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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8화 (123/1,794)

템빨 16권 - 11화

“후아… 힘들다, 힘들어.”

“할당량이 이리 많으니 힘들 수밖에 없지. 이 광활한 논밭에 인부라고는 고작 400명밖에 없다는 게 말이 돼? 규모만 보면 10배는 더 있어야할 것 같은데.”

“빌어먹을! 농업도시면 농업도시답게 농부의 숫자를 좀 늘릴 것이지!”

“인건비를 아끼려는 수작일 테지. 그리드도 어지간한 짠돌이인가봐.”

“짠돌이 수준을 넘어서 지독한 범죄자다. 인건비를 아낀답시고 유저들을 납치해다가 농부로 부리다니, 이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짓이냐?”

피아로에게 붙잡혀 강제로 노역 중인 21인의 유저.

그들은 모일 때마다 그리드를 욕하느라 바빴다.

자신들을 납치해서 농부로 부리는 피아로가 그리드의 하수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도망치지 않고 밭일을 하는 이유는 히든 퀘스트의 보상이 탐나서였다.

솔직히 히든 퀘스트를 얻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들은 기뻤고 그리드에게 큰 원한은 없었다.

레이단을 찾아온 이유부터가 템빨단에 가입하기를 희망해서인 바, 이들은 기본적으로 그리드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다만, 일이 너무 고되다보니 하소연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가 어려웠고 그리드가 자주 거론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신입들인가?”

투덜거리면서도 열심히 밭일을 하던 유저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쏠렸다.

저 멀리, 피아로가 5명의 사내들을 이끌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엔 5인 파티를 물어왔군.”

“쯧쯧, 불쌍한 녀석들.”

21명 유저들의 평균 레벨은 무려 270이었다. 사막을 횡단하여 레이단까지 도달하려면 최소 그 정도 레벨은 되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저 5인 파티 또한 우리들 못잖은 고레벨 유저일 터.

한데 고작 농부 한 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개처럼 끌려오고 있으니 어찌나 황당하고 슬플까?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어라?”

“엥?”

점차 가까워지는 5명의 신참을 동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유저들이 당황했다.

신참들의 정체, 자이언트 길드의 마스터와 5대장들이었기에!

“마, 말도 안 돼!”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에서 큰 타격을 입었으나 클래스는 영원한 법! 여전히 자이언트 길드는 최고의 길드 중 하나로 꼽혔다.

특히 5대장들은 전원 3차 전직자였고 길드 마스터 크리스는 통합 랭킹 3위였으므로 유저들에겐 높은 하늘과도 같았다.

한데 그들조차도 피아로에게는 상대가 못되었다는 뜻인가?

‘저 미친 농부가 우리의 생각보다 더 대단한 인물이었구나!’

경악한 유저들이 할 말을 잃고 있는 사이, 가까워온 피아로가 크리스 일행을 소개했다.

“신입 농부들이다. 앞으로 사이좋게 잘 지내도록.”

“누가 농부란 말이냐!”

“무엄한 놈!”

통합랭킹 3위이자 대자이언트 길드의 수장이며 에트날 왕국의 자작인 크리스님을 신입 농부라고 소개하다니!

피아로의 버르장머리 없는 태도에 5대장들이 치를 떨었다.

하지만 정작 크리스 당사자는 불쾌해하지 않았다.

상대는 나보다 몇 수 위의 존재.

나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줬고, 히든 퀘스트까지 안겨줬다.

굳이 얼굴을 붉히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선임농부들에게 정중히 인사하는 크리스였다.

그러자 나머지 5대장들 또한 허리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우, 우리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크리스와 5대장들이 즐겁고 신나는 수련에 합류한 이날.

인터넷에 황당무계한 루머가 떠돌기 시작했다.

자이언트 길드의 마스터 크리스와 5대장들이 그리드의 농노가 되었다.

정말이지 되도 않는 루머였다.

아무도 이 루머를 믿지 않았다.

“이게 뭔 개소리야?”

누구보다도 그리드가 가장 뜬금없어했다.

***

브라함의 부활을 돕고 그리드가 보유하게 된 파브라늄은 27개였다.

본래 파브라늄의 개수는 총 28개였으나 그중 하나는 혼의 그릇이 되어 브라함의 소유가 된 까닭이었다.

‘1개를 못 얻은 것은 뼈아픈 일이지만…’

정말로 다행인 점은, 27개 파브라늄 전부에 4대 신의 축복이 남아있다는 점이었다.

그리드는 파브라늄의 주인으로서 공격력, 방어력, 마력 15퍼센트 상승 버프와 생명력 회복속도 300퍼센트 상승 버프를 적용받고 있었다.

파브라늄은 과연 레전드리 클래스의 전용 아이템답게 말도 안 되는 사기템이었던 것이다.

‘야탄 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던 것은 오로지 브라함 덕분이었으니, 그에게 파브라늄 하나쯤 준 것은 너무 아깝게 생각하지 말자.’

