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13화
세계 최고의 미녀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유라.
그녀의 아름다움은 취향과 인종마저도 초월한다더니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실물이 TV나 학보로 보았을 때보다 수백 배 더 예뻤다.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부셔서 실명할 것만 같았다.
화장기 하나 없는 모습이라는 점이 경악할 부분이다.
“…….”
유라의 미모에 홀린 이국래 국장의 넋이 나갔다.
그의 나이 올해 마흔다섯.
20년 전. 첫사랑과 결혼에 성공한 이후 바람 한 번 안 피워본 그의 절개가 최초로 위기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허험! 험!”
이국장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헛기침 하면서 마음을 추스른 그가 밝은 미소를 그렸다.
“유라 양께서 우리 방송국을 방문해 주시다니, 개국 이래 최고의 경사로군요. 한데 무슨 용무로 찾아오셨다고요?”
“영우씨의 몸값을 청구하려고요.”
“영우씨…?”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그리드.’
그의 본명이 신영우였다.
중계팀원들이 술령였다.
“그리드 생중계 내보내는 거, 그리드 본인한테 허락받았던가?”
“허락은 무슨. 애초에 그리드인 줄도 몰랐는데.”
“허, 자칫하다가는 큰일 나겠네.”
“근데 왜 유라가 그리드 일에 나서는 거야?”
“그리드랑 사귄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지.”
“…그리드는 지슈카랑 사귄다지 않았었나? 저번에 스캔들 났었잖아?”
“스캔들은 유라와도 났었어.”
“…….”
남성들이 치를 떨었다. 그들은 그리드가 너무나도 부러웠다. 피눈물이 흐를 지경이었다.
‘다옴 생에는 꼭 그리드로 태어나고 만다!’
정작 그리드로 태어나면 땅을 치고 통곡하며 후회할 테지만, 그 사실을 모르고 헛된 바람을 갖는다.
“자리를 옮기시죠.”
이국장이 유라를 자신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편성국장실.
소파에 앉은 유라의 자세로부터 절도와 기품이 넘쳐흘렀다. 찻잔을 쥐는 모습조차도 고상하여 마치 귀족을 연상하게 만든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유라가 본론을 꺼냈다.
“이번 중계로 창출되는 광고 수익의 30퍼센트를 영우씨에게 지불하세요. 그러면 영우씨를 허락도 없이 중계한 것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광고수익의 30퍼센트라고요?”
터무니없는 액수다.
방송계의 생리를 깨뜨리는 수준이었다.
“농담이 지나치십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가 바로 유라였다.
몸값이 독보적으로 높은 그녀조차도 방송 출연료를 광고수익과 비례해서 받지는 않았다.
그리드가 대세 중의 대세라고는 하나 유라의 요구는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3억 5천을 드리죠.”
유라와 동급으로 쳐주는 액수였다. 이것도 필요 이상의 성의를 표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유라를 만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타인의 게임플레이 영상을 허락도 없이 상업적 용도로 사용할 경우. 심각한 법적 책임을 문다는 사실을 국장님도 잘 아실 탠데요.”
“…….”
“안 그래도 이번 중계. 잔학성이 높아서 방통위도 벼르고 있겠죠. 굳이 일을 크게 만들지 마세요. 과한 욕심은 도리어 독이 되는 법이랍니다.”
유라는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재력가다. 그녀의 곁에는 최고의 법조인들이 붙어있었다.
그녀가 무지하지 않음을 이국장은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신중하게 생각하고 답했다.
“우리의 입장이 불리함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30퍼센트는 너무 많습니다.”
이번 생중계의 광고 수익은 150억원에 육박할 것으로 추산됐다. 업계 신기록이었다.
그중 3분의 1 가량을 개인의 출연료로 넘기라니 내킬 리가 만무했다.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고 혼자서 결정할 사안도 아니었다.
“애초에 우리는 가면의 사내가 그리드라는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실황을 중계한 겁니다. 우리가 그리드를 의도적으로 악용했다고 판단할만한 근거가 없고. 그리드가 직접적으로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았으니 초상권을 침해한 것도 아니죠. 또한 이번 촬영 무대는 공식적인 행사장입니다. 우리에게는 공개된 장소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을 방송할 권리가….”
사실 요목조목 따져보면 OGC 입장도 크게 불리하지 않았다.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하는 이국장이었으나 칼을 쥔 사람은 유라였다.
“융통성있게 처리해주세요. 성의를 보여주신다면 제 방송 일정을 OGC 위주로 조율하도록 할게요. 혹시 또 알아요? 이번 일을 계기로 영우씨도 OGC를 좋아하게 될지.”
