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6권 - 13화
‘피아로의 레벨은 400 이상이다.’
굳이 대영주의 검으로 관찰하지 않아도 안다.
방어구 하나 무장하지 않고도 내 공격에 큰 타격을 입지 않은 요인, 레벨차이라고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최소 100레벨 차이라…’
100레벨의 차이는 크다. 결코 메울 수 없는 격차가 존재했다. 레벨 보정 시스템을 떠나서 스탯 수치와 스킬의 위력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상식적으로 봤을 때 그리드가 피아로를 이길 가능성은 0퍼센트였다.
하지만.
‘내게는 상식을 파괴할 수단이 있다.’
그 수단이란,
‘당연히 템빨이지.’
자고로 템빨의 묘미란 밸런스 파괴에 있다.
템빨을 갖출 수 없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템빨은 저주스러운 요소였으나 그리드는 입장이 정 반대였다.
템빨의 정점에 설 수 있는 존재였기에.
반면 피아로는 노말, 레어 등급의 농기구들과 낡은 천 옷 한 장을 달랑 걸쳤을 뿐이다.
‘내게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
전설의 농부의 강함은 잘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검성보다는 못하지 않겠는가?
‘피아로, 너의 그 고집을 꺾어주마.’
기필코 다시금 검성의 꿈을 꾸도록 만들어 주리라!
다짐한 그리드가 아이템 분해 스킬을 사용했다.
4개의 황금 칼날로부터 수인족 왕의 눈물을 추출해낸 뒤 총 27개의 파브라늄 전부를 용광로에 쏟아 부었다.
제련의 시작이었다.
‘이번엔 뭘 만드시려는 걸까?’
일손을 놓은 칸과 젊은 대장장이들이 그리드의 곁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그리드의 행동을 하나라도 놓칠 새라 집중했고 그리드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의 경지로는 그리드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당최 뭘 하시는 거지?’
따앙! 따앙!
파브라늄이 용해되는 동안 거푸집을 제작하는 그리드.
한데 거푸집 모형이 어째 일반적이질 않다.
칼날도 아니고, 창날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리드 본인의 손 모양이었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
파브라늄 원정대는 10번부터 15번까지의 뱀파이어 도시만을 반복 공략하고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아직 공략하지 못한 도시들에 도전하고 싶었으나 그리드의 경고가 마음에 걸렸다.
“마리로즈라는 이름의 뱀파이어 공작이 있거든? 브라함의 말에 따르면 걔가 도시 어딘가에 잠들어 있나봐. 몰살당하고 싶지 않다면 안전을 확보한 곳에서만 사냥하도록 해. 응? 걔가 얼마나 세기에 그러냐고? 음… 템빨단 전부를 끌고 가봤자 아무 것도 못하고 전멸할 정도? 걔 완전히 사기야, 사기.”
‘엘핀스톤보다 몇 배나 센 건가…’
‘드래곤급이라도 되나?’
300레벨을 달성하고 엘핀스톤 레이드에 성공한 그리드.
최근의 그는 지존이라는 칭호에 차츰 적합한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다. 또한 템빨단은 최강이라고 자부해도 좋은 길드였다.
한데 우리를 홀로 압도하는 존재가 있다니?
과연 Satisfy는 넓다. 아직까지도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과 존재가 너무나도 많았다.
“엘릭서 진짜 더럽게 안 나오네. 그리드랑 처음 왔던 날부터 지금까지 사냥한 뱀파이어의 숫자가 족히 1만은 넘을 텐데 어떻게 1개도 안 나올 수가 있지?”
“그러게 말이다. 체력 엘릭서 딱 1개만 나와줘도 여한이 없을 텐데…쩝.”
“아이템 획득률 상승 버프까지 있는데도 이 모양인 걸 보면 드롭률이 소문보다 더 극악이네.”
“그래도 하급 흡혈 반지 11개는 챙겼잖아. 이 정도면 충분히 대박이지.”
이미 한 번 보스를 레이드한 도시들의 경우 진혈족 뱀파이어의 출현률이 낮아졌다. 보스도 최초의 보스보다 많이 약했다. 이는 던전의 난이도가 하락했다는 뜻으로서 드롭템의 양과 질이 떨어졌다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그래서인지 템빨단원들은 기대만큼의 수확을 올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태도는 긍정적인 편이었다.
