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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44화 (139/1,794)

템빨 16권 - 21화

웅성웅성!

한창 축제가 진행 중인 숙녀고에 한바탕 소란이 발생했다.

교정 내의 여성 수백 명이 원인불명의 이유로 쓰러진 까닭이었다.

피해여성들은 하나 같이 얼굴을 붉힌 채 거친 숨을 헐떡이는 등 공통 된 증세를 보였다.

다행히 일시적인 현상으로서, 전원 금세 회복하기는 했다.

하지만 숙녀고는 원인 규명에 나설 의무가 있었다.

하여 의료진과 경비진을 급파, 조사에 착수하였지만 뚜렷한 성과를 거둘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피해여성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불쾌해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도리어 하나 같이 기분이 좋아 보이더군요.”

“뭐? 갑자기 쓰러져놓고도 좋아한다고? 왜?”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흠, 하여튼 잘 됐군. 진상 규명을 외치거나 보상을 바랄 줄 알았더니.”

“네, 덕분에 축제에 차질이 발생할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천만다행이긴 한데… 당최 무슨 경위로 이런 일이 발생한 걸까?”

“피해여성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을 겁니다. CCTV부터 차근차근 확인해 나가죠.”

숙녀고의 방비는 삼엄하다. 교정 곳곳에 CCTV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각이라고는 학생들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어야하는 공간들만으로 국한됐다.

“이건!”

녹화 된 영상을 확인한 교직원과 의료진들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커다란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수수께끼의 남성!

그의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여성들을 스칠 때마다 여성들이 픽픽 쓰러져나가는 게 아닌가!

“저, 저게 뭐지.”

“신종 바이러스 유포자로 파악됩니다. 그게 아니면 저 현상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어요.”

“설마 북측에서 파견한 특수공작원인가!”

“허, 참. 저게 어딜 봐서 바이러스요? 애무지.”

“…”

“어, 어쨌든 치안 유지를 위해서 체포를…”

“경찰에게는 연락하지 마. 변태 하나 잡는데 굳이 경찰까지 불러서 분위기 망치면 안 되니까.”

수십 명의 경비원들이 신속하게 출동했다.

비밀리에 영우의 수배령이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영우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과 똑같은 행색을 하고 있는 방패막이, 극검이 곁에 있었기에!

***

“헉헉… 여긴가?”

무수한 인파를 돌파해온 영우와 극검 듀오.

그들이 드디어 유령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제길.’

숨을 헐떡이는 영우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열손가락으로부터 불편한 통증을 느꼈기 때문이다. 손가락을 쉬지 않고 사용한 후폭풍이었다. 무리한 탓에 상당히 저려왔다.

‘역시 게임과 현실은 다르군.’

게임에서는 밤새 쉬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여 아이린을 기쁘게 해줄 수 있었던 반면, 현실에서는 고작 30분 움직였다고 이 꼴이다.

게임과 현실에서의 능력 차이를 절감하고 한숨 쉰 영우가 세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 사서함으로…]

세희의 핸드폰은 여전히 꺼진 상태였다. 예림의 핸드폰도 사정은 같았다.

‘문자도 아직 확인 안 했고.’

영우가 직접 숙녀고까지 찾아와 긴박하게 움직이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세희와 예림, 둘 모두 도통 연락이 안 닿았던 것이다. 몇 시간 전 예림으로부터 날아온 문자메시지 한통이 전부였다.

아무래도 축제에 열중하느라 핸드폰을 확인하지 못하는 듯했다.

영우는 둘에게 김두현을 조심하라는 경고를 전달할 수가 없었으니 답답하고 초조했다.

‘기껏 여기까지 온 이상 직접 만나 이야기하는 수밖에!’

영우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극도로 혐오한다. 솔직히 귀신이 무서웠다.

과거, Satisfy에서 귀신-칸의 조상들-을 봤다가 오줌을 지린 전력이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유령의 집은 기껏해야 여고생들이 제작한 시설이 아닌가?

애교 수준에 불과할 것이다.

쉽게 여긴 영우가 극검에게 시선을 돌렸다.

2통의 김치 아이스크림을 모조리 먹어치운 극검은 마늘 냄새를 풀풀 풍기고 있었다.

포만감에 젖어있는 그에게 영우가 지시했다.

“들어가서 세희 만나고 올 테니까 여기서 기다려요.”

“나도 들어가서 놀고 싶은데.”

