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14화
‘이게 인간의 솜씨라고?’
엘핀스톤은 무려 350년 이상 존재해왔다.
긴 세월동안 실로 수많은 인간들을 만났고, 개중에는 인간들 사이에서 천재, 혹은 용사라고 칭해지는 족속들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공통점은 열등하다는 것이었다.
엘핀스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오크보다는 조금 더 사냥할 맛이 나는 수준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 순간 인식이 바뀌고 말았다.
극한의 수혈을 반사한 것으로 모자라 눈으로 쫓을 수 없는 신속의 검술을 펼친다?
뛰어나다. 이놈은 결코 열등종이 아니다.
엘핀스톤의 얼굴이 구겨졌다.
‘브라함의 말이 사실이었나.’
내게 최초의 분노와 고통을 안겨줬던 존재, 브라함.
혈족들에게 온갖 악랄한 짓을 일삼고 결국 추방당한 그놈이 말했던 바 있다.
<마지막까지 나의 탐구심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형제들이여, 너희들은 인간보다도 못한 존재다. 너희가 가축으로 여기는 인간들조차 나태하지는 않다. 그들은 우리와 달라 항시 노력하며 발전한다. 언젠가 우리를 위협할 정도의 초월적인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것은 필시 인간일 것이다.>
‘빌어먹을 자식…!’
뱀파이어 주제에 인간의 마법을 연구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혈족들을 희생시켰던 브라함 에슈발트.
놈이 실험용 쥐처럼 써먹은 혈족 중에는 내 연인 레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큭… 큭큭…”
지난 수백 년 동안 얼마나 노력했던가?
끔찍한 기억을 잊기 위해서 보다 많은 잠을 잤고, 마음에 각인 된 상처를 지우고자 보다 많은 사냥에 열중했다.
한데 고작 인간 따위가 나를 자극함으로서 기억과 마음을 또 다시 헤집어 놓는 것이다.
‘브라함의 역겨운 얼굴을 떠올리게 만들다니.’
용서할 수 없다.
그리드를 노려보는 엘핀스톤의 시선에 절대적인 살의가 깃들었다.
“네놈의 솜씨가 제법이라지만 결국에는 인간! 내 먹잇감일 수밖에 없다!!”
쿠화하학!
엘핀스톤이 흘리고 있던 선혈이 하나의 구체로 결집되었다.
그리드를 향해서 쏘아진 그것이 이내 강력한 폭발을 발생시켰다.
블러드 익스플로전의 발현이었다.
그 위력은 대륙의 10대 마법사들이 전개하는 익스플로전의 위력을 월등히 상회하고 있었다.
‘피할 수 없다.’
폭발 범위가 너무 크다.
어쩔 수 없이 방어를 선택해야하는데, 과연 신성의 방패만으로 온전히 피해를 흡수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이를 악 문 그리드가 신성의 방패를 꺼내려는 그때였다.
“대장은 내가 지킨다!”
그리드를 감싸 안은 반트너가 마법의 위력을 대폭 감소시키는 <천겹의 방패>를 전개, 블러드 익스플로전의 위력을 반감시켰다.
퍼어어어엉!!
“크악! 아이고! 나 죽네!”
천겹의 방패조차도 블러드 익스플로전의 기세를 완전히 억누를 수는 없었다.
폭발과 함께 발생한 오염된 피를 뒤집어쓰고 중상을 입은 반트너가 울상을 지었다.
그의 품으로부터 벗어난 그리드가 엄지를 추켜세웠다.
“고맙다. 남자 품에 안기는 것은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지만.”
“큭큭! 나라고 좋아서 안은 건 아니야! 자, 가라!!”
웃음으로 화답해준 반트너가 소리친다.
이미 그리드의 신형은 앞으로 쏘아지고 있었다.
“노옴!”
멀쩡한 그리드를 보고 더욱 더 격노한 엘핀스톤이 블러드 미사일을 발사했다.
폭발력을 내포한 피의 유도탄이 그리드를 쫓으며 그의 접근을 차단하고자 했다.
