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10화
‘그 방법이라면… 어쩌면 지금 당장의 위기는 모면할 수도 있다.’
그리드의 레이드 경험은 기형적으로 많다.
사냥으로 올린 레벨과 레이드로 올린 레벨 수치가 비등할 정도이니 말 다했다. 비상식을 넘어 미쳤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수준이다.
더군다나 그리드가 레이드한 보스들은 “쿠워워어!”하는 포효와 함께 등장하고 때 되면 또 다시 리젠되는 형식의 몬스터뿐만이 아니었다.
Satisfy의 세계관에 크고 작은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한한 생명의 네임드급 보스들이 태반이었고 그들은 각자 개성이 넘쳐흘렀다.
그래서일까?
그리드가 보스를 관찰하는 관점은 매우 특이했다.
남들처럼 보스의 전투 패턴만을 집중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과 배경까지도 고려했다.
보스의 성향을 보다 입체적으로 파악할수록 레이드가 수월해짐을 자연스럽게 터득한 덕분이었다.
실제로 파스칼을 레이드할 당시, 그리드는 무작정 힘으로 밀어붙이지 않고 보름이라는 시간을 투자한 바 있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게끔 의도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전문가다.
세계 최초로 <레이드 전문가>라는 직종을 만들어서 각종 길드와 유저들에게 돈 받고 레이드 조언을 해줘도 좋을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리드에게는 스스로의 재능을 돈으로 승화시킬만한 두뇌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엘핀스톤 본인 또한 지금의 상황이 썩 내키진 않을 거다.’
그리드는 생각해봤다.
엘핀스톤은 우리 일행을 언제든지 몰살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 나흘 동안 그는 1일 1회의 살인을 원칙으로 행동했다.
이유?
성격을 보아 의외로 단순할 것이다.
‘유희였을 테지.’
엘핀스톤은 등장할 때마다 같은 말을 되풀이했었다.
너희들을 매일 1명씩 차례대로 죽임으로서 극한의 공포를 체험시켜주겠노라고.
‘겁에 떠는 우리를 보고 즐기는 것이 목적이었을 터다.’
홧김에 우리를 일거에 몰살시켜 버린다면?
‘허무하겠지.’
장난감을 한 번에 잃어서야 무료해질 것이 뻔하고, 이는 엘핀스톤이 원치 않는 일일 것이다.
‘그 점을 이용하는 거다.’
묘안을 떠올린 그리드의 표정이 어두웠다.
“신속의 폭압.”
퍼어어어어어엉!!
그리드가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템빨단원들은 이를 악 문 채 분투하고 있었다.
엘핀스톤의 어그로가 후로이에게 끌려있는 점을 철저히 이용, 후로이의 보호는 반트너에게 맡기고 나머지 인원은 공격에만 열중했다.
각자 다른 특성을 지닌 스킬들이 120퍼센트의 시너지를 발생시키게끔 공격을 연계하는 템빨단원들의 솜씨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과연 통합 랭킹 20위권 유저들의 호흡이었고 만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특히 페이커의 활약이 눈부셨다.
그의 신속은 엘핀스톤조차 반응하기 어려워했다. 신체를 연기로 변화시키기도 전에 단도에 베여 피를 흘렸다.
하지만 블러드 필드가 문제였다.
템빨단원들의 생명력을 빼앗아 초당 1천 이상의 생명력을 회복하는 엘핀스톤!
그의 회복력은 경이적이었다.
애초에 총 생명력이 800만대로 추정됐다.
소수 인원의 공격력으로는 쓰러뜨리는 일이 불가능했다.
“뇌살권!”
콰지지직!
전격을 토하는 레가스의 주먹이 엘핀스톤의 가슴을 꿰뚫었다.
하지만 엘핀스톤은 단 1의 데미지도 입지 않았다.
타격 지점을 연기화 시켜 공격을 흘렸다.
“진짜는 이거다!”
소리친 레가스가 주먹을 회수하지도 않고 몸을 회전시켰다.
그대로 허리를 띄우더니 엘핀스톤의 정수리에 발뒤꿈치를 찍었다.
변칙적이며 호쾌한 공격이었다.
“끅…!”
레가스의 강점은 예측할 수 없는 공격 궤도에 있다.
설마 이런 식의 연격이 가능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엘핀스톤이 신음을 토했다.
한편에서는 폰이 나서고 있었다.
“레인 스피어!”
퍼펑! 퍼퍼펑!!
도약한 폰이 연속적으로 창을 찔렀다.
창격이 마치 비처럼 쏟아졌다.
전신을 연기화 하지 않는 이상 피할 길이 없는 공격이었다.
