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17화
대형 스크린 속 엘핀스톤이 검정 연기로 흩어졌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결과였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윤상민 이사와 애슐리 팀장에게 임철호 회장이 손을 내밀었다.
“자, 어서들 내놓으시게.”
재촉에 못이긴 두 사람이 5만원권 지폐를 1 장씩 꺼냈다.
“크윽… 내 피 같은 용돈이…”
“이번 주에는 치킨 한 마리도 못 사먹겠군…”
윤상민 이사와 애슐리 팀장은 국내에서 손꼽히는 고액 연봉자다.
하지만 둘 모두 가계에 엄격한 부인을 둔 탓에 소량의 용돈만 받고 생활하는 신세였다.
공처가인 그들에게 있어서 내기의 패배로 인해 생긴 지출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설마 내기에서 질 줄이야…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리드 파티가 엘핀스톤 레이드를 성공하지 못하리라 확신했다는 뜻이다.
임철호 회장이 미소를 지었다.
“그리드가 최초의 블러드 필드를 저지한 것이 승패를 갈랐지. 만약 레이드 초기부터 블러드 필드가 전개됐더라면 템빨단원들이 그렇게까지 활약하지 못했을 테니까.”
“공감합니다.”
그리드의 솜씨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300레벨을 달성하면서 새로이 습득한 <아이템 합체> 스킬의 발동 대기 시간만 짧았다면, 어쩌면 전투 특화 레전드리 클래스와 비견되는 전투력을 발휘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상정 범위를 아득히 초월하는 강함이다.
그리드는 임철호 회장이 말한 ‘기적을 일으키는 5인’에 포함될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한데 그리드… 좀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흑화 상태로 사망하지 않았습니까?”
난색을 표하는 윤상민 이사에게 임철호 회장은 웃어줄 따름이었다.
“그리드도 슬슬 새로운 세상을 경험해봐야지.”
그동안 그리드의 활동 반경은 너무 좁았다. 인간계. 그것도 서대륙의 에트날 왕국 내에서만 활동했으니까.
20억 유저가 즐기고 있는 Satisfy가 얼마나 넓은 세상인지 이참에 알아둘 필요가 있다.
“애초에 그곳은 그리 위험한 곳도 아니야. 대부분의 주민들은 친절하고 인간들과 다를 바가 없지.”
***
[사망하였습니다.]
과거의 그리드는 밥 먹듯이 죽었었다.
5레벨 초보자들조차 가지고 논다는 <그린 슬라임>에게 무려 4번이나 잡아먹힌 전력이 있으니 말 다했다.
그야말로 게임치의 정점이었다.
하지만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그리드에게 있어서 죽음이란 생소한 것이 됐다.
지금은 옛사람이 된 도란.
그에게 바짓가랑이를 붙잡혀 유라와 싸우게 됐을 때 이후 오래간만의 죽음이다.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죽음으로 인해 발생할 온갖 페널티부터 걱정하며 치를 떨었을 터다. 욕설은 기본으로 깔렸을 테고.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동료들의 안위부터 걱정했다.
‘다들 괜찮을까?’
엘핀스톤 레이드에 성공했는지 확신이 서질 않는다.
연살(聯殺)의 5회째 타격 때부터 정신이 혼미해졌던 까닭이다.
“상태창.”
Lv.300(11.05%)
“…핫.”
상태창을 열어 경험치 게이지를 확인한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엘핀스톤과 조우했을 당시 그리드의 경험치 게이지는 단 0퍼센트에 불과했다.
만약 엘핀스톤 레이드에 실패했다면?
당연히 레벨이 다운 됐을 터다. 하지만 지금은 도리어 경험치 게이지가 11퍼센트 차올라 있었다.
말인 즉,
“레이드는 성공했군.”
300레벨의 사망페널티는 경험치 30퍼센트의 하락인 바, 엘핀스톤으로부터 약 41퍼센트의 경험치를 얻었다는 뜻이 된다. 어마어마한 수치다. 과연 역대급 보스답다.
‘다들 무사하겠네.’
다행이다.
안도한 그리드가 문득 파브라늄을 떠올렸다.
‘놈이 파브라늄을 드롭 했으려나?’
만약 드롭하지 않았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다.
남겨진 동료들이 도시를 샅샅이 수색하여 찾아줄 테니까.
“그 동안 나는…”
사망으로 인해 아이템 내구력이 엉망이다.
특히 실패작은 합체의 여파까지 겪어 내구력이 채 10도 남아있지 않았다. 잘못하다간 영구히 소멸할 수도 있었다.
‘아이템 수리부터 해야겠군.’
몸을 일으킨 그리드가 칸의 대장간으로 향하려다가 멈칫했다.
“…여긴 어디야?”
그리드의 부활 포인트는 레이단이다.
