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21화
‘그놈이 설마 나를 잊은 건가?’
대마법사 브라함.
1년도 훨씬 더 전, 그는 그리드에게 <혼의 그릇> 제작 의뢰를 맡겼었다.
부활을 위해서는 혼의 그릇이 꼭 필요했던 까닭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그리드는 감감무소식이었다.
무무드의 오브를 통해서 관찰한 놈의 행보를 보면, 놈은 의뢰를 이행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어보였다.
‘파브라늄을 가져가놓고 입을 싹 닦다니!’
인내심의 한계는 진즉에 찾아왔다.
그렇기에 경고의 의미로서 골렘 대군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브라함의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파그마의 후예…!]
영혼의 감정 표현은 솔직하다.
수십 개로 나뉘어 대륙 각지에 흩어진 그의 영혼 조각들이 일제히 붉게 달아올랐다.
그중 하나를 발견한 이가 있었다.
뱀파이어의 첫 번째 도시.
“어머? 더럽고 저급한 마력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게 누구야?”
결계를 쉽게 부수고 나타난 묘령의 여인이 브라함의 영혼 앞에 섰다.
드래곤 하트처럼 영롱한 빛을 띠는 적안으로부터 엿보이는 마력이 엄청나다. 브라함마저도 긴장하게 만들 수준이었다.
[너, 너…!]
청초함과 관능미를 겸비한 흑발, 적안의 미녀.
너무나도 아름다운 탓에 도리어 비현실적인 그녀를 목도한 브라함의 영혼이 물결처럼 요동쳤다.
[마리로즈! 어떻게 네가 봉인에서 풀려난 거지!]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
시조 베리아체의 직계 중 가장 강력한 마력을 지녔다고 알려진 그녀가 브라함의 영혼을 손아귀에 움켜쥐었다.
“그깟 봉인이야 언제든지 깰 수 있었어. 단지 귀찮아서 숙면을 즐겼을 뿐이지.”
그러던 중 인간 사내가 두르고 있는 망토의 피냄새를 맡고 깨어나 버렸다.
마리로즈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었다.
“브라함, 순혈을 상실하고 퇴화해놓고도 나름 잘 버티는가 싶더니 결국 죽어 영혼만이 남았구나. 하찮은 모습이 너와 아주 잘 어울리네.”
[조롱하지 마라!!]
점차 붉게 달아오르는 브라함의 영혼을 마리로즈는 가소로이 여길 따름이었다.
“우리 꾀쟁이 브라함이 대책도 없이 이런 꼴이 되었을 리는 없고. 작금의 모습은 무엇을 위한 안배이려나.”
브라함의 영혼을 마치 찰흙처럼 조물거리며 생각해본 마리로즈가 문득 미소 지었다.
오로지 어둠뿐인 지하 도시를 환히 밝힐 정도로 눈부신 미소였다.
“너, 부활을 꿈꾸고 있구나?”
브라함은 특이한 존재였다.
일족 중 유일하게 타고난 힘에 의존하지 않고 마법의 극의를 탐구했다.
그라면 부활의 마법을 완성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역시나 브라함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네가 어쩔 거지? 너는 결코 내 부활을 막을 수 없다! 대륙 각지에 숨겨놓은 영혼 중 단 하나라도 소멸하지 않고 존재 한다면, 나는 언젠가 완전하게 부활할 수 있어! 그때야말로 기필코 네년을 소멸시키겠다!]
호기롭게 소리치는 브라함의 영혼이 마리로즈는 귀여웠다.
“필멸자 따위가 어디까지 할 수 있을지 궁금하네.”
[…!]
필멸자!
그 저주스러운 말이 브라함을 자극했다.
다시금 붉어지는 그의 영혼을 본래 자리에 돌려놓은 마리로즈가 발걸음을 되돌렸다.
브라함이 그녀를 불러 세웠다.
[내 영혼 조각들을 소멸시키지 않을 셈이냐?]
브라함은 일족으로부터 추방당한 입장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점을 이용, 일족들의 도시에 영혼 조각들을 숨겨놓았으나 지금 이 순간 마리로즈에게 발각 당했으니 소멸당하리라 여겼다.
