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4권 - 2화
백색 외벽에 황금색 원탑.
마치 궁궐처럼 크고 화려한 건물 3채가 롤링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산림과 조화를 이루는 조경. 건물마다 등지고 있는 작은 폭포. 중심부에 우뚝 솟은 레베카 황금상.
부와 미가 밀집된 이곳이 바로 대륙 제일 종교인 레베카교의 중추, 교황청이다.
“이사벨 쨩!”
교황청에 돌아온 데미안은 이사벨부터 찾았다. 그녀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
이사벨의 건강은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아니, 도리어 악화됐다.
청력과 시력을 완전히 상실한 듯 보였다. 바로 곁에서 불러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콜록! 콜록!”
기침을 거듭하며 피를 토한다. 푸석푸석한 백금색 머리카락은 손길 한 번만 스쳐도 뜯겨져 나갔고, 피골이 상접하니 안타깝다.
허름한 침대 위에 영혼 없는 인형처럼 앉아있는 이사벨.
그녀를 바라보는 데미안의 억장이 무너졌다.
“빌어먹을… 이 방은 왜 항상 추운 거야…”
“늦으셨군요.”
존재감이 희미한 사제가 다가왔다. 무감정한 눈동자가 불길함을 주지만 겉모습과 달리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이다.
카서스였다.
데미안이 없는 동안 그가 쭉 이사벨을 수발해왔다.
“제국 서부에서 발견 된 야탄 신전 파괴 임무… 40일 내로 완수하고 돌아오실 줄로 알았습니다.”
한데 예상보다 일주일이나 늦었다.
여신의 대행자, 데미안.
어쩌면 그의 능력은 모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염려하는 카서스에게 데미안이 설명했다.
“임무는 한 달도 더 전에 완수했어요. 도중에 에트날 왕국에서 머무르느라 시일을 지체한 겁니다.”
한 달도 더 전이라고?
야탄의 신전 하나를 파괴하는데 보름가량밖에 소모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카서스는 전율을 느꼈다.
“한데 에트날 왕국은 어찌…?”
“그리드님을 만나 뵈었죠.”
“그리드님을!”
리파엘의 창을 봉인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
과거, 타락한 교황 드레비고에게 신벌을 내림으로서 레베카교를 구원하였던 그가.
“지금 이곳으로 오고 계십니다.”
과거에도 그랬듯, 이번에도 그는 이사벨을 살릴 것이다. 그녀의 아름다운 미소를 되찾아줄 것이다.
“그 틈에 저는 파스칼과의 경합을 시작하겠어요.”
교황 선출일까지 42일 남았다.
데미안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
여신의 대행자라는 클래스 효과 덕분에 의외로 많은 교인들이 자신을 믿고, 따라주었으니까.
‘그들을 기반으로 삼아서 선거활동을 한다면, 파스칼을 꺾고 내가 교황이 될 수 있을 거야.’
쥬다르교 교주 출신인 파스칼은 교황 후보 1순위다.
정치력이 강하고 경험이 풍부하다. 제5대 교황 파스칼의 후손이라는 적통성까지 보유했다.
심지어 부친이 사하란 제국의 백작이므로 뒷배도 좋다.
‘하지만 그는 타락했다.’
개인의 명예를 드높이고 가문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서 레베카교를 이용하고자 한다.
‘그가 교황이 될 경우, 레베카교는 드레비고 시절보다 더 끔찍한 길을 걷게 될 테지.’
이미 많은 교인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교인들은 교단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나를 선택할 것이다.
순진한 데미안은 그렇게 믿었다.
***
원로회.
공석인 교황의 업무를 대행하고 있는 기관이다. 23명의 최고위 성직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데미안을 소환한 그들이 명령했다.
“가우스 왕국 중부에서 야탄의 신도들을 목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왔소. 여신의 대행자, 데미안. 그대는 지금 즉시 가우스 왕국으로 향하여 야탄의 신전을 수색하고 파괴하시오.”
“교황 선출일까지 42일 남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교황 후보죠. 중요한 유세 기간에 제게 또 자리를 비우라는 겁니까?”
데미안의 올해 나이 서른.
한때 방구석폐인 생활을 했었던 탓에 그는 사회 경험이 부족하다. 부조리에 익숙하지 않다.
순진하게 따지는 그를 원로들이 비웃었다.
“선거활동 때문에 책무를 다하지 못 하겠다고? 스스로의 무능함을 고백하는 꼴이군.”
