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8화 (93/1,794)

템빨 15권 - 3화

그리드 파티의 뒤를 따르는 수수께끼의 인물이 있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긴 팔과 두꺼운 입술, 그리고 석탄보다 새카만 피부가 인상적인 사내였다.

사내의 이름은 카심.

사하란 제국에게 멸망당한 네로족의 마지막 후예이며 <그림자의 왕>이라는 이명을 지닌 최강의 어쌔신이다.

“흠.”

카심은 그리드가 아직 공작의 작위를 얻기 전부터 그를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리드와 늘 5미터 간격을 유지하고 따라다녔다.

최근에는 페이커라는 젊은 어쌔신의 실력이 올라 7미터 간격을 벌려야했으나 관찰하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카심과 페이커의 실력 차이가 아직도 크다는 반증이다.

“뱀파이어의 도시라…”

그리드 일행의 목적지를 알게 된 카심의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뱀파이어.

마족의 한 갈래로서 지옥이 아닌 인간계에 터를 잡고 사는 종족.

그 강함은 압도적이다.

태생적으로 인간을 포식하게끔 설계 된 상위종이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바글거리는 소굴로 뛰어든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 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진혈족이 문제다. 자작 이하급 진혈족은 그리드 공작 또한 상대할 수 있을 테지만…’

백작 이상급은 아직 무리다.

카심은 그리드를 비롯한 템빨단원들의 전력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으므로 확신할 수 있었다.

‘백작급이라도 만났다가는 저들 모두 전멸할 터인데.’

말려야 하는가?

아니, 굳이 그럴 필요 없다.

카심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리드를 포함한 그리드의 동료들은 대부분 불사의 저주를 받은 존재(유저)였다.

그들에게 죽음의 대가는 크지 않다.

‘패배도 때로는 좋은 약이 되는 법이지.’

그렇지 않은가? 도란이여.

너와 나는 수천 번을 겨뤘고, 전날의 대련에서 패배한 쪽이 항상 다음날 대련에서 승리하지 않았더냐.

“…그립군.”

도란. 같은 스승 아래서 함께 자란 벗이자 유일한 호적수였던 사내.

그가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반지를 어째서 그리드가 지니고 있는가?

카심은 의문이었다. 그 이유를 알고자 그리드를 따라다녔다.

이유를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드가 아이린의 남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모든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리드의 주변을 맴도는 이유는, 그리드가 사하란 제국의 대항마로 성장할 가능성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사하란 제국!

죄 없는 소수민족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모자라서 복종을 거부하면 멸망시키는 악귀들의 소굴!

제국에 대한 카심의 원한은 감히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카심은 그리드가 언젠가 제국을 멸하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다.

스륵.

카심의 인영이 사라졌다. 앞으로 그리드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가 있을 곳은 아이린의 곁이었다.

그리드가 성장하는데 있어서 발목을 붙잡는 사태가 발생하지 말아야하는 바.

카심은 그리드가 사랑하는 아이린을 철저히 보호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피아로가 밭일하고 아스모펠이 병사들을 육성하며 카심이 숨어있는 도시, 레이단.

지금의 레이단은 크라우젤이 있었을 당시보다 훨씬 더 안전했다. 대악마나 드래곤이라도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난공불락의 요새나 다름이 없었다.

덕분에 행정관 라빗은 안심하고 도시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두 달 후 부터는 드디어 적자 재정에서 벗어날 수 있겠군. 노동자들의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슬슬 인건비를 올려줘야겠어. 최대 0.1퍼센트 정도 인상하면 충분히 감동할 테지?’

그리드는 확실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그리드 주변에는 그리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인재들이 참으로 많았다.

이 모든 결과는 그리드 본인이 변화하고 성장하면서 만들어낸 것이었으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았다.

***

[자이언트 웜을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2,330,900을 획득하였습니다.]

[사막 두꺼비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2,607,400을 획득하였습니다.]

‘역시 훌륭하다.’

뱀파이어의 도시로 향하는 길.

그리드 일행이 사막의 몬스터들을 도륙하며 전진하고 있었다.

극검은 연신 감탄하는 중이었다.

‘몬스터들이 주는 경험치가 너무 많아. 적응이 안 될 정도야.’

