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5권 - 9화
푹 자고 일어난 엘핀스톤 백작!
그가 오늘도 어김없이 그리드 일행을 찾았다.
지난 3일 동안 매일 그래왔듯이 인간 하나를 죽여 놓기 위함이었다.
한데 어째 좀 이상했다.
‘어제랑 숫자가 같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다. 어제 숫자를 세어놨기에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인간들의 숫자가 줄지를 않았다.
‘이게 무슨 영문이지?’
의문에 휩싸인 엘핀스톤이 그리드 일행의 면면을 살폈다.
자신이 어제 죽였다고 생각한 놈이 혹 살아있는 것인가 찾아내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짐승의 얼굴을 구별하기 어려워하듯이 뱀파이어 또한 인간의 생김새를 구별하기 어려워했다.
킁킁.
킁킁!
시각적으로는 그리드를 찾아내기 힘들었던 엘핀스톤이 마치 개처럼 코를 벌렁거렸다.
후각을 활성화시킴으로서 혈향을 찾는 것이었다.
‘이놈이다!’
엘핀스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로 고정됐다.
머리털이 거칠고 체격은 실한 것이, 깨나 성깔 있고 힘 좀 쓰게 생긴 녀석이었다.
한 마디로 집 잘 지키게 생긴 이놈이 어제 내게 공격을 당한 그놈임이 확실했다.
아니, 비단 어제뿐만이 아니라 첫째 날과 둘째 날도 이놈이었던 것 같다.
엘핀스톤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네놈, 어떻게 살아있는 것이냐?”
<극한의 수혈>을 한 번도 아니고 3일 연속으로 얻어맞았으면서도 살아남다니?
필시 예사 놈이 아니다. 품종 좋은 놈일 것이다.
‘큰 일 날 뻔했군.’
진미를 놓칠 뻔했다.
품질 좋은 인간의 피를 맛보지도 않고 죽여 없앨 뻔했다고 상상하자 정신이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살아남아줘서 고마울 따름!
‘어디 한 번 음미해볼까?’
저벅저벅.
그리드에게 강력한 호감(?)을 품게 된 엘핀스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지는 그를 보고 긴장한 그리드가 주춤거리는 그때였다.
“너희 부모님은 너 같은 놈을 낳고도 안녕하시더냐!!”
“……!”
하등한 인간들조차도 부모를 끔찍이 여기는 마당이다.
본인을 인간보다 상위종이라고 인식하는 뱀파이어들이야 오죽할까?
특히 귀족급 진혈족에게 있어서 부모란 곧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시조 베리아체.
그녀는 우리에게 무려 영생을 부여해줬으니까!
한낱 인간 따위가 감히 운운할 대상이 아니었다.
“내 3백 년을 살면서 이토록 화가 나본 일은 두 번째로구나!!”
엘핀스톤의 피가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얼굴을 무섭게 일그러뜨린 그가 망발을 지껄인 인간, 후로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외쳤다.
“내 오늘 네놈들을 포식해주마!!”
쿠오오오오오!!
엘핀스톤이 압도적인 마력을 발산하였다.
대악마의 힘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지만 최상급 마족보다는 몇 배나 강한 수준이었다.
검성 뮐러에게 육신을 봉인당하고 약화 된 대악마 헬가오, 그를 살짝 상회하고 있었다.
경악하는 일행 중 특히 그리드와 극검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헬가오와 싸워본 경험이 있었기에 엘핀스톤의 강함을 보다 정확히 가늠할 수 있었다.
‘이건 엿 됐다!’
헬가오에게는 화석이라는 약점이라도 있었던 반면 엘핀스톤은 다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도살귀의 안대를 쓰고 관찰해봤지만 급소로 파악되는 구석조차 없었다.
한 마디로 역대급 보스였다.
‘제길!’
후로이의 어그로가 너무 과했다.
엘핀스톤을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말았다.
매번 남의 소중한 부모님을 함부로 언급하기에 언젠가 호되게 당하는 날이 올 줄은 알았지만…
‘그날이 하필 나와 함께 있는 날이라니!’
