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22화
브라함 에슈발트.
시조 베리아체의 아홉 직계 중 하나로서 지공(智公)이라는 이명을 지녔던 존재다.
일족 중 가장 영리했던 그가 어느 날 깊은 의문에 빠졌다.
‘야탄 신께서는 우리의 무력과 야욕이 강하다하여 나태의 저주를 내리셨지만, 왜지?’
야탄 신은 파괴적인 욕망을 지녔다.
그의 바람은 빛의 여신 레베카에게 축복 받는 모든 존재의 파멸이었다.
그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절대적인 힘과 잔혹성이었고, 그에 적합한 종족이 바로 뱀파이어였다.
뱀파이어야말로 야탄 신의 바람을 이뤄줄 강력한 패인 것이다.
한데 나태의 저주를 내림으로서 힘을 봉인시키다니?
납득할 수 없는 처사다.
더군다나,
‘대악마들에게는 아무런 금제도 내리지 않았으면서 왜 굳이 우리들에게만?’
구린내가 난다.
고약한 악취를 맡은 브라함은 야탄 신에 대해서 보다 깊이 탐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려 483년이라는 세월에 걸쳐서 한 가지 사실을 밝혀냈다.
야탄 신의 파괴 본능은 항시 유지되는 것이 아니며, 일정 주기에만 발현된다는 사실이었다.
‘인간들의 야욕이 극에 달하고 분쟁이 끊이질 않아 세상에 혼돈이 찾아올 경우.’
즉, 레베카 여신이 더 이상 세상을 통제할 수 없게 될 경우.
그때야 비로소 야탄 신의 파괴 본능이 발휘된다.
‘이때 야탄 신이 나서서 세상을 멸하고, 또 다시 레베카가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는 식이었나.’
야탄과 레베카.
표면적으로는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두 신이 사실은 협력관계였던 셈이다.
“큭큭… 우리 모두가 신들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던 게로군.”
야탄의 피조물들과 레베카의 피조물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서로를 증오하며 살육을 벌이는 중이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됐다.
한데 정작 야탄과 레베카는 세상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협력자 관계였다고?
브라함은 극심한 배신감에 휩싸였다.
태생적으로 타고났던 야탄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러다가 문득, 본래는 대악마 중 하나였던 시조 베리아체가 지옥으로부터 추방되어 인간계로 쫓겨난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어머님께서도 나와 같았던 게다.’
영리한 베리아체 또한 야탄의 실체를 알게 됐을 터.
그녀의 성격상 야탄을 대놓고 비난하고도 남았고, 그 결과 나태의 저주를 받음과 동시에 지옥에서 추방당했을 공산이 크다.
‘반면 다른 대악마들은?’
야탄의 실체를 알고도 그저 복종하는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모른 채 꼭두각시 노릇을 하는가?
‘어찌됐든 관계없다.’
브라함이 원하게 된 것은 오직 하나였다.
‘나는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겠다.’
시조 베리아체는 포식의 악마였다.
그녀의 피를 이은 뱀파이어들 또한 당연히 포식을 갈망했다.
그중에서도 브라함은 지식의 포식을 원했다.
하지만 나태의 저주 탓에 하루 중 대부분을 잠만 잤으니 포식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위대한 신께 깊은 뜻이 있어 우리에게 저주를 내렸던 거라면.’
수긍하고 포식의 욕구를 억누르며 저주를 달게 받았을 터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애초에 신은 없었다.’
야탄.
즉, 여태껏 신이라 믿어왔던 대상은 생각처럼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기계처럼 수동적인, 그저 세상의 섭리를 위해 존재할 따름인 하나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그깟 존재를 섬길 이유도, 그깟 존재가 내린 시련을 감내할 이유도 하등 없다.
‘야탄이여, 네놈이 내린 저주를 극복하고 나는 내 본능에 충실하겠다.’
무수한 지식을 축적하여 무상한 존재가 되리라!
다짐한 브라함은 그날부터 세상의 모든 학문과 마법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수백 년에 걸쳐서 지식을 쌓았고 온갖 종족을 피험체로 삼아 마법 연구에 매진했다. 피험체 중에는 일족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최악의 사태의 발단이 되었다.
***
“브라함!! 네놈을 죽여 버리겠다!!”
연인의 주검을 품에 안은 뱀파이어가 피눈물을 흘리며 소리쳤다.
시조 베리아체의 아홉 번째 자식, 엘핀스톤이었다.
“감히 레아를…!! 네놈이 레아를!!!”
자신의 연인이 연구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사실에 엘핀스톤은 분노를 금치 못하였다.
격분하는 그에게 브라함이 물었다.
“형제여, 너는 마지막까지도 나의 탐구심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내 탐구심의 근원이 무엇인지 궁금하지도 않은가?”
