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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106화 (101/1,794)

템빨 15권 - 11화

“…”

블러드 필드의 영역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도망치고 얼마지 않아 알림창이 떠올랐다.

[파티원 ‘후로이’가 사망하였습니다.]

분위기가 무거웠다.

“제길… 동료를 제물로 바쳐서 살아남는 날이 올 줄이야…”

“우리의 힘이 부족해서 발생한 결과다. 이번 일을 계기로 각성하고 더욱 더 정진하도록 하자.”

일행은 더 이상 그리드를 비난하지 않았다.

그리드라고 좋아서 후로이를 버리는 판단을 했을 리 없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봤을 때 그리드의 선택은 옳았다. 아니, 어쩌면 훌륭하다고 판단해도 무방했다. 그의 선택 덕분에 나머지 일행은 위기를 모면하여 후일을 도모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보스의 성격을 고려해서 이와 같은 상황을 유도하다니?

그리드가 성격, 능력뿐만 아니라 지능적으로도 발전해가고 있음을 알게 된 날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지금의 상황이 썩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레가스만큼은 여전히 치를 떨고 있었다.

“동료를 희생양으로 삼아서 구차하게 살아남느니, 차라리 우리 모두 죽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본래 레가스는 인정이 넘치는 사내였고 무엇보다도 의를 중시했다.

그리드가 볼품없던 시절.

남들 모두 무시했던 그리드를 유일하게 존중하고 믿어주었던 사람이 바로 레가스였다.

그렇기에 그리드는 레가스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그 뜻을 전부 다 받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투덜거릴 시간이 있다면 몬스터 한 마리라도 더 몰아와. 우리는 지금부터 23시간 내에 건물 4개를 공략한다.”

“……!”

그리드 일행의 건물 공략 시간은 평균 10시간이었다.

이마저도 많이 줄은 거다. 처음 이틀은 12시간 이상씩 걸렸었다.

그만큼 건물마다 배치 된 뱀파이어는 많았고 또한 강했다. 진혈족이 2마리 이상 머물고 있는 건물은 특히 위험했다. 반트너가 무적 스킬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가 있을 정도였다.

한데 지금 그리드는 건물 1개당 6시간 내에 공략하겠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심지어 인원이 1명 줄어든 상황에서 말이다.

후로이의 희생과 죽음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분노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리드임을 증명하는 대목이었다.

“오바야. 자칫 서둘렀다가는 전멸할 거라고. 재수 없게 진혈족 3마리가 머무는 건물이라도 들어갔다가는 거기서 스태미나 전부 소진할 텐데 휴식조차 없으면…”

“반트너의 말이 맞아. 페이스는 유지하도록 하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잖아? 그리드, 네 심정은 이해하지만 너무 초조해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폰의 설득이었다.

반면 지슈카와 극검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 우리는 그리드의 말대로 해야 돼. 엘핀스톤은 내일 또 다시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그때까지 그리드가 300레벨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 오늘과 같은 일이 또 다시 발생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답은 정해졌다.

“급할수록 돌아가기는 개뿔. 급할수록 서둘러야지.”

새로운 건물에 입장한 그리드가 곧바로 초(超)를 전개, 천장을 향해서 검기를 난사했다.

쿠르르르르릉!!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천장이 무너지고 사방을 희뿌연 흙먼지가 지배하게 되었다.

덜컥덜컥!

쿵! 쿵!

나뒹구는 돌무더기 속.

콰앙!

쾅! 쾅!!

상층부에 배치되어 있던 관들이 무너진 천장 탓에 떨어져서는 일제히 개방됐다.

관에서 빠져나온 수백 마리 뱀파이어들이 분노에 찬 시선을 보내왔다.

“감히 우리의 잠을 깨우다니!”

“너희 인간 놈들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아니, 죽이고 싶어서 환장하셨다.”

서늘한 표정으로 대꾸한 그리드가 실패작과 도플갱어의 대검을 거머쥐었다.

‘열 받는다.’

내 퀘스트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곳까지 함께 해준 후로이와 동료들.

그들을 사지로 밀어 넣고 있는 나의 무력함에 치가 떨린다.

“나는…!”

이를 악 문 그리드가 도약했다.

일행들이 말릴 새도 없었다.

도살귀의 안대 너머 적광이 어둠 속에서 유성처럼 빛났다.

“나는!! 더 강해지겠다!!!”

그래, 두 번 다시는 이런 더러운 기분을 느끼지 않아도 좋을 정도의 강자가 되겠다.

지존!

게임을 플레이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바라마지 않는 그 목표를 드디어 그리드가 갖게 된 것이다.

지존이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

무수한 전투 경험과 레벨, 센스. 그리고 단연코 템빨이다.

“우오오오오오!!”

수백 마리 뱀파이어들의 중심부로 선진입한 그리드!

어둠 속에서 더욱 더 강력해지는 실패작과 그리드의 부츠를 무장한 그가 살육을 개시했다.

