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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7화 (122/1,794)

템빨 16권 - 10화

제1회 국가대항전과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 등.

대중들 앞에서 큰 활약을 펼쳤던 그리드가 사용한 무기는 늘 대검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Satisfy 최고의 대검술사를 그리드가 아닌 크리스라 인식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그리드는 템빨, 스킬빨로 적들을 찍어 눌렀을 뿐 대검술 솜씨 자체는 특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기사들과 싸울 당시 선보였던 실력도 단지 탁월한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크리스의 대검술은 보는 이의 경탄을 자아내는 수준이었다.

“간발의 차로 지발을 쓰러뜨렸다지? 그 실력, 어디 한 번 내게도 보여 봐라!”

청광에 휩싸인 묵색 대검.

일견하기에도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것을 한 손에 거머쥔 크리스가 피아로에게 쇄도했다.

그 속도, 썩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마주한 입장에서는 상당한 압박감을 느꼈다.

패시브 스킬, <패도의 길>의 효과였다.

파괴전사가 돌진하는 방향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은 마법, 스킬의 캐스팅 속도와 민첩성이 소폭 저하된다.

‘겁먹었는가.’

내가 돌진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잠자코 서있는 피아로.

그가 위축되었다고 착각한 크리스가 실망했다.

‘지발을 쓰러뜨렸다는 자가 고작 이 정도라니.’

아니, 상대의 수준이 낮은 게 아니라 내 수준이 너무 높은 것 같다.

패도의 길은 근력과 비례해서 더 큰 효력을 발휘하는 스킬인 바, 314레벨을 찍고 근력 3천을 달성한 효과가 톡톡히 발휘되고 있는 것일 터다.

목석처럼 서있는 피아로에게 근접한 크리스가 대검을 휘둘렀다.

콰앙!

횡으로 베어지는 검격에 군더더기란 없었다.

바람을 폭발시키며 세차게 뻗어나가 대상을 벤 뒤 곧장 당겨졌다.

‘완벽하다!’

크리스가 감탄했다.

대검의 크기와 형태가 검술을 펼치기에 매우 적합하여 검을 회수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평소보다 배는 단축 된 느낌이었다.

여태껏 수백 종류의 대검을 사용해봤으나 이처럼 손에 딱 맞는 대검은 처음이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해서 제작된 대검 같았다. 제작자 그리드에게 경외심과 호감이 생길 지경이었다.

‘죽었나?’

크리스는 자신의 일격에 피아로가 양단된 것은 아닐까 걱정했다.

NPC라고는 하나. 아니, NPC이기에 하나뿐인 소중한 목숨인 바.

단순한 호승심으로 목숨을 빼앗기에는 제법 가책이 느껴…

“어?”

그리드의 대검에 시선이 사로잡혀 있던 크리스. 그가 피아로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당황했다.

피아로가 너무 멀쩡한 자태로 살아있었던 까닭이다.

피아로가 쯧, 혀를 찼다.

“한눈을 파는가? 오만함이 극에 이르렀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중요한 것이나 과하면 독이 될 따름이다.”

크리스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벤 감각이 있었는데?’

나는 뭘 베어놓고 저자를 베었다고 착각한 거지?

혼란스러워하던 크리스가 문득, 피아로의 발치에 이등분 난 채 널브러져 있는 짚단을 발견했다.

“닌자…!”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그렇듯, 캐나디언인 크리스 또한 닌자에 대한 환상을 어느 정도 갖고 있었다.

하여 닌자에 대해서 약간은 알고 있었고, 닌자의 기술 중에 짚단과 육신을 바꿔치기하는 속임수가 있음을 알았다.

그가 봤을 때 피아로는 농부로 정체를 감춘 닌자임이 분명했다.

‘어쌔신 계열의 히든 클래스 NPC였군! 지발 녀석이 당할만하다!’

크리스가 긴장했다.

이제 저 닌자가 표창을 투척해올지, 아니면 얄팍한 대도를 찔러올지, 어떤 형태의 공격을 해오든 간에 신속함이 극에 이를 것이란 추측이 들었다.

