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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9화 (74/1,794)

템빨 14권 - 5화

하지만 그림자 속 누군가는 그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

노에였다.

씰룩씰룩. 씰룩씰룩.

위로 솟은 작고 통통한 엉덩이가 좌우로 흔들린다. 짧은 앞발은 바닥에 완전히 밀착해 있다.

사냥감을 몰래 덮칠 준비하는 지옥 제일 마수의,

‘과학적이고, 아름답고, 완벽하게 설계 된 사냥자세인 것이다! 냥!’

“…”

까마귀는 어둠 속에 숨어있는 노에의 기척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실력자였지만, 위대한 지옥 제일 마수의 은신 능력을 감지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스윽.

3층으로 향하는 층계참에 까마귀가 올라섰다.

3층은 이사벨의 방이 있는 곳이다.

‘이제 곧.’

까마귀는 상상한다.

자신의 단도에 절명할 그리드의 모습을.

그 순간이었다.

“캬옹!”

숨죽인 채 까마귀의 뒤를 쫓아온 노에가 깡총 점프를 뛰었다. 어둠을 꿰뚫고 등장한 녀석의 번뜩이는 송곳니는 작지만 날카로웠다.

“……!”

까마귀는 황당했다.

설마 고양이 따위에게 기습을 당하는 날이 올 줄이야?

‘내가 고양이의 미행을 눈치 채지 못했다고?’

태어난 이래 가장 큰 수치심과 당혹감이 엄습해왔다.

하지만 그도 잠시.

금세 냉정을 되찾는다.

까마귀는 프로 중의 프로였다.

여태껏 89명의 인간을 암살하면서 숱한 위기를 경험했고, 살아남았다.

그 과정에서 깨달은 진리가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할 것.

고작 고양이의 기습이라는 변수를 만났답시고 소란을 피우기에는 까마귀의 경험이 중후하다.

파앙-!

뱃살을 출렁이며 날아온 고양이가 휘두른 앞발을 까마귀가 단도로 날려버렸다.

이어서 반격을 가하려던 까마귀가 멈칫했다.

지끈지끈.

일합을 겨뤘다는 이유만으로 손목이 저려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무슨 고양이가 이렇게 힘이 세지?’

이 녀석,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다.

까마귀가 노에의 특이점을 눈치 챘다.

이마에 작게 솟아난 뿔과 등 뒤의 짧은 날개.

분명한 마수였다.

‘어떻게 이곳에 마수가?’

이곳은 교황청이다.

교황청은 신성력으로 충만하다. 어지간한 몬스터와 마수들은 교황청 근처에도 얼씬하지 못했다. 만약 교황청에 한 발이라도 디뎠다간 신성력을 견디지 못하고 죽게 된다.

그게 문제였다.

현재 노에는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는 상태다.

‘큰일이다옹.’

주인이 명령했다.

자신이 집중하는 동안 혹시 모를 적습에 대비해달라고. 만약 적이 침입해올 경우, 괜히 덤비지 말고 그 즉시 자신에게 달려와 소식을 전하라고 말했다.

근데 문제는…

‘나도 모르게 덤볐다옹.’

노에는 스스로를 이성적인 존재라고 인식했지만 현실은 다르다.

아직 어린 노에는 본능에 충실했다.

시커먼 놈이 나타나서는 어둠 속에 조용히 움직이자, 노에는 본능적으로 놈에게 신경을 빼앗겼고 뒤를 쫓아 덮치고 말았다.

의도치 않게 벌인 일이었고, 결과는 작금의 사태다.

낭패였다.

몸에 힘이 잘 안 들어간다.

못된 레베카 년의 신성력이 아주 지독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옥 제일 마수인 이 몸께서 고작 인간 한 명 못 해치우겠는가?

“냐앙!”

노에가 다시 한 번 앞발을 휘둘렀다.

츠칵!

날카로운 발톱이 까마귀의 귓불을 찢는다.

가까스로 치명상을 회피한 까마귀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빠르기까지…! 최상급 마수다!’

고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마수.

듣도 보도 못한, 허접한 생김새를 하고 있지만 이놈은 엄청난 괴물임이 틀림없다.

어쩌면 중급 마족 정도의 실력을 지닌 마수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신성력으로 충만한 교황청 내에서 이만한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을 납득할 수 없었다.

‘진지하게 간다.’

어째서 마수가 이곳에 있는지, 그것은 중요치 않았다.

죽일 대상이 하나 늘어났을 뿐이다.

철컥.