“떼를 쓰는 것은 어미 치마폭에 있을 때나 할 일이지… 쯧, 한심한지고.”
“교황 후보로 등록한 것 때문에 업무에 지장을 초래해서는 안 되지요. 차라리 후보직을 사퇴함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이사벨의 일을 대행하는 것을 관두시던가.”
무시, 조롱, 도발, 경멸.
원로회의 뚜렷한 적의가 데미안을 압박했다.
‘이들은 이제 완전히 파스칼의 사람이 되었구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하는군.’
데미안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여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나를 노골적으로 견제하는 권력자들의 행태가 무서웠다.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어.’
데미안은 이사벨을 살리기 위해서 그녀의 임무를 대행하고 있다.
반면 원로회의 목적은 이사벨의 폐기다.
리파엘의 창에게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기 위해서 그들은 이사벨의 죽음을 원한다.
‘이 상황에서 내가…’
선거활동을 해야 한답시고 이사벨의 임무를 등한시한다면?
결국 이사벨이 임무를 수행하게 될 것이고 그녀는 죽게 된다.
본말전도다.
데미안이 교황이 되고 싶은 이유는 레베카의 딸들을 위해서였다.
선거 때문에 이사벨을 버릴 수는 없었다.
“…알았습니다. 지금 즉시 가우스 왕국으로 향하도록 하죠.”
절망적이다.
이번 임무에는 수색까지 포함되어 있다.
교황 선출일 전까지 야탄의 신전을 찾아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애초에 그곳에는 야탄의 신전이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몰라.’
뻔한 견제이자 함정이었다.
하지만 당해줄 수밖에 없다. 이사벨을 지켜야하는 입장에서 원로회의 명령을 어기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리드님께서 도착하셔서 리파엘의 창을 봉인하실 때까지, 이사벨은 꼭 살아있어야만 해.’
나흘.
레이단에서 교황청까지, 말을 쉬지 않고 달렸을 때의 거리다.
그리드가 레이단에서 출발했다는 귓속말을 보내온 것이 어제였으니, 이사벨은 앞으로 3일만 더 버티면 살아날 수 있다.
‘제발.’
뚜벅뚜벅.
힘없는 걸음으로 원로회실을 떠나는 데미안.
그는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이사벨 쨩을 살려주십시오, 그리드님.’
내가 돌아올 쯤에는 이사벨의 건강이 회복되어 있기를. 그녀의 미소를 볼 수 있기를 바라본다.
끼익.
원로회실의 거대한 문이 스스로 열렸다.
불편한 존재인 데미안에게 어서 나가라 재촉하는 듯하다.
고개 숙인 데미안이 문밖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때였다.
“가지 마세요.”
“……!”
문밖에서부터, 그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로 깔려있던 데미안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이사벨 쨩…”
리파엘의 창을 손에 쥔 그녀가 문을 가로막고 있다.
그녀는 두 다리로 똑바로 서있었다. 눈의 초점도 또렷하다.
백화의 힘이다.
초월적 신성력이 망가진 육신을 정상적으로 회복시켜주고 있었다.
물론 일시적인 현상일 뿐이었다.
이제 저 창을 손에서 놓는 순간, 이사벨은 전보다 더 큰 고통에 떨게 될 것이다. 아니, 죽는다.
“어째서…! 어째서야! 왜 네가 이곳에 있는 거야!!”
3일만. 앞으로 3일만 기다렸으면 너는 살 수 있었다.
“근데 왜…!”
절망하고 좌절하는 데미안에게 이사벨이 미소 지었다.
“고마웠어요, 데미안.”
흐릿한 의식 속에서 당신의 외침을 들었다.
우리들을 위해서 홀로 고군분투 해왔음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은 꼭 교황이 되어야만 해요.”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
만약 데미안이 아닌 파스칼이 교황이 되었다가는, 나처럼 불행해지는 아이가 계속해서 생겨날 테니까.
“당신도 알고 있죠? 데미안, 나 하나 때문에 교황이 될 기회를 놓쳐선 안돼요.”
“…”
데미안은 알고 있었다.
제2, 제3의 이사벨이 탄생하지 않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꼭 교황이 되어야한다는 사실을.
지금은 이사벨이 희생해야하는 시점이다.
‘하지만 나는 네가 죽는 것을 원치 않아.’
데미안은 혼란스러웠다.
급기야 주저앉는 그의 머리를 이사벨이 어루만졌다.