‘살을 줄 각오는 해야겠군!’

다른 전사들처럼 근력에 스탯을 집중적으로 투자한 크리스의 민첩성은 200대에 불과했다. 적의 공격을 보고 대응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살 정도야 내주마!’

크리스가 반격 태세를 갖췄다.

부족한 민첩성을 대비와 예측으로 극복, 피아로의 공격에 응수하여 배로 갚아줄 요량이었다.

그를 본 피아로가 즐거움을 느꼈다.

‘뛰어나다.’

내 주군의 휘하에는 걸출한 인재가 많다. 특히 재능 면에서 레가스와 이벨린은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눈앞의 사내가 그들 수준의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보다 가다듬어진 재능이었다.

이만한 인물은 크라우젤 이후 처음이었다.

“그대의 실력에 경의를 표해 전력을 다하겠다.”

크리스를 인정한 피아로.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무기를 뽑았다.

꿀꺽!

크리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품으로 손을 넣은 닌자가 꺼낼 무기는 표창인가, 대도인가? 그도 아니라면 채찍? 쇠사슬?

‘채찍은 아닌가?’

어쨌든, 크리스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피아로가 꺼내는 무기가 무엇이냐에 따라서 대응법을 달리해야했기에.

한데 피아로가 꺼낸 무기는 크리스의 예측을 완전히 빗나가는 것이었다.

“호미라고!”

그렇다.

피아로가 품에서 꺼낸 무기는 호미였다. 방금 전까지도 사용하다가 온 듯, 다소 뭉툭해진 날 끝에 수분기가 남은 상태로 흙투성이였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크리스가 소리쳤다.

“낫도 아니고 호미라니! 너는 나를 기만하는가!!”

“그렇지 않다.”

굳이 긴 말이 필요할까?

행동으로 보여주면 될 일이다.

터엉!

피아로가 신형을 날렸다.

과연 닌자답게 엄청난 빠르기였다.

크리스가 이상적이라 판단하고 벌려놓았던 간격을 순식간에 좁혀오더니 호미를 찍어왔다.

“이놈이!”

격분한 크리스가 대검을 휘둘렀다.

같잖은 호미와 통째로 피아로를 일거에 날려버릴 각오였다.

한데,

톡.

“뭣?”

피아로의 가슴팍으로 날아가던 대검 앞날 부분으로 호미가 찍혔다.

그 순간 크리스의 무게 균형이 무너지더니 상체가 앞으로 기울었다.

‘뭐지?’

지켜보던 5대장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들은 고작 호미에 대검을 찍히고 기우뚱거리는 크리스의 모습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크리스와 지르칸은 달랐다.

이들은 사태를 순식간에 파악하고 있었다.

‘의도한 거다!’

대형무기는 한손무기와 비교해서 훨씬 더 무겁고 길이가 길다. 무게추가 편향되기 쉬우며, 보다 큰 파괴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게를 집중시킴이 옳았다.

크리스는 그와 같은 기본에 충실하였고 피아로는 그 점을 노렸다.

크리스가 휘두른 대검의 무게추가 쏠린 지점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호미로 가격함으로서 크리스의 무게중심을 상실시킨 것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마치 20세기 홍콩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황당무계한 솜씨가 아닌가?

당황하며 휘청거리는 크리스의 목으로 호미가 날아들었다. 대검을 쳐낸 반동을 활용, 물 흐르듯이 연계시킨 공격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진 크리스가 어깨를 추켜세웠다. 그러자 그의 목을 찔렀어야할 호미가 어깨에 박혔다.

[12,3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뭔 호미의 데미지가…!’

설령 크리티컬이 터진 거라 가정할지라도 믿기지 않는 피해량이다. 어지간한 네임드 보스보다 더 강하다.

이를 악 물어 신음을 삼킨 크리스가 기울어진 몸을 역으로 이용해서 응수했다.

피아로에게 바짝 붙어 그의 움직임을 봉쇄시킨 후 회전함과 동시에 대검을 회수했다.

