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8화
전투. 특히 패배한 전투를 복기하는 일은 성장에 큰 도움을 준다.
눈을 감고 앉은 까미앙은 돌이켜보았다.
‘그리드가 찌르기로 들어왔을 때.’
방어하지 말고, 도리어 앞으로 파고 들었다면?
‘그래도 당했다. 그리드가 횡으로 때렸다면 결과는 역시 같았을 것이다.’
차라리 뒤로 물러섰다면?
‘그래도 당했어. 그때의 그리드는 이미 최대한의 보폭으로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었다.’
아무리 돌이켜 봐도 방어가 최선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까미앙의 검술 실력으로는 방어가 불가능한 공격이었다는 것이 문제다.
‘직선이 원으로 바뀌기까지 걸린 시간이 찰나였다.’
일직선으로 날아오던 창끝이, 내 칼과 맞닿기 직전에 원을 그리며 옆구리를 때려왔다.
까미앙은 정녕 소름이 돋았었다.
그리드가 창술에 통달하였음을 체감할 수 있었다.
‘스킬로 응수해야만 했다.’
<슈퍼 아머>를 사용했더라면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반탄력에 튕겨져 나가는 그리드에게 도리어 반격까지 꽂아 넣을 수 있었으리라.
‘그러면 승자는 내가 됐을 것이다.’
최초의 일합부터 비장의 수단을 사용하기에는 망설여졌었다. 하여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고, 결과는 허망한 패배였다.
“빌어먹을… 설마 그렇게 아플 줄은 몰랐지.”
레드 아머를 무장한 내가 한방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줄이야.
리파엘의 창의 공격력은 상상이상이었다. 괜히 신기라고 불리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부터 잘못된 싸움이었다.’
까미앙은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사용할 수 있다는 가정을 세워두지 않았었다.
그렇기에 방심했고,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회수함과 동시에 내 칼을 떨쳐내는 것에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거기서부터 흐름이 그리드에게 넘어갔다.
억울하다.
‘검사라며?’
그리드가 전대 교황 드레비고와 싸우는 모습을 목격한 성직자가 한둘이 아니다. 그중에는 원로들도 있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쳤었다.
그리드는 대검을 사용하는 검사라고 말이다.
한데 생뚱맞게 창을 다루다니?
‘그것도 리파엘의 창을!’
리파엘의 창은 여신의 신탁을 받은, 극히 소수의 ‘여성’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라지 않았던가?
“정말로 짜증나는군.”
이번 패배의 가장 큰 원인은 ‘잘못 된 정보’에 있었다.
오류투성이의 정보가 내게 쓸데없는 선입견을 심었고,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결과를 발생시켰다.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사용하리라는 가정을 세워둘 수만 있었어도.’
어처구니없게 당하지는 않았을 터!
꽈드득!
까미앙이 이를 갈았다. 그는 억울해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 분노, 검 끝에 실어 수련에 임한다.
“그리드! 다음에는 다를 것이다! 결코 방심하지 않을 것이다! 적기사의 진정한 힘을 보여주겠다!”
당대의 적기사단은 전대의 적기사단과 비교해서 약하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대 적기사단은 <검호 피아로>에게 직접 사사한 반면, 당대 적기사단은 피아로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받는 <검공 리미트>에게 사사하고 있었으니까.
리미트 공작은 피아로와 승부해서 승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리미트 각하의 경지는 이제 피아로를 넘어섰다.’
그분께 사사한 우리 또한 전대 적기사단을 넘어섰음이 자명한 사실이다.
그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적기사단은 무패여야만 했다.
까미앙은 반드시 그리드에게 설욕할 각오였다.
“두고 보자!”
콰작!
오러가 맺힌 까미앙의 검이 커다란 바위를 일격에 부셨다.
그는 한층 더 강해졌다.
***
“파그마.”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검성 뮐러 다음가는 검사라고 칭송 받았던 존재.
그는 모든 종류의 무기를 다룰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의 힘을 이은 그리드 또한 마찬가지일 터다.
