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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74화 (69/1,794)

템빨 13권 - 21화

“현실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군.”

세희와 함께 조깅하고 돌아오는 길.

영우는 반삭 머리가 유난히도 잘 어울리는 30대 중반의 사내와 마주쳤다.

“극검?”

게임 속 모습보다 날카로운 느낌이 더 강하기는 했지만 분명히 극검이었다.

외국인만 만나면 ‘두 유 노우?’를 연발하는 한국 알리미.

“하하하! 갓리드님께서 나를 알아봐주시다니, 영광인데?”

“유난 떨기는.”

영우는 극검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코크로 섬 던전에서 그와 함께 헬가오를 레이드하고 사쿠라 길드와 싸우면서 우정을 쌓았다.

하여, 그가 예고도 없이 방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쾌함을 느끼지 못했다. 도리어 반가운 감도 있었다. 당황하기는 했지만.

“보통 이 시간쯤에 조깅을 한다고 들어서, 아침부터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와 봤다. 혹시 마주치지 못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타이밍을 잘 맞췄군.”

극검이 명함을 내밀었다.

<대한 애국 협회>

초대 회장 강대한

강대한.

극검의 본명이다.

“대한 애국 협회? 뭐하는 곳이죠?”

“대한민국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일을 하고 있지. 예를 들어서 외국인만 만나면 두 유 노우…”

“잘 알겠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듣고 싶지 않았다.

설명을 들었다가는 괜히 황당하기만 할 것 같았기에.

“참고로 내 동생 이름은 민국이다.”

대한민국.

극검의 유별한 애국심이 부모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멋진 이름이네요.”

“그렇지? 근데 내 동생은 자기 이름을 싫어해.”

“왜죠?”

“여자애거든.”

“여자 이름이 강민국이라고요?”

“응.”

“…싫어할만 하군요.”

“그래, 나도 이해한다. 하지만 개명만큼은 절대로 허락할 수 없어. 민국이라는 이름이 사라지면 내 이름은 반쪽짜리나 다름이 없게 되니까. 그리고 애초에,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을 함부로 바꾼다는 게 말이 된다고 보나?”

“그것도 그렇군요.”

근데.

‘왜 이렇게 쓸데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거지?’

극검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다. 그는 보험판매원으로서의 재능이 다분해 보였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영우가 용건을 물었다.

“그래서,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그건.”

설명하려던 극검이 문득 세희와 눈을 마주쳤다.

세희가 꾸벅 인사하자 극검이 90도로 허리 숙여 답례했다.

“갓리드님의 동생이자 명성 높은 루비 성녀님을 실제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당신 남매는 정녕 대한민국의 보배입니다.”

세희의 얼굴이 붉어졌다. 상대가 과도한 격식을 차리고 오글거리는 멘트를 날려 오자 민망했던 것이다.

“오빠, 나는 먼저 들어갈게. 말씀 나누다가 가세요.”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가는 세희의 뒷모습을 극검이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예쁘고, 예의도 바르군. 내 동생 민국이와 아주 판박이야.”

“…”

“음, 어디 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이야기하는 건 어때?”

실컷 달리고 온 영우도 마침 목이 마르던 차였다.

“그러죠.”

두 사람은 근처의 카페를 찾았다.

***

6월 말.

기말고사를 끝낸 대학생들 덕분인지, 투모로우 카페의 좌석은 오전부터 적잖게 차있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문이 열리자 종업원이 인사한다.

반사적으로 출입구 쪽을 향했던 일부 손님들의 시선이 그대로 고정됐다.

“극검?”

“와, 진짜 극검이네.”

유라 다음가는 한국인 랭커, 극검.

그는 대한민국의 톱스타였다.

찰칵찰칵.

들뜬 사람들이 극검의 모습을 스마트폰에 담기 시작하는 그때였다.

딸랑.

극검의 뒤로 새로운 손님이 카페에 입장했다.

영우였다.

“가, 갓리드!”

“우와! 그리드다! 한동네 살면서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네!”

“꺄악! 영우씨 멋져요!”

“노에는 뭐해요?”

사람들의 이목이 일제히 영우에게 집중됐다.