뱀파이어들이 주는 경험치가 기본적으로 매우 높았던 까닭이다.
뱀파이어의 도시들은 여전히 훌륭한, 최고의 사냥터였다.
최초에는 203레벨에 불과했던 유라의 레벨이 단 일주일 만에 210을 초과하였으니 경이적인 수준이었다.
“근데 그리드는 왜 안 와? 경험치 버프 기간도 이제 딱 25일밖에 안 남았는데.”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겼다고 이틀 후쯤에나 온다더라.”
“중요한 일? 며칠 전에는 크리스한테 대검 만들어 주느라 늦는다더니, 이번엔 또 왜?”
“설마 크리스 그 녀석이 그리드 뒷통수 친 거 아니야?”
“그건 아니고. 템빨의 극의를 완성시킨다나 뭐라나.”
“템빨의 극의…?”
검술, 창술, 궁술 등.
무예의 극의를 논한다면 뭔가 대단해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템빨의 극의라니, 어감부터가 장난스럽고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감이 안 잡혔다.
“아이템 합체까지 나온 마당이니 이번에는 변신이라도 할 생각인가?”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파그마의 후예가 보유한 능력들은 과연 몇 개나 될까? 또한 그리드는 그것들을 전부 다 활용할 수 있을까?
템빨단원들은 아직 예측할 수 없었다.
***
그리드는 쉽게 생각했다.
‘손? 그 정도야 쉽게 만들 수 있지!’
그리드의 손재주 스탯은 이제 2,600에 육박하고 있었다. 그리드의 대검 2자루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숙련도가 대량으로 상승한 덕분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자신감이 넘쳤던 그리드는 석고에 자신의 손 모양을 그대로 본뜬 후 그를 바탕으로 거푸집을 제작했다.
이어 용해 된 파브라늄을 주입, 총 5개의 손을 찍어냈다.
잠시 후.
“좋아! 완벽해!”
활짝 펼쳐진 황금의 손 5개가 부유하더니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그리드는 희열에 찼다.
이 5개의 손들이 앞으로 내게 얼마나 큰 도움을 줄지 상상해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미칠 노릇이었다.
당장 전투적인 측면만 봐도 어마무시하다.
상상해보라!
이 5개의 손들이 각자 무기와 방패를 거머쥔 채 나를 지키는 한편, 적을 공격하는 모습을!
그리드는 당장이라도 절대무적이 된 심정이었다.
“오오…!”
칸과 대장장이들은 저 홀로 허공을 떠다니는 손바닥들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스스로 움직이는 손을 만들어 내다니, 그들의 눈에는 그리드가 마치 신처럼 보였다.
“후훗… 자, 어디 한 번 성능을 시험해볼까!!”
인벤토리로부터 실패작, 이야루그트, 그리드의 대검, 이상적인 단검, 신성의 방패를 꺼낸 그리드가 5개의 손바닥에게 명령을 내렸다.
“무장해라!”
파파파팟!
5개의 손들이 일제히 그리드에게 날아와 5개의 아이템들과 충돌했다.
그렇다.
거머쥔 것이 아니라 충돌했다.
“…?”
아이템을 착용하기는커녕 도리어 후려 쳐 바닥에 떨어뜨리는 손바닥들!
그리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너네 뭐하냐? 아이템을 쥐려면 손을 접어야지, 왜 계속 손바닥을 펴고 있는 건데?”
답답해서 물어봤자 파브라늄들이 대답할 리 만무했다. 의지를 지녔다고는 하나 그건 일종의 습성일 뿐, 파브라늄은 어디까지나 광물이다. 대화하는 일이 가능할리 만무했다.
“아오, 이 답답한 녀석들.”
손바닥 5개를 일렬로 세운 그리드가 녀석들 앞에 자신의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그리고 손을 오므렸다가 다시 펼치기를 반복하며 학습을 시도했다.
“이건 주먹! 이건 가위! 이건 보! 자, 따라해 봐라!”
“…”
열렬히 외쳐봤자 파브라늄은 묵묵부답이었다. 멀뚱멀뚱 손바닥을 펼치고 있을 따름이었다.
“아니, 좀 따라해 보라니까!”
“…”
허공에 떠있는 5개의 손바닥을 상대로 열불을 토해내는 그리드였다.
