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12화
19번 적기사 플뤼톤.
그는 이번 임무에 불만이 많았다.
자신이 고작 성직자 따위의 뒤치다꺼리나 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명색이 10번대 기사건만.’
적기사단 내에서도 상급자로 구분되는 내가 이런 자질구레한 일에까지 투입되어야만 했는지 의문이다.
‘20번대 녀석들만 보내도 충분할 것을, 쯧.’
그 불만어린 생각, 까미앙을 압도하는 그리드를 목도하는 순간 말끔하게 사라진다.
‘강하다.’
에트날의 공작이라고 했던가?
그리드라는 놈, 일신의 능력이 뛰어남은 물론이고 국보급 아티팩트를 여러 개나 보유 중이다.
특히 황금 창날의 성능이 경이적이었다.
‘한낱 소국에 저만한 능력자가 숨어있었다니.’
까미앙이 아직 미숙한 애송이라고는 하나 적기사임은 사실이다. 최강자의 반열에 올라있는 존재였다.
그를 저토록 쉽게 짓밟는 그리드가 솔직히 놀라웠다.
‘얼추 21번 기사급인가. 내가 투입될만했군.’
무료함으로 점철되어 있던 플뤼톤의 눈빛이 이채를 띠었다.
드디어 의욕이 발생한 것이다.
“슬슬 나서볼까.”
리파엘의 창날에 연속적으로 찔리며 치명상을 입은 까미앙.
그가 죽기 직전, 플뤼톤이 신형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그리드가 플라이를 사용했다.
자신 쪽으로 날아오는 그리드를 확인한 플뤼톤이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내가 적수임을 알아 본 것이냐!’
플뤼톤은 방심하지 않았다.
곧바로 검을 뽑은 뒤 직면해오는 그리드를 공격하려다가 멈췄다.
‘뭐?’
내 의지와 관계없이 의식이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리드에게 철저히 무관심해졌다. 칼을 휘두르지 않게 되었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쐐액!
혼란스러워하는 플뤼톤의 곁을 그리드가 스쳐지나갔다. 가공한 속도였다.
***
“허억… 허억…”
<정의의 사도의 파트너>
극히 소수만이 알고 있는 후로이의 정체다.
그는 그리드와 함께 있을 때 모든 스탯이 20퍼센트 상승한다. 굳이 무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사용할 수 있는 스킬 또한 많았다.
하지만 그는 그리드와 다르다.
그리드처럼 압도적인 스탯을 보유하지 못했다. 근본적으로 웅변가인지라 근력과 체력, 민첩성 등의 전투 관련 스탯이 심각하게 낮았다.
그렇다고 템빨이 특출한 것도 아니다.
그의 능력으로는 흑기사 다섯 명을 맨손으로 상대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으윽…”
피를 철철 흘리며 신음을 토하는 후로이.
휘청거리는 그를 흑기사들은 철천지원수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 악독한 놈! 돌아가신 우리 할머님을 능멸하다니! 결코 곱게 죽이지 않겠다!”
“우리 부모님에 대해서 네가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느냐!”
“나는 내 동료들에게 비누를 주워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후로이는 이미 온갖 욕설을 지껄인 후였다.
적들에게 디버프를 걸어 여태까지는 잘 버텨왔지만 이제 한계였다.
욕설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되돌아오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고, 전신은 이미 상처로 도배됐다. 생명력이 위험수치까지 떨어졌다.
하지만 지금 후로이가 걱정하는 것은 본인의 목숨이 아니었다.
나는 골백번 죽어도 된다. 떨어지는 경험치와 아이템? 주군의 목숨과 비할 바가 아니다.
오로지 주군만 무사하시면 좋겠다.
“주, 주군…”
맨손으로 적기사를 상대하면서 얼마나 큰 곤욕을 겪고 계실까?
후로이가 그리드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그리드가 낭패를 겪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죽어! 죽어! 죽어! 푸하하하핫!!!”
“…”
그리드는 멀쩡했다.
적기사를 일방적으로 두들겨 패면서 심지어 즐기고 있었다.
당최 얼마나 얻어터진 것인지, 얼굴이 퉁퉁 부어있는 적기사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헐.”
걱정한 내가 바보가 된 기분이다.
푸욱!
황당해하고 있는 후로이의 옆구리로 검 한 자루가 날아와 깊숙이 꽂혔다.
“어디서 한 눈을 팔아!”
“커윽.”
후로이의 시야가 흔들렸다.
생명력이 이제 10분의 2도 채 남지 않았다.
앞으로 두세 번의 공격만 더 허용했다가는 죽게 될 터.
후로이가 이를 악 물었다.
‘한 놈이라도 데려간다.’
주군의 짐을 덜어드려야만 한다.
작심한 후로이가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흑기사 한 명을 붙잡고 늘어지더니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솜씨와 근력으로는 흑기사에게 아무런 타격도 입힐 수 없었다.
칠흑의 갑주 위로 떨어지는 주먹은 솜방망이 그 자체였다.
