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7화 (72/1,794)

템빨 14권 - 3화

‘당혹스럽군.’

그리드.

그는 레베카 교인들에게 있어서 무척이나 각별한 존재다.

타락한 교황 드레비고를 징벌함으로서 교단을 구원한 영웅이니까.

생각보다 더 많은 교인들이 그리드의 위업을 기리며 칭송하고 있었다.

그가 데미안의 후견인임을 자처한 이상 커다란 파장은 피할 수 없다.

수많은 교인들이 데미안을 지지하게 될 공산이 컸다.

‘데미안 녀석, 비장의 패를 준비하고 있었구나.’

치명적으로 작용하는 회심의 패다.

소모품들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던 얼빠진 놈이 설마 그리드라는 거물을 물어올 줄이야, 상상조차 못한 일이다.

‘위기로군.’

그리드는 데미안에게 선거적인 도움만 줄 수 있는 게 아니다.

3대 신기 중 하나인 리파엘의 창을 봉인함으로서 데미안의 약점을 없애줄 수도 있는 존재였다.

‘이것 참, 입장이 난처하게 됐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과 달리 파스칼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경험이라는 무기를 지닌 그에게는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드는 영웅이 아니지.’

그리드가 드레비고를 해치운 이유.

그것은 레베카 교단을 위함이 아니라 그리드 본인을 위한 행동이었다.

그 진실을 파스칼은 알고 있다.

‘파브라늄이라는 괴상한 광물에 축복을 받아야했기에 드레비고를 죽였다고 했었다.’

그리드는 이기적이고 난폭하다.

파브라늄에 쥬다르 신의 축복을 내려줄 당시 파스칼은 그리드의 본성을 엿봤었다.

‘이기적인 사람일수록 다루기 쉬운 법.’

그리드가 데미안의 후견인임을 자처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뭔가 자신에게 득이 되는 것이 있기 때문일 터다.

씨익.

파스칼의 입가로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그리드여, 데미안 따위 보다야 내가 더 너를 충족시켜줄 수 있다.’

재물, 권력, 미인.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주겠다.

‘그러니 데미안을 버리고 내게로 오라.’

그리드만 얻을 수 있다면 선거에서 필승함은 물론이고 본교의 3대 신기 전부를 봉인 해제할 수 있다.

역대 최강의 레베카의 딸들을 거느린 교황이 될 절호의 기회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파스칼이 불편한 침묵을 깨뜨렸다.

“이야, 이야! 이게 누구시오! 레베카교의 구원자! 영웅 중의 영웅! 그리드님이 아니오이까!”

파스칼은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은 채 감탄사를 연발했다. 과장 된 언행으로 그리드를 추켜세우더니 악수를 건넸다.

“다시 만나 뵙게 되어서 참으로 반갑소.”

그리드가 당황했다.

‘이 능구렁이 같은 녀석, 노골적으로 도발했는데도 화내기는커녕 웃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과거에도 이랬지.’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성스러운 빛의 무구 세트를 내게 빼앗기고도 나를 적대하기는커녕 도리어 환대하였다.

드레비고를 징벌해주어 고맙다며 연회를 베풀어줬을 뿐더러 파브라늄에 쥬다르 신의 축복까지 조건 없이 내려줬었다.

고단수다. 굳이 강한 적을 만들기를 꺼려하고 도리어 회유하고자 노력한다.

‘조금 더 도발해볼까.’

생각한 그리드가 악수에 응했다.

“나도 반갑군.”

그리드가 화답하자 파스칼의 기세가 올랐다.

‘그럼 그렇지. 다른 원로들에게는 몰라도 내게는 그리 버릇없게 굴 수 없겠지.’

그리드 또한 잘 알고 있을 터다.

데미안 따위보다야 내가 더 자신에게 도움이 되리란 사실을.

자신감이 충만해진 파스칼이 상황을 신속하게 이끌어 나갔다.

“에트날 왕국의 공작이 되셨다고? 과연 영웅이시오.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금세 인정을 받고 권력자가 되셨구려. 자, 장소를 옮기십시다. 재회 기념 연회를 준비할 터이니 나와 오래간만에 회포를 나눕시다.”

사태를 지켜보던 데미안의 안색이 점차 굳어졌다.

