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92화 (87/1,794)

템빨 14권 - 18화

치리타 백작의 삼남 파스칼.

고작 1, 2년 늦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후계 구도에서 밀린 그는 세상의 불합리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세상을 원망하며 좌절했는가?

아니다.

파스칼은 도리어 노력했다.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고 출가한 후 오로지 레베카 여신을 섬기며 고행을 견뎠다.

그 결과 운명을 바꿨다.

머잖아 교황이 될 수 있었다.

‘이제 내가 군림할 차례였다!’

갑이 됨으로서 이 불합리한 세상을 만끽할 준비를 끝냈다.

한데 그리드가 나타나 훼방을 놓은 것이다.

‘그리드! 네놈이 내 삶을 송두리째 망쳤다!!’

분하다. 심장이 터질 것만 같다. 역류하는 피가 두 눈을 통해 분출되었다.

“크아아아아악!!”

잿빛으로 산화하는 파스칼의 원망어린 시선이 그리드를 꿰뚫는다.

그 눈빛에 증오와 저주가 담겨있음을 모를 그리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주? 하려면 해라.’

나는 이미 지옥 같은 삶을 살았고 견디어 극복했다.

설령 저주로 인해 새로운 지옥이 열릴지라도 반드시 또 극복할 수 있다.

성장한 그리드의 확고한 신념이다.

“노오오오옴!!”

흔들림 없는 그리드의 눈동자를 목도한 파스칼은 한줌의 빛이 되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도 분함을 감추지 못했다.

원망어린 비명이 원로회실에 메아리쳤고, 그리드의 시야에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무수한 사람들을 비탄에 빠뜨린 교황 후보 파스칼을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725,477,950을 획득하였습니다.]

..

무려 7억 2천대의 경험치!

파스칼은 과연 고레벨 네임드 보스답게 어마어마한 경험치를 뱉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만족하지 못했다. 도리어 실망한 기색이었다.

‘최소 2레벨은 오를 줄 알았는데.’

여태까지 그리드는 보스를 레이드할 때마다 레벨을 여러 개 올렸다.

하지만 296레벨인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레벨 업에 필요한 경험치량이 대폭 증가한 것이 문제였다.

7억이 넘는 경험치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경험치 게이지가 절반도 차오르질 않았다.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이제 레이드만으로 레벨을 올리는 건 불가능하겠군.’

남들은 넘볼 수 없는 존재들을 홀로 사냥함으로서 광렙을 해온 그리드였지만 이제 그 방법에 한계가 찾아온 것이다.

사냥 노가다가 필요한 시점이다.

물약 바리바리 싸들고 사냥터에 죽치고 앉아 몬스터를 잡고, 또 잡고.

지긋지긋한 단순 반복 작업의 결정체를 체험할 차례다.

첫 번째 사냥 대상은 당연,

“헉.”

탐욕과 살기로 물든 그리드의 시선과 마주치자 질겁하는 16인 원로들.

“너희들이다.”

다크버스의 귀걸이에 귀속 된 <흑화>는 12시간에 1번밖에 사용할 수 없다.

지속 시간은 5분, 재사용 대기 시간은 12시간.

신기에 내장 된 백화와 달리 일개 아티팩트에 내장 된 흑화는 불완전했다. 효율적이지 못했다.

이제 그리드는 마기에 의지할 수 없었다.

순수한 능력만으로 16인 원로들과 맞섰다.

“홀리 미사일!!”

“홀리 웨이브!!”

“그레이트 힐!!”

이를 악 문 원로들이 그리드에게 저항했다.

파스칼과 같은 꼴을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가 그들의 집중력을 증폭시키고 있었다. 마법 캐스팅 속도가 전보다 더 빨라졌다.

“연(聯)!”

히든 피스 <봉인 된 능력> 중 하나를 획득하고 고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10퍼센트 감소한 그리드.

이제 그는 파그마의 검무를 보다 자주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신속의 검격으로 2명의 원로들을 베어 넘긴 후 꺾을 수 없는 정의로 마무리.

이어서 회전하며 살(殺)을 전개했다.

푸욱!!

동료에게 힐을 사용해주던 원로가 나부끼는 후드짚업에 황망해하던 도중 피를 토했다.

아찔한 시선을 내려 보니 가슴을 푸른 대검이 꿰뚫고 있었다.

“크, 크억…!”

[타락한 원로 화이버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45,908,230을 획득하였습니다.]

[악마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타락한 원로 사이런스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46,441,000을 획득하였습니다.]

[악마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타락한 원로 라이드를 해치웠습니다.]

..

3차 전직 원로들이 주는 경험치가 어마어마했다. 동레벨대 일반 몬스터보다 최소 10배 이상 더 줬다.

준네임드급 NPC들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뻐하는 그리드였지만 실제적인 전황은 썩 좋지 못했다.

마기가 사라진 그리드의 공격력으로는 원로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스킬을 사용하지 않고 평타만으로는 그들을 해치는 일이 불가능했다.