여태껏 한 자루의 단도만 쥐고 싸웠던 까마귀가 태도를 꺼냈다.

오른 손에는 태도, 왼 손에는 단도.

무기를 하나 더 쥐었다는 것만으로 그의 기도가 확 바뀌었다.

까마귀의 본모습이다.

“키야옹!”

‘힘으로는 안 돼.’

노에의 연속 할퀴기를 방어하지 않고 회피한 까마귀. 그가 태도를 사선으로 그었다. 이어서 단도를 찔렀다.

노에의 가슴에 옅은 상처가 생겼다. 태도에만 살짝 베였을 뿐, 단도는 회피한 것이다.

까마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걸 피해?’

도끼눈 뜬 노에가 송곳니를 드러냈다.

“냐앙!”

쩌정! 쩌저저정!

“큭.”

노에의 할퀴기가 더욱 더 빠르고 강해졌다.

피하기 어려웠던 까마귀가 태도와 단도를 교차시켜 방어에 힘썼다. 그러면서 노에의 진짜 실력을 깨달았다.

‘상급 마족 이상이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본래 마수란, 마족보다 하위 개념의 종족이 아니었던가?

경악한 까마귀가 아껴두었던 비장의 수단을 꺼냈다.

스물스물.

벽과 바닥, 그리고 천장에 드리워져 있던 모든 그림자들이 일제히 요동치기 시작한다.

그림자술이 발동하는 것이다.

이상한 낌새에 놀란 노에의 눈동자가 바둑알만해졌고, 까마귀는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지옥으로 꺼져라.”

승리를 확신한 까마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사방의 그림자들이 꾸물꾸물 움직여 가시처럼 뾰족하게 모양을 바꿨다.

파파파파파팟!

여섯 개의 가시가 각기 다른 궤도로부터 날아와 노에의 몸을 찔렀다.

위험하다고 판단한 노에가 유체화를 사용했다.

<유체화>

사용자의 신체에 물리력이 개입할 수 없게끔 만드는 스킬이다.

하지만 현재의 노에는 신성력의 영향으로 인해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였다. 영혼 섭취는 아예 사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유체화가 발동하지 않았고, 노에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푸욱!

“우냥!”

노에의 작은 몸을 여섯 개의 가시 중 하나가 관통했다.

애절한 비명을 내지른 노에가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억울하다, 냥.’

영혼 섭취 스킬을 사용할 수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노에는 이곳 교황청이 너무 싫었다.

大자로 뻗어 있는 녀석의 볼록 솟은 배를 까마귀가 발로 꽉 짓밟았다.

노에의 ㅅ모양 주둥이로부터 픽! 하고 김빠지는 소리가 흘렀다.

그 꼴을 까마귀가 비웃었다.

“마수의 최후라는 건 추하군.”

철컥.

까마귀가 태도로 노에의 얼굴을 겨냥했다.

“죽어라.”

“거기까지 해둬라.”

“……!”

불현듯 음성이 들려왔다.

놀란 까마귀가 황급히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에 내려앉은 것은 오로지 어둠과 적막뿐이었다.

‘환청인가?’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기척이 전혀 없다.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은신 능력이었다.

“어?”

섬뜩함을 느끼고 긴장하던 까마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림자들이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고 있었다.

파앗!

그림자가 파도처럼 솟구쳤다.

까마귀는 피하려고 했지만 불가능했다. 투망처럼 날아드는 그림자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꽈악!

까마귀의 몸이 그림자에 옥죄어졌다.

“크악!”

그림자에 붙잡혀 허공에 떠오른 까마귀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림자를 제어하는 속도가 터무니없이 빠르다…!’

그림자술이 이 정도까지 진화할 수 있다고?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혼란을 느끼는 사이, 그림자는 까마귀의 몸을 더욱 더 세게 조이고 있었다. 까마귀가 발버둥 쳤지만 고통만 심해질 뿐이었다.

도대체 누가 나를 이리도 쉽게 제압하는가?

까마귀의 의문이 깊어지는 그때, 어둠 속에서부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 당신은…!”

검은 피부의 사내였다. 몸이 무척이나 말랐고 팔이 비정상적으로 길었다.

그 특징들과 실력을 종합해 봤을 때 떠오르는 인물은 하나밖에 없었다.

까마귀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내질렀다.

“카심!”

그림자술을 단순한 공격과 방어로 응용하는 것을 넘어선 존재.

그는 그림자로 병사를 만들어 수족처럼 부린다고 들었다.

군세를 이끄는 어쌔신,

그 이명은…

“그림자의 왕!”