과거와 비교하면 굉장히 긍정적이고 자비로운 인물이 된 그리드였다. 실제로 조금 전 그는 크리스에게 수리비 2골드를 깎아주기까지 했다.

‘2골드면 라면이 2갠데.’

지금쯤 크리스가 얼마나 고마워하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이번 일을 계기로 크리스가 내게 큰 호감을 품게 되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리드였다.

훗날, 자이언트 길드와 동맹관계를 구축하는 모습을 그려본 그가 파브라늄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좋을지 고민해보았다.

‘일단 리파엘의 창은 만들지 않는다.’

리파엘의 창은 현존 최강의 무기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리드에게는 비효율적인 무기였다.

창은 파그마의 검무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신성력은 흑화에 독으로 작용하였으니까.

‘무기는 그리드의 대검과 실패작, 그리고 야쿠르트면 충분해.’

그렇다면 방어구를 제작하여 활용하는 편이 좋을까?

현재 그리드가 무장하고 있는 갑옷과 왕관(투구), 장갑은 파그마가 제작한 것으로서 세트로 착용할 시 독보적인 성능을 자랑한다. 부츠 또한 그리드의 부츠와 브라함의 부츠를 스왑해가면서 충분히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면 방패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하지만 대검을 주력무기로 사용하고 심지어 쌍검술을 구사하는 그리드에게 있어서 방패를 사용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통상적인 무기나 방어구가 아닌, 뭔가 특별한 것이 없을까?’

파브라늄은 의지를 지닌 광물이다.

그리드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스스로 판단하여 움직인다.

직접 쥐고 휘두르거나 몸에 부착시키기보다는 자유를 주는 편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다.

자유를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형태의 아이템은 과연 무엇일까?

‘자유의 상징이라 하면…’

“간식.”

“…간식이려나. 엉?”

그리드의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간식이라니?

갑자기 헛소리를 지껄여서 내 깊은 생각을 방해한 괘씸한 놈은 누구인가!

그리드가 시선을 돌린 방향에는 노에가 있었다.

레이단에 도착한 이후 내내 몬스터 사냥에만 열중했던 녀석이 지금은 창틀에 누워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간식 줘라! 내놔라! 냥!”

부탁하는 태도치고는 무척이나 당당하고 거만하다. 거의 명령조였다.

“감을 잃었냐? 아니 애초에, 왜 뜬금없이 간식 타령이야? 네가 먹는 건 몬스터나 인간의 영혼이잖아?”

“그건 주식이다냥! 간식은 간식이다냥!”

“어떤 얼간이가 이 식충이한테 간식이라는 개념을 알려준 거지…”

“니 마누라다! 냥!”

“…”

마누라라는 말은 또 어디서 배워먹은 것인지는 차치하더라도, 아이린에게 얼간이라고 지껄인 나를 죽이고 싶다.

‘그러고 보니 요즘 아이린이 케이크 굽기에 취미를 들렸다지.’

아이린은 귀하디귀하게 자란 백작 영애로서 본래 요리의 요자도 모르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레이단에 온 이후 그리드에게 작은 기쁨이라도 주고 싶단 마음에 케이크와 쿠키 굽기를 배우고 있었다.

그녀 덕분에 템빨단원들과 레이단의 병사들은 달콤한 간식을 즐길 수 있었고 거기에 노에까지 추가된 듯하다.

“어휴, 됐다. 일하는 거 방해하지 말고 낮잠이나 자라.”

노에를 무시하기로 결정한 그리드가 다시금 파브라늄으로 무엇을 만들어야 좋을지 고민해보기 시작했다.

‘스스로 움직인다는 장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아이템이라면…’

“곰인형.”

“…곰인형이 좋겠… 아, 나.”

그리드의 눈살이 또 찌푸려졌다.

곰인형이라니?

이번엔 또 누구의 방해란 말인가!

격분한 그리드가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하고 있는 랜디가 초롱초롱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아이린님한테 곰인형을 선물 받았어!”

자랑하듯 인형을 내미는 랜디의 모습은 순수하고 귀엽기 짝이 없었다.

그 아이에게는 차마 모진 말을 할 수 없었던 그리드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좋겠다. 가서 인형이랑 놀아라.”

“응!”

싱글벙글 미소지은 랜디가 노에의 곁으로 가서 인형놀이를 시작했다.

하지만 놀이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노에가 앞발로 자꾸만 인형을 때리고 할퀴면서 랜디를 괴롭힌 까닭이었다.

“…진짜 돌아버리겠네.”

엉엉 울기 시작하는 랜디와 냥핫핫 웃는 노에 듀오가 자꾸만 명상을 방해하자 참다못한 그리드가 둘을 쫓아냈다.

그리고 재차 생각해보았다.

‘파브라늄으로 제작해야할 아이템…’

“농기구를 제작해주십시오.”

“…역시 농기구가 답… 하.”

한숨 뱉는 그리드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농기구라니?

이번엔 또 누가 헛소리를 지껄여서 찬물을 끼얹는단 말인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가 확인해보니 피아로가 서있었다.