‘그리드님과 파스칼은 서로 아는 사이였던 건가?’

큰일이다.

파스칼은 어마어마한 부자다. 그가 그리드를 돈으로 유혹할 수도 있었다.

데미안이 걱정하며 초조해하는 그때 파스칼이 쐐기를 박았다.

“그리드 공, 내 오늘 당신을 위해서 많은 선물을 준비하겠소이다.”

“호오, 선물이라. 그것 참 기대되는군.”

그리드가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에 데미안이 좌절하였고, 파스칼의 입가로는 짙은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이었다.

“한데 파스칼, 나는 일국의 공작이 아니더냐?”

꽈악!

악수하고 있는 손에 그리드가 강한 힘을 실었다.

파스칼의 얼굴이 급속도로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믿기지 않는 악력이다.

파스칼은 손이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껴야만 했다.

몸부림치는 그를 그리드는 놓아주지 않았다.

“교황이면 또 몰라. 일개 교황 후보 따위가 내게 고개를 숙여서 예를 표하기는커녕 악수를 청해? 그대는 내가 우습게 보이는가, 파스칼. 나를 영웅이라 칭송하는 것은 말뿐이었군?”

‘소국의 공작 따위가 감히 나를!’

파스칼은 뼛속까지 사하란 제국인이다.

제국 외 모든 국가를 작고, 미개하다 인식하고 무시하였다.

심지어 레베카 여신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민족은 오로지 제국인 뿐이라는 믿음까지 지니고 있는 민족주의자였다.

한낱 모험가 출신 따위의 소국 귀족에게 수모를 겪다니, 파스칼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한 굴욕이 없었다.

“이게 무슨 난폭한 짓이오! 헉?”

버럭 성을 내던 파스칼이 그리드와 눈을 마주친 순간 기겁했다.

‘이놈…!’

감정을 읽을 수 없고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

무엇을 의도하는지 모를, 그런 심오한 눈빛을 그리드는 아직 표출하지 못한다.

그리드의 눈빛은 도리어 명확한 뜻을 드러내고 있었다.

도발.

“덤벼라, 파스칼. 나는 너를 부수고 싶다.”

그리드의 눈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짐승 같은 놈!’

파스칼이 동요하는 그때 천장에서부터 하나의 인영이 떨어져 내렸다.

적색 갑주를 무장한 기사였다.

그의 이름은 까미앙.

적기사단의 30번째 기사로서, 파스칼이 교황이 되기를 바라는 제국 황제가 파스칼에게 친히 하사한 무력이다.

“그 손 놓으시오.”

그리드의 목덜미에 검을 겨눈 까미앙이 경고했다.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싫다면?”

“손목을 날려주지.”

까미앙은 망설임이 없었다.

파스칼의 손을 붙잡고 있는 그리드의 손을 향해 그대로 검을 내리 꽂았다.

파스칼이 소리쳤다.

“멈춰라!”

까미앙의 검이 그리드의 손목 바로 위에서 우뚝 멈췄다.

인벤토리로부터 실패작을 소환하고 있던 그리드의 미간이 좁혀졌다.

‘아깝네.’

그리드의 손을 간신히 뿌리친 파스칼이 이를 갈았다.

“그리드 공, 오늘의 무례는 내 눈감아 드리겠소.”

“그럴 필요 없는데? 내가 아까 말했잖아. 불만 있으면 덤비라고. 그냥 덤벼.”

“…”

파스칼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제국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레베카교에 입단한 이후 승승장구해온 자신을 이토록 무례하게 대하는 놈은 그리드가 처음이었다.

제아무리 신중한 파스칼이라고 해도 더 이상 이성적일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까미앙에게 지시하여 그리드의 목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3대 신기의 봉인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힘이 필요했으니까.

“조만간 다시 만날 때는 부디 서로가 웃을 수 있기를 바라겠소. 나는 언제나 당신을 위한 선물을 준비해놓고 있을 테니.”

얼굴을 시뻘겋게 붉힌 파스칼이 순순히 물러났다. 까미앙과 원로들 또한 그를 따랐다.

그들을 바라보는 그리드의 얼굴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인내력 하나는 대단하군.’

그리드는 고위 성직자 NPC들을 먼저 공격할 수 없다.

