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6권 - 7화
‘그리드는 거래를 수락할 것이다.’
크리스가 확신을 가지게 만들 정도로 엘릭서의 가치란 높았다.
Satisfy에는 온갖 종류의 영약이 존재하지만 그중에서도 엘릭서의 효과가 독보적이었으니까.
‘능력치를 무려 10이나 올려주는 비약…’
복용할 경우 1레벨을 올리는 셈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을 마다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없다고 단언한다.
“좋아, 당신의 무기를 만들어주도록 하지.”
역시나 그리드가 거래를 수락했다.
“꼭 최강의 무기를 만들어주시오. 당신이 사용하는 푸른 대검과 같은.”
신신당부하는 크리스였다.
실패작 이하의 무기를 제작해줬다가는 거래를 취소할 기세였다.
“나만 믿어.”
그리드는 최선을 다짐했다.
엘릭서를 꼭 얻고 싶었을 뿐더러 명예가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최고의 무기를 만들어주지.’
길드원이 아닌 유저에게 아이템 제작 의뢰를 받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템빨단의 수장이자 전설의 대장장이로서 자존심이 있다. 의뢰를 허술하게 수행할 생각 따위 추호도 없었다.
‘이참에 그리드 세트를 추가한다.’
그리드 부츠에 이어서 그리드의 대검을 창조할 차례다.
실패작, 다인슬레프, 도플갱어의 대검, 리파엘의 창, 이야루그트 등등.
그간 사용해온 최고의 무기들을 토대로 창조될 그리드의 대검은 필시 보통내기가 아닐 것이었다.
‘거기에 특별한 옵션을 추가해주지.’
열의를 불태우는 그리드의 음흉한 미소가 점차 더 짙어졌다.
***
“체다카 출신들은 어디에도 보이질 않는군.”
“우리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서 죄다 쫄아 숨은 거 아니야?”
레이단 영주성 정원에 다섯 명의 남녀가 모여 있었다.
자이언트 길드의 5대장이었다.
레이단까지 크리스를 수행해온 이들은 크게 실망한 상태였다.
L.T.S 시절부터 우리의 철천지원수였던 전 체다카 길드원들. 그들의 모습이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던 까닭이다.
“오래간만에 레가스 녀석과 붙어보나 싶었더니만.”
마검사 랭킹 1위 미하라가 특히 아쉬워했다.
레가스와의 전적 14전 3무 11패.
오늘, 그 치욕적인 전적에 승수를 추가하려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기자 이를 가는 그에게 초로의 검사가 일침을 가했다.
“우리는 이곳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닐세. 괜한 분란을 조장하지 말고 감정을 억제하도록 하게.”
초로의 검사, 그는 검사 랭킹 1위 지르칸이었다.
한때 잠시나마 이벨린에게 랭킹을 빼앗겼었지만 이제 그는 1위 자리를 공고히 하고 있었다.
이벨린이 10인의 루키 출신으로서 촉망 받는 인재이기는 하나, 완숙한 지르칸을 넘어서기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미안, 미안. 자제할게.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였어.”
제멋대로의 난폭한 성향을 지닌 미하라조차도 지르칸에게는 고분고분하게 굴었다. 다른 대장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르칸은 크리스의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으니 그를 거스르기란 어려웠던 것이다.
“그건 그렇고 이 성. 참으로 볼거리가 없네요.”
홍일점 핑키가 화제를 전환시켰다.
그녀의 감상대로 레이단 영주성은 볼품이 없었다.
단지 규모만 클 뿐이지, 성 어디에도 화려한 조경이나 장식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인구도 적어.”
레이단은 보기 드문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 사람이 없었다.
사막의 난이도가 너무 높아 접근성이 낮은 한계였다.
“레이단의 발전 속도는 우리들의 예측보다 훨씬 더 늦을 수도 있겠군.”
“애초에 템빨단 총원이 30명도 안 되잖아. 이런 대도시를 제대로 관리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하지.”
“농사 하나는 잘 지어놨던데?”
“이만한 대도시를 농업 도시로 발전시켰다는 것부터가 무능하다는 방증이다.”
템빨단이 잘하는 것은 싸움뿐이고 길드로서의 전체적인 능력은 수준 미달이다.
자이언트 길드의 5대장들은 그렇게 파악했다.
템빨단이 비밀리에 은기사 길드를 흡수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으니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광활한 사막 어딘가에 존재하는 옐로우 미스릴 광산.
에트날 왕국 북부에 있는 중소도시 바이란.
천혜의 자원이 매장 된 코크로 섬.
현재 템빨단이 그렇게 세 곳으로 나뉘어 활동 중이라는 사실을 5대장들이 알게 된다면?
템빨단의 저력에 충격을 받고 감히 함부로 떠들지 못했을 것이다.