“궁금하지도 않고 이해할 수도 없다!! 강력한 힘을 타고나고도 굳이 마법을 연구하고, 심지어 일족을 희생시키는 네놈의 괴이한 행태를 그 누가 이해할 수 있겠느냐!! 네놈은 단지 미쳤을 뿐이다!!”
“…너 또한 그리 말하는가.”
나태의 저주 탓이다.
이들은 어떤 현상에 대한 의문을 품지 않는다. 만사를 귀찮아하고 당장 눈앞에 닥친 일에만 간신히 대처할 뿐이다.
“우리 일족에게 존재 가치란 없다.”
단언하는 브라함이었다.
“형제들이여, 새겨 듣거라. 너희들은 너희가 가축으로 취급하는 인간들보다 못한 존재다. 너희 따위에게 내 발목을 붙잡을 권리는 없다.”
“자꾸 궤변을 늘어놓지 마라!”
블러드 필드를 전개하고 이야루그트를 소환한 엘핀스톤이 브라함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애초에 상대가 못되었다.
브라함은 공작급 진혈족인 반면 엘핀스톤은 백작급 진혈족에 불과했으니 힘의 차이가 극명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브라하아아암!!!”
“처량하군.”
피를 토하며 절규하는 엘핀스톤의 모습은 슬프고도 우스웠다.
원수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인 이 순간에도 밀려오는 졸음을 견뎌내지 못하고 눈꺼풀을 껌뻑였으니 말이다.
“브라함.”
실소하고 있는 브라함의 눈앞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시조 베리아체였다.
“어머님…”
브라함이 동요했다.
야탄에게 직접적인 저주를 받아 수백 년씩 잠을 자던 베리아체가 하필이면 이때 깨어나다니?
‘본래 50년 후에나 깨어나셔야 하는 게 아니었던가?’
혼란스러워하던 브라함이 문득, 베리아체로부터 이질감을 느꼈다.
‘생명력이 느껴지질 않는다.’
베리아체가 죽어가고 있었다.
영생을 누려야할 그녀가 왜?
‘저 계집…!’
브라함이 베리아체의 곁에 서있는 소녀를 뒤늦게 발견했다.
베리아체와 꼭 닮은 흑발의 소녀였다.
“열 번째 형제인 겁니까?”
질문하는 브라함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녀로부터 느껴지는 마력이 베리아체의 마력을 초월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어머님! 당신께서는 자신을 넘어서는 존재를 출산하신 겁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일족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금기를 어겼구나.”
“어머님, 그건.”
해명하려던 브라함이 입을 다물었다.
오로지 탐욕을 충족하기 위해서 일족을 희생시킨 내 행위, 어떤 말로도 용서받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았기에.
베리아체가 증오의 시선을 보내왔다.
“영특한 너를 내 누구보다도 아꼈거늘.”
“…”
브라함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본디 영생을 누리는 것이 당연한 베리아체의 얼굴에 주름이 지고 있음을 목도한 까닭이었다.
이 모든 게 저 소녀 때문이리라!
이를 간 브라함이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소녀, 마리로즈의 수급을 취하려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초면부터 실례네.”
“……!”
마리로즈의 힘은 절대적이었다.
갓 태어난 주제에 일족 중 최강의 반열에 올라있던 브라함을 가뿐히 제압했다.
빠드득!!
“크윽…!”
낚아 채인 손목을 그대로 뽑혀나간 브라함이 신음을 토했다.
그를 바라보는 베리아체의 시선에는 이제 증오마저도 남지 않았다. 무심할 따름이었다.
“포식을 갈망하는 우리 일족이 서로가 서로를 해할 경우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리라 내 분명히 경고했을 터다. 한데 너는 내가 잠든 사이 여러 일족을 해한 것으로 모자라, 지금은 또 내가 보는 앞에서 형제를 해치려 드느냐? 내 너를 벌하여 본보기로 삼겠다!”
“……!”
브라함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마리로즈의 작은 송곳니에 목덜미를 깨물린 순간, 체내의 혈액이 모조리 빨려나가며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통이 엄습해왔기 때문이다.
이날 브라함은 영생을 잃었다. 그리고 일족으로부터 추방당했다.
이후 100년.
인간으로 정체를 감춘 브라함은 마법의 연구를 계속하여 나태의 저주를 극복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제는 유한한 생명이 문제였다.
보다 많은 지식을 포식하려면 영생을 되찾아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하여 브라함은 영생을 되찾는 마법을 탐구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대마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결국 일생 말년까지 영생의 마법을 완성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차선책이기는 하지만 부활의 마법을 완성시켰으니까.
***
과거를 회상해보던 브라함이 현실로 되돌아왔다.
