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18화
그리드 파티는 엘핀스톤 레이드에 실패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엘핀스톤이 너무 강하다.
템빨단원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였을 때 유라만큼은 부정했다.
그리드라면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결과를 만들어 내리라 믿었다.
이는 호감으로부터 비롯된 근거 불충분의 믿음이 아니었다.
데빌 슬레이어로 전직하고 레전드리 클래스의 위력을 실감하였기에 도출할 수 있는 결과였다.
“강적과의 사투는 당신께 도움이 되었나요?”
믿음에 화답하듯 레이드를 성공시킨 그리드.
그에게 미소 지은 유라가 물었다.
대답하는 그리드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래, 아주 큰 도움이 됐다.”
그리드의 의식 속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이 하나 있었다.
다름 아닌 헬가오다.
검성 뮐러에게 육신을 봉인 당하고 영혼만이 남은 대악마.
그런 주제에 놈은 무척 강했다. 화석을 채취하지 않는 이상 놈을 쓰러뜨리는 것은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헬가오에 버금가는.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강한 엘핀스톤을 쓰러뜨린 경험을 얻었다.
‘조만간 헬가오가 다시 출몰하게 된다면.’
그때는 과거와 다를 것이다.
화석이라는 요소에 의지하지 않고도 놈을 레이드해낼 것이고, 종국에 이르러서는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할 것이다.
‘반드시 지존이 된다.’
스스로의 무력함을 핑계 삼아 동료들을 희생시키는 일, 두 번 다시는 원치 않는다. 더러운 기분은 한 번 느낀 것만으로 족하다.
재차 다짐하는 그리드의 표정은 이전보다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어느덧 28세를 바라보는 청년의 성장은 멈추지 않고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가 나이 서른을 넘어 완숙해질쯤이면 얼마나 매력적일까?
상상해본 유라의 가슴이 작게 뛰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시선이 게슴츠레했다.
“근데 너 왜 그렇게 레벨이 낮냐? 통합랭킹 5위가 무슨 203레벨밖에 안 돼? 설마 너, 여태까지 사람들한테 사기치고 다녔던 거야?”
이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이 남자는 어떤 말을 뱉기 전에 생각이라는 여과 과정을 거치지 않을 때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이조차도 좋게 받아들이는 유라였다.
가식이나 허세를 부리는 남자들보다야 차라리 단순한 남자가 낫기 때문이다.
“제 클래스를 확인해 보세요.”
“클래스? 흑마법사잖아?”
길드원 정보에서 유라의 레벨에만 주목했던 그리드가 뒤늦게 클래스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경악했다.
“데빌 슬레이어? 이게 뭐야? 응? 헐? 레, 레전드리…!”
제1회 국가대항전이 끝나고 기자회견장에서 임철호 회장이 밝힌 바 있다.
레전드리 클래스는 단 9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한데 그중 무려 2개의 레전드리 클래스가 템빨단 소속이 되었다.
그리드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진짜로 겁나게 환영한다!!”
마음 같아서는 포옹이라도 해주고 싶은 그리드였다.
하지만 자칫 성추행범으로 고소당할까봐 자제했다.
이후.
파티를 맺은 그리드와 유라, 후로이가 레이단을 떠났다. 파브라늄 원정대와 합류하기 위함이었다.
파브라늄 확보 퀘스트의 잔여 시일은 앞으로 84일.
최상위 난이도를 보유한 13번 도시는 이미 클리어한 상태다.
전력이 한층 더 강해진 원정대의 파브라늄 확보는 수월할 것이었다.
***
13번 뱀파이어의 도시.
그리드가 엘핀스톤과 목숨을 맞바꾼 덕분에 살아남은 일행은 도시 곳곳을 수색하는 중이었다.
이번 원정의 궁극적 목표인 파브라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쉽게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도시의 규모가 썩 작지도 않을뿐더러 너무 어두웠다.
“횃불 벌써 다 떨어졌네.”
“어차피 쓸 일 없을 줄 알고 몇 개 안 챙겨왔잖아.”
“아니, 제드노스. 넌 3차 전직까지 한 마법사가 무슨 라이트 하나 못 켜냐?”
“전 바람 마법만 배웠으니까요.”
“어휴, 기본 마법은 속성과 관계없이 배워놨어야지.”