하지만 설마 본교의 3대 신기조차 다룰 줄이야…
“이것 참 답답하군.”
죽은 이사벨의 후임을 빨리 정해야만 한다.
파스칼은 자신이 비밀리에 육성한 소녀를 새로운 레베카의 딸로 임명함으로서 입지를 올릴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불법으로 소유한 채 넘겨주지 않고 있었으니 골치였다.
“…데미안, 그 애송이놈.”
데미안이 부린 수작임이 분명하다.
나를 견제하고자 그리드에게 리파엘의 창을 보호해달라고 부탁한 것일 터다.
“그딴 저열한 수작에 당할 내가 아니다.”
콧방귀 뀐 파스칼이 원로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리드에게 리파엘의 창을 반납하라는 명령서를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그리드, 제아무리 너라도 본교의 공식 명령을 어길 수는 없을 테지.”
만약 명령을 어긴다면?
‘그때부터는 어쩔 수 없다. 너를 적으로 여기는 수밖에… 응?’
명령서를 손에 쥔 파스칼이 대장간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파스칼?”
“데미안!”
파스칼은 유세 활동 중인 데미안과 우연히 마주쳤다.
빌어먹을 약장수처럼 주둥이만 살아있는 후로이라는 놈의 도움을 받아 기세를 올리는 중인 데미안.
그를 보자 파스칼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 리파엘의 창은 본교의 신기다! 한데 그리드가 불법적으로 소유하게끔 일을 꾸며? 이번 일을 명명백백히 밝혀서 네놈에게 반드시 죗값을 물리고야 말겠다!”
데미안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이지? 리파엘의 창의 현재 소유권자는 이사벨 쨩이다. 그녀가 직접 그리드님께 맡겨둔 것을 왜 당신이 왈가왈부…”
“닥쳐라!”
“…”
“이사벨은 이미 죽은 년이다! 그러니까 리파엘의 창의 소유권은 다시 원로회에게로… 헉?”
열변을 토하던 파스칼이 갑자기 말문을 닫았다. 그는 마치 못 볼 것을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드가 여자인 것인가 의심했을 때보다 안색이 더 파랗게 질렸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백금색의 머리카락을 찰랑이며 다가오는 여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무슨 소란이에요?”
질문하는 여성.
그녀는 다름 아닌 이사벨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이사벨은 죽은 것이 아니었던가?
죽기는커녕 도리어 혈색이 완전히 회복되어선 멀쩡하게 두 다리로 걸어 다니다니?
어안이 벙벙해져있는 파스칼에게 데미안이 핀잔을 주었다.
“이사벨 쨩이 죽었다고? 당신, 드디어 노망이 든 건가?”
“이럴 수가!”
다 죽어가던 년이 도대체 무슨 수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일이 크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
내가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수작이 계속되고 있다.
이는 심각한 문제다.
파스칼은 작금의 사태를 이해해보기 위해서 머리를 감싸 쥐고 생각했다.
그러던 도중, 시야로 무엇인가가 후두둑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머리카락이었다.
그리드가 등장한 이후로 꾸준히 받아온 스트레스가 탈모라는 불상사로 이어진 것이다.
후둑. 후두둑.
“…”
손으로 머리를 만질 때마다 한 움큼씩 빠져 나가는 머리카락이 파스칼의 분노를 가일층시켰다.
“그리드으으으!!”
그놈이다.
그놈이 등장한 이후로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파스칼은 그리드의 존재를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방금 작성된 따끈따끈한 명령서를 신경질적으로 찢어 버린 그가 마음을 정했다.
‘그리드! 네놈은 이제 내 적이다!’
결정한 이상 철저히 배제한다.
씩씩거리며 물러나는 파스칼을 보면서 통쾌함을 느낀 데미안과 이사벨이 손뼉을 마주쳤다.
***
<빛의 차륜격>
찌르기, 찍기, 베기 등.
어떤 형태의 공격을 행하더라도 원형의 공격으로 연계됩니다. 대상은 이 변칙적인 공격을 결코 회피할 수 없습니다.
*명중률 100퍼센트.
*빛 속성.
