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4화
“아름답고 자애로운 레베카 여신이시여, 당신의 빛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하는 이 나약하고 어리석은 종에게 빛을 내려주소서. 당신의 빛을 인도삼아 어려운 자와 나약한 자를 구원할 것이며, 악한 자에게는 징벌을 내리겠나이다.”
제1기도실.
본래는 교황만이 이용할 수 있는 그 웅장한 대전에서 파스칼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리드에 대한 분노를 털어내고 이성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온 누리에 따스한 빛이 충만하기를.”
한참 후에야 기도가 끝났다.
개운한 표정을 지은 파스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노를 말끔히 잠재운 그가 냉정하게 생각한다.
‘지금의 그리드가 탐하는 것은 단순한 재물이나 권력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내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을 테니까.
‘데미안과의 사이가 무척이나 각별한가보군.’
예상치 못한 변수다.
‘하지만 영원한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지. 욕심 앞에서는 혈육마저도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마당이니.’
이 세상에서 영원히 변치 않는 개념은 오로지 신앙뿐이다.
씨익.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파스칼이 명령했다.
“창고를 열어라.”
“예!”
파스칼이 쥬다르교에서부터 데려온 그의 충복들이 즉각 움직였다.
끼익-
여신상 뒤편에 은밀하게 마련 된 창고 문이 개방되며 찬란한 금빛이 쏟아져 나왔다.
창고에는 금은보화가 쌓여있었다.
드레비고가 교황 시절에 만들어 놓았던 비밀 창고를 지금은 파스칼이 활용하는 것이다.
‘그리드, 너는 얼마로 만족해줄 것이냐?’
파스칼의 부하들이 금화를 퍼 담기 시작했다. 그리드를 회유할 용도로 사용될 금화였다.
‘부족하다면 더 주마. 그마저도 부족하다면 또 더 주마. 결국 넌 내 손을 잡게 될 것이다.’
잠자코 지켜보던 까미앙이 파스칼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리드라는 놈, 그냥 죽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그는 본교의 3대 신기를 봉인 해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결코 적대해서는 안 돼.”
“놈을 끝까지 회유하지 못할 경우는요?”
“하하, 그런 경우는 없다. 그는 무척이나 탐욕스러운 자거든. 분명히 내 마음을 받아들이게 될 게다.”
“…”
파스칼은 자신했지만 까미앙은 신용하지 않았다.
‘그놈은 맹수다. 결코 길들일 수 없어.’
원로회실에서 놈의 손목을 노리고 검을 날렸을 때.
놈은 눈 한 번 깜빡이지 않았다. 손을 내주는 동시에 내 목을 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솔직히 까미앙은 소름이 돋았다.
‘한두 번 싸워본 솜씨가 아니야. 기세 또한 매서웠다. 아마 제대로 싸운다면 나와 막상막하의 실력자일 거다. 안 그래도 교인들에게 칭송 받는 녀석이 무력까지 갖췄으니, 적이 된다면 여러모로 골치 아파진다.’
황제폐하께서 명령하셨다.
반드시 파스칼을 교황으로 만들라고.
명령을 충실히 완수해야하는 까미앙의 입장에서는 위험요소를 굳이 방치할 생각이 없었다.
“나와라.”
파스칼의 시선을 피해 자리를 옮긴 까미앙이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어쌔신을 소환했다.
황제 직할의 암살단, <까마귀> 소속의 어쌔신이었다.
안광을 번뜩이는 어둠 속 그림자에게 까미앙이 질문을 던졌다.
“그리드라는 놈, 너도 아까 보았겠지? 어때, 암살할 수 있겠나?”
“그걸 질문이라고 하는가? 나는 너조차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다.”
결코 허언이 아니다.
까마귀들은 적기사들을 위협할 정도의 암살 능력을 갖추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행방불명 된 최강의 어쌔신, 도란과 카심이 재림하지 않는 이상 까마귀들이야말로 현존 최강의 어쌔신이었다.
“멋진 대답이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그리드를 죽여라.”
“내일 아침을 기대해라. 레베카 여신상에 놈의 수급이 걸릴 것이다.”
까마귀가 그 즉시 사라졌다.
***
이사벨의 방으로 안내받은 그리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뭐야?”