하지만 마리로즈는 브라함에게 일일이 대처할 생각이 없었다.
지고한 존재인 그녀 앞에서 브라함은 한낱 벌레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귀찮아.”
그걸로 끝이었다.
마리로즈는 그 즉시 자신의 궁전으로 돌아갔다.
미련 없이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브라함의 영혼이 불꽃처럼 일렁거렸다.
‘시조마저도 초월한 돌연변이 년…!’
반드시 부활해야만 한다.
‘부활해서 나를 이 꼴로 만든 네년을 죽이고 그 심장을 빼앗아 영생을 되찾고야 말겠다!’
***
윈스톤은 골치를 썩고 있었다.
북부 제2도시로 성장하면서 온갖 인간 군상들이 유입되다보니 사건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갖가지 세력들이 생성되는가 싶더니 저마다의 이유로 대립했고, 이는 치안의 저하를 유발시켰다.
“아이린 영주님께서 어서 회복하셔야할 텐데…”
임신 6개월 차에 접어든 아이린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유일한 혈육인 스테임 백작은 프론티어에 있었고 남편 그리드는 레이단에 있었으므로 그녀 혼자 외로울 수밖에 없었다.
“후우…”
한숨 뱉는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윈스톤의 기사단장 피닉스도 이제 많이 늙었다.
아이린을 대신하여 영지의 일을 총괄하려니 그로서는 너무 벅찼다.
‘이럴 때 그리드님께서 계셨다면 의지가 되었을 터인데.’
서류더미에 묻힌 채 한숨 쉬는 피닉스에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피닉스 단장님! 레인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했습니다!”
레인은 빈민가의 술집 이름이다.
치안을 어지럽히는 불량배들의 아지트였다.
피닉스의 얼굴이 구겨졌다.
“이번엔 또 웬 놈들이 말썽이란 말이냐?”
“양날부리 상단과 옐로우 길드가 충돌을 일으켰습니다!”
양날부리 상단은 윈스톤의 주류 시장을 꽉 쥐고 있었다.
최근 오크 가죽 매입을 시작으로 사업을 확대하면서 이케일 상단과 마찰을 일으켰는데, 아무래도 이케일 상단이 옐로우 길드를 고용하여 양날부리 상단을 공격한 듯싶다.
‘옐로우 놈들!’
옐로우 길드는 전원 유저로 구성 된 청부집단이었다.
평균 레벨이 무려 200에 육박하는 윈스톤 최강의 길드였다.
그들을 억제하려면 피닉스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가자!”
기사와 병사들을 대동한 피닉스가 출동했다.
***
“북부 최강의 기사라더니 별거 아닌데?”
주점 레인.
수십 명의 유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피닉스가 무릎 꿇었다.
옐로우 길드에게 호되게 당한 것이다.
“노옴…!”
피닉스가 이를 갈았다.
그는 레베카교의 사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동파오.
한때 샤이 일당과 작당하여 PK를 즐기던 그 레베카교의 사제가 최근에는 옐로우 길드에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물론 돈 때문이었다.
게임을 즐기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멋지고 행복한 일인가?
“수고비다.”
옐로우 길드의 마스터 안크가 동파오에게 돈주머니를 던져주었다.
레베카교의 사제 신분으로 피닉스에게 접근, 그를 방심 시켜서 함정에 빠뜨린 활약에 대한 대가였다.
액수를 확인한 동파오가 만족의 미소를 그렸다.
“좋군, 좋아. 후환을 대비해서 목격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 잊지 말라고.”
“당연하지.”
안크는 피닉스와 그의 부하들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영지의 기사와 병사들을 살해함으로서 발생하는 페널티?
감수할 수 있다.
애초에 이번 일을 끝으로 에트날 왕국을 떠날 계획이었다.
‘무아지경의 검을 얻을 수만 있다면!’
<무아지경의 검>
전설의 대장장이 그리드가 초보시절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전설급 아이템.
예상 시세는 150만 골드다.
‘아니, 최근 180레벨대의 유저가 늘어났으니까 경매로 붙이면 200만 골드 이상까지 값이 치솟을 수도 있어.’
인생 역전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나도 이제 여자들 끼고 술 먹을 수 있다고!’
