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6권 - 9화
[민첩성이 10 상승하였습니다.]
크리스와의 거래를 마친 후.
지체 않고 엘릭서를 복용한 그리드는 몸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근력:2,790
민첩성:1,756
‘아직 멀었네.’
근력과 민첩성의 비율을 1대1로 맞추기 위해서는 앞으로 최소 104개의 레벨을 올려야하는 입장이다.
그리드는 솔직히 엄두가 안 났다.
아모락트의 대리인, 탈로스.
그를 잡고 경험치를 무려 26억이나 획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레벨이 하나밖에 오르지 않았는데, 어느 세월에 104개의 레벨을 올린단 말인가?
‘레벨이 오를 때마다 필요 경험치량이 너무 많이 늘어난다. 이래서야 4차 전직 유저는 1년 후에도 등장하지 않겠군.’
아니, 크라우젤이라면 1년 내에 4차 전직이 가능하지 않을까?
랭킹 목록에서 확인되는 그의 레벨은 어느덧 319였고 이는 2위 지발보다 무려 4나 높은 수치였다.
‘괴물 같은 놈… 그 녀석은 밥 먹고 사냥만 하는 게 분명해.’
통합랭킹 1위 크라우젤.
그리드는 그를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고 심지어 TV에서조차 본적이 없다.
하지만 세상사람 모두가 인정하듯 그의 레벨 업 능력이 독보적이라는 사실을 그리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됐든 민첩의 엘릭서를 거래할 수 있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면 좋을 텐데.’
현실적이지 못한 바람이다.
엘릭서는 너무나도 진귀한 영약이었다. 이번과 같은 거래는 두 번 다시없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흠.”
그리드가 길드원들의 위치를 파악해보았다.
파브라늄 원정대는 여전히 뱀파이어의 도시에 머물면서 사냥 중이었다.
엘핀스톤을 레이드하고 경험치와 아이템 획득률 상승 버프를 얻은 그들이었기에 이참에 뽕을 뽑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헐… 폰이랑 레가스는 레벨이 벌써 308이나 됐네. 쌓아놓은 경험치가 많았었나? 나도 지금이라도 다시 뱀파이어의 도시로 가야겠다.’
[경험치, 아이템 획득률이 5퍼센트 상승한 상태입니다. 이 효과는 뱀파이어의 도시에서만 적용됩니다. 남은 시간 25일 13시간 40분 15초.]
‘앞으로 25일하고도 반나절. 버프가 유지되는 동안 죽어라 사냥만한다면…’
레벨을 최소 3개는 올리고, 운이 좋을 경우 엘릭서를 획득할 수도 있지 않을까?
고무된 그리드가 떠나기에 앞서 대장간으로 향했다.
몇 가지 용무가 있었던 까닭이다.
우선,
“아이템 창조.”
[어떤 아이템을 창조하시겠습니까?]
“갑옷.”
[어떤 재질을 사용하시겠습니까?]
“푸른 오리하르콘과 흑철.”
[설계해 주십시오.]
눈앞에 공백의 설계도가 떠올랐다.
벌써 7번째 마주하는 설계도였기에 그리드는 능수능란하게 갑옷을 설계해나갔다.
잠시 후, 만족할만한 외관의 갑옷을 완성시킨 그리드가 아이템의 특징을 설명했다.
“이 갑옷은 결코 꿰뚫리지 않는다. 창칼로는 흠집조차 낼 수 없고 심지어 드래곤 브레스에도 녹지 않는 최강의 갑옷이야.”
[불가능합니다. 사용 재질과 설계 수준에 한계가 있습니다.]
“…역시.”
예상했던 일이다.
아이템 장착 페널티가 사라진 김에 공격력 999,999,999,999의 무기와 방어력 999,999,999,999의 갑옷 등을 무장하겠다는 꿈은 허황된 것이었다.
애초에 <(신의 무기를 이해한)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Lv.6을 기반으로 개화된 그리드의 지식이 말하고 있었다.
푸른 오리하르콘과 흑철만을 재료로 제작할 수 있는 아이템의 수준은 실패작보다 약간 나은 정도가 한계라고.
과거, 사용 조건을 고려치 않은 지존 무기를 설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실패작이 창조된 것이 그 증거다.
‘파브라늄을 재료로 한다면 사정이 달라지겠지만.’
그래봤자 리파엘의 창 수준일 터다. 아직 그리드의 설계 수준이 부족한 것이 큰 걸림돌이었다.
‘현재로서 파브라늄은 장비 아이템보다 보조 아이템으로 활용하는 편이 훨씬 더 좋다. 푸른 오리하르콘보다 상위 개념의 광물을 구하는 게 급선무군.’
확실히 깨달은 그리드가 광물 탐지기 마이너를 소환했다.
“푸른 오리하르콘보다 뛰어난 광물들을 찾아서 보고해.”