다섯 평 남짓한 작은 방에 가구라고는 허름한 침대 하나가 전부다.
심지어 뼈를 시리게 만드는 냉기가 내부를 장악하고 있었다.
“뭔 벽난로도 없냐? 한겨울엔 얼어 죽겠네.”
회색 벽을 한 번 만져보자 돌가루가 우수수 떨어진다.
“폐렴 걸리겠다, 야.”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를 손으로 휘저어 날려버린 그리드가 이사벨에게 시선을 돌렸다.
“너는 여전하구나?”
“…”
레베카의 딸들은 드레비고 시절에도 이랬다.
최강의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교단의 수뇌부들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부당한 대우를 감내했다.
보고 있노라면 답답할 지경이지만 어쩌겠는가?
철이 들기도 전부터 교단의 무기로 키워진 레베카의 딸들은 오로지 복종만을 요구받아왔다. 뿌리 깊은 세뇌가 그녀들에게 족쇄로 작용하고 있었다.
애초에 잘못된 것은 그녀들이 아니라 이 교단이다.
겉으로는 평화와 자애를 표방하지만 자애 따위 조금도 없다.
그리드가 봤을 때 레베카교는 야탄교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속물들의 집합체다.
‘못된 놈들.’
파스칼과 원로들이 데미안과 이사벨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상기한 그리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샤이라는 어쌔신이 했던 말이 떠오른다.
“대놓고 악을 표방하는 야탄교가 차라리 낫다. 녀석들은 악이야말로 옳은 길이라 믿으며 악행을 저지르잖아? 하지만 레베카교는 본인들을 선이라고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행을 저지르지. 앞과 뒤가 다르니 야탄교보다 음흉하고 훨씬 더 위험한 놈들이다.”
과거의 레베카교는 이렇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드레비고가 모든 걸 망쳤다.
‘고인 물은 썩는다더니.’
현재 레베카교의 수뇌부들은 드레비고를 겪은 세대다.
그들 대부분은 이미 금단이라는 이름의 달콤한 과실을 맛봤고, 타인을 괴롭히는 일에서 희열을 느낄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짜릿한 즐거움에서 헤아려 나올 수 있을까?
없다.
그 증거로서, 그들은 이미 파스칼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파스칼을 따르고 있었다.
물갈이가 필요한 시점이다.
‘데미안이 교황이 되어야만 한다.’
비록 오타쿠이지만 데미안은 순수한 사람이었다. 그가 교황이 된다면 레베카교는 변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파스칼이 교황이 되어선 안 돼.’
파스칼은 제국인이다. 제국 내에서도 권력이 강한 치리타 백작의 아들이다.
파스칼이 교황이 될 경우 제국은 레베카교를 멋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지금보다 훨씬 더 부강해지리라는 것이 라우엘의 확신이었다.
그리드도 동감했다.
‘언젠가 내가 왕이 되면 제국을 적대하게 될 텐데, 그때 놈들이 지금보다 더 강해져 있으면 안 되지.’
잠자코 생각하던 그리드가 입을 열었다.
“데미안, 너는 지금부터 즉시 선거 활동을 시작해라. 내가 너의 후견인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광고하도록 해. 후로이가 너를 도와줄 거다.”
“네!”
웅변가 랭킹 1위 후로이.
그의 흡입력 있는 연설은 사람들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는다.
데미안에게 반드시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동안 나는 리파엘의 창을 봉인하겠다.”
그리드가 이사벨을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리파엘의 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감정.”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범인을 초월하는 뛰어난 안목으로 물품을 감정합니다. 대상 물품에 숨겨진 기능이 존재할 경우 숨겨진 기능을 발견합니다.]
<리파엘의 창>
등급:신화
내구력:1,500/1,500
공격력:1,330~1,890
*신성력 +3,000
*모든 능력치 +200
*생명력 회복 속도 +300퍼센트
*매 공격 시 +5,000의 고정 데미지.
*높은 확률로 ‘빛의 차륜격’ 스킬 발동.
*높은 확률로 ‘빛의 보호막’ 스킬 발동.
*높은 확률로 ‘빛의 인도’ 스킬 발동.
*항시 ‘백화’ 발동.