“아…!”
당장의 손익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리드와 유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명의 톱스타와 인연을 맺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그들을 위주로 방송을 기획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 OGC는 오늘과 버금가는 수익을 꾸준히 창출할 수 있을 것이었다.
“회의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광고수익을 양도하게 될 경우 별도의 계약서 또한 몇 장 작성하도록 할 터이니 부디 기꺼운 마음으로 검토해주시길 바랍니다.”
“좋아요. 이제야 대화가 통하네요.”
영리한 판단을 내리는 이국장에게 만족한 유라가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그녀에게 이국장이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졌다.
“한데… 최근에 랭킹 목록에서 사라지셨더군요. 그 이유, 모두의 추측대로 히든 클래스를 획득하셨기 때문이 맞습니까?”
“언젠가 OG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세히 말해볼까요?”
“아이쿠! 그것 참! 상상만 해도 행복하군요!”
싱글벙글!
이국장의 승천한 광대가 도통 내려갈 생각을 않는다.
그는 유라를 건물 밖까지 직접 배웅해주었다.
달칵.
리무진에 오르는 유라의 표정이 밝다.
예상보다 쉽게 협상에 성공하여 그녀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메이저 방송국이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일이야.’
상대가 OGC라 다행이었다. 오로지 게임이라는 장르만 다루는 방송사였기에 자신과 그리드의 가치를 보다 높이 평가 받았다.
‘영우씨도 기뼈해주겠지?’
<데빌 슬레이어>는 야탄교와 마족들을 적대하는 클래스였다. 특성상 레베카교와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하여 유라는 교황 후보들에게 관심을 가졌다.
OGC에서 생중계되는 교황 후보연설 방송을 시청하게 됐다.
한데 뭐람?
방송의 주인공이 그리드로 바뀌고 말았다.
방송을 보면서 유라는 걱정했다.
방송계를 아직 잘 모르는 그리드라면, 어쩌면 손해를 입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염려한 그녀는 그 즉시 행동에 나섰다.
OGC를 직접 방문하여 그리드가 손해를 입기는커녕 도리어 엄청난 이득을 취할 수 있도록 결과를 만들었다.
이유야 간단하다.
유라는 그리드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통합랭킹 5위 출신답게 템빨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템빨단에 가입하기를 희망하고 있었다.
레벨이 초기화된 바람에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사적인 감정도 약간(?) 섞여있었고.
***
교황청.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한심한 놈이었군.”
까미앙 놈, 아직 미숙한 애송이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주먹에 얻어맞아 죽을 줄은 몰랐다.
적기사단의 수치다.
플뤼톤은 까미앙의 죽음을 애도할 수가 없었다. 도리어 욕만 나왔다.
“이거야 원, 병신 하나 때문에 입장이 난처해졌어.”
피아로가 제국을 배반한 후.
검공 리미트가 새롭게 육성한 적기사단은 허울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었다.
제국 신민들이 당대 적기사단은 전대 적기사단보다 못하다며 저평가했다.
이런 상황에서 적기사 하나가 맨주먹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안 그래도 위엄을 실추하고 있던 적기사단의 입지가 뿌리 채 흔들리고 만다.
플뤼톤은 그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해야할 의무가 있었다.
“행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주마.”
행사가 끝나면 그리드 또한 무기롤 사용할 수 있게 된다.
“그때. 전력을 다하는 너를 내가 꺾음으로서 적기사단의 위엄을 바로 세우겠다.”
“호오.”
그리드에게는 희소식이었다.
플뤼톤의 전투력은 측정불가. 까미앙과는 비할 바 없이 강했다.
리파엘의 창날에만 의지해서는 결코 쓰러뜨릴 수 없는 존재였다.
도대체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었건만. 녀석이 괜한 오기로 기회를 주니 다행이었다.
시청자들은 환호하고 있었다.
-와, 저 플뤼톤이라는 적기사는 겁나 센가보네. 그리드가 자기 동료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모습을 보고도 시간을 주다니. ㄷㄷ
-정말 자신감이 대단하네요. 솔로 넘버 나이트인가요?
-아뇨, 솔로 넘버 나이트들은 어깨에 금색 견장 붙이고 다닌다고 들었습니다.
-홈… 그럼 10번댄가.
-20번대 기사만 되도 30번대 기사보다 몇 배나 세다니까 20번대일 수도.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불법 도박 사이트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다.