과연 영우는 대세 중의 대세였다.

극검을 삼류 연예인취급 받게 만들 정도로 독보적인 인기를 뽐냈다.

영우를 뿌듯하게 바라보던 극검이 이내 종업원에게 주문했다.

“카푸…치노.”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내심 슬픈 듯하다.

사람들에게 화답해준 영우는 바나나 쉐이크를 주문했다.

구석진 위치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

드디어 극검이 용건을 꺼냈다.

“우리 은기사 길드를 템빨단에 병합시켜줘.”

“네?”

“우리도 템빨단의 일원이 되고 싶다.”

은기사 길드의 규모는 매우 컸다.

길드원의 숫자만 해도 200이 넘었고 금광과 관광지로 유명한 코크로 섬의 주인으로서 자금력도 훌륭하다.

50대 길드 목록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 대단한 길드가 템빨단에 합병되기를 스스로 바라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영우는 의심부터 했다.

“이미 큰 영광을 누리고 있는 은기사 길드가 굳이 템빨단에 들어올 이유가 어디에 있죠?”

극검이 솔직하게 대답했다.

“우리 길드의 성장은 딱 여기까지다. 길드원 중에 특출한 재능을 보유한 사람이 없을 뿐더러 코크로 섬은 섬이라는 지리적 한계를 가지고 있어. 세력 확장은 여러모로 힘들고 결국 도태되고 말겠지.”

도태되느니.

“대한민국의 자랑인 네가 이끌고 있는 템빨단에 가세해서 힘을 보태고 싶다. 네 밑에서 함께 최강의 길드를 만들고 그를 통해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고 싶어.”

극검은 영우가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거대 길드를 날름 삼킬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감히 누가 마다하겠는가?

하지만 영우는 의외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이유야 간단했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나는 조국을 위해서 템빨단을 설립한 게 아닌데요? 내가 템빨단을 만든 이유는 오로지 나와 내 동료들이 돈 많이 벌고 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섭니다.”

그렇다.

영우는 극검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전혀 다른 성질을 지녔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서? 그런 거창한 이유라면 길드 합병은 꿈도 꾸지 마세요. 나와 템빨단은 그런 것에 관심 없으니까. 애초에 템빨단은 다국적 길드라는 사실 모릅니까?”

솔직히 아깝다. 눈 딱 감고 은기사 길드를 집어삼키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 세력을 키운답시고 훗날 조직에 균열을 일으킬 가능성을 심어두느니, 차라리 미련을 버리는 편이 옳았다.

초조해하지 말고 대국적 시야를 가질 것.

라우엘에게 주입 받은 덕목 중 하나다.

‘무엇보다도 이 사람이 마음에 드는 게 문제야.’

극검에게 아무런 애정도 없었더라면, 거리낌 없이 길드를 합병시킨 후 등골까지 빼먹은 뒤 버렸을 수도 있다.

그게 라우엘과 라빗의 특기 분야이기도 했고.

하지만 영우는 극검이 마음에 들었다. 그와의 관계가 틀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짐짓 당황하고 있던 극검이 영우의 그러한 마음을 읽었다.

“솔직히 말해줘서 고맙다. 내가 너무 이기적으로 생각했구나.”

“고마울 것까지야.”

마침 종업원이 주문한 음료를 가져왔다.

그녀가 굳이 직접 음료를 가져온 이유는 영우를 보다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괜찮네.’

날카로운 눈매와 높은 티존, 그리고 다부진 체격이 인상적이다.

첫눈에 잘생겼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고 의지되는 훈남이었다.

‘100억짜리 빌딩도 짓고 있다지?’

이 남자를 물면 인생 편다.

종업원의 머릿속을 맴도는 생각이었다.

그녀가 유혹하는 시선을 보내오든 말든, 영우는 관심 없었다.

인기 있어본 경험이 적은 것이 원인이었다.

여성이 나에게 보내는 시선의 의미를 파악하는 재주가 영우에게는 아직 부족했다.

종업원이 D컵이었다면 사정이 좀 달라졌을 수도 있지만.

바나나 쉐이크를 흡입하는 영우.

종업원이 물러나길 기다렸던 극검이 다시금 말했다.

