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13화
“과연 어떻게 될까?”
운동장처럼 넓은 거실에 세 명의 사내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3D안경을 쓴 채 시원한 소주와 매콤한 닭발을 음미하고 있는 이들의 정체?
S.A그룹의 임철호 회장과 그의 최측근인 윤상민 이사, 그리고 애슐리 톤슨 팀장이었다.
내로라하는 거물급 인사들이다.
하나 같이 바쁜 이들이 임철호 회장의 저택에 모인 이유는 단순한 술판을 벌이기 위함이 아니었다.
대형 스크린 속 그리드 파티가 잠시 후면 엘핀스톤과 조우하게 된다.
저들은 과연 엘핀스톤 레이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세 사람은 그것을 확인하고 싶었다.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엘핀스톤을 레이드하기 위해서는 3차 전직한 힐러가 최소 3명 이상 필요합니다.”
엘핀스톤 레이드의 최우선 과제는 블러드 필드의 무력화다.
하지만 엘핀스톤이 블러드 필드를 전개하는데 소요하는 시간은 고작 1.8초에 불과했다.
사전차단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니 지속적인 힐을 사용함으로서 상쇄시키는 수밖에 없다.
힐러가 단 1명도 없는 8인 파티가 엘핀스톤을 레이드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뱀파이어들의 아버지, 애슐리 팀장의 확신이었다.
“후로이가 생존해 있었다면 또 모를까, 지금의 그리드 파티가 엘핀스톤을 레이드할 가능성은 제로입니다.”
후로이는 파티원들의 공격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음과 동시에 어그로를 완벽히 조율할 수 있는 인물이다.
파티에서 중요도가 매우 높은 그를 희생시킨 그리드가 어리석다고 애슐리 팀장은 생각했다.
하지만 임철호 회장의 의견은 달랐다.
애초에 후로이를 희생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리드 파티는 전멸한 상태였을 터다.
“또한, 파그마의 후예의 강함은 기획의도를 월등히 상회하고 있지. 현재 Satisfy에서 상정 외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다섯 명 중 하나가 바로 그리드일세.”
더군다나 그리드 파티에는 특별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지슈카, 극검, 폰, 레가스, 페이커, 반트너, 제드노스.
전원 뛰어난 컨트롤 실력과 감각을 보유한 이들로서 레벨과 클래스의 개념을 초월하는 강함을 발휘한다.
“저들이라면 엘핀스톤이라도 당해낼 재간이 없지 않을까?”
닭발 하나를 뼈째 입에 넣고 오물거리던 윤상민 이사가 조심스러운 추측을 내놓았다.
“저는 두 분 말씀에 모두 공감합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제아무리 그리드와 템빨단이라고 할지언정 이번 레이드는 성공시키지 못할 것 같군요. 블러드 필드의 영향력이 너무 강하니까요.”
한때 윤상민 이사는 그리드를 멍청하고 답답한 놈이라며 욕하고 다녔었다.
단 9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레전드리 클래스를 뭐 저딴 호구가 가져가서 사장시키느냐며 분개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1년 이상 계속되고 있는 그리드의 변화와 성장을 지켜보면서 이제 그는 그리드를 인정하고 응원하게 되었다. 마누라도 모르는 사실이지만, 그는 그리드 팬카페의 우수회원이기도 했다.
그런 윤상민 이사조차도 이번 레이드엔 회의적인 것이다.
볼케이노급 매운맛 닭발을 먹은 탓에 입술이 퉁퉁 부어오른 임철호 회장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렇게 된 이상 내 배당률이 올라가겠군.”
그렇다.
세계 제일 기업의 수뇌부들이 모여 그리드를 두고 내기를 하고 있었다.
얼핏 한가해보이지만 그건 아니다. 이들은 없는 시간조차 쪼개면서까지 그리드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그만큼 그리드는 각별한 존재였다.
우리가 제작한 Satisfy를 통해 성장한 인물의 일대기를 놓치고 싶을 리 만무했다.
***
부동의 랭킹 5위 유라.
세계 최고의 여성 랭커였던 그녀가 4달 전, 홀연히 랭킹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이유가 뭘까?
이는 아직까지도 큰 이슈였고 무수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 진실,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접하게 되었다.
“데빌 슬레이어…!”
영주대행 라우엘의 권한으로 템빨단에 가입한 유라.
길드원 목록에 떠오른 그녀의 클래스는 생소한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추측대로 그녀는 히든 클래스 전직자가 되어있었다.
그것도 무려 레전드리 등급의 히든 클래스였다.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이 전율에 휩싸였다.
데빌 슬레이어라는 클래스, 파그마의 후예와 마찬가지로 금빛으로 표기되어 있었기에.
그런데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그리드님의 말씀에 따르면, 레전드리 클래스로 전직하게 될 경우 레벨이 1로 하락한다고 했는데?’
