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6권 - 15화
“주군을 뵙습니다!”
대장간 앞의 공터.
약속 된 시간에 맞춰서 피아로가 찾아왔다.
그를 본 그리드의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피아로의 행색이 어제와 같았던 까닭이다.
흙투성이의 낡은 천 옷과 녹슨 호미.
어디로 보나 영락없는 농부였다. 심지어 가난에 찌든 농부!
“레이단의 총사령관이자 제일 템빨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격식을 갖추지 않는다는 것, 나에 대한 불충으로 해석해도 되겠지?”
그리드가 강하게 나갔다.
여전히 그는 농부로서의 피아로를 용납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피아로 또한 굽히지 않았다.
“총사령관이자 기사단장으로서의 책무를 수행할 시에는 그에 적합한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농부로서 주군을 찾아뵙기에 이러한 모습을 하였을 뿐입니다.”
“그놈의 지긋지긋한 농부생활, 오늘이야말로 기필코 청산하게끔 만들어주지.”
“굳이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주군께서 제게 바라는 것은 상승의 무력이 아닙니까? 농부로서의 저는 주군께서 바라시는 것 이상의 무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저는 검호라 불리던 시절보다 훨씬 더 강합니다. 부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제가 선택한 길을 존중해주소서.”
“검성보다는 약할 거 아니야! 농부 때려치우고 검성 되라고!!”
그리드는 긴 말 하지 않았다. 일갈한 후 양손에 무기를 거머쥐었다.
[+9 실패작을 장착하였습니다.]
[+8 그리드의 대검을 장착하였습니다.]
전날에는 노강이었던 그리드의 대검이 8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리드가 그간 모아온 강화석 전부를 투자한 결과였다. 재수가 없어 9강이 되지 않은 것이 한이 될 따름이다.
“오늘은 어제와 다를 거다!”
매섭게 변한 그리드의 눈빛에 깃든 것은 호승심과 자신감이었다.
피아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최 뭘 믿고 저러시는 걸까?’
바로 어제 나와의 실력차이를 절감하지 않으셨던가?
고작 하루 사이에 실력이 껑충 뛰었을 리도 없고,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저토록 자신만만하신지가 의문이다.
‘2만 백성의 주인이자 전설이 된 분께서 위축되어 있어도 문제겠으나.’
오만하면 그건 더 큰 문제다. 쉽게 적을 만들고 자칫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었기에.
브라함과는 다른 가치관을 지닌 피아로.
그는 그리드의 기세를 한 번쯤 꺾어놓는 것이 충의라는 판단을 세웠다.
“저 또한 오늘은 전력을 보여드리겠나이다.”
호미와 괭이를 무장한 피아로가 소리치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그리드가 공격에 나섰다.
일보 전진해서 실패작의 긴 리치를 활용, 앞으로 찌른 후.
쩌엉!
호미에 막히자 반발력을 이용, 삼보 후퇴하면서 동시에 보법을 밟았다.
쿠오오오오!!
망토를 펄럭이며 현란하게 움직이는 그리드의 주변 기류가 들끓기 시작했다.
한동안 이발을 하지 않아 제법 자란 흑발이 너울거렸고, 지면 위를 나뒹굴고 있던 돌멩이들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파그마의 검무, 초(超)의 전조였다.
[초월자 모드에 진입합니다.]
[공격력이 2배 증가합니다. 기본 공격이 원거리 공격으로 전환됩니다.]
[이 효과는 30초 동안만 유지됩니다.]
“죽고 싶지 않다면 잘 피해봐.”
콰쾅! 쿠콰콰콰콰쾅!!
진심으로 염려한 그리드가 2자루 대검을 연속적으로 휘둘렀다. 쉬지 않고 계속 휘둘렀다. 그때마다 쏘아지는 강맹한 검기가 마치 폭우처럼 쏟아졌다.
‘허.’
피아로가 감탄했다.
그리드가 선수로 기세를 잡았기에 연계시킬 수 있었던 초(超)가 위력적으로 작용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어제와는 다르시군.’
어제의 그리드는 순수한 검술실력에 의존하였다가 낭패를 겪었던 반면 오늘의 그리드는 초반부터 파그마의 검무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다.
이는 지극히 현명한 판단이었다. 전설의 기술이야말로 피아로와의 실력 차이를 좁힐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으니까.
그 현명함에 감탄한 피아로는 그리드를 더 이상 둔재라고 평가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기본적인 능력의 차가 크다. 현명함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였다.
퍼펑! 퍼퍼퍼퍼펑!!
피아로가 호미와 괭이만으로 검기의 폭우에 맞섰다.
