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19화
‘보고 싶어.’
신궁 지슈카.
그녀는 바이란의 영주로서 책무를 다하는 중이었다.
바이란을 발전시키는 한편 주기적으로 숲의 수호자를 레이드, 발생하는 각종 자원을 레이단에 보급했다.
레이단이 쫄딱 망하지 않고 근근이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그녀의 활약 덕분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슈카는 슬슬 염증을 느꼈다.
무려 7개월 가까이 그리드를 만나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드가 보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남미 제일 미녀로 추앙 받으며 전 세계 상위 0.1퍼센트 남성들에게 구애 받아온 그녀가 그리드를 상대로 상사병 증세를 보이는 것이다.
“하아.”
다 때려치우고 그리드 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에 한숨만 나오는 그때였다.
[당신의 군주 <그리드>가 당신을 소환합니다. 소환에 응하시겠습니까?]
“어머?”
고대하고 고대하던 알림창이 타이밍 좋게 떠올랐다.
‘내가 보고 싶어 한다는 걸 안거야?’
텔레파시가 통했나보다.
운명을 느낀 지슈카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연애 경험 전무한 그녀의 망상이 펼쳐졌다.
‘사전예고도 없이 소환을 요청한 걸 보면…’
나를 위한 깜짝 이벤트를 준비한 건 아닐까?
“지슈카, 나도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 매일 밤 아름다운 네 모습을 상상하며 몸부림쳤어.”
섹시한 표정을 짓고 마초적으로 말하는 그리드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헤벌쭉.
눈에 콩깍지가 씌어도 단단히 씌인 지슈카의 몸이 배배 꼬였다. 수줍음이 묻어났다.
태어나 처음으로 남성에게 연심을 품은 그녀는 마치 소녀와도 같았다.
몸매와 옷차림은 미성년자 관람불가 급이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소환에 응할게.”
일고의 고민도 없이 그리드의 부름에 화답한 지슈카.
그리드의 곁으로 텔레포트 된 그녀가 처음으로 목격한 광경은 금화의 산이었다.
‘나를 위해 준비한 거야?’
지슈카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드의 이벤트에 감동한 것이다.
“이 돈은 너와 나의 결혼 자금으로 쓰일 거다.”
이어질 그리드의 멘트를 상상해보면서 지슈카가 얼굴을 붉혔다.
‘그리드도 참, 결혼보다는 연애가 먼저잖아.’
연애도 한 번 못해보고 결혼부터 하는 것은 급한 감이 있었다.
내가 비록 그리드에게 연정을 품었을지언정 그렇게 섣부른 여자는 아니다.
지슈카는 결혼하기에 앞서 그리드를 보다 자세히 알고 싶었다.
낮에는 어떤 남자이고 밤에는 어떤 남자인지…
망상에 빠져있는 그녀의 귓가로 익숙한 음성들이 들려왔다.
“이야, 지슈카. 오래간만이다?”
“그동안 더 예뻐졌는데? 남자 친구 생겼냐?”
“여성용 갑옷은 왜 레벨이 오를수록 노출도가 오르는 거야? 고맙게.”
폰, 레가스, 반트너, 토반, 페이커 등등.
망상에서 벗어나 현실로 눈을 돌려보니 전 체다카 길드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
나와 단 둘이 만나려던 거 아니었어?
당황한 지슈카가 그리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드는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노에의 주둥이에 금화를 쑤셔 넣느라 바빴다.
그리드가 소리쳤다.
“돈 챙겨! 돈! 이곳은 앞으로 2분 40초 후에 폭발하니까 그때까지 최대한 많은 돈을 챙겨라!”
“…그게 우리를 소환한 이유였군.”
템빨단원들이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반면 멍하니 있는 지슈카에게 라우엘이 재촉했다.
“뭐하십니까? 어서 돈 챙기시죠.”
금화의 양이 어마어마하다.
부지런히 챙긴다면 레이단의 재정난을 극복할 수도 있어 보였다.
[62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75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일일이 주워가지고는 한도 끝도 없겠네.”
유저가 한 번의 동작으로 챙길 수 있는 금화의 양에는 한계가 있었다. 손이 허용할 수 있는 부피의 문제였다.
“유페미나가 있었으면 매스텔레포트로 한꺼번에 옮길 수 있었을 텐데.”
“그러게… 걔는 왜 하필 이럴 때 비접속 상태냐.”
“삽이라도 챙겨올걸.”
“방패로 쓸어 담을까?”
“오, 좋은 생각인데?”
“흐음.”
투덜거리는 반트너와 토반 사이에서 잠시 생각해보던 라우엘이 스킬을 사용했다.