이때 대검이 자연스러운 호선을 그려 피아로의 가슴을 베었다.

수만, 수십만 번의 전투 경험을 토대로 어떤 최악의 상황일지라도 적에게 위협을 주는 크리스의 위엄이었다.

“씨뿌리기.”

가슴에 옅은 상처를 입은 피아로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가 크리스의 발치로 작은 씨앗을 여러 개 뿌렸다.

‘뭐지?’

전투도중에 씨는 당최 왜 뿌린단 말인가?

이해하지 못하고 혼란을 느끼던 크리스가 아차 싶었다.

‘단순한 눈속임이다!’

상대는 닌자다.

닌자는 은밀함과 눈속임으로 적을 기만하는 것이 주특기인 치졸한 존재!

상기한 크리스가 발치에 떨어진 씨앗으로부터 시선을 뗐다. 애써 무시하는 것이었고 이는 치명적인 실수로 작용했다.

“뭣이!”

재차 대검을 휘두르려던 크리스가 경악하였다.

피아로가 뿌린 씨앗들이 어느새 벼로 자라 내 발목부터 허벅지까지 꽉 휘감았기에!

“어떻게 이런!”

방금 뿌린 씨앗으로부터 순식간에 벼가 자라나다니? 게다가 고작 벼의 압력이 이렇게까지 세다니?

크리스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하다.

전설의 스킬이었으니까.

검성의 길을 버리고 농부의 길을 택한 피아로!

그가 농부로 전직한 이후 완성시킨 <무상농법>은 역사 속 전설들의 기술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수준이었다.

즉, 지금의 피아로는 그리드가 알고 있는 검호 시절 피아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뜻이다.

“그대는 내가 만났던 사람 중 두 번째로 강하다. 잠재력 또한 뛰어나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두 번째?

그렇다면 첫 번째는 누구란 말인가!

‘지발을 말함인가…!’

크리스의 자존심이 산산조각 났다.

지발과 나의 레벨 차이는 고작 1.

늘 좁히지 못한 차이였으나 전투력만큼은 내가 위라 믿어왔다. 한데 내가 한 수 아래라고?

“크아아!”

고함을 내지른 크리스가 벼에 하체를 속박당한 상태로도 대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기가 전방으로 쏘아져 피아로를 덮쳤다.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패도의 검>의 묘수였다.

강력한 검기가 피아로의 가슴을 관통하는 듯싶었으나,

“무상농법 제4 장, 밭 갈기.”

어느새 쇠스랑을 꺼낸 피아로가 땅을 한 번 쓱 갈았다. 그러자 지면이 해일처럼 일렁이더니 흙이 솟구쳐 올랐고 그것은 하나의 방벽이 되어 패도의 검을 막아냈다.

“말도 안 된다!!”

Satisfy를 시작하고 정확히 2년 2개월.

오로지 지존이 되겠다는 목표를 갖고 꾸준히 열렙하고 수련해왔다. 심지어 이제는 템빨까지 갖췄다.

한데 농부로 정체를 숨긴 닌자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진짜 농부였던 존재에게 압도당하다니?

씨뿌리기, 벼 재배, 밭 갈기 등의 농법에 패배를 겪게 생기자 지나온 세월이 허망할 따름이다.

‘인정할 수 없다!’

크리스가 순두부처럼 뭉개진 멘탈을 간신히 수복시켰다.

상대는 지발을 아슬아슬하게 간신히 이겼다고 알려진 존재.

그에게 이처럼 허무하게 당하는 것은 내가 지발보다 수준이 훨씬 낮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나 다름이 없었으니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크아아아아아!!”

<폭군의 용력>을 전개, 근력을 일시적으로 20퍼센트 상승시킨 크리스가 하반신을 속박하고 있는 벼들을 찢어버렸다. 단순히 힘만으로 해낸 일이었다.

그를 본 피아로가 자책했다.

‘나도 수련이 부족했군.’

무상농법 1장 <씨뿌리기>에 이은 2장 <급성장>.

그것으로 성장시킨 벼의 내구력이 생각보다 약했다. 아직 급성장의 수준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보다 더 밭일을 열심히 해야겠다.’