“네? 뭐라고요?”
눈살을 확 찌푸린 마이너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파브라늄만 모두 모으면 내게 광부로서의 삶을 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았습니까!!”
마이너가 타고난 재능은 광물 탐지보다 채광에 더 적합했다.
기스를 넘어서는 전설의 광부가 되어 사하란 제국 황제의 오른팔이 되는 것이 마이너의 원대한 포부였다.
한데 그리드가 광부가 될 기회조차 주질 않았으니 정녕 치가 떨렸다.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하는 소년의 어깨를 그리드가 토닥여주었다.
“조금만 더 참아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전설의 대장장이가 아니더냐? 네가 훌륭한 광부가 되어서 내게도 큰 힘이 되어주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야.”
“크으…!”
마이너가 이를 갈았다. 눈에 독기가 실렸다. 명색이 주인에게 이런 태도라니, 과연 배신의 상을 지닌 녀석다웠다.
그리드가 속으로 혀를 찼다.
‘현실을 알아야지.’
마이너의 재능은 분명히 빼어나다. 엄청난 광부가 될 자질을 타고났다. 하지만 전설의 광부가 될 정도는 아니다. 대영주의 검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마이너의 꿈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네게는 광물 탐지가로서의 삶이 더욱 더 적합해.’
광물 탐지 능력은 희귀한 것이다.
윈스톤, 바이란, 레이단의 백성들을 수시로 관찰해온 그리드였으나 광물 탐지 재능이 있는 NPC는 마이너가 유일했다.
그리드는 마이너가 쭉 광물 탐지기로서 성장하며 자신에게 큰 힘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바이란에 계시는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었다지? 내 바이란의 영주에게 말하여 어머니께 최고의 의원을 붙여드릴 것을 약조하마. 자, 마이너. 어머니가 건강을 되찾길 바란다면 어서 모험을 떠나라. 최고의 광물을 찾아내는 거야. 파이팅!”
“제길…! 제길!! 이 악마 같은 인간이!!”
마이너의 나이 올해 고작 14세였다.
아직 어린 소년의 약점을 잡고 멋대로 부리는 그리드의 모습은 사악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자신이 마이너를 다루는 방법이 옳다고 확신했다.
단지 뛰어난 수준의 광부가 되기보다는 희소성 있는 광물 탐지기로서의 삶이 훗날 마이너에게도 좋게 작용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마이너가 치를 떨며 떠난 후.
그리드는 세이렌의 유페미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수인족 왕의 눈물 몇 개나 모았어?
-4개요.
-오, 생각보다 더 많이 모았는데?
수인족 왕의 눈물.
아이템에 마법을 귀속시킬 수 있게끔 돕는 재료다.
독보적인 효력을 지닌 제작재료이기는 하나 수인족 왕은 5개월에 단 하루만 눈물을 흘린다고 했었다.
세이렌으로 떠나고 3개월 만에 눈물을 4개나 모은 유페미나가 그리드는 놀라웠다.
-운이 좋았죠. 조금 특별한 퀘스트를 얻었거든요.
-특별한 퀘스트? 그게 뭔데?
-후훗,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신났네.’
꽤나 좋은 퀘스트를 얻었나보다.
미소를 머금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은 소식 기대하마. 도중에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고, 우선 그 전에 수인족 왕의 눈물을 전부 길드 창고에 넣어줘.
잠시 후.
창고로부터 수인족 왕의 눈물을 챙겨온 그리드가 파브라늄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
‘레전드리 제작템이라니… 이런 게 정말로 존재할 줄이야!’
그리드와 거래를 마치고 나온 크리스의 입이 귀에 걸렸다.
그리드와의 관계에서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고는 하나 세상에 이만한 아이템을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할까?
흔하기는커녕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드의 대검>은 상식을 초월하는 위력을 발휘하였고 이는 크리스가 바란 것 이상의 아이템이었다.
그 유명한 크라우젤의 <백아도>, 그리고 수에론의 <흉악한 총명검>을 가뿐히 압도하는 성능이리라고 크리스는 단언할 정도였다.
‘최소 360레벨까지는 사용할 수 있겠군.’
결코 과장이 아니다.
크리스가 레이드를 통해서 획득했던 320레벨 제한의 유니크 아이템보다 그리드의 대검이 훨씬 더 우수했다. 그를 토대로 분석해 봤을 때 어지간한 350~360레벨 제한의 아이템들은 그리드의 대검보다 성능이 못하리라는 판단이 섰다.
‘앞으로 최소 10개월 동안은 무기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하지만 상황이 심각한데…’
그리드와 템빨단은 이와 같은 수준의 무구들로 도배를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타 세력에 비해서 그리드의 세력이 월등하게 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 걸까?’
크리스 또한 거대 길드의 수장이다.