코크로 섬 던전의 최상층 몬스터들보다 사막의 몬스터들이 최소 20퍼센트의 경험치를 더 줬다.

그렇다고 사냥 시간이 크게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니었다.

막말로 노다지다.

그리드가 레이단의 영주로 임명 된 이후, 템빨단원들이 최상위 랭킹을 장악한 이유가 여기에 숨어있었다.

‘뱀파이어들은 사막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더 높은 경험치를 준다고 했다. 어쩌면 이번 원정으로 307레벨을 달성할 수도 있겠군.’

랭킹 10위권도 꿈이 아니라는 생각에 극검은 잔뜩 들떴다.

그에 반해서 그리드는 불만투성이였다.

‘경험치 오지게 안주네.’

대부분의 유저들이 레벨을 올리는 방식은 사냥이나 퀘스트로 획일화 된 반면 그리드는 레이드를 중심으로 레벨을 올린 특이 케이스다.

그로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적기사들과 레베카교의 원로들은 수천만대의 경험치를, 파스칼은 7억대의 경험치를 줬던 점을 고려해보면 사막의 몬스터들이 주는 2백, 3백만 가량의 경험치는 참으로 형편없는 것이었다.

‘도대체 언제쯤에나 300레벨을 찍을 수 있으려나.’

레전드리 클래스인 <파그마의 후예>는 2차 전직, 3차 전직 같은 개념이 없다.

하지만 300레벨을 달성함으로서 스탯들이 3차 각성을 맞이하는 것은 일반 유저들과 동일한 사항이었다.

스탯 총합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그리드의 경우 300레벨을 달성하는 순간 비약적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

어서 그날이 오기를 꿈꿔보지만 그리드의 현재 레벨은 296에 불과했다. 아직 경험치 게이지가 절반 가까이밖에 차오르지 않은 상태다.

한숨 쉬던 그가 문득 <명성 상점>을 떠올렸다.

히든 피스 <봉인 된 능력> 중 하나를 획득하고 명성이 3만을 돌파하면서 사용할 수 있게 된 시스템.

일전에 자세히 살펴본 적이 있다.

‘경험치 버프 물약도 있었어.’

뱀파이어의 도시에 입장한 후 그 물약을 복용한다면?

‘광렙할 수 있다!’

환희에 찬 그리드가 명성 상점을 소환했다.

“명성 상점!”

띠링~

[Satisfy 최고의 명사들만을 위한 특별 서비스가 찾아옵니다!]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드는 문구가 떠오른 직후, 그리드의 눈에만 보이는 황금색 마차가 하늘에서부터 떨어졌다.

PX가 존재하지 않는 최전방 부대에만 간간히 찾아오는 황금 마차와 무척 흡사한 느낌이다.

이 시스템의 고안자는 필시 최전방 부대에서 근무했던 군필자일 것이라고 그리드는 확신했다.

[귀빈께 명품을 소개합니다!]

<달콤한 사탕>

조그마한 막대 사탕이에요!

부드러운 천연의 단맛을 내는 사탕으로서 그 달콤함은 극상!

그 어떤 화학약품도 첨가하지 않았답니다!

효과:달콤한 사탕을 입에 물면 5분 동안 모든 능력치가 30퍼센트 상승합니다.

*계정당 단 5회만 구입할 수 있는 상품입니다.

가격:20,000명성.

최고의 성능을 발휘하는 한정판 상품부터 시작해서,

<잘생겨 보이는 선글라스>

사각형의 큰 프레임이 압권인 스퀘어 선글라스에요!

얼굴 절반을 가려줄 정도로 크기 때문에 당신처럼 못생긴 남자도 미남처럼 보이게끔 도와줘요!

효과:잘생겨 보임.

*실질적인 매력 능력치가 생성되거나 상승하지는 않습니다. 시각적인 효과 외에는 특별한 기능이 없는 단순 액세서리입니다.

가격:5,000명성

실용성 없는 잡품에 이르기까지.

황금 마차. 아니, 명성 상점에는 약 30여개의 다양한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벤트성으로 가끔씩 기간 한정 상품도 출시된다는 듯하다.

어쨌든 지금 당장 그리드에게 필요한 상품은 단 하나였다.