“아, 심심해. 나는 산책이라도 하고 있을 테니까 마스터 나오면 귓말 해줘.”
“사고 치지 마라.”
“알았어, 알았다고. 내가 무슨 앤 줄 아냐?”
템빨단의 저급한 수준을 실컷 비웃은 후.
무료함을 달래고자 일행과 떨어진 미하라가 홀로 성내를 활보했다.
“와, 진짜 더럽게 크기만 하고 볼거리라고는 하나도 없네. 이게 어딜 봐서 공작성이야?”
레가스가 이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부터 미하라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언제나 자극을 추구하는 그였기에 평범한 상황은 영 달갑지 않았다.
“응?”
투덜거리며 돌아다니던 미하라의 걸음이 자리에 멈췄다. 그의 시선이 낡은 분수대 너머로 고정되었다.
제법 예쁘장한 NPC 메이드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이다.
“시간 보내기용으로 딱 좋겠군.”
입맛을 다신 미하라가 메이드에게 다가갔다.
“어이, 몸 좀 만지자.”
퀘스트를 주는 NPC라면 또 모를까, 일반적인 NPC는 유저들에게 존중 받지 못한다. 특히 신분이 낮은 NPC의 경우 사람취급조차 못 받았다.
같은 인간끼리도 서로 해치는 마당이니 NPC의 인권이 지켜질 리 만무한 것이다.
이는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는 Satisfy의 가장 큰 문제점 중 하나였다.
“꺄악!”
화단에 물을 주고 있던 메이드는 갑자기 나타난 사내가 자신의 엉덩이를 주무르자 질색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저항하는 그녀의 반응에 미하라는 재미를 느꼈다.
“뭘 또 비명까지 지르고 그래? 좀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였다.
“그대는 누구지?”
중저음의 목소리가 미하라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미하라가 시선을 돌렸다.
다부진 체격의 중년인이 보였다.
한 손에 호미를 쥔 그의 행색은 영락없는 농부 그 자체였다.
이름은 피아로.
그 또한 메이드와 마찬가지로 NPC였다.
“누가 농업 도시 아니랄까봐 어딜 가나 농부가 있네.”
콧방귀 뀐 미하라가 손을 휘저었다.
“썩 꺼져라, 천한 것.”
“그대는 누구냐고 물었다.”
물러서기는커녕 재차 묻는 피아로였다.
그를 미하라는 더 이상 상종하지 않았다.
한낱 농부 NPC따위에게 신경 쓸 시간에 메이드의 몸을 더듬는 행위를 택했다.
그 행위가 불러올 재앙을 미하라는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레이단의 모든 것은 그리드 공작각하의 것이다. 설령 사하란 제국의 황제일지라도 탐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피아로의 음성이 더욱 더 낮게 가라앉았다.
미하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별 같잖은 놈이 헛소리 지껄이고 앉았네. 고작 시녀 엉덩이 만지는 걸로 웬 오바야… 헉?”
미하라의 눈앞으로 호미가 날아들었다.
미하라의 레벨과 민첩성이 조금만 더 낮았어도 읽어내지 못했을 빠르기였다.
헤이스트를 전개, 간신히 자리에서 물러나 호미를 회피한 미하라가 치를 떨었다.
“농부 따위가 감히 나를 위협하다니!”
화르륵!
미하라가 뽑아 쥔 검에 화염이 휩싸였다.
지금의 그는 자신이 고작 농부에게 위협을 느꼈단 사실을 용납 못하고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앞뒤 생각 않고 피아로에게 살수를 펼쳤다.
하지만 피아로의 입장에서 그건 재롱이나 다름이 없었다.
“레이단은.”
터엉!
“무슨…!”
미하라가 경악했다.
농부가 손가락을 퉁기자 날아온 작은 씨앗이 자신의 검을 튕겨낸 까닭이었다.
“그대 같은 쓰레기가.”
터엉!
“커억!”
새로이 날아온 씨앗에 이마를 강타 당한 미하라의 고개가 뒤로 크게 젖혀졌다.
[9,1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말도 안 되는…!’
“함부로 출입해서는 안 되는 곳이다.”
터엉!
“크아악!!”
결국 미하라가 비명을 질렀다.
재차 날아온 씨앗이 심장을 강타했고, 그에 끔찍한 고통에 시달린 여파였다.
‘서, 설마 내가 씨앗에 맞아 죽는다고?’
바닥을 기는 생명력 게이지를 확인한 미하라는 지금이 악몽이길 바랐다.
마검사 랭킹 1위 체면에 농부가 던진 씨앗. 그것도 해바라기 씨처럼 작은 씨앗에 맞아 죽다니,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사망하였습니다.]
네 번째 씨앗에 이마를 찧고 잿빛 세상을 보게 된 미하라는 결심했다.
‘내 두 번 다시는 NPC의 엉덩이를 만지지 않겠다…!’