한데 유라의 현재 레벨은 203이었다.
불과 4달 만에 1레벨부터 203레벨까지 육성했다는 뜻이 된다.
일반적인 유저. 아니, 랭커들보다 최소 3배는 빠른 성장 속도였다.
‘과연 대단하시군.’
육성하기 어려운 흑마법사로 랭킹 5위를 고수했던 여자다.
레전드리 클래스를 획득하였으니 등에 날개를 단 셈이었을 터.
타고난 재능과 노력, 그리고 랭킹 5위로서 축적해온 노하우를 통해 그녀는 상식을 초월하는 속도로 레벨을 올려왔음이다.
라우엘과 템빨단원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는 사이, 유라는 레이단 성내의 부활 포인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영우씨가 곧 나타날 거라고 했지.’
사정은 들었다.
8명으로는 레이드가 불가능한 보스와 조우하게 된 그리드 일행이 잠시 후면 전멸하고 돌아올 거라고.
‘그럴 리가 없어.’
유라는 언제나 그리드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와 관련 된 기사는 빠짐없이 챙겨보고 저장해놨을 정도다.
그녀가 지켜본 그리드의 성장세와 레전드리 클래스의 기능을 고려해본다면…
‘영우씨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낼 거야.’
유라는 그리드의 과거를 알고 있다.
타고난 재능이 부족하고 운도 나빠 온갖 고초를 겪어온 사내.
그는 27년 인생 중 26년 가까이를 불행하기만 했고 무수한 상처를 입어왔다.
유라는 그가 더 이상 좌절하지 않기를 바랐다. 앞으로는 그가 쭉 행복하기만을 원했다.
‘제 행운을 나눠주도록 하죠. 그러니 부디 무사히, 밝은 모습으로 돌아와 주세요.’
그리드처럼 재수 옴 붙은 사람은 처음 본 유라의 진실 된 마음이었다.
***
23시간 푹 자고 일어난 엘핀스톤 백작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전날, 감히 시조 베리아체를 모욕한 인간 놈을 갈기갈기 잔인하게 찢어 죽였더니 속이 다 후련하여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거하게 일을 벌려놨군.”
지하도시를 배회하는 수백, 수천의 사역마 대부분이 엘핀스톤의 권속이다.
엘핀스톤이 깨어있을 경우, 그들은 엘핀스톤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다.
하여 엘핀스톤은 그리드 일행이 도시 내 뱀파이어들을 살육하고 다님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이상 방치했다가는 조만간 도시가 완전히 박살나겠어.”
엘핀스톤은 일반 뱀파이어들이 얼마나 죽어나가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얼마든지 양성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다만, 진혈족 뱀파이어들은 경우가 달랐다.
그들은 오로지 시조 베리아체와 그녀의 직계들만이 낳을 수 있는 존재였다. 소중한 자원이기도 했다. 그들을 잃는 것은 썩 달갑지 않았다.
‘오늘부터 2명씩 먹어치워야겠군.’
혈통 좋은 흑발 놈은 마지막까지 살려둔다.
맛있는 음식은 가장 마지막에 먹는 것이 진리이니까.
‘동료까지 팔아 겨우 목숨을 연명하였건만, 결국 죽음을 받아들여야하는 순간이 찾아온다면 너희들은 어디까지 절망할 것이냐?’
겁에 질려 눈물 흘릴 인간들의 모습을 상상해보자 즐겁다.
백색 연미복으로 갈아입음으로서 출중한 외모를 극대화시킨 엘핀스톤 백작.
그가 유유히 저택을 떠났다.
그의 목적지는 단연 그리드 일행이 있는 곳이었다.
***
‘어느 놈부터 먹어줄까.’
짙은 어둠 속.
붉은 눈동자로부터 점화되는 적광마저 지우고 기척을 숨긴 엘핀스톤이 코를 벌렁거렸다.
그리드 일행의 혈향을 구분하는 것이었다.
그의 오늘 사냥감은 폰과 레가스로 정해졌다.
‘저 두 놈부터 먼저 없애는 것이 낫겠군.’
사실 가장 성가셨던 놈은 페이커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어쌔신이다.
하지만 종합적으로 봤을 때 페이커보단 폰과 레가스가 조금 더 강했다. 체력이 너무 뛰어나 오래 살려두면 귀찮아졌다.
그들을 먼저 처리하는 것이 보다 사냥을 천천히, 수월하게 즐길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이다.
‘자, 그럼.’
스르륵.
검정 연기로 변한 엘핀스톤이 어둠과 완전히 동화되었다.
그리드 일행을 향해 접근하는 그의 속도는 마치 벼락같았으며 은밀함은 페이커를 월등히 상회하고 있었다.
‘자! 네놈들의 싱싱한 피를 내게 다오!’
역시 인간은 열등하다.