그 모습이 도무지 정상인 같지는 않았기에 대장장이들은 당혹스러웠다.
‘왜 저러시지?’
‘뭘 잘못 드셨나?’
‘위대하신 레이단의 태양께서 어찌 저런…’
수군거리는 젊은 대장장이들 사이에서 칸은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병이 도진 겐가…”
***
<전설적 대장장이의 손 모형>
공격력:22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가 제작한 자신의 손 모형입니다.
파브라늄을 재료로 제작하였으므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입니다.
활짝 펼쳐진 손바닥으로 적의 뺨을 가격할 경우 도발 효과가 발동합니다.
무게:15
“…아.”
아이템 설명을 몇 번이나 읽어보던 그리드가 뒤늦게 깨달았다.
손이라는 신체 부위, 얼마나 섬세하던가?
여러 개의 관절과 근육이 존재함으로서 세세한 제어가 가능하고 온갖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즉, 파브라늄으로 제작한 이 손바닥들이 손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관절이라도 재현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모양만 본떠 만들어봤자 석고상 따위와 다를 바 없었다. 손가락 하나 구부릴 수 없었다.
“…하.”
그리드는 한숨밖에 안 나왔다.
내가 원하는 손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손의 구조를 완벽히 이해할 필요성을 느낀 까닭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우선 백과사전부터 뒤져보고… 그래도 정 안 되겠으면…”
설마, 아이큐가 최소 100이상이어야만 감히 책장을 넘길 수 있을 것만 같은 해부학 서적이라도 훑어봐야하는 건 아닐까?
그리드는 정녕 치가 떨렸다.
“게임 아이템 만들려고 인체의 구조를 알아야한다니…!”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나처럼 멍청하고 못 배운 사람은 심지어 게임에서조차 소외받아야만 하냐고 버럭버럭 성을 내며 욕설을 지껄였을 터다.
하지만 지금의 그리드는 그렇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응당 노력이 뒷받침되어야하는 바.
심호흡하고 마음을 추스른 뒤 로그아웃했다.
***
‘손가락은 엄지손가락, 집게손가락, 가운뎃손가락, 약손가락, 새끼손가락으로 구성된다. 엄지손가락은 두 개의 마디로, 나머지 손가락은 세 개의 마디로 이루어지며… 손가락의 앞면과 뒷면에는 굽힘 힘줄과 폄 힘줄이 있고 양쪽의 바깥 면으로는 신경과 혈관이…’
국내 최대 포털사이트에서 ‘손’을 검색해본 신영우.
의학백과로 들어간 그가 손의 형태와 구조에 대해 알아나갔다.
머릿속에 주입하기 위해서 같은 내용을 몇 번이나 반복해 읽었다.
기억력이 원체 안 좋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정작 재접속 해놓고 내용을 까먹으면 안 되니까 달달 외우는 수밖에.’
솔직히 굳이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싶었다.
손의 기능을 완벽히 재현한 아이템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창조 스킬의 보정 효과에 의지해야함을 알았기 때문이다.
기본적인 지식만 쌓아놓고 설계도를 그리면 그만일 일이었다.
하지만 영우는 최선을 다해서 사전의 내용을 외워나갔다.
보다 완벽한 손을 창조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비롯된 행동으로서 이는 미련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것이었다.
한참 열중해서 공부하고 있는 그에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영우야! 쓰레기 좀 내놔주렴!”
“…5년 만에 마음먹고 공부하는 아들을 방해하시다니!”
어머니는 예전부터 타이밍이 절묘하셨다.
숙제를 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숙제하라 닦달하셔서 의욕을 잃게끔 만들었고, 5시간 내내 시험공부 하다가 잠시 머리를 식힐 겸 컴퓨터를 켜면 그때 딱 방에 들어와 잔소리를 하시곤 했었다.
“설마 초능력자…?”
어쩌면 내게도 숨겨진 초능력이 있지 않을까?
유치한 상상을 해보며 기분을 달랜 영우가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얼굴을 완벽하게 가려주는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착용하는 일 또한 잊지 않았다.
‘브라함 때문에 백만 안티가 양성됐을 테니까 몸조심 해야지.’
어쩌면 현피를 당할 수도 있다.
요즘에는 두려워서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도 검색해보지 못하는 영우였다.
브라함의 인터뷰가 실제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켰는지, 그는 아직 몰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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