*암흑 계열 마력을 보유한 대상에게 공격력 +50퍼센트.
레베카교의 3대 신기 중 하나입니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기 때문에 사용자의 정신과 신체에 커다란 부담을 줍니다.
전대 레베카의 딸들이 이 무기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단명하였기에, 안타깝게 여긴 제5대 교황 프렌스는 파그마에게 부탁하여 무기의 힘을 봉인시켰습니다.
하지만 제13대 교황, 드레비고의 시대에 등장한 파그마의 후예가 무기의 봉인을 풀었습니다.
사용 조건:레베카의 딸.
무게:400
[숨겨진 기능을 이미 밝혀낸 아이템입니다.]
‘이걸 다시 봉인하려면…’
아이템의 구조를 이해해야만 한다.
제작법을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그러기 위해서는 관찰뿐만이 아니라 <분해>와 <조립>의 과정이 필수였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틈날 때마다 아이템을 분해하고 조립해온 그리드는 리파엘의 창의 구조를 빠르게 파악할 자신이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일을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다르군.’
일이 어렵게 됐다.
이사벨이 문제였다.
그녀의 건강 상태는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심각했다.
만약 그녀가 리파엘의 창을 손에서 놓게 된다면, 그녀는 그 즉시 죽는다.
리파엘의 창을 분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관찰만으로 해내야한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그리드 본인조차도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사벨, 나는 너를 반드시 살릴 거야.”
이사벨은 소중한 사람이다.
NPC이기 전에 나와 추억을 공유하는 존재이고, 누군가에게 사랑 받는 존재이다.
데미안이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은 내가 아이린을 생각하는 마음에 못지않을 것이다.
‘결코 죽게 만들지 않아.’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세심하게 모든 특징들을 살폈다.
이렇게 단지 바라보는 것만으로 아이템의 이해도를 100퍼센트까지 올리는 것이 가능할까?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
그리드의 능력 범위 밖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스스로의 불완전성을 믿고 있었다.
‘나에게는 아직 개화시키지 못한 능력들이 있다.’
본래라면 전직 퀘스트를 완료해야지 얻을 수 있을 능력들.
기필코 그 능력들을 끄집어낸다.
‘할 수 있어.’
그리드의 전직 퀘스트는 진행 불가한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 탓에 벌써 1년 이상 전직을 완료하지 못한 상태다.
‘개발자들이 뇌가 없거나 조작질하지 않는 이상.’
진행 불가능한 전직 퀘스트를 대신해서 내 힘을 각성시킬 어떤 방안을 준비해두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해답은 리파엘의 창에 숨겨져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봉인 해제한 이유가 무엇이던가?
시스템이 시켰기 때문이다.
과거, 시스템 화살표가 그리드에게 리파엘의 창을 봉인 해제하게끔 유도했었다.
그리고 작금의 상황까지 이르게 만들었다.
분명한 안배다.
‘내 능력을 개화시키도록 준비 된 안배.’
리파엘의 창을 관찰하는 그리드의 눈빛이 점차 더 예리하게 변모한다. 그의 집중력이 극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간 수많은 시련을 넘으며 단련시킨 의지와 근성이 발휘되고 있었다.
‘그리드…’
그리드를 마주보고 앉은 이사벨의 마음이 점차 평온해진다.
레베카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를 믿으렴.
***
고요한 새벽.
그림자 속 까마귀가 창문 너머 그리드의 모습을 엿본다.
‘벌써 8시간째.’
좁은 방 안에 쭈그려 앉은 그리드.
그는 무려 8시간 동안 눈이 빠져라 리파엘의 창만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정신은 오로지 리파엘의 창에만 집중된 상태다.
빈틈투성이라는 뜻이었다.
‘레베카의 딸은 잠들었군. 이거야 원, 예상보다 더 시시한 암살이 되겠어.’
까마귀가 나무 아래로 착지했다. 그리고 그리드가 있는 건물 내부로 진입했다.
그 일련의 과정에 미세한 잡음조차 발생하지 않았다.
“…”
복도를 이동하는 까마귀가 은밀하다. 감각이 예민한 쥐새끼들조차도 그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고 활개 쳤다.
하지만 그림자 속 누군가는 그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