그의 눈앞에는 인간 사내 그리드가 서있었다.
[네게 제작을 부탁했던 혼의 그릇. 그것만 있다면 나는 지금 당장이라도 부활할 수가 있다. 앞으로 몇 번이고 부활을 반복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너는 야탄의 축복을 받지 못하여 혼의 그릇을 제작할 수 없다고 했지?]
“그래. 야탄교와 적대하고 있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이 간청했다.
[그렇다면 내게 네 몸에 빙의할 수 있는 권한을 다오.]
“빙… 뭐?”
그리드가 귀를 의심했다.
빙의라니!
귀신이 몸에 깃드는 현상을 뜻하지 않는가!
3류 공포 영화의 단골 소재인 그것을 나보고 직접 체험하라고?
“시, 싫은데?”
그리드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싫어한다.
단칼에 거절하는 그를 브라함이 설득하였다.
[네 몸에 해악을 끼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단지 야탄교로 날아가 야탄의 종들을 때려눕히고 파브라늄에 야탄의 축복을 받아오는 것만이 목적이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이야?”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오는 그리드에게 브라함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만약 내가 다섯 살짜리 꼬마의 육신만 차지할 수 있어도 야탄교를 박살내는 일 따위 우습다.]
과연, 염룡 트라우카와 맞서 싸우고도 살아남았던 전설의 대마법사다운 자신감이다.
[내게 네 육신을 단 반나절만 빌려준다면, 나는 내가 소유한 파브라늄 전부를 네게 주겠다. 또한 마법 한 가지를 가르쳐주지.]
“이미 한 번 죽은 사람이 그렇게까지 부활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뭐지?”
브라함의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지식을 탐구하고 싶다. 불사의 존재가 되어 영원히!]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두 번째 전직 퀘스트 <대마법사의 부활> 내용이 갱신되었습니다.]
<대마법사의 부활>
대마법사 브라함은 탐욕스러운 존재입니다. 완전한 이치를 깨우치기 전까지 지식의 탐구를 멈출 생각이 없습니다.
이는 그가 타고난 본능으로서 비난할 수 없는 개념의 것입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이고 파브라늄에 야탄 신의 축복을 받아 혼의 그릇을 제작할 것.
퀘스트 클리어 보상:마법 한 가지를 습득. 대륙 각지에 흩어져 있는 모든 파브라늄의 획득.
‘파브라늄은 총 28개라고 했다.’
그중 현재 그리드가 소유한 파브라늄은 총 11개였다.
‘리파엘의 창을 완벽하게 재현하는데 필요한 파브라늄은 약 18개.’
모든 파브라늄을 획득할 수만 있다면 리파엘의 창을 제작하고도 파브라늄이 무려 10개나 남는 것이다.
아니, 애초에 굳이 리파엘의 창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
28개의 파브라늄을 전부 활용한다면 그보다 뛰어난 아이템을 창조하여 제작할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 그리드의 관심을 끄는 보상은 파브라늄보다도 마법에 있었다.
‘대장장이인 내가 정말로 마법을 습득할 수 있는 건가?’
비록 1개의 마법이라고는 하나 무려 대마법사가 가르쳐주는 마법이다.
필시 엄청난 마법을 가르쳐줄 것이 분명했다.
확신하고 전율한 그리드가 변경 된 퀘스트를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좋아! 당신의 요청을 받아들이겠다!”
그와 동시였다.
[훌륭한 선택이다!]
소리친 브라함의 영혼 조각이 그리드에게 날아들었다.
[브라함이 당신에게 빙의를 시도합니다. 받아들이겠습니까?]
“당연하지!”
대답과 동시에 그리드의 몸이 빛으로 휩싸였다.
[대마법사 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였습니다.]
[클래스가 파그마의 후예에서 대마법사로 변경됩니다.]
[지금부터 당신의 몸은 브라함의 뜻대로 움직이게 됩니다.]
“와우…”
사태를 처음부터 지켜보고 있던 일행이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브라함의 영혼을 받아들인 그리드의 상태창이 믿을 수 없는 수치를 보이고 있었던 까닭이다.
그리드(대마법사)
Lv.545
생명력:858,310
마나:13,965,000
당사자가 아닌 이상 공격력, 마력, 방어력, 스킬 목록 등의 상세 정보는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레벨과 생명력, 그리고 마나의 수치만 봐도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하리라고 유추해볼 수 있었다.
혀를 내두르고 있는 일행들에게 백발, 적안의 그리드가 말했다.
“다들 그동안 고마웠다. 파브라늄의 확보는 이로서 무의미해졌으니 먼저 레이단으로 돌아가 있도록 해.”
파앗!
그리드의 몸이 빛과 함께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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