그리드가 한탄했고, 지슈카는 일행들을 격려하고자 애썼다.
“차라리 잘 됐어! 전면전이라면 그나마 승산이 있으니까!”
엘핀스톤이 두려웠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기습적인 출현과 동시에 행하는 스킬 공격에 있었다.
그것은 대처할 수 없는 수준의 기습이었고, 누군가 1명은 반드시 죽을 수도 있다는 전제를 깔아놔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엘핀스톤과 정면으로 대치하였으니 기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진형을 잘 구축하여 합격을 가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없으려나.”
엘핀스톤이 가공할만한 모습을 선보이자 일행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블러드 필드!”
쿠화하하하학!
엘핀스톤을 중심으로 뻗어 나온 선홍빛의 마력이 반경 30미터의 땅을 지배했다.
그 위에 선 그리드 일행.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리드를 제외한 일행은 끔찍한 악영향을 받게 되었다.
[블러드 필드의 영향으로 혈류가 들끓습니다.]
[매초마다 153의 생명력을 엘핀스톤 백작에게 수혈합니다.]
[모든 치유 효과가 80퍼센트 감소합니다.]
일행 중 생명력이 가장 낮은 사람은 지슈카와 제드노스, 그리고 페이커였다.
궁사, 마법사, 어쌔신인 세 사람의 생명력은 각자 2만 후반에서 3만 초반 대에 불과했다.
그들에게 초당 153의 생명력 소모는 엄청 큰 압박이었다. 2분만 흘러도 생명력을 3분의 2가량 잃게 된다는 셈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 생명력은 단순히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 엘핀스톤의 생명력을 채워준다지 않은가?
엘핀스톤은 지금 이 순간부터 초당 1천 4백에 육박하는 생명력을 실시간으로 회복한다는 뜻이 된다.
“너무 사기네.”
“이곳에서 싸우면 필패다.”
일행은 우선 블러드 필드의 영역에서부터 벗어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잠자코 보내줄 엘핀스톤이 아니었다.
“블러드 레퀴엠.”
엘핀스톤이 양팔을 휘둘렀다.
고상한 곡을 배경으로 깔고 있는 지휘자의 모습을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일행들의 머리 위로 피의 기둥이 떨어졌다.
퍼펑! 퍼퍼퍼펑!!
블러드 레퀴엠!
대상이 몇 명이든 상관없다.
블러드 필드의 영역에 있는 ‘모든 적’들을 확정적으로 공격하는 엘핀스톤의 고유 스킬이었다.
피해량은 최소 1만!
확정 광역 스킬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위력이다.
“크아, 저걸 어떻게 잡아?”
“돌아버리겠네.”
피를 토한 템빨단원들이 일제히 생명력 회복 물약을 복용했다.
하지만 회복량 80퍼센트 감소의 저주 탓에 물약이 재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으니 낭패였다.
그리드가 다급히 노에와 랜디를 소환했다.
노에로 엘핀스톤의 스탯을 빼앗고 랜디로는 엘핀스톤의 스킬 일부를 복제하여 승산을 높일 계획이었다.
하지만 노에와 랜디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
“귀족급 진혈족은 집어삼킬 수 없다옹… 삼키려고 했다가는 내가 도리어 피의 저주를 뒤집어 쓸꺼다옹…”
노에의 짧은 네 다리와 통통한 꼬랑지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리드에게 도움을 줄 수 없어 의기소침한 것이다.
랜디 또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복제할 수 없는 대상이야.”
“파그마도 복제했던 네가 복제할 수 없다고? 엘핀스톤이 파그마보다 더 강하단 뜻인가?”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는 종족적인 한계였고 극복할 수 없는 생리였다.
진혈족 뱀파이어는 도플갱어가 감히 넘볼 수 없는 상위종이었기 때문에 복제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런 빌어먹을.’
마지막으로 믿고 있던 구석이 사라졌다.