강기에 휩싸인 그의 농기구들이 검기와 충돌할 때마다 폭발이 발생하며 검기가 소멸했다. 피아로는 상처 하나 입지 않고 그리드의 기술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제3자가 봤을 때는 피아로가 큰 위기에 빠진 것만 같았다.
연달아 발생하는 폭발의 중심에 있는 피아로가 연신 타격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였다.
“저럴 수가…”
“와, 저거 완전히 원딜러네.”
멀리 숨은 채 전투를 지켜보는 크리스와 5대장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초(超) 상태의 그리드가 발휘하는 위용은 그만큼 대단했다. 일단 화려했기에 더 대단해 보였다.
그들은 그리드가 피아로를 완전히 압도하는 중이라고 여겼다.
‘우리가 어쩌지 못한 상대를 그리드는 저리도 쉽게…’
‘그리드가 저렇게까지 강했다니!’
3차 전직을 하고 비약적으로 강해졌다고 생각했건만 착각이었다.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인 그리드에 비하면 아직 우린 새발의 피였다.
우리가 성장하는 동안 그리드 또한 성장하고 있었다.
크리스와 5대장들의 자존심이 뭉개지는 그때였다.
“씨뿌리기.”
폭발의 중심지로부터 피아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멀쩡한 피아로의 모습을 뒤늦게 확인한 크리스와 5대장들의 얼굴에 환희가 깃들었다.
‘그럼 그렇지! 우리도 어쩌지 못했던 피아로가 그리드에게 당할 리 없지!’
‘그리드 저 녀석, 화려하기만 할뿐이지 실속은 전혀 없군!’
역시, 3차 전직까지 한 우리가 그리드보다 못할 리 없다.
크리스와 5대장들이 확인하고 기뻐하는 그때 볍씨들이 그리드를 향해서 총알처럼 쏘아졌다.
5대장의 홍일점, 핑키가 그를 보고 단언했다.
“그리드는 끝이야.”
피아로의 볍씨는 막거나 피할 수 있는 영역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빠르고 강력해서 무조건 타격을 허용해야만 했고, 맞는 순간 끝장이었다.
며칠 전 핑키 또한 볍씨에 얻어맞고 빈사상태에 빠진 바가 있었다.
내가 감당하지 못했던 피아로의 기술을 그리드라고 감당할 수 있겠는가?
핑키는 그렇게 여긴 것이다.
물론 오만이었다.
핑키는 본인이 그리드보다 뛰어나다는 가정을 세우고 있었으나, 현실은 그녀보다 그리드가 훨씬 더 뛰어났으니까.
“종횡무진.”
칭호 <은밀한 영웅>에 귀속 된 스킬.
사용 범위에 한계가 있고 재사용 대기 시간은 무려 1시간이나 되지만, 목표대상에게 접근할 때까지 논타켓 스킬을 모조리 회피하는 최상위 돌진기다.
제아무리 피아로의 씨뿌리기가 빠르고 절묘한 궤적을 그릴지라도 타켓팅 스킬이 아닌 이상 그리드에게 닿을 수 없었다.
“……!”
피아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신속을 발휘한 그리드가 볍씨의 포화를 꿰뚫고 접근해왔기에!
“어제와 다를 거라고 했지?”
푸욱!!
놀란 기색을 금치 못하는 피아로에게 속삭인 그리드가 베기의 극의를 펼쳤다.
종횡무진의 도움을 받아 피아로에게 다가오는 과정까지 파그마의 검무, 극(極)의 보법을 밟아놓았던 것이다.
“저럴 수가!!”
5대장들이 경악했다.
피아로가 어깨를 크게 베이며 피를 쏟아냈으니 그들은 믿을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물론이고 크리스님께서조차도 유효타를 입히지 못했던 상대에게…’
‘치명상을 입히다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5대장들을 크리스가 일깨워주었다.
“아니, 피아로는 멀쩡하다. 그리드로서는 저게 한계야.”
과연 그 말은 사실이었다.
피아로는 어깨를 베이고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았다. 그리드의 일격이 제대로 들어가기는 했으나 레벨 차이 덕분에 치명상은 면한 것이다.
쩌엉!!
어깨에 박힌 대검을 호미로 날려버린 피아로가 괭이를 앞으로 찔렀다.
‘당할 것 같냐!’
도살귀의 안대와 통찰력에 의지, 공격을 읽은 그리드가 방어를 시도했다. 그리드의 대검을 세움으로서 괭이를 차단하고자 했다.
하지만 피아로의 공격은 변칙의 묘리를 담고 있었다. 정면으로 쇄도하는가 싶더니 어느새 옆으로 휘어 그리드의 방어를 부질없게 만들었다.
[11,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미친!’
옆구리를 찔린 그리드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현존 최강의 방어구 세트를 무장한 내가 고작 레어 등급의 농기구에 찔렸다고 이만한 피해를 입다니?