“은기사 길드를 템빨단에 병합시켜줘.”

붕언가?

원점으로 되돌아오는 극검에게 짜증을 느낀 영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에게 극검이 고개를 숙였다.

“나 또한 지존을 꿈꾸는 랭커다. 보다 좋은 환경을 원해. 최고의 길드에 소속되어 보다 나은 환경에서 게임을 플레이하고 싶다. 은기사 길드의 동료들도 함께.”

템빨단.

전설의 대장장이와 최고의 인재들이 시너지를 폭발시키고 있는 미래 최강의 세력.

극검은 개인적인 욕심으로도 그곳에 합류하고 싶었다.

영우를 실제로 만나보니 그 마음이 더욱 확고해졌다. 그의 관점에서 봤을 때 영우는 신용해도 좋은 인물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리드 너와 함께하고 싶다. 너와 함께 헬가오를 레이드 했던 그날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해. 그날이 내 게임 인생 중 가장 즐거운 날이었다.”

“흐음.”

열심히 화석을 채취하던 극검의 모습을 떠올린 영우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요즘에도 채광해요?”

헬가오 레이드 당시, 극검은 채광의 재미에 눈을 떴다.

화석을 하나 채취할 때마다 속이 뻥 뚫리는 중독적 쾌감을 느꼈다.

“자주 즐기는 편이지. 던전에서 사냥하다가 생명력이 간당간당해지면 채광을 해. 가만히 앉아서 쉬는 것보다야 그게 훨씬 더 낫더라고. 재미도 있고, 돈도 벌고, 스탯도 오르고.”

“채광 스킬 레벨 몇인데요?”

“하급 9레벨. 곧 마스터다.”

“호오.”

화석 채취 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법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기대 이상의 성장속도다. 채광이 어지간히도 좋은가보다.

“코크로 섬에는 광산이 많죠? 광부도 많겠네요?”

“그치. 코크로 섬 주민 중 대부분이 광업을 생업으로 삼고 있다. 또한 길드원 중에도 광부가 몇 명 있고.”

영우의 미소가 더욱 더 짙어졌다.

“좋아요. 은기사 길드를 받아들이도록 하죠.”

“정말인가!”

기쁨을 금치 못하는 극검이었다.

영우가 조건을 걸었다.

“단, 다른 길드원들에게 한국 사랑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요.”

영우도 한국인이다. 여러모로 썩었다고 욕을 많이 먹는 나라이기는 하나 그래도 한국이 좋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드원들에게 같은 마음을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극검도 눈치는 있었다.

“알았다.”

이걸로 일단락 됐다.

바나나 쉐이크를 바닥까지 비운 영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죠. 길드 합병에 관한 이야기는 Satisfy에 접속해서 라우엘과 나누도록 하시고요.”

“음!”

기뻐하는 극검.

그는 템빨단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애국심을 버렸는가?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템빨단이 굳이 대한민국을 위한 행동을 취하지 않을지라도, 템빨단에 소속된 우리 한국인들이 명성을 높인다면 자연히 대한민국의 위상도 높아질 거라는 사실을 말이다.

무조건 템빨단에 가세하는 것이 거시적으로 봤을 때 여러모로 좋았다.

“헤이.”

영우와 함께 카페를 나온 극검.

그가 때마침 지나가는 외국인 커플을 불러 세웠다. 그리고 영우를 가리키며 물었다.

“두 유 노우 그리드?”

“…”

영우는 창피했다.

극검에게 충분한 주의를 줬다고는 생각하지만, 그래도 역시 한계는 있어보였다. 템빨단원들이 당분간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아 염려되었다.

‘뭐, 그런 부분들은 라우엘이 알아서 잘 조율해주겠지.’

라우엘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극검과 작별한 영우가 곧장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캡슐에 앉았다.

“로그인.”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였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가신으로 받아들인 후 기사단을 창설해야하고, 그 후에는 리파엘의 창을 관찰, 봉인하여 신화급 아이템의 도안을 획득하는 한편 이사벨을 살려야했다.

‘그리드 세트도 몇 개 더 만들고.’

여러모로 계획을 짜는 영우의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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