“저는 계속 한우물만 팔 겁니다. 이렇게 계속 바람 마법만 배우다보면 히든 클래스를 얻게 될지 또 누가 알아요?”
“크응… 지금이라도 마이너를 보내 달라고 할까? 차라리 그게 빠르겠는데.”
“조금만 더 찾아보고.”
약 4시간이 지났다.
둘씩 짝지어 흩어진 일행이 뱀파이어 잔당들을 해치우며 수색하던 도중 깊은 동굴을 발견했다.
입구가 암벽에 가리어져 딱 봐도 은밀하고 수상쩍은 곳이었다.
“여긴 거 같은데?”
반트너가 앞장섰다.
그의 뒤를 따른 일행 전원이 동굴 안으로 진입한 순간이었다.
[침입자를 감지한 미궁의 수호자가 오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함정이 발동합니다.]
파팟! 파파파파팟!!
콰르르르릉!!
천장에서부터는 화살의 비가 떨어졌고 지면에서는 가시가 솟아났다.
벽면에서 날아오는 체인 라이트닝의 위력은 어지간한 마법사가 직접 전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과거, 그리드가 대처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어 불사 패시브를 발동시켰던 브라함의 함정보다 수준이 더 높았다.
하지만 현재의 템빨단원들을 위협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감이 있었다.
“타이탄.”
쿠워어어!!
반트너가 거인의 환영을 소환했다. 투사체를 막아냄과 동시에 파티원 전원의 물리 방어력을 상승시켜주는 스킬이었다.
쩌정! 쩌저저저정!!
쏟아지는 화살 비 대부분이 거인에게 가로막혀 무력화 되었다.
지면에서 솟구친 가시들이 발바닥을 찔러왔지만 거인이 상승시켜준 방어력 덕분에 치명상은 피할 수 있었다.
“바람 장막!”
체인 라이트닝은 제드노스의 마법에 기세가 누그러졌다.
덕분에 통구이가 되는 일을 면할 수 있었던 일행이 함정으로부터 빠져나왔다.
그들을 2마리의 초대형 골렘이 기다리고 있었다.
“와, 엄청 크네. 라인하르트에 쳐들어왔던 고대의 병기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은데?”
“이 골렘…”
지슈카와 반트너는 골렘이 낯이 익었다.
생각해본 두 사람이 이내 떠올렸다.
“그리드가 파브라늄을 얻을 때 싸웠던 골렘과 닮았어.”
“훨씬 더 크고 강해보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곳에 파브라늄이 있는 게 확실해졌군.”
“좋아, 가볍게 쓰러뜨리자고.”
2마리 미궁의 수호자!
놈들은 과거 그리드가 상대했던 녀석과 비교하면 레벨이 최소 150 이상 높았다. 라인하르트를 침공해왔던 고대의 병기들보다도 강했다.
하지만 템빨단 또한 성장했다. 템빨단의 정예들을 상대로 놈들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제아무리 능력치가 높아봤자 패턴이 단순한 보스 따위, 초월적인 컨트롤 실력을 발휘하는 최상위 랭커들을 위협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방어력 엄청 높네.”
“천천히 옭아매서 다리부터 집중 공략해. 일단 쓰러뜨려놓고 밟자.”
“제드노스는 마나 핵을 찾아줘. 마나 핵만 찾으면 내 발검술로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다.”
쿠르르르르르!!
전투가 시작되고 20여분 후.
높은 방어력과 생명력으로 버티는가싶던 미궁의 수호자들이 결국 쓰러지고 말았다.
놈이 드롭한 온갖 광물들을 확인한 일행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드가 기뻐할 모습을 상상하자 기분이 좋았던 까닭이다.
그들의 뇌리로 누군가의 음성이 전달되었다.
[이젠 별 개나 소가 내 심기를 건드리는구나.]
“개?”
“소?”
“우리가?”
20억 유저 중 최소 20번째로 강한 우리들에게 개나 소라니?
“그렇게 말하는 네놈은 누구지?”
으르렁거리며 질문하는 반트너에게 음성이 답했다.
[내가 바로 대마법사 브라함이다.]
브라함은 기대했다.
내 이름을 듣고 겁에 질려 까무러칠 미개한 놈들의 반응을 말이다.