하지만 전신을 연기화할 경우 딜레이가 크고 반격 또한 불가능해진다. 엘핀스톤으로서는 지양해야만 하는 행동이었다.
“블러드 실드!”
쩌정! 쩌저저저저저정!!
엘핀스톤이 본인의 생명력을 일부 소모하여 혈류를 방출, 그를 토대로 수십 개의 선홍빛 방패를 만들어냈다.
충돌하는 창격과 방패가 허공에 어지러이 수놓이는 그때,
푹! 푹푹!!
기척을 지우고 은밀히 접근해온 페이커가 엘핀스톤의 목을 단도로 연달아 찔렀다.
타격 횟수가 많아질수록 더 높은 데미지를 중첩시키는 <살귀의 격>이었다.
피칠갑 된 엘핀스톤이 소리쳤다.
“우선 네놈부터 처리해야겠구나!”
“……!”
페이커가 긴장했다.
엘핀스톤의 시선이 더 이상 후로이가 아닌 자신을 직시해왔기에.
퍼엉!
이야루그트가 적색의 검광을 뿌리자 귀를 울리는 파공성이 터졌다.
찌잉-
템빨단원들이 일제히 이명을 느꼈다.
이야루그트에 귀속 된 <피의 울음>의 발현이었다.
템빨단원들이 찰나지간에 균형을 잃었고, 엘핀스톤은 그 틈에 마법을 전개했다.
“블러드 쓰론.”
푸푹! 푸푸푹!!
블러드 필드로부터 수십 개의 가시가 솟아나 페이커의 허벅지에 연달아 꽂혔다.
블러드 쓰론!
공격력은 강하지 않으나 적중 대상의 혈류를 오염시키는 최악의 마법이었다.
이동 속도가 대폭 저하되어 신속을 차단당한 페이커의 낯빛은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회심의 미소를 그린 엘핀스톤이 이야루그트를 휘둘렀다. 페이커의 목을 베어버리고자 함이었다.
하지만 때마침 날아온 홍염의 화살이 그의 행동을 저지시켰다.
지슈카의 엄호였다.
“인간치고 꽤나 잘들 버티는구나.”
템빨단원들의 선전이 엘핀스톤의 흥을 돋우고 있었다.
엘핀스톤은 작금의 유흥거리가 길면 길어질수록 좋은 입장이었다.
콰작!
낚아챈 화살을 가볍게 부러뜨리는 엘핀스톤.
그의 현재 생명력은 여전히 10분의 8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템빨단원들의 생명력은 최소 3분의 1에서 최대 절반까지 하락한 상태였다.
블러드 필드의 위력이었다.
“이대로는 2분 안에 전멸입니다.”
페이커에게 <바람의 축복>을 걸어 이동 속도를 일부 회복시킨 제드노스가 절망적인 표정으로 말한다.
반트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말이다.”
엘핀스톤의 강점은 공격력, 마력, 방어력, 속도 등의 능력치가 아니었다. 동레벨대 보스들과 비교하면 무난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강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독보적인 유용성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광역 상태 이상 유발, 광역 확정 공격 스킬, 광역 흡혈 스킬, 단발 필살 스킬, 방어기, 회피기 등등.
템빨단원 전원을 소집하지 않는 이상 잡을 답이 안 보인다.
그리드가 300레벨을 달성한 이후 조우했을지라도 과연 이길 수 있었을까?
일행이 의문을 느끼며 차츰 패색을 띠는 그때였다.
{후로이를 팔아넘긴다. 현재 엘핀스톤이 날뛰는 이유는 후로이 때문이니까 후로이를 죽이면 화를 풀고 물러날 거야.}
그리드가 파티 말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
후로이를 제외한 일행 모두가 귀를 의심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호선을 그리는 이야루그트의 사나운 공격을 회피한 레가스가 이를 갈았다.
{동료를 팔자고요? 제가 잘못 들은 거겠죠?}
그리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제대로 들었다.}
폰이 버럭 성을 냈다.
{네게 실망하게끔 만들지 마라!}
지슈카도 거들었다.
{그리드, 동료를 희생양으로 삼는 사람은 위에 설 자격이 없어.}
극검, 제드노스, 페이커 또한 같은 의견인 듯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야말로 비난일색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모두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당당하기만 했다.
“더 많은 동료를 지키기 위함이다.”
그렇다.
지금의 그리드는 오로지 나 하나 살자고 후로이를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다.
‘1명의 희생으로 8명을 구한다.’
일반인들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선택을 쉽사리 내리지 못한다. 특히 그 대상이 소중한 사람들일 경우에는 더욱 더.
하지만 그리드는 본래 인정보다 실리를 따지는 성향이 강했다.
한낱 정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그리드가 혐오하는 결과다.