‘경험치 물약이 어디 갔지? 아, 찾았다!’

그리드의 시선이 특정 상품에 고정됐다.

<뽑아! 뽑아! 다 뽑아!>

랜덤 벤딩머신이에요!

이곳에 단 999명성만 투입하면 상점에서 판매하는 각종 아이템들을 무작위로 싼값에 얻을 수 있어요!

*한정판 상품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일정한 확률로 경험치 획득량 상승 물약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가격:999명성.

‘이거다!’

만렙(레벨 최대치)가 존재하지 않는 Satisfy의 특성상, 경험치 버프 물약은 유저간의 격차를 기하급수적으로 상승시킬 수 있는 물건이었다.

하여 일반적인 게임에서는 흔하디흔한 경험치 버프 물약이 Satisfy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명성 상점은 특별한 곳이었다.

큰 업적을 여럿 남긴 극소수의 유저들만이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니만큼 그에 합당한 매력이 있어야만 했다.

그 매력이라는 것이 바로 경험치 버프 물약이다.

그리드가 홀라당 넘어갔다.

‘싸긴 싸다. 999명성이면 1,000명성도 안 되는 거잖아?’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2만 원대 상품이라면서 29,990원이라는 가격표를 달고 있는 상품이 세상에는 참 많다.

사람을 현혹하기에 충분하고도 남는 마케팅 수법이었다.

‘싼값에 경험치 버프 물약을 얻을 기회다!’

999명성.

유니크 아이템을 제작하면 150명성,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면 500명성을 획득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 봤을 때 결코 싼 가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투자할 가치가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판단한 그리드는 벤딩머신에 999명성을 사용했다.

[<뽑아! 뽑아! 다 뽑아!>상품을 구매하셨습니다.]

촤르르르륵!

머신 속 상품들이 정신없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덜컹!

하나의 상품이 머신으로부터 튀어나왔다.

[축하합니다! 예쁜 머리핀을 획득하셨습니다!]

<예쁜 머리핀>

화려하고 예쁜 머리핀입니다.

여성에게 선물한다면 기뻐할 것입니다.

무게:0.1

“…?”

경험치 버프 물약에 정신을 빼앗긴 결과다.

그리드는 확률 게임의 무서움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청색의 머리핀은 정말로 예뻤다. 아이린의 은발과 훌륭한 조화를 이룰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999명성을 투자해서 얻을 정도로 가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욕설을 지껄인 그리드가 머리핀을 집어 던지려다가 인벤토리에 잘 챙겨 넣었다. 아이린에게 선물해줄 생각에서였다.

아이린을 떠올리자 분노가 가라앉고 침착해졌다.

“그래, 일이 한 번에 잘 풀리기란 어렵지.”

딱 2번.

2번만 더 뽑아보자.

그리드가 연달아 뽑기권을 구매했다.

[축하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꼬치구이를 획득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꼬치구이>

지옥 마견의 뒷다리 살을 100일 동안 숙성한 후 비법 소스를 발라 구운 꼬치구이입니다.

미식룡 레이더스가 즐겨먹을 정도로 극상의 맛을 자랑합니다.

“그냥 개고기잖아!”

[이런! 꽝이네요! 안타깝지만 다음 기회를 노려보세요.]

“심지어 꽝도 있어?”

아직 가상현실게임이 출시되기 전.

범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유저를 확보하고 있던 모바일 게임들을 그리드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PC로 즐길 수 있는 MMORPG만 플레이했던 까닭이다.

하여 그는 뽑기의 무서움을 몰랐고 이렇게 낭패를 겪고 말았다.

“이런 염병! 지랄!!”

그리드의 분노가 죄 없는 몬스터들에게로 향했다.

뱀파이어의 도시에 도착하기까지 그리드는 그 누구보다도 많은 몬스터들을 학살했다.

폰과 레가스조차도 놀랄 만큼 경이적인 사냥 속도였다.

“그리드 의욕 만땅이네.”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만큼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더욱 더 분투하는 걸 거야.”

“그리드는 이번 길드 합병을 계기로 한층 더 성숙해진거구나. 과연 훌륭해.”

선입관이란 무섭다.

오해가 난무하는 가운데, 그리드 일행은 드디어 뱀파이어의 도시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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