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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22화 (117/1,794)

템빨 16권 - 5화

‘순진… 아니, 멍청한 놈. 이번 일을 계기로 사람을 보다 의심하고 경계하는 법을 배워라.’

브라함은 그리드의 몸을 빼앗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그가 부활함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본래 자신의 몸이었지 타인의 몸이 아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그리드의 몸을 빼앗는 시늉을 했던 이유는, 그리드의 안일함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이었다.

그 형태가 심히 위협적이기는 했지만 호의를 베풀었다는 뜻이다.

왜?

‘나를 노심초사하게 만든 괘씸한 놈이기는 하나, 무려 300년 동안의 염원을 이뤄준 은인이기도 하니까.’

일종의 감사표현이다.

그리드 본인은 모르겠지만.

[뭐, 다음에 만날 때는 적이어도 좋다.]

읊조린 브라함의 영혼이 창천을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검의 무덤.

브라함의 육신이 봉인 된 장소였다.

***

레이단은 제2의 탈리마를 목표로 삼은 도시다.

이에 따라 행정관 라빗은 대장간 사업과 연금술 발전에 대부분의 예산을 투자하는 중이었다.

한데 웃기는 일이다.

현재 레이단에서 가장 발달한 분야는 다름 아닌 농업이었다.

레이단을 중심으로 사방팔방 펼쳐진 논밭이 형형색색이다.

“이제는 별에 별 곡식을 다 재배하나보군.”

1년 반 이상이나 방치해뒀던 퀘스트를 완료하고 귀환한 그리드.

논밭을 둘러본 그가 혀를 내둘렀다.

“어째 규모도 더 커진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으나, 검호 피아로는 영지의 풍작 확률을 100퍼센트로 만들어주는 패시브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다.

덕분에 레이단은 어떤 농작물을 재배할지라도 늘 수확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고 농업이 발달하게 됐다.

레이단의 수출 품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농산물이었으니 말 다했다.

‘이러다가 농업 도시라고 소문나겠어.’

전설의 대장장이가 영주로 있는 도시가 농업 도시로 이름을 떨치게 되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솔직히 썩 내키진 않다.

“응?”

큰 예산을 투자하지 않았음에도 절로 성장하는 레이단의 농업 상황!

이를 기뻐해야하는지, 아니면 슬퍼해야하는지.

혼란스러워하며 논두렁을 가로지르던 그리드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을 사로잡는 광경이 있었던 까닭이다.

“힘내자! 1시간 후면 새참이 도착한다!”

“좋아! 헉? 빌어먹을! 우리가 어쩌다가 새참 따위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 거지!”

이영차, 이영차.

각종 농기구를 번갈아 사용하며 열심히 농사 짓는 농부들.

땀 흘리는 그들 사이에 어째 유저들이 섞여있다?

‘뭐지?’

템빨단원들의 활약 덕분에 사막의 생태계가 제법 안정되었다고는 하나, 레이단의 진입 장벽은 여전히 높다.

최소 260레벨 이상의 유저들이 아니면 레이단에 발을 들이는 것은 꿈에도 못 꿀 일이었다.

하여 레이단에서는 템빨단원 외의 유저를 찾아보기가 어려웠고 주민은 전원 NPC였다.

이와 같은 상황에 어찌 유저들이 농사를 짓고 있단 말인가?

그리드가 의문에 휩싸여 있는 그때였다.

템빨 기사단 1의 단장이자 레이단의 총사령관 피아로가 논밭에 출현했다.

그가 열심히 밭일 중인 유저들에게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호미질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좀 더 손목을…”

“땅을 너무 곱게 갈지 않았는가? 이래서야 묘목을 심을 수 없다. 브라우니 나무는 거친 토양에서 더 잘 자라는 법이니까.”

“…”

[전설의 농부가 출현하였습니다!]

몇 달 전 목격했던 그 문구가 또 다시 뇌리를 강타했다.

충격에 잠시 멍하니 있던 그리드가 도리도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검성을 꿈꾸는 검호 피아로가 농부가 됐을 리 없어. 내 피아로가 농부일 리 없다고.”

