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20화
무려 4미터에 육박하는 높이로 솟아있던 금화의 산.
3분이라는 제한시간 동안, 템빨단원들은 총 얼마만큼의 금화를 챙길 수 있었을까?
각자 챙긴 금화의 액수를 합산한 결과,
“2천 1백만 골드로군요.”
“헉! 진짜?”
“와, 어마어마하네.”
“그리드가 또 한 건 해냈구나! 하여튼 대단하다니깐!!”
2천 1백만 골드!
한화로 환산하면 약 252억 원이 된다.
세계 정상급 스포츠 선수들의 연봉 절반에 근접하는 액수였다.
감탄한 폰이 반트너에게 질문했다.
“바스코 레이드 당시 수에론 공대가 얻은 수익이 얼마라고 했지?”
레이단 침공사건이 있기 2달 전.
영혼약탈자 수에론이 길드원들과 함께 바스코의 미궁을 공략 한 바 있다.
영상을 실시간으로 시청했던 반트너가 기억을 떠올렸다.
“흉악한 총명검의 가치까지 합산해서 총 8백만 골드쯤 된다더라.”
“그리드는 그 3배 가까이 되는 금액을 혼자서 번거네?”
엄밀히 말해서 혼자 번건 아니다.
그리드 혼자였다면, 금화를 손으로 일일이 줍느라 20만 골드조차 챙기지 못했을 테니까.
하지만 그리드 스스로의 노력과 선택, 그리고 실력으로 파스칼을 단독 레이드 한 것은 사실이다. 기사소환을 사용한 판단도 훌륭했다.
그리드의 업적을 깎아내릴 수는 없었다.
“그리드, 넌 최고다.”
“암, 우리의 마스터라면 당연히 최고라야지.”
“갑부가 된 걸 축하한다!”
템빨단원들이 그리드를 추켜세웠다.
큰돈을 번 그를 진심으로 축하해주며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질투와 시기는 조금도 없었다.
그리드에 대한 그들의 호감과 의리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하!”
“낄낄!”
“…”
잔뜩 신난 템빨단원들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반면 그리드는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템빨단원들은 돈벼락 맞은 그가 너무 기쁜 나머지 할 말을 잃은 것인 줄 알았다.
물론 오해였다.
그리드는 도리어 분노하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할 말을 잃었을 뿐이다.
‘왜지? 왜 1조가 안 되는 거지?’
그리드가 봤을 때 창고 안 금화의 양은 상상초월이었다.
한화로 최소 1조 원은 될 줄 알았다.
한데 고작 2천 1백만 골드밖에 못 챙겼다고?
“이건 말도 안 돼! 우리는 창고가 폭발하기 전에 대부분의 금화를 창고 바깥으로 운반했잖아!! 셀 수 없이 많은 금화를 지켰잖아!! 근데 왜 고작!! 어째서 고작 2천 1백만 골드밖에 안 되는 거냐고!!!”
“…”
2천 1백만 골드라는 거액을 두고 고작이라는 표현을 대체 몇 번이나 사용하는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이번에는 템빨단원들이 말문을 닫고 말았다.
“이건 사기야! 사기라고!!”
급기야 입에 게거품까지 물고 발광하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설명해주었다.
“폭발이 워낙 강해서 건물 외부까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때 상당량의 금화가 손실되었고, 스킬에 직격 당하여 파손 된 금화들 또한 많아요.”
조금이라도 파손 된 금화는 완전하게 소멸됐다. S.A그룹이 마련한 일종의 안전장치 같았다.
“이런 염병할!!”
기왕 줄 것이면 왕창 줄 것이지, 창고가 폭발하게끔 설계한 것으로 모자라서 파손 된 금화는 소멸시켜버렸다고?
“이 쪼잔한 새끼들이!!”
분노를 금치 못하고 욕설과 비명을 내지르는 그리드였다.
이성을 완전히 상실한 그를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라우엘밖에 없었다.
“2천 1백만 골드도 엄청난 액수잖습니까? 사실 지금 더 당황하고 있는 쪽은 S.A그룹일 겁니다. 우리가 3분 내에 이 정도로 많은 금화를 챙길 수 있으리라고 그들은 상상조차 못했을 거예요.”
기사 소환을 비롯한 각종 스킬들을 금화 챙기기 용도로 사용할 줄이야, 그들이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들은 그리드가 최대 1백만 골드가량밖에 챙기지 못하리라 예측했을 것이다.
작금의 결과는 그리드가 S.A그룹의 뒤통수를 후려친 셈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리드는 도리어 통쾌함을 느껴야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조금의 위안도 얻지 못하고 연신 씩씩거렸다.
“제길! 빌어먹을! 파손 된 금화는 녹여서 금괴로 만들면 되는데 그걸 소멸시키다니!!”
‘듣고 보면 그렇긴 해.’
템빨단원들도 그리드에게 동조하기 시작했다.