절망적인 상황이다.
그리드가 좌절하는 그때 엘핀스톤은 자신의 애병을 소환하고 있었다.
“이야루그트.”
‘야구르트?’
빠르게 말하면 평소 그리드가 즐겨 먹는 개당 200원짜리 음료와 발음이 비슷하다.
하지만 이름만 듣고 우습게 여길 무기가 아니었다.
손잡이부터 검날에 이르기까지 온통 적빛을 띠는 매끈한 장도.
살짝 휜 검날이 예리하여 무엇이든 베어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엘핀스톤의 애병은 무려 <블러드 스톤>을 재료로 만들어진 것이다.
블러드 스톤!
신들의 세상 아스가르드를 대표하는 광물이 <아다만티움>이라고 한다면, 블러드 스톤은 지옥을 대표하는 광물이었다.
인간을 사랑하는 신들이 종종 은총을 내려주는 덕분에 아다만티움은 인간계에도 가끔 출몰하였으나 블러드 스톤은 경우가 달랐다.
역사를 통틀어 인간계에 모습을 드러낸 전력이 거의 없었고 그리드에게도 생소한 광물이었다.
‘저건…!’
파그마의 작품들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다. 파그마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대장장이가 저만한 검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야루그트의 아름다운 생김새와 합리적인 구조에 매료되어 있던 그리드가 문득 <???의 조각>이라는 아이템을 떠올렸다.
정체를 알 수 없던 그 조각과 이야루그트의 색감이 너무나도 비슷했던 까닭이다.
휘몰아치는 핏빛 마력 사이, 금발과 백색 예복을 나부끼고 선 엘핀스톤은 라우엘 취향의 대사를 지껄이고 있었다.
“이야루그트를 보고도 살아남은 자는 여태껏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쩌엉!
다짐해보인 엘핀스톤의 첫 번째 목표 대상은 단연 후로이였다.
피의 길을 달려 적색 검광을 크게 그리는 그의 공격을 극검이 방어했다.
행동을 예측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엘핀스톤의 눈이 살짝 치켜져 올라갔다.
인간 따위가 자신의 일검을 방어하자 다소 놀란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발검, 쾌(快)의 수법으로 이야루그트에 맞섰던 극검은 검을 다시 회수하여 칼집으로 돌려 넣기까지 1초의 간극을 노출하고 있었다.
서걱!
“크…흑!”
빈틈을 포착 당하여 어깨를 크게 베인 극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야구르튼가 뭔가 저거…!’
에고 소드임이 분명하다.
자아를 가지고 주인에게 최선의 검로를 알려주고 있었다.
극검은 알 수 있었다.
엘핀스톤의 움직임이 검술에 최적화되어 있지 않음에도 그 검로를 예측하기가 어려웠던 까닭이다.
퍼엉!
재차 검을 휘둘러 극검을 마무리 지으려는 엘핀스톤의 측면으로 음속의 창이 날아왔다.
폰이 자랑하는 마하 스피어였다.
하지만 그조차도 엘핀스톤에게는 큰 위협을 주지 못했다.
일반적인 뱀파이어들은 전신을 연기화시키는 반면 엘핀스톤은 원하는 특정 부위만 연기화 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허리 부근을 검정 연기로 변환시켜 폰의 창을 흘려보낸 뒤 실체화하고 있는 팔을 휘둘러 반격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잡아?”
상처 입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뒤로 물러선 폰이 실소를 흘렸다.
그 틈에 다른 일행들이 공세에 나섰다.
홍염의 화살, 예측 불가능한 발차기, 신속의 단검, 강력한 폭풍.
모든 것이 일제히 엘핀스톤을 덮쳤다.
제아무리 엘핀스톤이라도 그 모든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는 없었다.
템빨단원들의 수준이 너무 높았다.
하지만 치명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다.
‘이대로는 전멸한다.’
모두가 확신하는 그때, 유일하게 그리드만큼은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리고 있었다.
오로지 그리드였기에 가능한 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