그렇게 곱씹으면서도 <대영주의 검>으로 피아로의 상세 정보를 확인할 생각은 차마 못한다.

‘자수정 방패에 대한 질문은 다음 기회에 하도록 하자…’

밀짚모자를 쓰고 있는 피아로와는 대화하고 싶지 않다.

터벅터벅.

애써 피아로를 외면하며 논두렁을 가로지르는 그리드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편, 피아로의 지휘 아래 밭일 중인 21명의 유저들은 울상을 짓고 있었다.

‘빌어먹을… 마법사 랭킹 55위인 내가 농사나 짓고 있어야하다니.’

‘검을 휘둘러야할 내가 호미질을….’

현재 피아로에게 붙잡혀 있는 21명의 유저들은 하나 같이 레벨이 높았다. 대부분이 200후반 레벨이었다.

큰 뜻을 품고 템빨단에 가입하기 위해서 레이단을 찾아온 이들이지만, 그들은 공교롭게도 레이단에 입장할 수가 없었다.

웬 정신 나간 농부에게 붙잡힌 까닭이었다.

그 정신 나간 농부란 당연히 피아로였다.

검성을 꿈꿨던 과거에는 강자와의 싸움을 즐기며 고레벨 유저들의 발목을 붙잡았던 그가, 전설의 농부가 된 지금은 다른 이유에서 유저들의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나는 레이단을 최고의 농업 도시로 발전시킬 것이다.”

하지만 행정관 라빗이 예산을 늘려주지 않음이 문제였다.

특히 인력이 부족했다.

부족한 인력?

알아서 보충하는 수밖에.

“어허! 호미질은 그리하는 게 아니라니까!”

“…하아.”

피아로에게 붙잡힌 채 혹사당하는 유저들은 한숨만 쉴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묵묵히 밭일에 매진하는 이유는 퀘스트의 보상이 탐났기 때문이다.

<즐겁고 신나는 수련!>

★히든 퀘스트★

레이단의 농부 피아로와 함께 밭일을 즐기세요. 그와 함께한다면 당신은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3주 동안 피아로의 명령을 철저히 수행.

퀘스트 클리어 보상:모든 능력치 +10. 스킬 <농사> 생성.

크라우젤, 데미안이 획득했던 히든 퀘스트에 비하면 보상이 다소 낮다. 하지만 그건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의 이야기고, 일반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올 스탯 +10이라는 퀘스트 보상의 가치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레이단에는 미친 농부가 있어. 그는 네게 다짜고짜 싸움을 건 뒤에 너를 두드려 팰 거야. 이때 도망치지 마. 일단 맞아. 그 뒤에 이어질 시련까지 견뎌낼 수 있다면, 너는 달콤한 과실을 맛볼 수 있을 거야.”

인터넷에 별 해괴한 소문이 떠돌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단순한 괴담쯤으로 여겼지만 7대 길드원들은 사정이 달랐다.

“미친 농부…!”

레이단은 여전히 그놈에게 지켜지고 있는 건가?

통합랭킹 2위 지발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비만 오면 이마가 쑤시는 그였다.

***

레이단에 도착한 그리드가 가장 먼저 찾은 사람은 아이린도, 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라우엘이나 라빗도 아니었다.

“어라? 그리드님?”

라엘라.

월드 클래스 아이돌 출신의 아름다운 영국인 여성이다.

그리드도 한때 그녀의 팬이었다. 뛰어난 가창력과 화려한 외모 때문이라기보다는 몸매가 딱 그리드의 취향이었다. 가슴이 무척 컸다. 어떤 과일을 연상하게 만들 정도로.

“…”

“무슨 일로 저를 다 찾아주셨어요?”

언제나처럼 가슴을 빤히 쳐다보는 그리드였다.

그에 민망함을 느끼고 얼굴을 붉힌 라엘라가 황급히 용건을 물었다.

그녀의 반응에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다.

“흠흠, 이번에 내가 마법을 익혔거든. 그 마법의 위력을 정확하게 테스트해보고 싶어서.”

라엘라가 레이단에서 맡고 있는 직책은 마법사단장이다.

그녀가 총책으로 있는 이곳 마법사단 병영에는 마법의 위력을 측정할 수 있는 시설이 존재했고, 그리드는 그것의 사용을 원했다.