‘떨쳐내기 힘들다.’
너무 빠르고 집요하다.
회피와 요격이 불가능할 정도다. 리파엘의 창날 한 자루에 의지하는 것만으로는 몸을 보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어쩔 수 없군.’
이동 중의 그리드가 보법을 밟았다.
파그마의 검무, 파(派)를 전개함으로서 블러드 미사일 중 일부라도 격추시킬 요량이었다.
한데 그때, 등 뒤로부터 홍염의 화살 수십 발이 날아왔다.
퍼펑! 퍼퍼퍼퍼퍼펑!!
가히 신기였다.
어지럽게 회전하며 그리드를 노리던 미사일들이 날아온 화살에 모조리 격추당한 것이다.
Satisfy에서 이만한 활솜씨를 지닌 사람은 오직 한 명밖에 없다.
신궁, 지슈카다.
“엄호는 내게 맡겨.”
찡긋, 윙크를 보내오는 지슈카의 모습이 요염하고 상큼했다.
두근거림을 느낀 그리드가 살(殺)의 보법을 밟았다. 그러자 엘핀스톤과의 얼마 남지 않은 거리가 한달음에 좁혀졌다.
“살(殺)!!”
쿠오오오오오!!
‘이런 미친?’
기성을 토하며 날아오는 두 자루의 대검!
내포한 위력이 조금 전 신속의 검술과는 차원이 다르다.
경악한 엘핀스톤이 플라이를 전개, 허공으로 몸을 띄워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강력한 풍압이 내려와 어깨를 짓눌렀기에 날아오를 수가 없었다.
제드노스가 발현한 <영겁의 폭풍>의 영향이었다.
본래 영겁의 폭풍은 목표 대상을 완전히 구속하는 마법이었다. 하지만 엘핀스톤의 마법저항력이 워낙 높아 행동에 일정한 제약을 가하는 것이 한계였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그리드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드는 깨달았다.
그래, 지금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의지할 수 있는 동료들이 나와 함께하고 있다.
‘지금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강하다!
푸우우욱-!
“큭…! 크아아아아악!!”
가슴에 두 자루 대검을 관통당한 엘핀스톤이 악을 썼다.
그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리드 하나만으로도 경각심을 느껴야할 수준이건만, 그 외에도 만만찮은 놈들이 그를 서포터하자 전투가 뜻대로 전개되질 않는다.
블러드 필드를 전개한다면 사정이 달라질 터였으나 재사용 대기 시간이 아직 3분가량이나 남았다. 앞서 사용하다가 실패한 것이 최악의 사태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네놈들 모조리 이 자리에서 죽여주마!!”
오늘은 어제와 다르다. 협상 따위 없다.
가슴으로부터 뿜어진 선혈을 마법의 매개체로 이용, 폭발을 발생시킴으로서 그리드를 떨쳐낸 그가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이야루그트!!”
키이잉!
휘몰아치는 혈풍 사이로 적색의 늘씬한 장검이 강림했다.
순간 발생한 <피의 울음>이 템빨단원들의 균형감각을 무너뜨렸다.
‘지금!’
그리드 또한 피의 울음의 영향으로부터 무사하지 못할 터!
확신한 엘핀스톤이 이야루그트를 힘껏 휘둘렀다.
호선을 그리는 적광이 휘청거리고 있을 그리드의 몸을 양단…
“뭐라!!”
엘핀스톤은 당혹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리드가 멀쩡히 서서는 자신의 검격을 방어하는 것이 아닌가?
“네놈은 도대체 뭐냐!”
내 사기에 영향을 받지 않을뿐더러, 마검 이야루구트의 울음에도 동요하지 않는다고?
이놈이 정녕 인간이란 말인가!
맞물린 검 너머로 흔들리는 엘핀스톤의 눈동자를 확인한 그리드가 대꾸했다.
“너를 죽일 사람이지 누구긴 누구겠어?”
조소 짓는 그리드.
그의 시선은 엘핀스톤의 등 뒤로 꽂혀있었다.