하지만 템빨단원들이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과거의 망령이었군.”
“함정 설치해놓은 게 너였냐? 성격 한 번 음흉하고 치졸하네.”
“죽었으면 곱게 저승으로 떠날 것이지, 왜 이승에 남아서 사람들한테 해를 끼치고 그래?”
“파브라늄이나 내놔.”
[이놈들이…!]
브라함은 침입자들이 그리드의 부하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세이렌에 머물고 있는 유페미나가 레이단에 머물던 시절, 무무드의 오브를 통해서 이들의 모습을 엿봤었던 덕분이다.
이들의 존재 자체가 브라함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더니!! 네놈들도 파그마의 후예와 마찬가지로 제정신이 아니로구나!!!]
그리드, 그 빌어먹을 도둑놈은 파브라늄을 몇 개나 훔쳐가 놓고도 혼의 그릇을 제작해주지 않고 있다.
심지어 이제는 부하까지 보내어 강도질을 시도하는 중이다.
결코 용서할 수 없는 행위다.
[이참에 본때를 보여주마!]
이놈들을 모조리 죽여 버린다면, 결국엔 그리드가 직접 찾아올 터!
그리드와 재회하기 위해서라도 브라함이 비장의 무기를 꺼냈다.
[무무드!]
콰작!
지면으로부터 낡은 관이 솟구쳐 올랐다.
이제 관이라면 지긋지긋한 템빨단원들이 혀를 찼다.
“또 뱀파이어야?”
“뭔 마법사가 뱀파이어를 소환하냐.”
템빨단원들은 관속에서 등장할 존재가 뱀파이어일 것이라 단정 지었지만 크나큰 착각이었다.
끼익.
낡은 소리를 내며 열린 관속에서 등장한 것은 뱀파이어가 아닌 해골이었다.
“스켈레톤?”
생뚱맞다.
Satisfy에서 스켈레톤은 뼈를 매개체로 소환되는 것이다. 관 속에 보관하는 스켈레톤이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스켈레톤의 손에 들려있는 오브를 확인한 제드노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무무드…!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라 싶더니, 브라함의 수제자 입니다!”
“그런데?”
“저 해골, 리치라고요!”
“뭣!”
리치는 일개 스켈레톤과 차원이 다른 존재다.
무한한 마력을 소유하였으며, 대륙의 10대 마법사를 압도한다는 풍문이다.
긴장하는 템빨단원들을 확인한 브라함의 영혼이 이죽거렸다.
[강요는 강자의 특권이다. 내게 파브라늄을 내놓으라고? 같잖은 녀석들, 주제파악 못하고 함부로 지껄인 벌을 내려주마.]
키야아아아-!
리치가 기성을 토했다.
순간 집약되는 마력의 수준이 엘핀스톤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일단 피하자. 그리드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께 오는 편이 좋겠다.”
“그래, 쓸데없는 오기 부릴 필요 없지. 안전하게 가자.”
엘핀스톤 레이드 후 전원 지친 상태다. 위험성 높은, 예정에도 없던 리치 레이드는 아무런 메리트도 없었다.
빠르게 상황을 판단한 템빨단원들이 물러나려하는 순간이었다.
뚜벅뚜벅.
거대한 동굴의 유일한 통로로부터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그리드인가!’
그리드는 언제나 멋지게 등장한다.
동료들이 위기에 처한 순간 나타나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활약을 펼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묘한 기대감을 품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드디어 찾았다. 리치 무무드.”
“……!”
발소리의 주인을 그리드라고 생각했던 템빨단원들.
그들의 밝아졌던 얼굴이 삽시간에 일그러졌다.
발소리 주인의 정체가 상상조차 못한 인물이었던 까닭이다.
“뭐 이렇게 게스트가 많아?”
리치와 대치하고 있는 템빨단원들의 앞에 나타난 사내.
연녹색 올백 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템빨단원들을 훑어보더니 실소했다.
“3차 전직까지 했다는 놈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꼴 보게. 애새끼들도 아니고, 혼자서는 할 줄 아는 일이 없냐?”
하나 같이 명성 높은 템빨단원들에게 이토록 함부로 지껄일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미치지 않은 이상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 화려한 치장의 사내는 별명부터가 미친 놈. 혹은 미친 개였다.
“아그너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