“마법이요?”

라엘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장장이인 그리드가 마법이라니?

“어떻게 당신이 마법을… 아! 브라함과 관련 된 퀘스트를 진행하셨다더니 설마, 브라함에게 마법을 배우신 건가요? 그가 무슨 마법을 가르쳐주던가요?”

눈을 빛내며 질문하는 라엘라에게 그리드가 숨기지 않고 대답해주었다.

“매직 미사일.”

“…아, 네.”

과연, 전설의 대마법사라고 할지언정 대장장이에게 제대로 된 마법을 가르치기는 힘들었으리라.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라엘라가 그리드를 병영 뒤편의 연병장으로 안내했다.

“파이어 볼!”

“아이스 애로우!”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가 그리드에게 구원 받았던 소수 민족, 울족.

마법에 타고난 재능이 있는 그들이 연병장 한쪽에서 수련에 매진하는 중이었다.

뿌듯한 표정으로 울족을 관찰하는 그리드에게 라엘라가 은색 허수아비를 가리켜보였다.

레이단의 연금술 시설에서 생산한 허수아비였다. 마법 저항력을 최소 0에서 최대 5,000까지 설정할 수 있는, 일종의 마법사용 샌드백이다.

“우선 마법 저항력을 0으로 설정해줘.”

허수아비 앞에 선 그리드가 요청하자 라엘라가 그에 따랐다.

“설정 했어요.”

“좋아! 매직 미사일!”

허수아비를 겨냥하고 손을 뻗은 그리드가 시동어를 외쳤다.

그러자 백색의 섬광이 앞으로 쏘아져 허수아비를 강타했다.

[대상에게 2,89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각종 칭호 효과를 등에 업고 말락서스의 망토와 흑수정 귀걸이까지 착용한 그리드의 현재 지력은 정확히 1,048이었다.

이에 따른 마력 수치는 1,258.

거기에 파브라늄에 깃든 야탄 신의 버프가 마력을 15퍼센트 상승시켜줬으니 그리드의 최종 마력은 1,447이다.

매직 미사일(강화)의 데미지 기댓값은 최대 2,894였고, 실제로 위력이 이와 같이 나왔다.

라엘라가 깜짝 놀랐다.

‘의외로 위력이 뛰어나네? 마력을 증폭시켜주는 아이템을 착용 중이신 건가?’

대장장이들은 지력에 스탯을 투자하지 않는다.

라엘라는 그리드의 지력을 최대 400대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력 400대의 유저가 매직 미사일Lv.1로 발휘할 수 있는 데미지 기댓값은 매우 미미했다.

한데 그리드의 매직 미사일은 그 위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라엘라에게 그리드가 요청했다.

“허수아비의 마법 저항력을 최대치로 올려줘.”

최대치라면 5,000이다.

어지간한 보스 몬스터들조차도 이만한 마법 저항력은 갖추지 못한다. 매직 미사일 따위는 완벽하게 무력화시키고도 남는 수치였다.

“데미지가 아예 안 박힐 텐데요.”

단언하는 라엘라에게 그리드가 재촉했다.

“어서.”

‘무의미한 실험인데.’

라엘라는 그리드가 마법을 익혔답시고 너무 들뜬 나머지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여겼다.

그리드가 실망하는 모습을 상상하고 안쓰러움을 느낀 그녀가 허수아비의 마법 저항력을 5,000으로 설정했다.

그리고 잠시 후.

[대상에게 2,894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무, 무슨…!”

라엘라가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그리드의 매직 미사일, 대상의 마법 저항력을 100퍼센트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한 마디로 사기다.

너무 놀라 딸꾹질을 시작한 라엘라 곁에서 그리드는 나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냥이나 레이드에서는 별 효율이 없겠지만.’

생명력 최대치가 만 단위에 불과한 유저들을 상대로는 큰 위력을 발휘할 터.

발동 시간 1초, 재사용 대기 시간 5초.

PvP에서 회심의 한 수로 작용할 마법을 확보했다.

한층 더 강해짐을 깨달은 그리드의 입가로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여태까지 없던 형식의 손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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