‘아차!’
엘핀스톤이 황급히 후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살귀의 격.”
푹! 푹푹푹푹!!
페이커의 은빛 단도가 엘핀스톤의 목을 찌르고, 찌르고, 또 찔렀다.
살귀의 격.
타격 횟수가 많을수록 데미지가 중첩되어 종국에는 살(殺) 이상의 공격력을 발휘하는 스킬이다.
전날 엘핀스톤은 이 공격을 3번밖에 허용하지 않았으나 오늘은 최악이었다. 무려 7번의 타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리드가 어그로를 완벽하게 끌어준 덕분이다.
“끄윽… 쥐새끼 같은 놈이!!”
생명력 게이지가 눈에 띄게 줄어든 엘핀스톤의 이야루그트가 페이커에게 날아갔다.
살귀의 격이 엄청난 효력을 발휘한 대가로 어그로가 바뀐 것이다.
일반적인 레이드에서 어그로 핑퐁은 파티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본래 그리드는 탱커보다 딜러로서 더 큰 효용성을 발휘하는 인물이었으니까 말이다.
“파그마의 검무, 극(極)!”
서걱!
베기의 극의가 떨어졌다.
엘핀스톤은 그리드로부터 한눈 판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대상에게 210,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부족해.’
그리드의 표정이 편치 않다.
평소에 잡몹 잡을 때는 잘만 터지던 5연격이 이번에도 터지질 않았기 때문이다.
엘핀스톤의 생명력은 여전히 80퍼센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극한의 수혈과 연(聯), 살(殺)에 이어 살귀의 격과 극(極)까지 적중시켰건만 이 정도다.
엘핀스톤의 생명력과 방어력이 네임드 보스답게 출중한 까닭이다.
‘내가 운만 좋았어도!’
살(殺)을 적중시켰을 때 5연격이 터졌다면 치명상을 입힐 수 있었을 터다. 하지만 운이 나빠 5연격이 계속 터지질 않고 있으니 아쉬울 따름이다.
‘아니, 아쉬워할 필요가 없나.’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없는 운을 충당해주고도 남을 동료들이 있음을 상기했기에.
“수라 강림!!”
어느새 엘핀스톤의 측면으로 접근해온 레가스의 전신이 마기와 뇌기에 휩싸였다.
이 순간 그가 발휘하는 파괴력은 그리드조차도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수준이었다.
퍼퍽! 퍼퍼퍼퍼퍽!!
잔광을 남기며 내뻗어지는 광속의 주먹과 발차기!
레가스가 아수라로 전직했을 당시 그리드가 제작해줬던 <뇌신의 너클>이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6회 콤보 달성!!]
[<아수라> 클래스의 고유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5천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힙니다.]
[<뇌신의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의 방어력을 무시하는 추가 물리 피해를 입힙니다.]
퍼엉!
[7회 콤보 달성!!]
[<아수라> 클래스의 고유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8천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힙니다.]
[<뇌신의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의 저항력을 무시하는 추가 전격 피해를 입힙니다.]
콰쾅!!
[8회 콤보 달성!]
[<아수라> 클래스의 고유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1만 2천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힙니다.]
[<뇌신의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의 방어력과 저항력을 무시하는 추가 물리 피해와 추가 전격 피해를 입힙니다.]
쩌저정!!
[10회 콤보 달성!]
[<아수라> 클래스의 고유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2만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힙니다.]
[<뇌신의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뇌살권>을 3회 전개합니다.]
쩌엉-!
[12회 콤보 달성!!]
[<아수라> 클래스의 고유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3만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힙니다.]
[<뇌신의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의 최대 생명력에 비례하는 추가 물리 피해를 입힙니다.]
“크헉! 윽! 크악!!”
엘핀스톤이 연신 신음을 토했다.
아수라의 힘을 개방한 지금의 레가스는 백작급 진혈족조차도 항거할 수 없는 속도와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단, 지속시간이 짧고 후폭풍이 크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레가스의 콤보가 정점을 찍었다.