리파엘의 창에 귀속되어 있는, 명중률 100퍼센트의 스킬.
심지어 자원 소모량과 재사용 대기시간도 없다.
일반 공격 시 ‘높은’ 확률로 발동하는 이 스킬의 위력은 막말로 사기였다.
“추가 피해량이 없기에 별로인 줄 알았더니.”
오산이었다.
리파엘의 창의 기본 공격력이 비상식적으로 높은 덕분에 <명중률 100퍼센트>라는 옵션이 엄청난 무기로 작용했다.
설마 그 유명한 적기사를 평타 한 방으로 쓰러뜨릴 줄이야.
그리드 본인조차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리파엘의 창. 과연 신화급 무기의 위용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창은 나와 상성이 맞지 않아.”
<파그마의 검무>Lv.3
비활성화 시, 그리드의 물리 공격력을 32퍼센트, 치명타 확률을 22퍼센트, 치명타 공격력을 15퍼센트 상승시켜준다.
활성화 시에는 살(殺), 연(聯), 초(超) 등의 액티브 스킬을 사용할 수 있게 해주고.
한데 이 강력한 레전드리 스킬의 발동조건은 ‘도검류 무기’를 장착하는 것에 있었다.
도검류 외의 무기를 장착할 경우에는 스킬이 발동하지 않았다.
그리드로서는 안타까운 노릇이었다.
‘리파엘의 창을 내가 직접 사용하는 것은 포기해야겠지.’
하지만 <그리드 세트>에는 예정대로 포함시킨다.
폰을 비롯한, 창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길드원들과 병사들을 위해서.
그렇다.
그리드는 언젠가 길드원들과 병사들을 죄다 그리드 세트로 도배시킬 계획이었던 것이다.
“큭큭큭! 푸하하하하핫!”
템빨국!
사람들이 찬양하게 될, 이름부터가 환상적으로 멋진 내 왕국의 병사들이 <그리드 세트>로 무장하고 도열할 모습을 상상해보자 그리드는 희열에 휩싸였다.
“저분… 무섭지 않아?”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왠지 정상인이 아닌 것 같다고 할까…”
교황청 내의 대장간.
대장장이들은 자꾸만 혼자서 중얼거리더니 급기야 광소를 터뜨리는 그리드로부터 부정적인 기운을 느꼈다. 그리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초리가 썩 좋지 못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타인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리파엘의 창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따앙! 따앙!
이틀에 걸쳐서 완벽하게 분해시킨 리파엘의 창.
그리드는 재조립의 과정을 통해서 그 창의 구조에 숨겨진 묘리를 깨우치고자 노력했다.
몇날며칠이고 대장간에 틀어박혀서는 연구에 힘썼다.
관찰, 분해, 조립의 과정을 지치지도 않고 지겹도록 반복했다.
유일하게 타고난 재능, ‘끈기’와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얻은 ‘집중력’ 덕분에 그리드는 그 지긋지긋한 과정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리파엘의 창의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되었습니다!]
[<도안:리파엘의 창>을 습득합니다!]
[신화급 무기를 낱낱이 파헤친 경험이 당신의 경지를 한 단계 끌어올립니다!]
[제작 관련 스킬들의 레벨이 1씩 상승합니다!]
[<(신의 무기를 목격한)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이 <(신의 무기를 이해한)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로 진화합니다!]
“좋았어!!”
이사벨과 단 둘이 방에 틀어박혀 있던 기간까지 포함하면 정확히 11일 만에 이룬 성과다.
숨겨진 능력들이 개화된다거나 하는, 기대대로의 사건은 전개되지 않았으나 <여신의 정수>의 쓰임새도 알게 되었고 각종 스킬들이 강화되었으니 그리드는 충분히 만족했다.
아니, 만족의 정도가 아니다.
무려 신화급 무기의 도안을 획득한 일이다.
그리드는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얻었을 때만큼이나 기뻤다.
“우선.”
당장은 리파엘의 창(모작)을 제작할 재료가 구비되지 않은 상태.
하지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그리드가 다시금 망치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