“아니, 내가 여길 놀러왔나? 자칫 엇갈릴 수도 있잖수. 내가 들어가 있는 동안 애들이 교대시간 되서 나오면 어쩌려고?”

“음, 그래! 알았다!”

극검은 자신의 본분을 상기했다.

나는 영우의 매니저 역할을 자처하지 않았던가? 즐길 생각 관두고 영우가 원하는 역할을 수행해줌이 옳다.

고개를 끄덕인 극검이 유령의 집 후문 입구에 버티고 섰고, 영우는 입장료 9천원을 지불한 후 유령의 집에 입장했다.

그리고.

“끼야아아아아아아악!!”

영우는 정말이지 심장이 멎는 줄로만 알았다.

태어나 이렇게 큰 비명을 질러본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유령의 집에 입장하자마자 마주친 기괴한 피투성이 인형이 워낙에 무섭게 생겼던 까닭이다.

‘엿 됐다.’

영우는 깨달았다.

이 유령의 집, 애교 수준이 아니다.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온갖 소품들은 하나 같이 보는 이의 공포심을 자극하였고, 음침한 조명은 그 공포심을 더욱 더 극대화시켰다. 간간이 들려오는 효과음은 심장을 철렁 내려앉게 만들었다.

숙녀고의 특수효과 제작 동아리 수준이 평범한 고등학생의 능력 범주를 초월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당장 할리우드에 진출해도 손색이 없어보였다.

‘지금이라도 튀자.’

영우는 미로를 홀로 헤쳐 나갈 용기가 도통 생기질 않았다.

하여 입장했던 길 그대로 되돌아가려다가 제자리에 멈췄다.

동생을 위한답시고 여기까지 와놓고서, 이젠 또 무섭다고 도망치겠다고?

참으로 한심한 오빠다.

“썩을…”

욕설을 지껄인 영우가 심호흡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이를 악 문 후 미로를 전진해나갔다.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용기 있는 모습이었다.

***

흉측한 소품들이 길목마다 배치되어 있는 시커먼 미로 끝에 귀신이 서있었다.

노출도 높은 소복 차림의 귀신, 다름 아닌 예림이었다.

끼야아아아아아악-!

멀리 입구 쪽에서부터 또 누군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저 손님도 여기까진 못 오겠네.’

예림이 한숨 쉬었다.

유령의 집을 너무 리얼하게 제작한 것이 문제였다.

입장하는 손님들마다 족족 무섭다고 오금을 지리며 도망쳤으니, 미로 끝에 자리를 잡은 예림으로서는 따분할 따름이었다.

유령의 집 오픈 이후 2시간 동안 그녀에게까지 도달한 손님은 단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겁들도 많아.”

도톰한 입술을 비죽 내민 예림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과연, 스스로 보기에도 섹시했다.

예림은 이 매혹적인 모습을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그래도 뭐, 가장 중요한 영우 오빠한테는 보여줬으니까 만족해야지.’

요염한 미소를 머금은 예림이 내내 꺼두었던 핸드폰을 켰다. 어차피 손님도 안 오는 마당이니 괜찮다는 생각에서였다.

“응?”

예림의 눈이 동그래졌다.

영우로부터 부재 중 전화와 문자가 대량으로 도착해 있었던 까닭이다.

“헤에.”

이 오빠, 내 섹시한 모습을 보고서는 달아올랐구나?

사진 보내기를 잘했다는 생각에 신난 예림이 영우의 문자를 확인했다.

-무슨 옷이 그렇게 야하냐.

-세희랑 같이 있어?

-전화 왜 꺼놨냐.―,.―

-야, 너희들 김두현이라는 배우 조심해라. 그 자식이 너희들한테 수작을 부릴 수도 있어.

“걱정해준 거구나.”

예림의 하얀 얼굴에 홍조가 물들었다.

이성에게 관심과 애정을 받는다는 것.

예림에게는 지극히 당연한 일상이었지만, ‘좋아하는 이성’에게 관심 받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애초에 이성을 좋아해본 경험이 처음이었으니까.

두근두근.

작게 뛰는 심장의 울림이 기분 좋다.

-나는 일편단심 신영우니까 걱정 말아요. 월드 스타가 꼬시더라도 넘어가지 않을 테니깐♥ 그리고 세희는 지금 Sati…

예림이 정성껏 답장을 작성하고 있는 그때였다.

“드디어 찾았다.”

유령의 집 개장 이후 2시간 23분.