참으로 저급한 탐욕이다.
환희에 찬 안크가 피닉스에게 다가갔다.
피닉스는 이미 망신창이였다.
함정에 빠져서 홀로 옐로우 길드원 40명과 사투를 벌인 여파다.
옐로우 길드원 절반 이상이 사망하였으니 대가가 싸다고 볼 수는 없었다.
“죽어서 부디 무아지경의 검을 드롭하기를 바라마.”
씨익!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안크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돈만 받으면 유저들도 죽이는 그가 NPC 따위를 죽이는데 죄책감을 느낄 리 만무했다.
그리고 여기, 안크 이상으로 살육을 개의치 않는 사내가 나타났다.
쐐액!
흉포한 검이 피닉스의 미간을 노리고 꽂히는 그 순간.
푸욱!
황금의 창날이 날아와 안크의 목덜미에 꽂혔다.
[3,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윽?”
고작 투척 무기 따위가 내게 이만한 피해를 입히다니?
당황한 안크가 창날이 날아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웬 놈이냐!”
대답은 등 뒤로부터 들려왔다.
“맞춰봐.”
콰작!
[11,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미친!’
무슨 공격력이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경악한 안크가 자신의 옆구리에 꽂힌 대검을 확인했다.
바다의 포식자 상어를 연상하게 만드는 푸른빛의 대검이었다.
‘서, 설마!’
안색이 하얗게 질린 안크가 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귀신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드!!”
저 먼 서부에 있어야할 그가 왜 이곳 북부에 있단 말인가?
안크를 비롯한 옐로우 길드원들은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할 말을 잃고 있는 그들에게 그리드가 검을 미친 듯이 휘둘렀다.
“이 시건방진 자식들이, 감히 내 마누라 구역에서 까불어?”
퍽! 푹푹!
굳이 묘사할 가치조차 없는 일방적인 폭행이 시작됐다.
고작 200초반레벨대의 유저들로서는 그리드에게 항거할 수가 없었다.
“그, 그리드 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구석에 숨어있던 동파오가 그리드와 눈이 마주치더니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사기꾼답게 연기의 달인인 그가 되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오늘도 저는 레베카 여신의 인도에 감격할 따름입니다. 이런 곳에서 우연히 당신과 재회하여 구원받다니! 그리드 님! 당신의 은덕으로 회개한 이후 성실히 살아가던 저는 이 악독한 무리들에게 인질로 잡혀 마음대로 이용당하고 있던 차입니다! 당신께서 저들을 토벌하여 저를 구원해주셨으니,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아야할지…!”
“누구냐?”
장황하게 늘어놓던 동파오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당황했다.
“저,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응, 너를 기억하기엔 내 뇌 용량이 아까웠나보다.”
“그, 그런 심한 말을!”
“닥쳐.”
퍽! 퍼퍼퍼퍽!
“크허억!”
이날.
그리드에게 복날 개처럼 얻어맞은 옐로우 길드와 동파오는 죗값을 물어 윈스톤의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스테임 백작령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덤으로 징역 2주도 선고 받았다.
유저의 입장에서 무려 2주 동안이나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는 말은 즉 도태됨을 뜻했으니 절망적이었다.
특히 동파오는 그리드에게 벌써 두 번이나 일을 망쳐진 탓에 게임을 접고 싶다는 욕구를 느낄 정도였다.
“치안을 바로 세운다.”
피닉스에게 윈스톤의 상태를 보고 받은 그리드가 즉각 쥬드를 소환했다.
다인슬레프와 최고의 방어구들로 무장한 쥬드는 무척이나 강했다. 나이가 들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피닉스를 가뿐히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여기 병사들 굴리고, 치안을 어지럽히는 놈들은 가차 없이 처벌해.”
“예.”
쥬드는 아무 생각 없었다.
그리드가 시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했다.
윈스톤의 병사들은 상황을 고려치 않는 쥬드의 혹독한 훈련 앞에 지옥을 맛봐야만 했다.
그 결과 탈영병과 부상병이 속출했지만 훈련을 견뎌낸 소수의 병사들은 정예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들을 기반으로 치안대를 재편성한 쥬드는 윈스톤의 치안을 빠르게 안정시켜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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