S.A그룹이 인플레이션을 막는답시고 벌이는 수작들이 썩 좋게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애초에 Satisfy 유저는 20억을 넘는다. NPC까지 포함하면 수십억이 되는 인구가 동일한 화폐를 사용 중이다. 화폐 좀 푼다고 해서 화폐의 가치가 떨어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그리드가 이를 가는 동안 일행은 교황청 영내를 벗어나고 있었다.
“윈스톤으로 가신다고 하셨죠?”
“후… 그래.”
“잘 생각했다. 부인한테 얼굴도 비추고 그래야지.”
“임신 했다며?”
“육아 시스템을 프린스 메이커식으로 구성했다던데, 부럽다. 애 키우는 재미가 쏠쏠하겠네.”
“으음… 그리드 주니어라. 으음…”
아이린과 득템이의 이야기가 나오자 그리드가 이성을 되찾았다.
머잖아 아버지가 될 존재로서 쉽게 평정심을 잃어서야 되겠느냔 생각에서였다.
잠시 고민해본 그가 라우엘에게 2천만 골드를 건넸다.
“이 돈은 레이단 발전 자금으로 쓰도록 하자. 애초에 너희들이 아니었으면 이만큼 챙기지도 못했을 거고.”
“……!”
라우엘을 비롯한 템빨단원들 전원 크게 놀랐다.
그리드가 영지를 위해서 선뜻 돈을 투자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까닭이다.
“내가 무능한 탓에 영주로서 하는 일이 없잖아? 돈이라도 대야지.”
레이단을 위해서 가장 노력해야할 사람은 본래 그리드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떤가?
그리드는 영주로서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고, 덕분에 템빨단원들만 온갖 분야에서 고생하는 중이다.
그와 같은 사실이 그리드는 쭉 미안하고 고마웠다. 자신 또한 영지 발전에 도움이 되고 싶었다.
“레이단이 발전하면 결국 우리 모두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테니까 투자하면 투자할수록 좋은 거지. 안 그래?”
“옳으신 말씀입니다.”
레이단의 발전은 템빨단을 부강하게 만들 것이다. 이는 그리드의 국가를 세우는 발판이 될 것이며 종국에 이르러 그리드에게 막대한 재물을 선사할 것이다.
2천만 골드와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돈을 말이다.
그리드 또한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투자를 결심한 것이고.
“당신께서 돌아오실 때쯤 레이단은 전과 비할 바 없이 발전해있을 겁니다. 부디 기대해주시길.”
2천만 골드는 레이단에 활력을 불어넣기에 충분한 금액이었다.
옐로우 미스릴 광산이 활성화되고 그를 기반으로 연금술 사업이 확장된다면, 레이단은 목표하고 있는 이상에 한 발 더 가까워진다.
‘제2의 탈리마!’
탈리마.
최강의 무구들을 생산하는 드워프들의 도시.
하지만 염룡 트라우카의 영역 내에 존재하므로 인간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곳.
레이단이 탈리마와 동급의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면…
라우엘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했다.
머잖아 합병시킬 은기사 길드까지 염두에 둔 그가 레이단을 위한 발전 계획을 세웠다.
***
“이렇게 단 둘이 걷는 건 처음이네.”
“그, 그러게.”
라우엘 일행과 작별한 후.
그리드는 지슈카와 단 둘이 윈스톤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꿀꺽!
여정 내내 그리드는 마른 침을 삼켰다.
이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지슈카의 아름다운 얼굴과 아찔한 몸매를 감상하다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드가 나를 보고 있어.’
그리드의 시선을 의식한 지슈카가 일부러 모델처럼 걸었다.
몸의 굴곡을 부각시키며 요염한 걸음걸이를 선보였다.
꿀꺽!
살랑거리는 엉덩이를 바라보는 그리드의 걸음걸이가 엉거주춤해졌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었다.
지슈카의 풍만한 몸매는 언제나처럼 그리드의 취향을 완벽하게 저격하고 있었다.
성격 또한 마찬가지였다.
“오늘은 여기서 노숙하자. 저기… 그리드, 팔베개 해주면 안 될까?”
“후훗, 그리드 엉덩이가 탄탄하네.”
밤에는 도발적인 여인이 되고,
“밥 차릴게.”
“어머, 그리드도 참. 이럴 때 어딜 보는 거야? 사냥할 때는 사냥에 집중해야지.”
“그렇게 쳐다보면 부끄러워.”
낮에는 정숙한 여인이 되니.
“환장하겠네.”
그리드의 지슈카에 대한 호감도가 기하급수적으로 치솟았다.
<한 달의 한 번> 페널티를 초기화시켜주는 <사랑의 묘약>을 명성 상점에서 구매할까 심각하게 고려해볼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지슈카는 떡 줄 생각이 없었다.
‘Satisfy에서 맺어져 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어.’
이미 그리드는 아이린과 혼인한 몸이다. 첩이 될 수는 없었다.
진실 된 마음을 전하는 일은 현실에서 하는 것이 옳았다.