피아로가 다짐하는 사이, 흑청의 검광이 난무하며 피아로를 덮쳤다.

호미로 모조리 방어, 처음처럼 크리스의 무게 중심을 무너뜨리고자 시도했던 피아로의 눈에 이채가 실렸다.

‘깨달음이 빠르군.’

대검이 호미와 충돌하는 순간마다 즉각적으로 대검을 회수하고, 반동이 중첩될 때마다 공격 속도를 증폭시키는 크리스의 솜씨는 피아로가 봐도 놀라운 것이었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크라우젤보다 경지가 높아.’

확실히 인정한 피아로가 호미에 이어 쇠스랑까지 휘두르기 시작했다. 두 자루 농기구를 수족처럼 부리는 그의 솜씨가 크리스를 압도해나갔다.

하지만 크리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가슴을 쇠스랑에 찍히고도 물러서지 않고 고함을 내질렀다.

“내가 지발보다 위다!!”

쿠워어어!!

사자후보다 상위개념의 외침이었다.

광활한 논밭 곳곳에 흩어져 새참을 먹고 있던 농부와 유저들.

그들이 화들짝 놀라며 기겁했고 전투를 지켜보던 5대장들 또한 귀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크리스가 획득한 세컨드 클래스 <폭군>의 힘이 발휘되는 것이다.

‘이때다!’

<폭군의 호령>을 정면으로 맞고도 무사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리스는 일시적으로 혼란에 휩싸였을 피아로의 틈을 노리고 <폭군의 격노>를 연계하였다.

쿠르르르릉!

크리스를 중심으로 지진이 일어났다.

이 지진에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지진을 일으킨 당사자, 크리스 본인이 유일했다.

크리스는 지진에 휩쓸려 나자빠질 피아로에게 <폭군 강림>을…

“헐.”

스킬을 사용하려던 크리스가 할 말을 잃었다.

무너지는 대지 틈새로 자라난 대량의 벼들 위로 고고히 군림하고 있는 피아로를 보았기에.

“땅을 요란하게도 망쳐놨구나. 그대가 해야 할 일이 늘었군.”

“…?”

말이 좀 이상하다. 마치 내게 무언가를 시킬 것만 같은, 그런 뉘앙스다.

섣불리 이해하지 못하는 크리스에게 벼의 비가 쏟아졌다.

연신 대검을 휘둘러 방어해봤자 부질없었다.

[그리드의 대검의 내구력이 10 하락하였습니다.]

[그리드의 대검의 내구력이 11 하락하였습니다.]

속 빈 벼.

무게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그 미약한 식물 하나하나에 오러. 아니, 오러보다 상위 개념의 기운이 실려 있었다.

감당할 수 없었던 크리스는 그리드의 대검과 함께 넝마가 되었다.

***

“대검을 수리해주시오.”

“뭐?”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채 20분도 지나지 않아 되돌아온 크리스. 그가 대검을 내밀자 그리드는 어이가 없었다.

이가 나가고 심지어 균열이 생기기 직전인, 그야말로 망신창이가 된 대검을 확인한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거 왜 이래? 그새 드래곤이라도 만났어?”

‘가증스러운 놈!’

크리스는 작금의 사태가 모두 그리드의 의도라고 믿었다.

피아로라는 괴물은 그리드의 부하였으니 정황상 그렇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우리의 관계에서 네가 우위에 있음을 확실히 주지시키겠다 이거지?’

과연 소문은 믿을 게 못된다.

멍청하다고 소문난 그리드였으나 정작 알고 보니 엄청나게 무서운 사내였다.

치를 떠는 크리스에게 그리드가 손을 내밀었다.

“수리비. 내구력 1당 3골드.”

“뭣…!”

시세보다 족히 10배는 비싼 값이었다.

실로 불합리한 가격이었으나 거래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 귀신 같은… 결코 적으로 돌려선 안 될 놈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853골드를 지불한 크리스가 논밭으로 향했다.

대자이언트 길드의 5대장들도 함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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