피아로는 어김없이 흙 묻은 천 옷 차림이었다.

그리드로서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피아로, 그대의 직책이 뭐지?”

“제일 템빨 기사단의 단장이며 레이단의 총사령관이고 또한 농부입니다.”

“이상한 거 하나가 끼어있지 않아?”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드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자꾸 농사에 집착하는 건데? 기사단장이자 총사령관으로서 맡은 바 책무는 다 하고 있는 거야?”

“예.”

얄미울 정도로 망설임 없이 답하는 피아로였다. 자신은 책무에 충실하다는 자부심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하지만 검성이 되겠다는 목표는? 책무를 다하고도 시간이 남는다면 밭을 갈지 말고 검술을 연마하는 편이 옳지 않은가?”

[전설의 농부가 출현하였습니다!]

Satisfy 전역의 모든 유저들이 목격했던 그 알림창의 주인공이 부디 피아로가 아니기를.

재차 빌어보지만 마음 한편이 불안하다.

그리고 역시나,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는 경우가 적었다.

“제가 갈 길은 검성이 아닌 농부임을 깨달았습니다.”

“…”

그리드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니다.

피아로가 농부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 있다는 점.

레이단을 침공했었던 7대 길드가 농부에게 격퇴 당했다는 소문.

유저들이 밭일을 하고 있던 부분 등등.

온갖 정황들이 피아로가 전설의 농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음을 그리드는 눈치 챈 상태였다.

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검성 뮐러.

전설 중에서도 최강이라 평가 받는 그의 힘을 반드시 피아로가 이어주길 바라고 있었기에.

“…검술의 극의를 추구하기에는 당신의 재능이 한참이나 모자랐나봐? 결국 검의 길을 포기하고 농부 따위나 되다니.”

끓어오르는 분노와 떨쳐낼 수 없는 허망감에 휩싸인 그리드가 피아로를 도발하였다.

“…”

피아로는 그리드가 자신에게 바랐던 역할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하여 그리드가 얼마나 큰 상실감을 느끼고 있을지 알았다.

신하 된 도리로서 그를 충족시켜주고자 피아로는 스스로를 증명해보일 각오였다.

검호 시절의 자신보다 지금의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증명 말이다.

“농사란 삶의 근간이 되는 것으로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저는 더 가치 있는 길을 선택했을 뿐입니다.”

“논밭을 갈고 곡식을 거둬들이는 일은 아낙네들조차 할 수 있어. 굳이 당신이 아니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지천에 널렸다고.”

“하지만 통달할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저뿐입니다.”

“농사에 통달해서 뭐하는데? 아, 풍작을 일으키는 일? 아주 사소하군. 무력이 있다면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고 더 많은 백성을 거느릴 수 있으며 그를 기반으로 대량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다. 고작 한 지역에서의 풍작에 연연하느니 무력을 발전시켜 땅따먹기에 힘쓰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라는 사실은 멍청한 나라도 알아.”

“농사에 통달한다는 것은 단순히 풍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을 이해하고 이를 토대로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며 신비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저는 주군께 꼭 필요한 사람이 될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한 번 증명해봐. 농부 따위가 무슨 힘을 발휘할지며 무슨 신비를 일으킬 수 있는지!”

피아로 또한 바라는 바였다.

농기구를 제작해달라는 부탁을 하고자 결심했을 때부터 작금의 상황을 원하고 있었다.

‘주군께 인정받고야 말겠다.’

농부의 위대함을 알리고 보다 당당하게 농부로서 지내고 싶다.

피아로가 자신의 애병 호미와 쇠스랑을 꺼내 쥐었고, 그리드는 실패작과 그리드의 대검을 무장하였다.

“당신을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려놓겠어. 당신의 손에 쥐어져야할 것은 검이지 흙 묻은 농기구 따위가 아니다!”

현재 피아로는 제정신이 아니다. 올바른 길로 인도해줘야만 한다.

그리드는 확신하며 도살귀의 안대를 착용, 대장장이의 분노를 전개하여 피아로를 덮쳤다.

피아로는 안타까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주군의 재능은 크라우젤이나 크리스와 비할 바가 아니다.’

파그마의 도플갱어를 쓰러뜨리고 크게 발전하였다고는 하나, 주군은 근본적으로 둔재다. 이후 지금까지 성장력이 지속되었을 가능성은 없다.

‘승승장구하고 계신 당신께 좌절을 맛보여드림은 자칫 독이 될 수도 있겠으나, 당신께서는 늘 그렇듯 좌절을 극복해보이시리라 믿습니다.’

내 가치를 증명함으로서 마음의 짐을 덜어드림이 우선이다.

판단한 피아로가 그리드가 휘둘러오는 푸른 대검을 호미로 막은 뒤, 청광의 묵색 대검은 피하고 쇠스랑으로 반격하는 구도를 그렸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리드는 이미 쓰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리드의 주특기가 무엇이던가?

대상의 상식을 뒤엎고 예측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쩌엉!

“……!”

푸른 대검과 호미가 충돌하는 순간, 피아로가 두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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