내가 자신들의 머리 바로 위까지 접근해오고 있음을 아직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다.
그 둔함이 재미있을 따름이다.
조소를 그린 엘핀스톤 백작이 최강의 마법, 극한의 수혈을 전개했다.
목표 대상은 폰이었다.
푸화하하하학!!
폰의 주변으로 피의 장막이 펼쳐졌다.
이제 폰은 소멸할 것이며 그의 생명력은 모두 엘핀스톤의 양분이 될 터였다.
그게 정상이다.
한데,
“기다리고 있었다.”
“뭣…!”
엘핀스톤의 두 눈이 찢어져라 커졌다.
그리드라는 이름의 흑발 놈!
폰의 후위로부터 등장한 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해오는 것 아닌가?
‘인간 따위가 내 접근을 눈치 챘다고? 여태까지 이런 일이 없었는데?’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어쨌든 늦었다.
이미 극한의 수혈은 시전 되었고 폰은 곧 죽는다.
그것이 엘핀스톤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그의 믿음을 깨뜨리고 말았다.
여태껏 그리드에게 사냥 당했던 다른 보스들이 그래왔듯, 엘핀스톤 또한 황당함을 맛봐야만 했다.
“회(回).”
“……!”
그것은 직접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폰을 집어삼키던 피의 장막이 그리드의 옥빛 대검에 휘감기더니 도리어 나를 향해 날아오는 것이 아닌가?
“허억!”
극한의 수혈은 최강의 마법이다.
나라도 맞았다가는 치명상을 피할 수 없다.
그리 생각하고 다급히 연기화를 시도하던 엘핀스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황금빛의 창날이 날아와 내 옆구리를 찌름으로서 연기화를 무력화시킨 탓이다.
“이게 무슨…!”
푸화하하하하하학!!
경악하는 엘핀스톤을 피의 장막이 집어삼켰다.
이때까지의 과정, 찰나지간에 발생한 일이다.
긴장한 채 엘핀스톤의 등장을 기다리던 템빨단원들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갑자기 그리드가 움직이는가 싶더니 하늘에서부터 상처 입은 엘핀스톤이 떨어졌기에.
“쿨럭! 쿨럭!!”
땅에 처박혀 피를 토하는 엘핀스톤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남자마저 홀릴 정도로 아름답던 얼굴이 피칠갑이 된 채 일그러졌다.
“이노옴!!”
분노와 혼란에 휩싸인 엘핀스톤이 즉각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제히 경계태세를 취하는 템빨단원들의 시야로 언제나처럼 끔찍한 알림창이 떠올랐다.
[13번째 도시의 주인, 뱀파이어 백작 엘핀스톤이 출현하였습니다.]
[강력한 사기가 당신의 마력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일부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게 됩니다.]
[뱀파이어의 시선은 하등한 종족을 굴종시킵니다. 신체에 제법 강한 억압이 가해집니다.]
템빨단원들이 무력감에 휩싸였다.
최소 2개에서 3개씩의 스킬들을 봉인당하고 모든 속도까지 감소되었으니 몸과 마음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반면 그리드는 멀쩡했다.
[저항하였습니다.]
오직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들에게만 부여되는 상태이상 저항 패시브.
그리드가 발휘하는 힘의 원천이다.
“블러드 필드!”
강력한 사기로 인간 놈들의 힘을 일부 봉인시킨 엘핀스톤이 틈을 놓치지 않고 결계를 펼쳤다.
아니, 펼치려고 시도했다.
푸욱!
“……!”
블러드 필드가 채 완성되기도 전이었다.
페이커라는 어쌔신 놈과 비견되는 속도로 날아든 그리드가 푸른 대검으로 나의 심장을 찔렀다.
그 탓에 일순간 마력이 역류하였고 블러드 필드의 발동이 멈췄다.
‘뭐지?’
이놈, 설마 나의 사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엘핀스톤을 응시하는 그리드의 시선이 한없이 고요하다.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몫은 이 정도로 끝내마. 이다음부터는 모조리 후로이의 몫이다.”
과거의 그리드는 감정을 제어하기 어려워했다.
인격이 미성숙하고 사회성이 결여되어 발생한 결과로서 화가 나거나 슬플 때, 그리고 기쁠 때마다 폭주하고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절친한 친구이자 충복을 희생시킨 경험을 통해 <위에 선 자>의 입장이라는 것을 완전히 자각하게 된 그리드.
지금의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와 복수심을 냉정하게 갈무리할 수 있었다.
핏!
피피피피피피피피핏!!
신속의 검무, 연(聯).
시간차 없이 수십 번 휘둘러지는 검격의 궤도 하나하나가 흔들림 없고 정교하다.
“크아아아아악!!”
이날, 엘핀스톤이 탄생한 이래 두 번째로 비명이라는 것을 지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