“지룡의 발톱.”
쿠르르릉!!
창고의 바닥 깊은 곳에서부터 3개의 돌기둥이 솟아나왔다가 곧 소멸했다.
깊이 파인 구덩이를 확인한 라우엘이 바람을 일으켰다.
“풍룡의 포효.”
콰콰콰쾅!!
바람에 휩쓸린 금화들이 구덩이 속으로 폭포수처럼 쏟아져 들어갔다.
땅 속 깊이 묻힌 금화들은 이제 잠시 후 발생할 폭발로부터 안전을 보장 받게 되었다.
다른 템빨단원들도 각자의 스킬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마하 스피어!”
쿠와아아아앙!!
폰이 전개한 음속의 창이 창고의 벽을 허물어버렸다. 외부와 직행하는 통로가 열린 것이다.
“차지!!”
쿠웅! 쿵!!
방패를 전면에 세우고 나란히 선 반트너와 토반 콤비는 불도저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무너진 벽면과 가까운 쪽으로 금화의 산을 서서히 밀었다.
한편, 산의 정상에 오른 피아로가 양손에 호미와 괭이를 무장했다.
“무상농법.”
파파파파파파팟!!
가히 신기였다.
괭이와 호미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움직여 금화의 산을 파냈다.
대량의 금화가 벽 바깥까지 날아가 차곡차곡 쌓였다.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던 아스모펠도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오러 익스플로전.”
쿠콰콰콰쾅!!
강맹한 폭발이 발생하면서 폰이 뚫어놓은 구멍보다 배는 더 큰 구멍이 벽에 뚫렸다.
그곳을 겨냥한 아스모펠이 오러 토네이드를 전개, 대량의 금화를 일거에 벽 바깥으로 날려버렸다.
하나 같이 굉장한 광경이었다. 그들의 능력이라면 제한 시간 내에 금화 대부분을 창고 바깥까지 운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반면 그리드는 어떤가?
“아오! 이걸 언제 다 챙겨!”
연신 두 손으로 인벤토리와 노에의 주둥이에 금화를 쑤셔 넣는 중이다.
돈에 눈이 멀어 주변을 살피지 못하는 그에게 피아로가 넌지시 말했다.
“협소한 시야는 늘 독이 되는 법이지요.”
그리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끓어오르는 탐욕에 져서 잠시 망각하고 말았다.
번뜩 정신을 차린 그리드가 템빨단원들을 살폈다.
‘스킬을 활용하면 되는 거였구나.’
뒤늦은 깨달음을 얻은 그리드가 우선 노에를 떼어놓았다.
바둑알처럼 커진 노에의 눈동자에는 흥건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퉤퉤퉷! 반짝이는 이거 맛없는 것이다! 냥! 꺼윽!”
“맛이 중요한 게 아니야. 뱉지 말고 계속 먹… 너, 왜 트림을 하냐?”
“먹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냥!”
“아니! 씹어 삼키지 말고 주둥이에 넣어 두라고! 다람쥐가 도토리 보관하듯이!”
노에는 지옥 제일 마수다.
영혼 섭취 스킬을 사용할 때 보면 주둥이의 크기를 자유자재로 늘릴 수 있었다. 금화를 끊임없이 흡입할 수 있음이 분명했다.
확신한 그리드가 노에에게는 별도로 금화를 먹게끔 명령한 후 자신은 실패작을 꺼내 쥐었다.
‘그리드, 그동안 네 실력은 얼마나 늘었지?’
템빨단원들의 시선이 그리드에게 집중됐다.
피아로와 아스모펠도 기대하는 눈치였다.
귀추가 주목 된 가운데 도살귀의 안대를 쓴 그리드가 스킬을 전개했다.
“파그마의 검무, 초(超).”
쿠오오오오오!
심상찮은 기운이 방출되며 그리드의 흑발이 나부꼈다.
번뜩이는 적광으로 금화의 산을 관조한 그리드가 신중하게 실패작을 휘둘렀다.
콰앙! 쿠콰콰콰쾅!!
쿠르르르르릉-
검기의 절묘한 타격에 균형을 잃은 금화의 산이 붕괴되면서 앞서 폰과 아스모펠이 뚫어놓았던 창고 벽면으로 쏟아졌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금화의 파도를 확인한 피아로와 템빨단원들이 놀라워했다.
‘훌륭하다.’
실력이 또 늘었다.
지난 수개월 동안 단독 행동해온 그리드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비록 템빨에 의존한 것일지언정 사물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능력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모두가 감격하는 그때, 토라져서 입을 비죽 내민 지슈카가 활시위를 놓았다.
“피할 사람은 피하던가. 피닉스 애로우.”