더 높은 작위를 원했고 종국에는 왕이 되어 최고의 부와 권력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 목표였다.
그의 입장에서 그리드는 크나큰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가시죠.”
고심해보는 크리스를 5대장들이 수행했다.
그들과 함께 성문을 나서던 크리스가 문득 의문을 느꼈다.
“미하라는?”
“3일 전인가부터 안 보이는가 싶더니 먼저 페드로에 가있더군요.”
미하라는 레이단에 있는 내내 무료해 했었다.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이라면 제멋대로 먼저 귀환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녀석답군. 응?”
혀를 차던 크리스가 자리에 멈춰 섰다.
레이단 외성 밖으로 광활히 펼쳐진 논밭.
그곳을 지나는 우리의 앞길을 웬 농부가 가로막는 것이 아닌가?
“넌 뭐냐?”
5대장 중 하나인 아셀라스가 감히 내 주군의 앞길을 가로막는 농부에게 위협적으로 질문했다.
그러자 농부가 그에게 괭이 5개를 건넸다.
“땅을 갈아주시게.”
“뭐?”
아니, 이 농부가 미쳤나?
다짜고짜 나타나서 앞길을 가로막더니 땅을 갈아 달라고?
너무 황당한 나머지 모두가 입을 닫는 그때 크리스가 나섰다.
“우리가 너를 도와야하는 이유가 뭐냐?”
농부, 피아로의 논리는 간단했다.
“그대들의 동료가 감히 그리드 공작각하의 시녀를 추행하였다. 그대들은 동료를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죄를 물어 레이단의 농업 발전에 일조해줘야겠다.”
우리의 동료가 시녀를 추행하였다고?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던 크리스와 5대장들이 이내 미하라를 떠올렸다.
‘그 멍청한 새끼가 또 쓰레기 같은 짓을…!’
미하라는 예전부터 사고뭉치였고 도를 지나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가는 5대장들 사이에서 한숨 쉰 크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하고자하는 말은 잘 알겠다. 시녀를 추행한 그자에게는 내 엄벌을 내리도록 할 테니 너무 분개치 말고 길을 열어라.”
크리스는 피아로라는 이름의 농부가 일종의 퍼포먼스를 벌이는 중이라고 여겼다.
부디 미하라의 죄를 알아달라는, 힘없는 농부의 외침쯤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큰 오해였다.
“엄벌은 이미 내가 내렸으니 그대들은 밭일만 도우면 된다.”
결국 참다못한 아셀라스가 언성을 높였다.
“네놈은 이분이 뉘신 줄 알고 말을 자꾸 함부로 하느냐? 이분은 에트날 왕국의 자작이며 대자이언트 길드의 마스터인 크리스님이다! 감히 너 따위는 함부로 눈조차 마주칠 수 없는 분이건만, 너는 어찌 예절을 생략하는 것이며 심지어 밭일을 강요하는 것이냐!”
Satisfy를 갓 시작한 초보자도 아니고, 농부 NPC 따위와 이리 말을 길게 섞는 것도 참 오랜만이다.
어처구니가 없어 씩씩거리는 아셀라스에게 농부 피아로가 무심한 시선을 보냈다.
“내가 멀리서 지켜보니, 너희야말로 그리드 공작각하께 예절을 갖추지 않더군. 오는 예절이 없으니 가는 예절도 없는 게다.”
“예절은 개뿔…!”
NPC들과 달리 유저와 유저 사이에서 작위는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그리드가 공작이랍시고 크리스와 5대장들이 고개를 조아리며 예절을 갖춘다?
있을 수 없는 바람이었다.
현실을 모르고 지껄이는 농부의 태도가 5대장들은 답답할 따름이었다.
“썩 꺼져라!”
언제까지고 농부에게 발목을 붙잡혀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셀라스가 농부를 밀쳤다. 아니, 밀치고자 했다.
“억?”
아셀라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농부에게 손목을 낚아채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이게 무슨…!’
바닥에 널브러진 아셀라스와 그를 본 5대장들이 경악하였고, 그들 사이의 크리스는 이채를 띄고 있었다.
‘레이단의 괴물 농부…! 정말로 존재하였던 건가!’
헛소문이라 믿었지만 이제 보니 아니었다.
지대한 흥미를 느낀 크리스가 그리드의 대검을 뽑아 쥐었다.
“간발의 차로 지발을 쓰러뜨렸다지? 그 실력, 어디 한 번 내게도 보여 봐라!”
자이언트 길드를 제외한 7대 길드 연합이 레이단 침공에 실패한 이유는 정체불명의 농부들 때문이라 들었다.
농부 중 하나는 랭킹 2위 지발을 아슬아슬하게 꺾었을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라는 소문인데, 과연 내가 그와 붙으면 어떻게 될까?
세컨드 클래스를 획득한 후 지발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랭킹 3위 크리스.
그가 피아로에게 쇄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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