드레비고처럼 여신에게 버림받지 않는 이상, 그들은 여신으로부터 항시 비호 받기 때문이다.

그들을 먼저 공격할 경우 여신의 저주가 발동한다.

<여신의 저주>

불행 스탯이 생성됩니다.

불행은 상태 이상이라고 보기에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그리드도 여신의 저주는 꺼려졌다.

하여 파스칼이 자신을 먼저 적대시하게끔 계속 도발한 것인데,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뭐, 초조해하지 말고 기다려볼까.’

파스칼의 입장에서 나는 눈엣가시다.

이렇게까지 해놓았으니 머잖아 결국 내게 칼끝을 겨누게 될 것이다.

파스칼과 원로들이 떠난 후.

내내 잠자코 있던 이사벨이 그리드의 곁으로 다가왔다.

“오래간만이네요.”

새침한 목소리였다.

입을 비죽 내민 것을 보니 뭔가 불만이 있어보였다.

‘내가 밉겠지.’

이사벨이 끔찍한 고통에 시달려왔던 이유는 전적으로 그리드에게 있었다.

그리드가 리파엘의 창을 봉인하는 것을 잊은 탓에 사태가 이 지경까지 왔다.

“미안하다.”

그리드가 진심으로 사죄했다.

그를 본 이사벨이 이를 악물었다.

“당신이 왜 미안해하는 거죠? 혹시 리파엘의 창의 봉인을 푼 것에 대해서 사과하는 건가요? 웃기지 마요. 당신이 창의 봉인을 풀어준 덕분에 나는 내 친구들을 구할 수 있었어요. 오로지 당신 덕분에 교단 전체가 구원 받았어요. 그러니까 사과하지 마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감사할 따름이다.

‘근데 왜 화내는 거야?’

그리드가 의아해하는 사이, 이사벨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당신은 항상 그래요. 왜 꼭 내가 절망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만 나타나서 도와주는 건가요? 마치 백마 탄 왕자님처럼요.”

이사벨은 그리드에게 반했었다.

지옥으로 떨어지기 직전에 구원 받았으니 소녀의 감성이 자극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녀의 마음을 이미 한 번 외면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이리라.

“어차피 나를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왜 자꾸만 반하게 만드는 거냐고요…”

고개 숙인 채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사벨.

그녀의 말은 그리드에게 닿지 않았다. 너무 작은 목소리로 말한 것이 문제였다.

‘애 상태가 영 이상하네. 역시, 많이 아파서 그런가.’

그리드는 이사벨을 그저 가엽게 바라볼 따름이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백금발 머리카락이 이제는 백발에 가깝고 윤기조차 없다. 탐스럽게 붉었던 입술도 창백하고 비쩍 마른 몸은 마치 미라를 보는 듯하다.

특히 가장 큰 문제는.

‘가슴이 작아졌다.’

살이 빠진 영향이다.

본래는 최소 B컵 이상이었던 가슴이 A컵 이하가 되어버렸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 어딜 보는 건가요! 이 변태!”

시선을 느끼고 가슴을 가린 이사벨이 소리치자 그리드가 황당해했다.

“볼 것도 없으면서 무슨 생색이야?”

“보, 볼 것도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의미죠?”

“설명해줘?”

“됐어요!”

이사벨의 생기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로 오래간만이었다.

그리드와 투닥거리는 그녀를 보면서 데미안은 미소 지었다.

‘이사벨 쨩, 너는 항상 그리드님을 그리워했었지.’

너의 마음이 부디 그리드님께 전해지기를 바란다.

진실 된 응원이었다.

데미안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연적이 아니었다.

‘히로인들은 주인공과 연결되는 게 당연한 거니까.’

엑스트라에 불과한 나 따위는. 무능한 나 따위는 레베카의 딸들을 그저 곁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할 따름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데미안의 곁으로 다가온 후로이가 속삭여주었다.

“걱정 마십시오. 그녀는 결코 주군의 취향이 아니니까.”

“…”

아름다운 이사벨 쨩이 성에 차지 않는다고?

그건 또 그것대로 기분 나쁘다.

복잡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미안에게 그리드가 재촉했다.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거야? 어서 마땅한 장소로 안내해라.”

리파엘의 창의 제작법과 봉인법을 알아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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