그의 눈앞에 펼쳐질 광경은 익숙한 것이어야만 했다.
한데 어째 주변 풍경이 생소하다.
쓰러질 듯 기울어져 있는 판잣집 20여 채가 전부인 작고 고요한 마을.
그 중심부에 오로지 그리드 혼자만이 서있었다.
“…?”
당황한 그리드가 지도를 펼쳤다. 하지만 지금 그리드가 서있는 곳은 지도 어디에도 표기되어 있지 않는 장소였다.
“이게 대체 무슨 경우야?”
눈살을 찌푸린 그리드가 마을을 샅샅이 살폈다.
마을에는 그 흔한 잡화점 하나 없었다. 단지 판잣집 20여 채와 마카롱 나무 다섯 그루, 그리고 작은 개울가 하나 있는 것이 전부였다.
‘사람조차 없고.’
달콤하고 고소한 마카롱을 하나 따서 입에 넣은 그리드가 생각해봤다.
어째서 레이단이 아닌 이곳에서 부활한 걸까?
버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Satisfy에서 버그가 발견 됐다는 소식은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킁…”
그리드가 생각해봤자 지금 처한 상황을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단 어서 레이단으로 돌아가야겠군.’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 위치를 알아야만 한다.
그리드가 길드원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지금 내 위치 파악되는 사람 있어?}
[길드 말 보내기에 실패하였습니다. 지옥은 인간계와 단절 된 차원입니다.]
“…지옥?”
높고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다니고 따스한 미풍이 휘감기는 이곳이 지옥이라고?
지옥은 보다 어두침침하고 용암이 들끓는 곳이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이런 염병!!”
결국 성깔을 드러낸 그리드가 이를 갈았다.
“여기가 지옥이라니! 내가 지옥에 떨어지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평소에 착하게 살… 아니, 악마력 수치에 보다 신경 썼을 텐데!
‘제국과 교황청, 그리고 윈스톤까지 다녀오면서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인 게 문제야.’
현재 그리드의 악마력 수치는 401이었다.
악마력이 너무 높아 지옥에 떨어진 것이라 확신한 그리드가 초조함에 입술을 깨무는 그때였다.
“저들은…?”
마을 어귀로 일단의 무리가 진입하고 있었다.
한데 모습들이 하나 같이 이상하다.
어떤 남자는 이마에 뿔이 솟아있었고, 또 어떤 여자는 피부가 보라색이었다.
사지 멀쩡하게 달려있기는 하지만 인간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종족이었다.
‘마족?’
아이템 내구력도 엉망인 마당에 싸워서야 골치 아프다.
도망치려는 그리드를 발견한 마족들이 달려왔다.
어찌나 빠른지 그리드는 도주에 실패하고 말았다.
‘젠장… 결국 싸워야겠군. 근데 마족도 밭일을 하나?’
마족들은 하나 같이 손에 농기구를 쥐었고 옷이 흙투성이였다.
평소의 피아로를 보는 듯하다.
마족들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 누구야?”
“여행자인가…? 여행자가 이런 오지까지 찾아올 이유는 또 뭐지?”
“…?”
마족들은 그리드를 경계하지도 적대하지도 않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대했다.
그리드로서는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마족은 인간을 적대하지 않던가?’
의문을 느끼던 그리드가 문득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창백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몸 곳곳을 살폈는데 온 몸이 그렇다.
그리드가 깨달았다.
‘흑화가 풀리지 않았다.’
그렇다.
지금의 그리드는 인간이 아닌 반마 상태였다.
하여 마족들이 동족으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생소한 식물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한쪽에 내려놓은 늙은 마족이 그리드에게 인자한 표정을 지었다.
“왠지 굳어있군. 긴장하지 말게. 마을에 손님이 찾아온 것은 근 100년 만의 일인지라 다들 신기해하는 것이지 딱히 추궁하는 게 아니야. 행색을 보아하니 꽤나 고단한 여행을 했나본데 어떤가? 식사라도 들지 않겠는가? 보다시피 가난한 마을이라 아투라 풀을 끓여먹는 것이 고작이네만.”
“…풀? 풀을 먹는다고요? 인간을 잡아먹지 않고요?”
눈을 껌뻑이며 질문하는 그리드였다.
그에 마족들이 배를 잡고 웃었다.
“젊은 친구가 재미있는 농담을 다 하는군.”
“인간을 어떻게 잡아먹어?”
“우리가 인간에게 잡아먹히지 않으면 다행이지.”
“…?”
이들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어째 이상했다.
그리드가 직접 보거나 이야기로 들어 알고 있는 마족들과는 성향이 많이 다른 듯하다.
‘허름한 동네에 살고 있는 것도 그렇고… 이들은 마족 중에서도 약한 종족인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헬스미스라는 이름의 체구 좋은 마족이 다가와 손목을 낚아챈 까닭이다.