<그리드 VS 적기사 플뤼톤>
과연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를 놓고 도박사들의 배팅이 시작됐다.
그리고 의외로 많은 도박사들이 플뤼톤의 승리를 점쳤다.
까미앙이 그리드에게 맞아죽는 동안 느긋하게 구경만 했다는 점. 그리드에게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끔 시간을 줬다는 점 등을 고려해 봤을 때 플뤼톤으로부터 강자의 여유가 엿보였던 탓이다.
어느 모로 보나 플뤼톤은 자신이 그리드보다 강하다고 인식하고 있었고. 전투의 승자는 당연히 플뤼톤이 될 것만 같았다.
-치킨 올 때 됐는데.
-난 이미 5분 전에 치킨 도착해서 닭다리 2개 뜯음.
-후… 도대체 언제 시작하지;; 기다리다가 소주 한 병 다 먹겠다.
-교황 후보 꼰대들 말 겁나 많음.
-아ㅋㅋㅋㅋ 그러고 보니까 이 방송 원래 교황 후보 연설 행사 방송이었지. 참ㅋㅋㅋㅋ
그리드가 행사의 종료를 기다리는 사이. OGC채널의 시청률은 43퍼센트를 돌파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적기사의 대결이 곧 시작될 거라는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진 여파였다.
OGC 웹채널에는 외국인 시청자들이 수백만 명 몰려와서 서버가 마비되기 직전이었다.
그렇게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교황 연설 후보 행사가 종료되었습니다.]
[안전을 위해서 사용 불가로 설정되었던 무기들의 금제가 풀립니다.]
[+9 실패작을 장착하였습니다.]
[+8 도플갱어의 대검을 보조무기로 장착하였습니다. 이도류 패널티 발생으로 무기 공격력이 50퍼센트만 적용됩니다.]
그리드가 두 자루 대검을 양손에 거머쥐었다.
시청자들이 술렁였다.
-이도류?
-저거 등신인가? 대검으로 이도류를 씀? 진짜 개멍청하네;;
-대형무기 2개를 동시에 휘두르려면 제약이 심할 텐데… 자세도 쉽게 무너질 거고.
-에이, 싸울 때는 한 자루만 사용하겠죠. 그냥 겉멋인 듯.
도박 사이트 커뮤니티는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리드에게 배팅했던 도박사들이 쌍욕을 지껄이고 있었다.
_아, 엿 됐네.
-저놈을 믿은 내가 바보지. 하…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더니 착각이었어.
-또 발컨의 악몽이 시작되는 건가…
비웃음 당하고 있음을 알기나 할까?
긴 말 하지 않고 덤벼오는 플뤼톤에게 그리드가 이도류로 응수했다.
쩌정!
도플갱어의 대검으로 공격을 막고.
파핫!
실패작으로 반격한다.
<예리한 감각>을 액티브 스킬로 발동하던 까미앙과 달리 패시브 스킬로 보유한 플뤼톤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날렵했다.
그리드의 반격을 피하면서 동작을 연계해 스킬을 날렸다.
“리미트 소드.”
앞서 까미앙이 사용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위력을 내포한 스킬이었다.
방어해봤자 큰 데미지를 입을 것이 분명했고. 회피하기에는 궤도가 너무 절묘했다.
이럴 경우 어찌해야 하는가?
성장한 그리드는 대처법을 알고 있다.
“파그마의 검무, 회(回).”
쩌어어어어어엉
완벽한 타이밍에 발동시킨 반격기였다.
도플갱어의 대검 덕분에 스킬의 위력도 상승했다.
플뤼톤의 가슴에서 피가 솟구쳤다.
‘뭣!’
플뤼톤이 경악했다.
그리드가 까미앙과 겨뤘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하다.
공격력과 치명타 확률, 위력을 상승시키고 온갖 액티브 스킬을 발생시키는 <파그마의 검무>는 오로지 도검류 무기를 착용했을 때만 적용되는 스킬인 바.
대검을 무장한 그리드는 플뤼톤이 상정한 범위를 아득히 초월할 정도로 강했다.
-와. 이도류 개쩐다.
-카~ 역시 갓리드.
언제나 그랬듯이 시청자들의 태세 변환은 빨랐다.
불과 1분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를 무시하고 욕하던 사람들이 이제 또 찬양하기 시작했다.
OGC 채널의 순간 시청률은 45퍼센트를 돌파하고 있었다. 50퍼센트도 꿈이 아니었다.
한국 방송계 수십 년만의 대기록이다.
그리드는 또 한 번 새로운 전설을 써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