지금의 그는 뱀파이어의 도시에 도착하기 전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전투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매일 하루 종일 대량의 적과 싸워왔으니 실력이 안 늘어도 이상하다.

하지만 역시 사람은 언제 어느 때고 냉정해야하는 법이다.

“켁! 윽! 힉, 히익! 살려줘어!!”

“…”

미친놈마냥 혼자서 뱀파이어들에게 덤볐던 그리드가 금세 복날 개처럼 얻어터지고는 넝마가 되었다.

일행은 그의 똥을 치우느라 더욱 더 분투해야만 했다.

***

레이단 성의 부활 포인트.

파앗!

후로이가 빛과 함께 등장했다.

바로 조금 전, 엘핀스톤에게 온몸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도 멀쩡한 모습이었다.

“허억… 허억…”

주저앉은 후로이가 거친 숨을 토했다. 온 몸이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제아무리 강인한 정신력을 지녔다고는 하나 몸이 난도질당하는 경험을 하고도 멀쩡할 리가 만무하다.

심호흡하며 간신히 충격을 떨쳐 낸 그가 상태창을 열었다.

경험치 게이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10프로…’

하락한 경험치가 무려 29.3퍼센트였다.

200레벨 이후부터는 사망 시 발생하는 경험치 손실률이 레벨과 비례하기 때문에 치명적이었다.

‘다행히 아이템을 떨구진 않았군.’

딱히 위안은 되지 않는다.

현재 무장하고 있는 아이템 모두 내구력이 최소 100씩 떨어졌다.

후로이에게는 그리드가 있었으니 망정이지, 평범한 유저였다면 수리비로만 거액을 날렸을 터다.

“후로이님?”

잔디 위에 널브러진 채 안정을 되찾고 있는 후로이의 곁으로 라우엘이 달려왔다.

역시나 길드 내에서 가장 바쁜 사람답다. 라우엘은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찌 된 일이죠?”

뱀파이어의 도시에서부터 탈출하는 방법은 단 두 가지뿐이다.

보스를 공략하거나, 혹은 죽거나.

그리고 일행 중 돌아온 사람이 후로이 하나뿐이라는 말은 즉.

“…당신, 죽은 겁니까?”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질문하는 라우엘에게 후로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스가 너무 강했다.”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세요.”

숨길 이유가 없고 숨겨서도 안 된다.

후로이가 뱀파이어의 도시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을 라우엘에게 상세히 전했다.

이야기를 들은 라우엘의 반응은 의외로 밝았다.

“그리드님께서 그런 묘수를 사용하셨다고요? 하하! 대단하네요! 그리드님의 머리통이 장식은 아니었어요!”

“…”

그리드의 지능적 성장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라우엘이었다. 하지만 단어 선택이 부적절하여 후로이의 눈총을 사고 말았다.

***

“그리드님의 13번 도시 원정은 실패로 끝날 겁니다. 아마 내일 이 시간쯤이면 그리드님 일행 전원 부활 포인트에서 등장하겠죠.”

레이단 성내의 회의실.

전 체다카 길드 출신 템빨단원들을 소집한 라우엘이 현재 그리드 일행이 처해있는 소식을 전달했다.

절망적인 이야기에 템빨단원들이 웅성거렸다.

토반이 이를 갈았다.

“역시 내가 갔어야 돼.”

토반은 성기사로서 신성력을 보유했다. 뱀파이어들에게 상극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이번 원정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는 옐로우 미스릴 광산의 총책을 맡았기 때문이다.

템빨단에는 인부들을 관리하고 통솔할만한 인물이 적었고 토반은 귀중한 인재였다.

분위기가 진정되기까지 기다린 라우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리드님께 파브라늄은 꼭 필요한 아이템입니다. 그리드님께서 파브라늄을 많이 확보하실수록 템빨단 또한 강성해지겠죠. 그러니까 저는 그리드님 파티에 인원 2명을 추가로 지원하려고 합니다.”

레이단, 바이란, 코크로 섬.

3개 영지를 관리해야하기 때문에 그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하다.

2명의 지원도 라우엘이 크게 무리하는 것이었다. 2명만 빠져도 라우엘은 잠자는 시간을 더 쪼개야만 했고 영지 관리가 힘들어졌다.

토반이 거수했다.

“내가 합류하겠어.”

“아뇨. 당신은 안 됩니다.”

“익…! 상성을 생각해보라고! 지금 그리드 파티에 가장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봐도 나야!”

“그건 저 또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광산의 인부 숫자가 100 단위로 넘어간 지금 당신이 자리를 비울 순 없습니다.”

“그러면 난 어때?”

야수인간 툰이었다.

이번에도 라우엘은 고개를 저었다.

“당신도 안 됩니다. 길드의 주력이 빠진 상황에서 당신마저 떠나면 길드 전투력이 위험 수준으로 떨어져요.”

“그럼 대체 누구를 보내려는 건데?”

“흠.”

라우엘이 템빨단원들의 면면을 살폈다.

후로이를 포함하면 총 3명.

그리드에게 큰 힘이 되어줄 수 있으며 영지 관리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고심하던 라우엘이 우선 한 명을 지목했다.