“주둥이만 산 자식 같으니라고! 간지럽지도 않다!”
조소한 흑기사가 후로이의 손목을 낚아채더니 팔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후로이의 심장 부근이 무방비하게 노출됐다. 그곳을 정확히 노린 흑기사가 칼을 찔렀다.
-저게 정상이지. 어떻게 무기도 없이 흑기사를 쓰러뜨려.
-맞음… 그리드가 비정상임.
후로이 본인은 물론 시청자들 모두가 후로이의 죽음을 당연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달랐다.
후로이에게 함께 열렙 하자고 말한 주제에 경험치 분배가 아까워서 파티를 맺지 않았던 그리드.
후로이가 걱정되어 틈틈이 살피던 그가 <은밀한 영웅>의 능력을 개방시켰다.
은밀한 영웅은 다크버스를 레이드하면서 획득한 칭호 중 하나다.
이 칭호의 정확한 획득 조건은 자신보다 레벨이 높은 네임드 보스 3마리를 ‘혼자서’ 레이드하는 것.
아무나 얻을 수 있는 칭호가 아니며 그 가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적들의 의식을 분산시킵니다.]
어그로 해제.
[스킬 <위세>가 발동합니다. 이 효과는 10초 동안 유지됩니다.]
자신을 중심으로 50미터 범위 내에 존재하는 모든 적들의 방어력을 50퍼센트 저하.
[스킬 <종횡무진>을 1회 사용할 수 있습니다.]
200미터 범위 내의 ‘원하는 대상’에게 접근할 때까지 타켓팅 스킬을 제외한 모든 공격을 회피하는 최상위 돌진기 생성.
“감히!”
터엉!
피투성이가 된 후로이를 보고 격노한 그리드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곧장 흑기사들을 향해서 쇄도했다.
이동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카메라가 그를 잠시 놓칠 정도였다.
“허…?”
그리드를 향해서 돌진해오던 플뤼톤이 일순 멈췄다. 의식 분산의 영향을 받아 그리드에게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드는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별 해괴한 능력을 다 쓰는군.”
혀를 내두른 플뤼톤이 멀어지고 있는 그리드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파앗-!
강맹한 오러가 마치 뇌광처럼 번쩍이며 쏘아졌다.
그리드는 등을 완전히 노출하고 있는 바.
플뤼톤의 오러에 적중당하여 추락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할 정도로 빈틈투성이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종횡무진>을 사용한 상태였다. 타켓팅 스킬을 제외한 모든 공격을 자동 회피할 수 있었다.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몸을 저절로 움직이며 플뤼톤의 오러를 회피한 그가 흑기사 4명이 연계해오는 검술마저 한 번의 동작으로 돌파했다.
“무, 무슨?”
후로이의 심장을 다시 한 번 더 찌르려던 흑기사가 귀신에 홀린 듯한 얼굴을 했다.
그리드의 움직임은 그만큼 경이적이었다.
“꺼져.”
퍼억! 푹!
“커윽!”
꺾을 수 없는 정의에 이은 리파엘의 창날 콤보.
<위세>의 영향으로 방어력이 감소한 흑기사는 단 이격만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고 말았다.
맥없이 쓰러지는 흑기사를 발로 걷어 차 치운 그리드가 후로이에게 핀잔을 줬다.
“넌 여전히 약하구나? 완전히 동네북이네.”
“하하… 제가 약하기는 하죠.”
‘템빨단 내에서만.’이라는 뒷말은 삼킨다.
“어서 빨리 3차 전직을 하란 말이야. 그래야 새로운 아이템을 만들어 주지. 넌 아직 템빨이 부족한 게 가장 큰 문제야.”
“명심하겠습니다.”
“파티 맺자.”
그리드가 후로이에게 손을 내미는 그때였다.
태세를 정비한 까미앙이 어느새 달려와서는 후로이를 베어버렸다.
“쿨럭…!”
“……!”
후로이가 토한 피가 그리드의 후드짚업을 적셨다.
그리드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후로이는 죽어가는 와중에도 그리드를 걱정했다.
“부디… 살아남으십시오. 주군께서는 결코 쓰러져서는 안 되는 존재십니다.”
[사기가 고무되었습니다.]
[공격력과 마력이 다음 공격에 한정해서 대폭 상승 적용 됩니다.]
[다음 공격은 반드시 크리티컬이 발동합니다!]
털썩!
그리드를 위해서 아껴두었던 최강의 버프 스킬을 사용한 후로이가 그대로 주저앉는다.
생명력을 눈곱만큼만 남겨놓은 그를 노리고 까미앙이 또 다시 검을 휘둘렀다.
그리드가 후로이를 아낀다는 사실을 간파한 것이다.
쩌엉!
까미앙의 의도대로였다.
그리드가 후로이를 지키기 위해서 몸을 날렸다. 오래간만에 꺼내든 신성의 방패로 까미앙의 공격을 막아냈다.
“놈! 꼴이 마치 거북이 같구나!!”