저 괴물이 어째서 이곳에?

까마귀의 얼굴에 깃든 의문이 더욱 더 짙어진다. 하지만 그에게 찾아온 것은 해답이 아닌 죽음이었다.

그림자가 더욱 더 강하게 압박하자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곤죽이 되었다.

카심은 까마귀의 시신을 흔적도 없이 치웠다. 그림자가 휩쓸고 지나가자 핏자국조차 사라졌다.

“그 녀석 참, 보면 볼수록 귀엽군.”

주둥이를 벌린 채 뻗어 있는 노에를 확인한 카심이 다시금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짹짹! 짹!

새들이 지저귄다.

따스한 햇살이 몸을 감쌌다.

“흠냥.”

곤히 잠들어 있던 노에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더니 질색했다.

“학! 어떻게 된 거냐! 캭!”

아직 아침이 밝아오기 전.

나는 미개한 인간 놈과 싸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요상하고 치사한 기술에 얻어맞고 기절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노에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옥 제일 마수인 이 몸께서 고작 인간 따위에게 당했다고?

“이건 치욕이다! 냥!”

아무리 이곳이 교황청이라지만 용납할 수 없는 결과였다.

본래 인간 따위, 앞발만으로 제압할 수 있는 위대한 이 몸께서 어째서 이런 수모를 겪어야만 하는가!

분노에 파르르 몸을 떨던 노에가 뒤늦게 의문을 떠올렸다.

“내가 왜 살아있는 것이냐? 냥?”

그 인간 놈은 왜 나를 제압해놓고도 죽이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던 노에가 쉽게 결론을 내렸다.

“꿈이었던 것이다! 냥!”

그렇다.

어젯밤 겪은 일들은 현실이 아니다.

“냥핫핫! 그런 것이다! 지옥 제일 마수인 이 몸께서 인간에게 당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냥핫핫핫!!”

노에는 확신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멀쩡히 살아있는 이유가 설명이 되질 않았다.

엄청난 회복력 탓에 전날 입었던 상처들마저 말끔히 사라져 있었으니, 노에의 착각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띠링~

노에의 상태가 좌절에서 자아도취로 변경됐다.

하지만 그리드는 노에에게 관심도 없었다. 리파엘의 창과 씨름하느라 바빠 펫창을 아예 거들떠도 안 보고 있었다.

***

‘엿 됐다.’

그리드는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리파엘의 창을 관찰하기 시작하고 벌써 이틀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제작법은커녕 봉인법조차 밝혀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생각했나?’

최근 승승장구해왔기에 자만한 건가 싶다.

‘창날과 창대를 잇는 부분이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되네.’

결합부위가 너무 깔끔하다. 무슨 기술을 사용한 건지 감도 안 잡혔다.

‘단조 기술만으로 이렇게까지 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일체형도 아니고…’

<분해>와 <조립>을 사용할 수만 있다면 결합부의 비밀을 밝혀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사벨 때문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리드는 계속, 계속 창을 관찰하면서 논리적으로 창의 구조를 파악해나갔다.

다음날, 그에게 불청객이 찾아왔다.

파스칼이었다.

“선물을 드리고 싶소이다.”

파스칼이 건넨 상자에는 무려 100만 골드라는 거금이 들어있었다.

데미안이 준 53만 골드보다 약 2배 가까이 높은 금액이었다. 현금으로의 가치는 12억.

[파스칼의 선물을 받으시겠습니까?]

[선물을 받을 경우, 파스칼의 소원 하나를 무조건 들어줘야만 합니다.]

“나랑 장난해? 고작 이 정도 금액으로 나를 회유하겠다고? 꺼져.”

지금의 그리드는 눈앞의 이익에 연연할 정도로 단순하지 않다. 항시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있었다.

고작 100만 골드 때문에 제국이 레베카교를 집어삼키게끔 묵과하지 않았다.

이틀이 더 지났다.

오늘도 찾아온 파스칼을 내쫓은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관찰하던 도중 관점을 바꿔보았다.

‘결합부의 비밀은 기술에 있는 게 아니라 재질에 있는 게 아닐까?’

리파엘의 창을 구성하고 있는 주재료는 아다만티움이다.

아다만티움은 은빛을 띄는 광물이었지만 결합부의 색상은 청색이었다.

‘아다만티움 외의 광물을 사용한 건 아니야. 아다만티움에 다른 무언가를 섞은 것 같은데…’

그 무언가가 뭘까?

‘이거, 설마.’

그리드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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