“가우스 왕국에는 내가 다녀올게요. 그동안 당신은 꼭 교황이 되어주세요. 린과 루나, 그리고 내 후임을 잘 부탁드려요. 그 아이들을 꼭 지켜줘요.”
마치 솜털이 앉은 듯하다. 참으로 앙상한 손이다.
하지만 따뜻하다.
이사벨의 손길을 느끼는 데미안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를 비웃는 사람이 나타났다.
“교황을 꿈꾸는 자가 타인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파스칼이었다.
얇게 기른 콧수염을 매만지며 등장한 그가 조소했다.
“참으로 위엄 없는 교황 후보로군. 이런 울보가 교황이 되어서야 교단의 망신이지. 안 그렇습니까, 원로님들?”
“맞습니다.”
“데미안은 그릇이 작아요.”
“교황은 반드시 파스칼님이 되셔야만 합니다.”
23명의 원로들이 파스칼에게 동조하기 시작한다. 데미안을 조롱하며 깎아내렸다.
그들을 이사벨이 노려보았다.
“감히 레베카 여신의 대행자를 업신여기다니, 이는 신성모독이나 다름없음을 모르나요?”
“태도가 나쁘군. 이사벨이여, 그대가 적의를 보낼 대상은 야탄의 개들이지 우리가 아니다.”
이사벨에게 다가선 파스칼의 손이 리파엘의 창끝을 매만진다.
“주제파악을 하라. 본교의 신기를 다룰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여신의 딸이라 추켜세워 주니까 스스로의 위치를 망각하는가본데, 그대는 오로지 도구일 뿐이다. 여신과 본교를 위해서 목숨을 불태워 싸우는 전쟁 도구.”
이사벨을 직시하는 파스칼의 눈동자는 마치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도저히 사람을 보는 눈 같지가 않았다.
“그대는 이 창을 무기 삼아 그저 살육만 벌이면 되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말고, 주둥이도 놀리지 마라. 알았느냐?”
“그 입 닥쳐!”
데미안이 격노했다. 그의 심정 같아서는 당장 파스칼을 후려 패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그 즉시 교단에서 쫓겨날 것이다. 모든 일을 그르치게 된다.
주먹을 불끈 쥔 채 씩씩거리는 데미안을 보고 파스칼이 콧방귀 뀌었다.
“그대가 그토록 사랑하는 레베카의 딸이 눈앞에서 수모를 당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를 삭이는가? 요란하기만 할 뿐, 겁쟁이로군.”
“값싼 도발 집어치워.”
“……!”
데미안, 이사벨, 파스칼. 그리고 23인 원로들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졌다.
“약점 하나 붙잡았답시고 신나가지고, 여럿이서 사람을 괴롭히는 일이 즐거워?”
180이 넘는 키와 탄탄한 신체.
매혹적인 흑발과 예리한 눈매.
자신감으로 충만한 눈빛과 음성.
파그마의 후예, 그리드.
그가 복도 저 끝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한명한테 여럿이 괴롭힘 당해볼래? 응?”
“다, 당신이 어째서 여기에?”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동요한 파스칼과 원로들이 웅성거린다. 이사벨의 어안은 벙벙해졌다.
“그리드님!!”
데미안이 활짝 웃었다.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그리드를 보고 감격하여 분기하는 그에게 다가온 그리드가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잘 참았다.”
후로이의 비룡 덕분에 예정보다 훨씬 더 빠르게 교황청에 도착한 그리드.
그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파스칼과 원로들에게 선언한다.
“지금부터 내가 데미안의 빽이다.”
“…빽?”
파스칼과 원로들은 그리드의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후로이가 번역해주었다.
“이 시간부로 나, 에트날 왕국의 공작 그리드 레이단 드 스테임이 여신의 대행자 데미안의 후견인이다.”
웅변가 후로이의 음성에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넓은 원로회실에 힘 있게 울려 퍼지며 파스칼과 원로들의 안색을 질리게 만들었다.
그리드의 선언이 이어졌다.
“얘 함부로 괴롭히지 마라. 그러다가 나한테 혼난다.”
“두 번 다시 데미안 교황 후보를 조롱하였다가는, 그에 합당한 응징을 내릴 것이다.”
“불만 있어? 그러면 덤벼, 이 경험치 덩어리들아. 나는 데미안하고 입장이 달라서 너희들을 마음껏 상대해줄 수 있거든.”
“…”
뭐라고 포장하기가 힘들다.
후로이조차도 말문을 닫아버리자 원로회실에는 적막만이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