지금 그녀가 그리드를 자극하는 일은 일종의 물밑 작업이었다.
덕분에 그리드만 고생이었다.
그리드는 어서 빨리 아이린이 보고 싶었다.
***
윈스톤에 도착하기 전.
지슈카와 6시간 후를 기약한 그리드가 로그아웃했다.
캡슐 외부로부터 동생 세희의 호출이 있었던 까닭이다.
“왜 불렀어?”
캡슐에서 나온 그리드의 질문에 세희가 퉁명스레 답했다.
“손님.”
“손님?”
시간을 보니 오전 11시다.
일요일 오전.
모든 가족들이 모여 있는 시간에 어떤 손님이 방문했단 말인가?
고개를 갸웃한 그리드. 아니, 영우가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기겁했다.
“유, 유라?”
소파에 앉은 유라가 부모님과 하하 호호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언제 봐도 아름답다.
청초한 매력이 가히 극상이다.
지슈카가 영우의 취향에 100퍼센트 일치하는 미인이라면, 유라는 영우의 취향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미인이었다.
넋을 잃은 채 유라의 미모를 감상하던 영우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어머님의 부름 탓이었다.
“영우야, 뭘 멍하니 있는 거니? 어서 와 앉거라.”
“아, 네.”
그리드가 어색한 폼으로 소파에 앉았다.
한쪽 소파에는 부모님이 나란히 앉아 계셨던 터라 영우는 자연스럽게 유라의 곁에 앉게 되었다.
기분 좋게 만드는 향기가 코끝을 간질인다.
부모님께 목례하여 양해를 구한 유라가 영우에게 곧장 용건을 꺼냈다.
“밥 사주세요.”
“뭐?”
생뚱맞고도 당당한 요청에 영우가 당황했다.
“다짜고짜 밥을 사달라니? 나한테 맡겨둔 밥 있냐? 아니, 너 설마 내가 돈 벌었다는 소식 들은 거야?”
이 마녀가 돈 떼어먹으러 온 건가!
유라는 템빨단원들과 다르다.
나름 인연을 쌓았고 많은 도움을 받았다지만 영우는 그녀를 아직도 경계했다. 아직 친구로 여기기에는 부족한 인연이었다.
못내 서운한 표정을 짓는 유라를 확인한 부모님이 영우에게 호통을 쳤다.
“기껏 찾아와준 손님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니!”
“영우야, 있을 때 잘 해라.”
유라는 예쁘고, 능력 좋고, 돈도 많은데다가 어른에게 깍듯했다.
영우의 부모님이 그녀를 며느리로 삼고 싶어 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얘 별명이 핏빛마녀라는 걸 모르시네.’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사람을 해치는 살인귀!
아직도 첫 만남에서의 인상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는다.
한숨 쉰 영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자.”
영우는 씻지도 않아서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김칫국물 튄 자국이 남은 츄리닝 차림이기도 했다.
그 상태로 유라를 데리고 나가려하는 영우를 어머니가 극구 만류했으나 유라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에게는 자신에게 굳이 잘 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 영우가 도리어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집 근처의 기사식당.
“무슨 일인데?”
유라가 허름한 식당 내부를 신기하다는 듯이 관찰하는 사이, 불고기 백반 2인분을 주문한 영우가 퉁명스레 물었다.
유라가 그에게 통장을 내밀었다.
“이게 뭐야?”
“OGC 방송국에서 받아온 당신의 방송 출연료에요.”
“아.”
방송 출연료를 받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유라가 나서서 자신의 출연료를 대신 받아줬는지, 영우는 섣불리 이해하지 못했지만 내심 공돈 생긴 기분에 기뻤다.
‘기념으로 오늘 저녁에는 아귀찜을 먹어야겠다.’
大자를 먹을 거다. 콩나물은 적게. 아귀는 많게!
수백만 원 정도 생각하고 통장을 열어 본 영우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억!”
막말로 억소리 나는 액수였다.
통장에는 무려 5억…
“아니, 50억?”
경악하는 영우에게 유라가 설명했다.
“원천징수를 제한 금액이에요.”
“아, 아니, 왜 이렇게 많아?”
“제 능력이죠.”
이는 결코 오만이 아니다.
유라는 진실 그대로를 말할 뿐이었다.
“이렇게까지 해준 저의가 뭔데?”
영우의 질문에 유라는 뜸 들이지 않고 답했다.
몸이 10개라도 부족할 정도로 바삐 사는 그녀에게 시간이란 소중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템빨단에 가입시켜주세요.”
영우 또한 뜸 들이지 않았다. 인재의 영입은 그가 갈망하는 것이었으며 유라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인재였다.
무려 통합 랭킹 5위가 아닌가?
그렇다.
비공개 랭커로서 랭킹계에 별반 관심이 없는 영우는 유라가 랭킹 목록에서 사라진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겁나게 환영한다!”
이날 두 사람은 불고기 백반을 아주 맛있게 먹었다.
유라는 식사 내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놀랄만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