“쿨럭!”
페이커가 엘핀스톤의 공격을 허용하고 있었다.
피를 토하며 주저앉는 그의 곁으로 날아간 그리드가 실패작을 뽑았다.
쩌엉-!
실패작의 푸른 검신과 이야루그트의 붉은 검신이 충돌하며 불똥을 튀겼다.
[+9 실패작의 내구력이 5 하락하였습니다.]
푸른 오리하르콘보다 블러드 스톤의 강도가 월등히 뛰어났다. 강도만 놓고 본다면 아다만티움을 상회하고 있었다.
‘애초에 이 야구르트를 만든 제작자가 지금의 나보다 뛰어난 실력자야.’
혀를 내두른 그리드가 후로이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내 뜻은 파악했겠지? 모두를 위해서 희생해줘야겠다.
후로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알겠습니다, 주군.
예상대로의 반응이다.
그렇기에 더욱 더 가슴이 아프다.
그리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가끔씩은 싫은 소리도 좀 하지 그래? 너무 착하게만 굴면 내가 더 미안해지잖아.
-오로지 주군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지금처럼 합리적인 명령이라면 더욱 더 기꺼이!
사망 시 발생하는 경험치 하락, 아이템 내구도 하락, 혹은 아이템 드롭 페널티는 누구에게나 치명적으로 작용한다.
특히 후로이의 경우는 전투력이 낮아 기본적인 레벨 업 속도가 느렸으므로 더욱 더 치명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명령에 따라주는 후로이가 그리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반드시 엘핀스톤에게 복수해주마. 그리고 오늘의 희생으로 발생할 피해를 만회할 만큼의 보상을 꼭 해주겠어.
-보상 따위 필요 없습니다. 주군과 주군의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제 사명이며 대가를 바랄 일이 아닙니다. 또한 이번 사태는 전적으로 저의 책임…
-네게 책임을 물리려는 의도가 아니야. 그리고 너 또한 내게 소중한 사람임을 잊지 마라.
-…
마음을 다잡은 그리드.
그가 맞물린 검 너머로부터 차가운 시선을 보내오는 엘핀스톤에게 제안했다.
“감히 당신의 부모님을 언급한 내 동료를 당신에게 넘기겠다. 그를 죽임으로서 분노를 풀어다오.”
엘핀스톤이 콧방귀 뀌었다.
“본인의 목숨을 건사하기 위해서 동료를 팔아넘기겠다고? 과연 인간이란 더럽고 추하구나.”
“그래서, 싫어?”
엘핀스톤의 입가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싫을 리가.”
‘과연.’
그리드의 예상대로였다.
엘핀스톤은 인간 사냥이라는 유희를 보다 오랫동안 즐기고 싶어 했다.
“가서 죽어라.”
엘핀스톤으로부터 물러난 그리드가 명령하자 후로이가 즉각 행동에 나섰다. 엘핀스톤의 곁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그를 본 일행들이 경악성을 뱉었다.
“안 돼!”
“뭐하는 짓이야, 이 미친놈들아!”
말려봤자 부질없다.
그리드는 이미 마음을 정했고, 후로이는 그리드를 따른다.
“잔인하게 죽여주마.”
푸욱!
저항하지 않는 후로이를 엘핀스톤은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블러드 쓰론으로 발목을 찔러 움직임을 제약한 뒤 이야루그트로 손목을 베어 검을 쥘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몸 곳곳을 마치 스테이크 썰듯 차근차근 난도질하더니 급기야 주둥이를 찢었다.
“…”
신체적 고통은 둘째 치고 정신적으로 충격이 클 터인데도 후로이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수백 시간 동안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에 갇혔던 경험을 토대로 정신력을 튼튼히 단련한 성과였다.
“더 이상 못 봐주겠군!”
템빨단원들이 공분했다.
후로이를 구하고자 나서려하는 그들에게 그리드가 경고했다.
“헛지랄하지 말고 어서 이 자리에서 피해. 만약 명령을 어긴다면 길드장의 권한으로 추방하겠다.”
“…”
그리드에게 부족한 것은 카리스마였다.
위엄 스탯이 아무리 높으면 뭐하는가?
오로지 돈과 글래머밖에 모르고 신중하질 않아 경망스럽게 보였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달랐다.
충복에게 죽음을 강요함으로서 느낀 죄책감과 슬픔.
그 감정을 눈빛에 고스란히 담고서도 티 내지 않고자 노력하는 그리드의 모습은 애처로우면서도 강인해보였다.
리더로서의 자질이 조금씩 개화하고 있음이다.
그제야 냉정하게 사태를 파악한 템빨단원들이 진정하고 물러섰다.
이날 후로이는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