쿠와아아아아앙!
압도적인 위력이었다.
이제 절반이 채 남아있지 않았던 금화의 산을 화염의 새가 통째로 창고 바깥까지 날려버렸다.
상당량의 금화가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녹아 바닥에 눌어붙었지만 아쉬워할 필요가 없었다.
이미 창고 폭발 10초 전이었다. 지슈카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금화의 산 절반을 두 눈 뜨고 잃었을 것이다.
“헉헉… 모두 피해!”
자칫 피닉스 애로우에 적중당할 뻔해서 질겁한 그리드가 외치자 모두의 신형이 창고 바깥으로 날아갔다.
직후 지축을 뒤흔드는 폭발이 발생했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앙!!
“꺄악!”
“이번엔 또 뭐지?”
무너진 원로회실 근처에 모여 있던 수천 명의 인파가 폭음이 들려온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폭포 너머 제1기도실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성기사들이 소리쳤다.
“원로님들을 살해한 범인들의 소행일 것이다! 당장 쫓아라!”
신속하게 움직이는 그들을 데미안이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예, 여신의 대행자님.”
데미안은 최고위 성직자들에게 무시당하는 반면 대부분의 교인들에게는 큰 지지를 얻고 있었다.
깍듯이 받들며 멈춰 서는 성기사들에게 데미안이 말했다.
“여러분께서는 이곳에 남아 조사를 마저 해주세요. 저곳은 저와 이사벨 쨩, 그리고 그리드님이 향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신의 대행자께서 원하신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원로들이 죽은 현재 최고의 실권자 중 하나가 바로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의 뜻을 따른 성기사들이 즉각 길을 열었다.
“가죠.”
데미안이 이사벨과 그리드에게 눈짓했다.
여기 있는 그리드는 랜디였다. 신성력의 영향으로 인해 형체가 점차 이상해지고 있었다. 그리드인 듯 그리드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따라 붙어!”
급한 마음에 서둘러 자리를 옮기는 데미안 일행을 OGC의 촬영용 마법구들이 뒤쫓았다.
OGC 방송국은 레베카교의 원로회를 박살낸 인물이 도대체 누구인지 반드시 밝혀내고 싶었다.
하지만 잠자코 있을 데미안이 아니었다.
도약한 그가 피아로, 크라우젤을 상대로 수련한 검술을 선보였다. 수십 대의 마법구를 차례대로 부셨다. 시청자들의 공분을 살 터였으나 망설이지 않았다.
그리드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
“파스칼이 숨겨두었던 재물인가 보군요.”
사방팔방에 널려있는 금화들을 각자 인벤토리에 쑤셔 넣고 있는 그리드와 템빨단원들.
그들을 본 데미안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파스칼이 이 많은 재물로 무슨 수작을 부려왔을지 떠올리고 혐오하는 것이다.
“데미안, 꼭 교황이 되라.”
그리드가 진중한 표정으로 응원해왔다.
쭈그리고 앉아 더듬더듬 금화를 주우면서 말해봤자 그다지 멋지진 않았다.
하지만 데미안에게 그리드는 더 없이 빛나보였다.
“반드시 교황이 되어 당신께 필요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그리드가 모든 것을 안배해놓았다.
이사벨을 살리고 파스칼을 죽였다.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교황이 되지 못한다면 면목이 없다.
결의에 찬 눈빛을 보내오는 데미안에게 든든함을 느낀 그리드가 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믿고 기대하마.”
“…”
데미안이 울컥했다.
그리드가 자신을 도운 의도가 순수하지 않음을 그 또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신뢰를 보내고 있음은 사실이 아닌가?
진성 오타쿠인 내게 색안경을 끼지 않고 대하는 사람은 그리드가 처음이었다.
“혹시… 저도 템빨단에 가입할 수 있겠습니까?”
예비 교황이 길드원이 된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다.
쌍수 들고 환영하려는 그리드를 라우엘이 제지했다.
“레베카교는 표면적으로 중립이어야만 합니다.”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고 교리를 전파하는 레베카교의 특성상 중립을 지킴이 옳다.
노골적으로 특정 세력과 결탁했다가는 여러 세력에게 반감을 사고 종교의 가치가 하락할 우려가 있다.
“그렇다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그리드가 의기소침해 있는 데미안에게 악수를 청했다.
“뭐, 같은 길드 소속이 아니면 또 어때? 우리가 영원한 동반자라는 사실에 변함은 없을 텐데. 길드 가입은 교황 임기 끝나고 해라.”
“…예.”
친구를 얻었다.
기쁨에 미소 지은 데미안이 그리드가 건넨 악수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