“이벨린.”

“아싸!”

프람베르그의 달인, 이벨린!

호명당한 그가 쾌재를 불렀다.

지난 며칠 동안 광산 근처의 몬스터들만 사냥하다보니 지긋지긋하던 그였다.

“또 한 명은… 하아.”

생각하던 라우엘이 한숨을 쉬었다.

“아무리 봐도 이벨린처럼 쓸모없는 사람이 또 없네.”

“이 새끼가!”

라우엘과 이벨린은 같은 10인의 루키 출신으로서 여전히 앙숙이었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와중에 누군가가 회의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라우엘이 응답하자 문을 연 병사가 고개를 조아렸다.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길드 내 누군가가 찾아온 거라 여겼건만 손님이라고?

“헉.”

“마, 말도 안 돼…”

고개를 갸웃거리던 템빨단원들이 이내 경악하고 말았다.

찾아온 손님이 누구인지 두 눈으로 확인한 까닭이었다.

“반가워요.”

목소리마저도 아름답다.

투명한 피부와 찰랑이는 흑발.

가녀린 몸매에 청초한 인상이 좌중을 압도하는 매력을 발산한다.

그녀, 유라였다.

라우엘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

“헉헉… 씨불, 이제 죽는 일만 남은 건가.”

피투성이가 된 채 주저앉은 반트너가 욕설을 지껄였다.

그만큼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현재 그리드 일행을 둘러싸고 있는 뱀파이어들의 숫자는 족히 100을 넘었고 진혈족 뱀파이어도 3마리나 섞여 있었다.

반면 8명에 불과한 그리드 일행은 전원 넝마였다.

생명력과 마나가 바닥을 기었고 심지어 스태미나조차 떨어져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사냥한 여파였다.

“역시 무리였어.”

“그 빌어먹을 엘핀스톤 새끼의 면상에 주먹을 날려주고 싶었는데 이대로 떠나야한다니, 아쉽게 됐군.”

일행 전원 최악의 결말만을 상정하고 있었다.

언제나 일행을 격려하고 최선의 수를 탐색하던 지슈카조차도 입을 다물고 있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가쁜 숨을 내쉴 때마다 흔들리는 가슴을 조용히 응시하던 그리드가 실패작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콰작!

젖 먹던 힘까지 쥐어 짠 그리드의 검격이 뱀파이어 한 명의 머리통을 부셨다.

그를 보고 격분한 뱀파이어들의 어그로가 일제히 그리드에게 쏠렸다.

“미친!”

“야! 대장인 네가 먼저 죽으면 어떻게 하냐! 죽으려면 우리가 먼저 죽어야지!”

기겁한 일행들이 내달려 그리드를 도왔다.

“허억… 헉…”

그리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숨 쉬는 것조차 벅차하면서 오로지 뱀파이어들에게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리파엘의 창날만큼은 지치지 않고 그의 곁에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다. 리파엘의 창날조차 없었더라면 그리드는 진작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날뛰어 볼까.”

그리드를 보고 자극 받은 반트너가 방패를 고쳐 쥐었다.

이미 그는 무적 스킬을 소모한 상태였고 기본적인 방어 스킬을 사용할 여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물약?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복용하는 중인데도 이렇다.

다른 일행 또한 사정은 같았다.

“죽어라!”

뱀파이어들이 일제히 쇄도해왔다.

그 중심에는 진혈족 뱀파이어 3마리가 있었다.

그들의 집중 공격을 방패로 막아내는가 싶던 반트너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다른 일행들 또한 뱀파이어 두세 마리 베어 넘기는 것이 한계였다. 이내 공격을 허용하더니 생명력을 빠르게 소진했다.

“지슈카!”

앞 라인이 무너지자 적들의 접근을 허용하게 된 지슈카가 뱀파이어들에게 몸 곳곳을 물리기 시작했다.

그를 본 제드노스가 마지막 남은 마나를 쥐어짜 바람을 일으켰지만 미약한 바람은 지슈카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였다.

진짜 끝이다.

“하아… 하아…”

일행들은 이제 죽음만을 기다리는 처지에 놓이고 말았다.

마지막 남은 그들의 생명력을 뱀파이어들이 빼앗아가려하는 그때였다.

쩌엉!

찬란한 빛의 기둥이 떨어졌다. 누군가의 레벨이 올랐다는 신호였다.

그 누군가란 당연히…

“너흰 다 뒤졌다.”

그리드였다.

[축하합니다!]

[300레벨을 달성하여 주력 능력치들이 3차 각성을 맞이하였습니다!]

[체력 1당 생명력 수치가 25, 방어력 수치가 0.9로 상향 조정 됩니다.]

[근력 1당 생명력 수치가 7, 공격력 수치가 0.6으로 상향 조정 됩니다.]

[지력 1당…]

..

[<파그마의 후예>의 히든 피스, <봉인된 능력> 중 하나를 획득합니다.]

[스킬 <아이템 합체>를 습득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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