기겁하는 그의 이마로 연이어 호미가 날아들었다.
“저걸로 끝이다!”
이번에는 5대장 중 아셀라스가 확신했다.
며칠 전 자신 또한 피아로의 호미에 이마를 찍혀 패배한 바가 있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그 또한 오판하는 것이었다.
아셀라스에게 없는 것이 그리드에게는 있었다.
그건 바로 템빨이다.
쩌어어엉-!!
“아닛!”
피아로가 어울리지 않게 경악성을 질렀다. 그만큼 크게 놀랐다는 뜻이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리드의 전면으로 갑자기 방패가 튀어나와 호미를 차단하였는데, 그 방패를 쥔 손은 그리드의 것이 아닌…
‘저 홀로 움직이는 손이라고!’
심지어 무구를 장착시킬 수도 있는 손이라니!
얼마나 대단하게 활용할 수 있을지 즉각 상상이 될 지경이다.
동요하는 피아로에게 그리드가 웃어보였다.
“템빨의 극의를 보여주지.”
선언한 그리드가 손에 쥐고 있던 실패작과 그리드의 대검을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뭐지?’
전투 도중에 무기를 버리다니?
멀리서 지켜보느라 정확한 사태 파악을 못하고 있는 크리스와 5대장들이 의문에 휩싸이는 순간이었다.
“어, 어억?”
“저게 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황금의 손 2개가 나타나더니 그리드가 집어던진 대검들을 그대로 낚아채 거머쥐는 게 아닌가?
“똑똑히 봐둬라!”
크리스가 다급히 외쳤다.
어쩌면 그리드의 저력을 엿볼 수도 있는 유일한 기회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이 순간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눈에 새겨 넣을 심산이었다.
“누구 마음대로?”
“……!”
집중하고 있던 크리스와 5대장들이 화들짝 놀랐다.
빛나는 금발을 허리까지 내려오게끔 기른, 다소 신경질적인 인상의 미남자가 불현 듯 눈앞에 나타난 까닭이었다.
백색의 갑주와 푸른 망토를 무장하고 있는 그의 머리 위로 떠올라있는 이름은 아스모펠.
NPC였다.
“넌 뭐냐?”
갑자기 나타난 NPC에게 중요한 순간을 방해받자 크리스의 반응이 격해졌다.
이를 드러내며 묻는 그에게 아스모펠이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제이 템빨 기사단의 단장이다.”
“템빨 기사단?”
“풋!”
기사단 이름 한 번 우습다.
크리스와 5대장들이 반사적으로 실소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반응을 아스모펠이 달가워할 리 만무했다.
“감히 주군을 엿본 것으로도 모자라 주군의 기사단을 비웃는가.”
스윽.
아스모펠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다인슬레프를 소형화시킨 듯한 생김새의 묵빛 검이었다.
“감히 누구 앞에서 검을 뽑아 드느냐!”
“이젠 별에 별 놈들이 다 우릴 무시하는군! 우리가 흙투성이라고 우습게 보이냐!”
격분한 5대장들이 각자 무기를 쥐었고, 그들은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만 했다.
“레드 소드.”
“컥.”
“윽.”
막말로 순식간에 발생한 일이었다.
붉은 검광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는가 싶더니 지르칸을 제외한 5대장 전원이 피를 토했다.
“괴물은 하나가 아니었는가…!”
간신히 공격을 방어했다고는 하나 순전히 운이였다.
아스모펠과의 실력차이를 단 일합에 절감한 지르칸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를 본 아스모펠이 한숨 쉬었다.
“내 실력도 많이 죽었군.”
한때 검호의 유일한 호적수로 평가 받았던 내가 이딴 피라미를 일격에 해치우지 못하다니, 수치다.
일그러진 표정으로 재차 공격에 나서려하는 그에게 크리스가 외쳤다.
“봐주십쇼!”
“…”
이미 한 번 피아로를 겪었기에 영리해진 크리스였다.
그는 괜한 치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행위인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저희는 피아로님께 맡은 임무가 있어 당장 논밭으로 가야합니다! 그럼 이만!”
다소 비굴하게 보일지라도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스모펠에게 꾸벅 인사한 크리스가 5대장들을 챙겨 후다닥 달아났다. 아스모펠은 굳이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에게 중요한 것은 주군과 친우의 대결이었다.
‘저게 대체 뭐란 말인가.’
아스모펠은 피아로의 강함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광경이 더욱 더 믿기지 않았다.
3자루 대검과 1자루 단검을 휘두르며 주군을 보좌하는 4개의 황금 손과,
“흑화.”
칠흑의 마기에 휩싸인 주군.
그에게 피아로가 밀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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