NPC 보호 시스템이 이렇게까지 강화되었을 줄이야!
치를 떤 미하라가 로그아웃했다.
***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장비 아이템 제작법을 3개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창조할 수 있는 아이템 제작법 횟수 12/18.
*이 스킬을 사용해서 창조한 아이템을 생산 시, 아이템에 창조자의 이름이 자동으로 새겨집니다.
<그리드의 부츠>이후 오래간만에 아이템을 창조하게 된 그리드.
그가 <그리드의 대검>을 창조하기에 앞서서 머릿속으로 설계도를 그려나갔다.
과거, 생각없이 무작정 아이템 창조부터 외쳤던 시절과 비교하면 엄청난 신중함이었다.
‘실패작을 사용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은 과도한 크기였다.’
대검은 커야 멋지다.
오로지 그와 같은 이유로 실패작의 길이를 3미터에 육박하게 설계했던 그리드는 사용함에 있어서 불편함을 맛봐야만 했다.
검을 회수하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렸을 뿐더러 지형지물의 제약을 크게 받았다. 특히 바닥에 끌리는 경우가 많았다.
‘길이는 1미터 40센티 내외가 가장 적당할 것 같고.’
폭은 4센티 정도 늘리는 편이 좋을 듯하다.
대검이라는 무기의 장점 중 하나가 방어 용도로 활용하기에 적합하다는 점에 있었으니 그 부분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무게감은 조금 더 높이자.’
실패작의 가장 큰 장점은 푸른 오리하르콘을 재질로 하여 가볍다는 점이다.
하여 대검임에도 불구하고 공격속도가 떨어지지 않았지만 무게감이 없어 파괴력이 극대화되지 않는다는 단점을 발생시켰다.
‘그렇다면 재질을 푸른 오리하르콘과 흑철을 섞어야겠지.’
칼날 부분은 푸른 오리하르콘의 함량을 높여 절삭력을 극대화시키고 칼등 부분에는 흑철의 함량을 높여 무게감을 싣는다.
“…”
벌써 2시간째 눈을 감고서 새로운 아이템의 형태를 그려나가는 그리드였다.
대장간의 젊은 대장장이들은 한쪽에 앉아 명상만 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일하러 오셨다는 분께서 왜 저러고만 계시는 걸까?”
“낮잠을 자야지 일에 더 집중을 잘 하시는 성격이 아닐까?”
“낮잠을 굳이 앉아서 잘 이유가 어디에 있어? 저건 명상이라는 거야. 공작각하께서는 작업하시기에 앞서 자신이 제작할 무기의 형태를 미리 그려보시는 거라고.”
‘호오.’
의견을 나누는 대장장이들 중에 제법 안목이 뛰어난 이들이 있었다.
누구보다도 먼저 중급 대장장이가 되었던 2명의 젊은이들이었다.
칸의 그들에 대한 평가가 더욱 더 높아졌다.
‘내 뒤를 이어 그리드에게 큰 힘이 되어줄 아이들이다.’
현재 칸은 모든 대장장이들에게 휴식을 주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리드의 작업을 견학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였고, 이는 벌써 효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드의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 의문을 품고 의견을 조율해나가는 젊은 대장장이들은 이 순간에도 저마다 경지를 한 단계씩 성장시키고 있었기에.
“자, 시작하자.”
명상 후 아이템 창조 스킬을 사용, <그리드의 대검>을 설계한 그리드가 드디어 망치를 꺼내 쥐었다.
따앙! 따앙!!
칸조차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전설의 대장장이가 행하는 작업 하나하나를 레이단의 젊은 대장장이들이 눈과 가슴에 담았다.
***
그리드에게 작업 의뢰를 맡기고 3일이 지난 날이었다.
-완성됐다.
사막 곳곳을 누비며 몬스터들을 사냥하고 있던 크리스에게 드디어 그리드의 귓속말이 도착했다.
환희에 찬 크리스가 당장 레이단으로 향했다.
“오오…!”
그리드가 제작한 아이템의 상세 정보를 공유 받은 크리스가 몇 번이고 감탄했다.
아이템의 성능이 자신이 기대한 것 이상이었던 까닭이다.
하지만 어떤 옵션 효과를 확인하더니 얼굴을 굳혔다.
*오로지 제작자만이 수리할 수 있는 아이템입니다.
‘이 녀석이 잔머리를…!’
멍청하다는 소문에 비해서 너무 능구렁이 같지 않은가?
그리드가 꾸준히 성장해왔음을 알 리 없는 크리스가 이를 갈았다.
“거래, 콜?”
빙그레 웃으며 마지막 의사를 확인하는 그리드였다.
크리스는 심히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템의 성능이 너무나도 탐나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거래…하겠소…”
통합랭킹 3위이자 거대 길드의 수장이 아이템의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그는 그리드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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