동료를 지키기 위해서 방패를 쥐고 웅크린 그리드를 한껏 비웃은 까미앙이 미친 듯이 검을 휘둘렀다.
채챙! 채채채챙!
푸욱! 푹푹!
그리드가 방어할 수 있는 공간은 까미앙을 마주보고 있는 정면뿐이었다. 후위에서부터 칼을 찔러오는 흑기사들에게는 대처하지 못했다. 후로이를 보호하느라 피할 수도 없었다.
후로이가 질색했다.
“어찌 군주가 신하를 위해서 희생하는 겁니까! 일어나십시오! 적에게 맞서 싸우십시오! 저는 주군의 발목을 붙잡고 싶지 않습니다!”
“너랑 나, 군신 관계이기 전에 친구잖아?”
“……!”
“뭐, 친구라고 하기에는 평소에 내가 너를 꽤나 부려먹고 있다만.”
너의 진실 된 마음에 언젠가 반드시 보답한다.
그렇게 몇 번이나 다짐해왔다.
푹! 푸푸푸푹!!
서걱!
후로이를 철저히 보호하는 그리드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어리석은 놈. 고작 부하를 지키겠답시고 스스로를 희생하다니, 미련하기가 짝이 없군.’
플뤼톤은 다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리드에게 흥미를 잃고는 방관자의 태도로 되돌아간 것이다.
한편 까미앙의 맹공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 빌어먹을 황금 창날만 없으면 네놈은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다!”
까미앙은 그리드가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를 악 물고 버티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가 발동합니다.]
[1시간 동안 생명력과 방어력, 손재주가 200퍼센트 상승합니다.]
의도적으로 사용할 수 없고, 극도로 인내하는 행위를 할 때에만 발동하는 스킬이었다.
덕분에 그리드는 여유를 찾을 수 있었던 반면 까미앙과 흑기사들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터무니없는 방어력이다!’
까미앙과 흑기사들은 아무리 찌르고 베어도 쓰러지지 않는 그리드를 괴물 보듯이 했다.
그들이 봤을 때 그리드의 갑옷과 방패는 성능이 너무나도 기막혔다.
하지만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겠는가?
“리미트 소드!”
까미앙이 검공 리미트로부터 전수 받은 스킬을 전개했다.
쩌엉!!
타오르는 듯한 오러가 깃든 검이 신성의 방패를 허공으로 튕겨냈다. 압도적인 공격력이었다.
무방비 상태가 된 그리드의 몸에 다섯 명의 흑기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칼을 찔렀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리드의 얼굴 절반을 가리고 있는 도살귀의 가면이 완연한 적색으로 물든 것은.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날로 방어하지 않고 흑기사들의 공격을 허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악귀의 피눈물>효과가 발동합니다. 공격력이 5초간 50퍼센트 상승합니다.]
“이제 내 턴이다.”
대장장이의 분노를 발동,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리드가 까미앙에게 선언한다.
“빌어먹을 새끼, 5초 내로 죽여주마.”
안대 너머 눈동자가 짙은 적광을 토하고 있었다.
위험을 감지한 까미앙이 <예리한 감각>을 발동시켰다.
그를 노리고 그리드의 주먹이 날아갔다. 까미앙이 회피하려고 했으나 어느새 날아온 리파엘의 창날이 그의 옆구리를 찌름으로서 행동을 제약시켰다.
“허어억!!”
뭐지, 이 공격력은?
종전과 비할 바 없이 강력하지 않은가!
레드 아머를 꿰뚫고 들어오는 충격에 경악하는 까미앙의 안면으로 그리드의 주먹이 연속적으로 꽂혔다.
흑기사들이 후로이를 공격함으로서 그리드를 통제하려 했으나 부질없었다. 리파엘의 창날이 날아가 후로이를 보호해주었다.
쩌엉! 쩡! 쩌저정!!
풀썩!
대장장이의 분노, 악귀의 피눈물, 사기 진작.
최강의 버프 스킬들을 중첩 받은 그리드의 주먹에 4초 동안 쉬지 않고 얻어맞은 까미앙이 결국 무릎 꿇는다. 애초에 남아 있는 생명력도 적었던 탓에 5초도 버티지 못한 것이다.
“이럴… 수…가…”
잿빛 기둥이 하늘을 향해서 솟구쳤다.
까미앙의 최후를 상징하는 광경이었다.
“…”
적기사를 맨손(?)으로 때려잡다니!
모두가 경악했다. 대한민국 전체가 들썩였다. 이 소식은 몇 분 내에 전 세계로 퍼질 것이었다.
현재 OGC 채널의 시청률은 41퍼센트를 돌파하고 있었다.
“재미 좀 보고 계시나요?”
OGC 방송국.
대박이 났다며 환호하고 있는 이국래 국장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완벽한 비율과 늘씬하게 뻗은 다리가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자신 외의 존재를 모두 퇴색시켜버리는 그녀, 다름 아닌 유라였다.
“영우씨 몸값 받으러 왔어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매료시켜버리는 미소를 짓는 유라.
눈빛만큼은 얼음처럼 차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