공포로 점철 된 미로의 끝까지 도달한 최초의 손님이 예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확인한 예림이 초승달 모양의 눈웃음을 그렸다.

성인 여성들조차 압도해버리는 고혹적 미소였다.

“너무 좋아.”

“으악!”

안 그래도 많은 역경을 이겨내야만 했기에 잔뜩 지쳐있던 신영우.

그가 예림의 교태 섞인 음성과 이어지는 포옹을 감당치 못하고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예림의 미모와 애교는 영우의 손재주에 버금가는 위력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둘의 궁합은 가히 환상적일 터였다.

***

숙녀고 제2운동장.

평소에는 각종 운동부 학생들이 이용하는 그 초대형 운동장에 수천 명의 인파가 집결해 있었다.

잠시 후 이곳에서 Satisfy 무투 대회가 개최되는 것이 그 이유였다.

“두현 오빠가 참가하는 종목 맞지?”

“이민정 아나운서가 사회를 본대!”

“우리는 루비 성녀님 보러 왔다!”

“세희! 세희! 세희!”

“두현! 두현! 두현!”

“미, 민정! 민정!”

이청순 교장은 유능하다.

신세희와 김두현, 그리고 이민정의 인기를 파악하고 마케팅에 제대로 활용했다.

그 결과 숙녀고배 Satisfy 무투 대회는 이례적인 호황을 맞이할 수 있었다.

운동장을 가득 매운 관객들을 보면서 이청순 교장은 희열을 느꼈다.

한편, 대기실의 세희는 참가자 명단을 살펴보고 있었다.

참가자 총원은 16명.

전원 각 분야의 유명인들이었다.

연예인, 운동선수, 정재계 인사, 문학가 등등.

화제가 될 만한 인물들밖에 없었다.

숙녀고배 Satisfy 관련 대회는 전문적이기보다 친선, 홍보의 목적이 강했으므로 유명인의 포섭은 경기의 의도를 극대화할 기본 전제였던 것이다.

당연히 밸런스는 엉망이었다.

40레벨 초보자가 있는 반면 200레벨이 넘는 초고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단지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이 대회에서 승패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상대는…’

고지명.

오성소속의 KBO리그 선수다.

한때 대한민국 최고의 타자로서 명성을 높였었으나, 작년부터 걸그룹 파리나의 리더와 사귀더니 성적이 뚝 떨어지고 애물단지 취급 받는 인물이었다.

팬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고는 있지만 여전히 높은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좋네.’

고지명의 Satisfy 레벨은 무려 187로 엄청난 고수였다. 16명의 참가자 중 2번째로 높은 레벨이었다.

세희는 고지명과의 대결에서 자연스럽게 패배, 어서 탈락해야겠다고 마음을 정했다.

애초에 그녀가 이번 대회에 참가한 이유는 학교측의 부탁 때문이었지 스스로 원해서가 아니었다.

축제의 흥행을 위해서 부디 Satisfy관련 종목에 참가해달라고 하니 일개 학생인 세희로서는 거절하기가 힘들었고, 반 강제적으로 참가한 상태였다. 빨리 탈락하는 게 그녀의 입장에서는 좋았다.

그녀를 바라보는 고지명의 시선이 음흉했다.

그는 의욕이 들끓고 있었다.

여자친구 레이나의 요청 때문이었다.

“게임에서 죽으면 페널티가 상당하다며? 이번 대회에서 세희라는 계집애를 꼭 죽여줘.”

‘이유는 모르겠지만, 우리 여신님의 요청이라면 들어줘야지.’

숙녀고배 무투 대회는 대련 모드로 진행될 예정이다.

생명력이 최소치로 떨어져도 사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상대가 대련 모드를 신청해올 때 거절하고 죽여 버리면 그만이니까.

‘큭큭큭.’

어긋난 여자에게 홀려 사리분별 못하게 된 고지명.

그의 인생은 점차 막장으로 치닫고 있었고, 막장의 결과는 최악일 수밖에 없다.

‘왠지 기분 더럽네.’

예림의 제안에 따라서 선글라스와 마스크 대신 인형 탈을 뒤집어 쓴 영우.

예림, 극검과 함께 제2운동장에 도착한 그가 본능적인 불쾌감에 휩싸였다.

‘이게 다 김두현이 때문이겠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동생에게 수작을 걸고 있을 놈의 면상을 떠올리니 영우는 치가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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