리(F)]/[중급 소드 마스터리(D)]/[농업(B)]/[명문의 혈통(A)]/[활인검(S)]
레이단이 제2의 수도라고 불리던 시절, 카린은 레이단 최고 무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철이 들기도 전부터 검술을 연마하였고 그녀 또한 오빠들처럼 훌륭한 기사가 되기를 꿈꿨습니다.
하지만 10년 전, 레이단에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그녀의 꿈은 산산 조각나고 맙니다.
끊임없이 출몰하는 몬스터들에게 부친을 잃었고, 이미 앞서 뱀파이어 원정대에 차출 되었던 오빠들의 생사는 불투명하여 가문이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레이단 전체가 몰락했다고 표현함이 옳습니다.
이후, 오빠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살아온 카린.
그녀는 레이단을 수복시키고 내게 다시금 오빠들을 기다릴 시간을 벌어준 그리드 공작에게 진정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에 보답하고자 여성마저 버리고 병사로서 최선을 다해 단련 중입니다.
그리드가 전율에 휩싸였다.
“이거 놀랍군.”
능력치 상승에 한계치가 없는 네임드 NPC.
본래 이들과는 인연을 쌓기가 매우 어렵다. 로또에 당첨되는 확률이나 다름이 없다고 들었었다.
한데 그리드 주변에는 네임드 NPC가 계속해서 출현하고 있었다.
‘내 운빨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는 건가!’
그리드는 생각했지만, 단순히 운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드의 현재 지위를 고려해보면 간단하다.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일국의 공작.
아직 보유한 백성의 숫자가 적다고는 하나 어딜 가나 꿀리지 않는 권력가다.
권력가의 곁에는 인재가 모여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였다.
“근데 얘 여자네.”
그러고 보면 꽤나 예쁘장하게 생기긴 했다.
피부가 거칠고 머리가 짧아서 그렇지, 도톰한 입술과 긴 속눈썹이 매력적이었다.
“여자라니요?”
그리드가 대수롭지 않게 꺼낸 말에 피아로가 의문을 표출했다.
여자라니? 로이먼이? 저 우수한 병사가?
말도 안 된다.
믿지 않는 피아로에게 그리드가 재차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맞다니까? 쟤 여…”
“공작각하!!”
로이먼이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러더니 그리드에게 애처로운 시선을 보냈다.
“저는 남성입니다! 훗날 기사가 되고 장군이 되어 각하의 곁을 지킬 훌륭한 사내가 되는 것이 제 꿈입니다!”
“…”
그러니 비밀을 지켜 달라 이거다.
제아무리 눈치 없는 그리드일지라도 충분히 알아 들었다.
“농담이야, 농담. 그보다 선물이 있다.”
그리드가 인벤토리를 열었다.
인벤토리 안에는 완성 된 <양산형 그리드 세트> 31개가 종류별로 나열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이보다 100개 세트가 더 있었지만 무게 때문에 창고에 넣어둔 상태다. 그리고 창고에 넣은 것들은 죄다 노말~레어 등급이었다.
반면 그리드가 인벤토리에 넣어온 그리드 세트들은 평균 에픽 등급이었고,
“자, 받아.”
그중에서도 로이먼에게 건네준 세트는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유니크 등급이었다.
“이, 이럴 수가.”
공작각하께서 친히 내게 무구를 하사해주시다니?
감격한 로이먼이 공손히 무구를 받았다. 기뻐 눈물까지 글썽이는 그녀에게 그리드가 재촉했다.
“어서 입어봐.”
“네, 네!!”
후다닥!
그리드 세트를 품에 안은 로이먼이 병영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피아로는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아이는 계집도 아니면서 꼭 옷을 은밀하게 갈아입더군요. 몇 안 되는 단점 중 하나입니다.”
“…”
그리드가 듣기로 피아로는 연애 경험이 전무했다. 그래서인지 여성을 보는 안목이 없어 여장남자를 분간하지 못하는 듯 보였다.
그리드는 동질감을 느꼈다.
본인 또한 로이먼의 상세정보를 확인해보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 테니까.
잠시 후.
“이거 정말 대단합니다!!”
강철과 흑철을 배합하여 제작한 회색 갑주와 무기를 무장한 로이먼이 요란을 떨며 뛰쳐나왔다.
“좋지?”
“좋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 대단해서 믿기지가 않을 정도입니다! 전 태어나서 이처럼 훌륭한 무구를 본 적이 없습니다! 3배…! 아니, 족히 4배는 더 강해진 기분입니다!”
“그게 템빨이라는 거야.”
“템빨…!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기가 막힙니다!!”
한껏 격앙 된 로이먼의 억양이 계속해서 올라갔다. 그러자 숨길 수 없는 여성의 음색이 튀어나왔고, 피아로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피아로는 로이먼의 남성성을 키우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4배로 강해졌다면 훈련의 강도도 4배로 올리면 되겠군.”
“예? 지, 진심이십니까?”
“내가 헛된 말을 하는 것을 본적이 있느냐?”
“….”
안 그래도 다른 병사들보다 2배는 더 힘든 훈련을 받고 심지어 새벽에는 밭일까지 하고 있는데-이유는 모름-, 여기서 훈련의 강도를 더 높이겠다고? 그것도 4배나?
제아무리 로이먼일지라도 겁이 나서 질릴 수밖에 없었다. 겁먹은 강아지마냥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피아로에게 자비란 없었다.
“뛰어라! 알테스 산맥까지 직진이다!!”
“아, 알테스 산맥이라니요! 거기까지 가는데만 해도 족히 이틀은 걸리지 않습니까!”
“내일 아침까지 다녀온다!”
“피, 피아로님!!”
의욕이 충만한 피아로와 울상 지은 로이먼이 죽어라 뛰기 시작했다.
금세 멀어지는 그들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얼굴에 근심이 드리웠다.
지금 생각해보니, 로이먼의 보유 스킬 중에 농업이 있지 않았던가?
“설마 특무대라는 게 농부집단은 아니겠지?”
그럴 리가.
나도 참 별 같잖은 생각을 다 하고 있다.
조소한 그리드가 자리를 떠났다.
같은 시각 알테스 산맥.
파앗! 파파파파파파파팟!!
창공에서부터 수천 개의 빛줄기가 떨어져 내렸다.
흩어지는 빛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낸 2천 군세의 선두에는 휴렌트와 바니바니가 있었다.
“별동대 대장 휴렌트의 위대한 활약을 그 카메라에 잘 담아두라고.”
“헤헤, 맡겨만 주세요.”
휴렌트의 설욕과 그리드의 몰락.
그 과정을 생생히 녹화하여 방송하게 되는 순간, 바니바니는 하루아침에 억만장자가 될 수 있었다.
‘오래오래 사골처럼 우려먹을 수 있도록 멋있는 장면들이 최대한 많이 연출되면 좋겠군!’
강자들이 호각을 겨루며 화려한 스킬 이펙트가 난무하는 전장을 영상에 담고 싶다.
바니바니의 간절함 바람이었지만, 글쎄.
“이곳에 밭을 개간해도 좋겠군.”
“피아로님, 왜 갑자기 호미를 꺼내 쥐시는 겁니까?”
“이 또한 수련의 일환이다. 그리고 밭일을 할 때만큼은 갑주를 벗도록 해라. 순수한 육신으로 자연을 느껴라.”
“…예.”
휴렌트와 바니바니 일당이 머잖아 직면하게 될 적들의 행색은 화려함과 거리가 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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