‘인간이라는 걸 들켰나?’
긴장하는 그리드의 손을 유심히 살펴본 헬스미스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은살의 형태를 보아 자네 또한 대장장이로군? 이것 참 신기한데? 마족 중에 나 외의 대장장이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거든.”
‘대장장이?’
마족 중에도 대장장이가 있었나?
‘설마.’
이자가 야구르트인가 뭔가 하는 그 마검을 제작한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흑화의 지속 시간이 1분 남았습니다.]
사망해도 해제되지 않은 흑화.
혹 어떤 문제가 생겨서 영영 유지되는 것인 줄로만 알았더니 그건 또 아니었나보다.
‘이런.’
다행이기는 하지만 이곳에서 인간으로 변했다가는 어떤 변을 당할지 몰랐다.
의외로 사람 좋은 마족들이었기에 그리드가 요청해보았다.
“혹시 인간계로 가는 방법 아십니까?”
마족들이 절망적인 말을 했다.
“그야 우리도 모르지. 전지전능하신 대악마님들조차도 인간계에는 자유로운 출입이 불가능하신데 우리처럼 하찮은 자들이 어찌 그런 방법을 알겠는가?”
“인간계는 왜 가려고? 당신, 아까부터 좀 이상한데?”
“뭔가 좀 수상해.”
마족들이 슬슬 그리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엿 된 건가?’
그리드가 마른 침을 삼켰다.
한데 그때, 그리드의 펫 인벤토리로부터 노에가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냥! 고향의 냄새다옹!!”
짧은 다리를 활짝 펼치며 등장한 녀석이 킁킁, 지옥의 향기를 맡으며 꼬리를 살랑거렸다.
환한 표정을 보면 어지간히도 기쁜 듯하다. 덩실덩실 어깨춤이라도 출 것만 같았다.
‘귀여울 듯.’
춤추는 노에를 보고 싶다.
그리드가 생뚱맞은 생각을 하는 사이 마족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리고 있었다.
“허억! 메, 멤피스님!!”
“지옥 제일 마수님이시다!!”
노에를 보고 경악한 마족들이 소리치더니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멤피스.
지옥의 마수 중 가장 영리하고 강력한 종으로서 대악마들조차 아낀다더니 과연, 일반적인 마족들에게는 숭배의 대상과도 같은 듯싶다.
고개를 조아리는 마족들을 확인한 노에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엣헴! 봤느냐, 주인!! 이 몸이 이렇게 대단하신 것이다!!!”
그리드가 면박을 줬다.
“엘핀스톤 잡을 때는 내내 숨어있던 주제에 잘난 척은.”
“미안하다옹…”
노에가 급속도로 기가 죽었다.
귀와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녀석이 그리드를 주인이라 칭하자 마족들은 사색이 되었다.
“메, 멤피스님의 주인님이시라니!”
“저희가 귀한 분을 알아 뵙지 못하고 결례를 범하였습니다!!”
“죽여주십시오!!”
비록 마족이기는 하나 식사까지 권유해준 친절한 이들이다.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그리드가 괜찮다고 답하려는 순간이었다.
[흑화의 지속 시간이 끝났습니다.]
[악마력이 봉인되어 종족이 인간으로 되돌아갑니다.]
[평범한 인간은 지옥으로의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지옥에서 추방당합니다.]
“큭…!”
그리드의 시야가 아찔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가 다시 눈을 뜬 곳은 레이단의 부활 포인트였다.
{그리드! 괜찮아?}
{뭐야, 왜 위치가 불명으로 떴던 거야?}
길드 채팅창이 난리다.
지슈카를 필두로 파브라늄 원정대 동료들이 연신 떠들어댔다.
얼마나 걱정하고 있었는지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엘핀스톤 레이드에 성공해서 외부와의 연락이 가능해진 건가?’
{그리드! 이것 봐봐! 엘핀스톤이 드롭한 아이템들이야!}
{진짜 대박이다! 등급 성장형 아이템이라고!! 우린 이런 아이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몰랐어!!}
“……!”
그리드가 두 눈을 부릅떴다.
동료들이 공유한 <엘핀스톤의 반지>와 <이야루그트>의 아이템 옵션을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어서 와요.”
“…유라?”
네가 왜 여기에 있냐?
라는 표정을 짓는 그리드를 보고 서운함을 느낀 유라가 뺨을 살짝 부풀렸다.
청초함의 대명사인 그녀가 이토록 귀여운 표정까지 지을 수 있다니?
유라와 나란히 서있던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이 헤벌쭉해졌다.
‘그저 예쁘면 좋아가지고… 쯧쯧, 한심한 녀석들.’
혀를 차는 그리드조차도 헤실헤실 웃고 있었다.
역시 미인의 힘은 위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