그리드가 스킬 쿨타임에 발목을 잡히는 동안 힐로 버틸 수 있었던 원로들이 연신 마법을 전개, 그리드에게 유효타를 입혔다.

퍼펑!

퍼퍼퍼퍼펑!!

빛의 폭격이 계속된다.

그리드의 상처가 늘어갔다. 붉게 염색한 성스러운 빛의 갑옷 세트가 점차 넝마가 되어갔다.

‘이대로는 안 돼.’

판단한 그리드가 창녀들을 보호하도록 지시했던 파브라늄을 회수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쩌정! 쩌저정!!

황금의 창날이 그리드를 보좌하기 시작한다.

때로는 공격을 방어해 그리드를 지켰고, 때로는 적을 공격해 그리드의 파괴력을 배가시켰다.

“크아악!”

리파엘의 창날이 홀리 실드를 부수고 그리드가 평타를 꽂는 연계가 연달아 펼쳐지자 원로들의 생명력 유지선이 낮아졌다.

마나 물약을 복용한 그리드가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올 때마다 난사, 그들을 하나씩 확실하게 처리했다.

‘버티기 힘들다!’

원로들의 얼굴에 낭패가 서렸다.

애초에 사제란 전투 전면에 나서기보다 보조에 적합한 직업군이었다. 그들의 능력만으로는 그리드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었다.

“우오오오오!!”

그리드가 점차 미쳐 날뛰었다. 원로들을 월등히 상회하는 육체능력을 기반으로 종횡무진 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 위기의 순간도 찾아왔으나 도란의 반지가 그를 한 번 더 살렸다

5초 무적과 도란의 반지.

그리드는 목숨이 3개 있는 셈이나 다름이 없다.

직업빨과 템빨이 결합되었으니 막말로 사기였다.

‘이런 빌어먹을!’

어느새 여덟밖에 남지 않게 된 원로들.

그들이 결국 최악의 수단을 사용했다. 구석에 벌벌 떨고 있는 창녀들을 인질로 잡았다.

“거기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마라! 네가 움직이면 이 계집들을 모조리 죽여 버리겠다!”

죄 없는 창녀들.

재수 옴 붙어서 살육의 현장을 목격하게 된 그녀들이 이제는 목숨까지 위협받게 됐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멈칫하는 그리드를 확인한 원로들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역시 통하는군!’

‘이제 이대로 성기사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면 된다!’

그리드는 황금의 창날로 굳이 창녀들을 보호해주었다.

그를 통해 그가 창녀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간파한 원로들의 한 수였다.

하지만.

“죽여.”

“뭣…!”

멈추는가 싶던 그리드가 다시금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는 창녀들을 겨냥한 원로들의 손에 마력이 응집되고 있음에도 개의치 않았다.

“그녀들이 죽어도 나한테 손해일 건 없지.”

물론 기분이야 찝찝하다.

도의적인 문제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죄 없는 사람이 내가 일으킨 소란에 휩쓸려 죽게 되는 것을 달가워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에 그리드도 최선을 다했다.

창녀들을 지키기 위해서 내 피해를 감수하고 리파엘의 창날을 지원해줬다.

그걸로 족하다.

지금에 와서 그녀들 때문에 퀘스트를 실패할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잘 됐지.’

창녀들은 증인이다.

그리드가 파스칼과 원로들을 해치웠음을 지켜본 목격자로서 그리드에게 불리한 증언을 할 우려가 있었다.

그녀들이 죽는 편이 그리드에겐 도리어 나았다.

저벅저벅.

그리드가 거침없이 다가오자 겁에 질린 원로들이 악을 썼다.

“가, 가까이오지 마라! 정말로 이년들을 죽이겠다!”

지이잉-

창녀들을 향한 원로들의 손끝에 실린 마력이 점차 강해진다.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죽이라니까?”

터엉!

그리드가 도약했다.

허공에서부터 검무를 펼치는 그를 본 원로들의 눈이 뒤집혔다.

“진짜로 죽인다!”

콰콰콰콰콰쾅!!

두려워 숨죽인 채 흐느끼고 있던 창녀들의 몸이 빛의 폭발에 휩쓸렸다.

비명과 함께 재가 되는 그녀들을 확인한 그리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파(波).”

쩌엉!

굽이굽이 물결치는 검기의 파도가 여덟 원로들을 강타했다.

모든 속도가 저하되어 허우적거리는 그들을 푸른 검광이 베고, 또 베었다.

약 10분간의 사투 후.

“허억… 허억…”

이제 원로회실에 남은 것은 그리드와 치리타 백작 단 둘뿐이었다.

“제, 제발! 제발 살려주시오!”

스태미나가 소진되어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그리드에게 치리타 백작이 애원했다.

파스칼과 원로들이 무력하게 당하는 것을 목격한 그는 반쯤 실성한 상태였다.

그리드는 냉담했다.

“말했잖아. 여기서 살아나가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일 거라고.”