“마지막이다!!”
콰작!! 콰자자작!!
[15회 콤보 달성!!]
[<아수라> 클래스의 고유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10만의 고정 된 피해를 입히며 대상의 방어력과 재생력을 5분 동안 50퍼센트 저하시킵니다. 또한 <투신의 창>이 전개됩니다.]
푸우우우욱!!
“크, 크아아아아악!!”
오늘 엘핀스톤의 대사 중 90퍼센트 이상을 비명이 채우고 있었다.
하늘에서부터 떨어진 투신의 창에 관통당한 그가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투신의 창.
상태이상에 저항하는 대상조차도 1.5초간 무력화 시키는 아수라의 궁극기이다.
“헉… 헉, 뒤를 부탁…”
털썩!
탈진한 레가스가 쓰러지고 말았다. 대량의 스태미나를 일시에 소모한 대가로서 그는 앞으로 3초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간극을 메우는 것이 동료들의 역할이었다.
“마하 스피어!!”
“발검, 개화.”
“피닉스 에로우!!”
“흑풍참!!”
일행의 궁극기가 쏟아졌다.
엘핀스톤이 연기화를 시도하였으나 리파엘의 창날이 문제였다. 그는 무력하게 공격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좋았어!”
회심의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검무를 펼치기 시작했다.
동료들의 활약 덕분에 생명력이 45퍼센트까지 떨어진 엘핀스톤을 노리고 연살(聯殺)을 전개, 승기를 확실히 잡을 요량이었다.
한데 이변이 발생했다.
“감히…! 감히이!!”
특정한 보스들은 일정 수준까지 생명력이 떨어질 경우 각성하여 더욱 더 강해졌고, 엘핀스톤이 이에 속하는 존재였다.
쿠화하하하학!!
엘핀스톤을 중심으로 뻗어나간 선홍빛 마력이 일대를 지배했다.
기껏 그리드가 사전 차단했던 블러드 필드가 지금 이 순간 즉각적으로 펼쳐진 것이다.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이 진정한 힘을 개방합니다. 엘핀스톤의 모든 능력치가 상승하고 재생력이 300퍼센트 상승합니다.]
[블러드 필드의 영향으로 혈류가 들끓습니다.]
[매초마다 153의 생명력을 엘핀스톤 백작에게 수혈합니다.]
[모든 치유 효과가 80퍼센트 감소합니다.]
템빨단원들의 시야로 절망적인 알림창이 떠올랐고,
“네놈들 모두 먹어 치워주마.”
자리에서 일어난 엘핀스톤이 선언했다.
홍옥처럼 붉게 빛나던 그의 눈동자가 칠흑으로 물들어있었다.
그 위압감,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이제 진짜 어떻게 잡냐.”
템빨단원들이 전의를 상실하고 말았다.
블러드 필드까지 생성 된 마당에 모든 능력치가 상승한 엘핀스톤을 도대체 어떻게 상대해야할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모두가 절망하는 그때,
“숨겨놓은 힘이 나라고 없을 것 같아?”
그리드가 의미심장한 발언을 꺼냈다.
그에게 엘핀스톤과 템빨단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숨겨놓은 힘이 있었다고?’
엘핀스톤이 긴장했고,
‘역시 그리드!’
‘비장의 수가 있었던 건가!’
템빨단원들은 환희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 된 가운데 그리드가 스킬의 시동어를 외쳤다.
“아이템! 합!! 체!!!”
“…?”
우리 할아버지 세대에 유행했던 변신합체 로봇 애니메이션에서나 등장할 법한 대사가 아닌가?
더군다나…
따앙! 따앙!!
주섬주섬 망치를 꺼낸 그리드가 쪼그려 앉더니 단조질을 시작했다.
솔직히 볼품없고 우스꽝스러운 행동이었다.
“저놈이 겁을 먹고 미쳤군.”
조소를 머금은 엘핀스톤이 콧방귀를 뀌었다.
부끄러움은 템빨단원들의 몫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