푸욱!!

“쿨럭…!”

[사하란 제국의 백작 치리타를 해치웠습니다.]

[경험치 3,110,400을 획득하였습니다.]

[2천 골드를 획득하였습니다.]

[악마력이 1 올랐습니다.]

“이건 또 의외의 수확이군.”

2천 골드.

한화로 240만원이나 되는 거금이다.

옷차림부터 화려하다 싶더니 어마어마한 골드를 드롭하는 치리타 백작이었다.

[타임 어택 퀘스트 <증거인멸>을 완료하였습니다!]

[사하란 제국에 당신의 소문이 퍼지는 것을 억제하였습니다!]

쿠르르르르르…

전투의 여파로 원로회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내려앉는 천장과 균열을 일으키는 기둥을 확인한 그리드가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주인! 표정이 왜 그러냐! 냥!”

이사벨의 방으로 피신한 그리드.

낡은 침대에 드러누워 있는 그를 노에가 걱정했다.

분위기가 영 어두웠던 까닭이다.

자신 때문에 죽게 된 창녀들을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던 그리드가 녀석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 일 아니다.”

사랑하는 아이린 탓에 가끔씩 망각하는 사실이지만, 이곳은 결국 게임 속 세상이다.

NPC들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좋지만 필요 이상의 몰입은 독이다.

상기한 그리드가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파스칼이 드롭한 아이템들을 하나씩 확인했다.

<여신의 정수 1개>

<축복 받은 무기 강화석 5개>

<축복 받은 방어구 강화석 7개>

<최상급 마석 11개>

<파스칼의 비밀 창고 열쇠>

장비 아이템은 드롭되지 않았다.

다소 실망스러운 부분이지만 그리드는 충분히 만족했다.

<여신의 정수>

레베카교의 3대 신기(모작)을 제작할 때 필수적으로 필요한 재료이다.

안 그래도 소량의 정수밖에 보유하지 못한 터라 아쉬운 차였는데 때마침 파스칼이 드롭해주자 기쁠 따름이다.

<최상급 마석>

개당 시세가 4천 골드를 호가하는 물품으로서 마법 아이템 제작에 요긴하게 사용할 수 있다.

‘축복 받은 강화석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고.’

파스칼이 드롭한 아이템 중에 귀하지 않은 것은 없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그리드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황금색 열쇠였다.

<파스칼의 비밀 창고 열쇠>

파스칼의 비밀 창고를 개방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파스칼의 비밀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산을 이루고 있습니다.

‘금은보화의 산…!’

도대체 얼마나 많은 재물이 쌓여있기에 산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걸까?

‘떼부자가 되는 건가!’

김칫국 마신 그리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데미안으로부터 귓속말이 도착했다.

-지금 밖에 난리가 났습니다! 파스칼과 원로들이 죄다 누군가에게 살해당했어요!

-내가 죽였다.

-네?

귀를 의심하는 데미안에게 그리드가 질문했다.

-파스칼의 창고가 있는 위치를 알고 있어?

잠시 멍하니 있던 데미안이 뒤늦게 답했다.

-창고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평소 파스칼이 제1기도실을 애용했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제1기도실.’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곧장 제1기도실로 향해 곳곳을 뒤져 창고문을 발견했다.

철컥.

열쇠를 꽂아 창고문을 개방한다.

솨아아아아-

찬란한 금빛이 시야를 뒤덮었다.

눈이 부셔 괴로울 지경이다.

“대박…”

거대한 창고 안에 골드가 정말 산처럼 쌓여있었다.

드래곤 레어의 축소판 같았다.

“이게 다 내거란 말이지?”

이걸 다 챙기면 한화로 족히 수백억은 될 터!

괄약근이 부르르 경련할 정도의 희열이 엄습해온다.

“푸하하하하! 난 부자다! 부자야!!”

환희에 찬 그리드!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알림창이 떠올랐다.

[파스칼의 신성력을 감지하지 못하여 비밀 창고의 안전장치가 가동합니다.]

[3분 후 창고가 폭발합니다!]

[3분 안에 최대한 많은 재물을 챙기십시오!!]

“이런 염병!”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다.

3분 안에 최대한 많은 금화를 챙기려면 어찌해야하는가?

우왕좌왕하다가 급한대로 노에의 주둥이에 금화를 쑤셔 넣던 그리드가 문득 묘안을 떠올렸다.

“기사 소환!!”

경험치를 독식하고자 위기의 순간에도 결코 사용하지 않았던 시스템이 발동한다.

“주군의 부름에 응합니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그리드!”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비롯한 약 10여 명의 템빨단원들이 빛과 함께 등장했다.

그리드가 소리쳤다.

“돈 챙겨! 돈!”

“…”

과거, 제국의 기둥이 되리라 평가 받았던 우리의 역사적인 첫 임무가 망토를 보따리 삼아 금화를 챙기는 일이 될 줄이야…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심경이 복잡미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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