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3권 - 20화
데미안의 요청을 받아들인 이후, 그리드는 템빨단원들과 라빗으로부터 행정 보고를 들어야만 했다. 귀찮아도 어쩔 수 없었다. 영주로서 최소한의 책무였다.
그 결과 1시간이 훌쩍 지났다.
‘피곤하다.’
5주간 퀘스트를 진행하느라 누적 된 피로도가 너무 높았다. 수면 시간이 부족한 것이 문제다.
“그리드님, 바로 교황청으로 출발하시는 겁니까?”
회의실 밖.
대기하고 있던 데미안이 다가와 묻는다.
눈을 초롱초롱 빛내오는 그에게 그리드가 손을 저었다.
“난 일단 쉬어야한다. 나중에 접속해서 연락할 테니까 넌 먼저 교황청에 가있던가 해.”
“넵.”
솔직한 심정으로, 데미안은 그리드가 지금이라도 당장 교황청으로 향해주기를 바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 받고 있을 이사벨 쨩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차마 재촉하지 못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수개월을 기다려놓고 고작 하루, 이틀 더 못 기다리겠는가?
정중히 고개 숙이는 그를 뒤로한 그리드가 로그아웃했다. 그리고 곧바로 침대로 가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
국가대항전 이후부터 지금까지.
Satisfy 시간으로 장장 10개월 동안 유라는 단 하나의 퀘스트에만 몰두해왔다.
<고행의 길>
난이도:SS
야탄의 첫 번째 종을 만나야만 합니다.
퀘스트 클리어 보상:???
일말의 단서조차 없었던 퀘스트다.
퀘스트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유라는 셀 수 없이 많은 역경에 봉착해야만 했다. 몇 번이고 좌절을 맛봤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애초에 쉽게 포기할 인물 같았으면 통합 랭킹 5위가 되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의 근성과 집념은 일반인의 범주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드디어 찾았어.’
더러운 흙먼지와 역겨운 핏물조차도 유라의 미모를 퇴색시키지 못했다.
기나긴 사투 끝에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잡티 하나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깨끗한 하얀 피부와 흑단 같은 머리카락이 조화를 이루어 그녀를 빛나게 만들었다.
뚜벅뚜벅.
깊은 공동.
유라가 공동 중앙에 세워진 제단 위로 올라섰다.
제단에 놓인 것은 순백의 불꽃이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야, 나약한 인간의 육신으로 용케 이곳까지 도달하였구나.]
천사의 음성이 이럴까?
더없이 상냥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불꽃으로부터 들려온다.
유라의 눈가가 파르르 경련했다. 기다란 속눈썹이 물결치듯 흔들렸다.
‘내 예상이 맞았어.’
모든 것이 베일에 싸여있었던 야탄의 첫 번째 종.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증거?
눈앞의 하얀 불꽃에 있다.
이 불꽃의 정체는 악마의 영혼이다.
[네게는 나 아모락트를 영접할 자격이 충분하다.]
분쟁의 악마, 아모락트.
33대악마중 하나인 그가 바로 야탄의 첫 번째 종이었다.
악마의, 악마에 의한, 악마를 위한 종교.
그것이 야탄교의 본모습이었던 것이다.
힌트는 많았다.
야탄교는 33대악마를 지상에 강림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활동한다는 점.
야탄의 종에는 발락 등의 마족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전설이 서술하기를, 33대악마는 악신 야탄의 피조물이라는 점.
그 모든 특징을 종합해 봤을 때, 야탄교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라고 볼 수 없었다.
야탄교는 명백한 인류의 적이다.
[아이야, 내가 네게 무한한 힘을 주겠다.]
아모락트가 유혹해온다.
[네가 나약한 인간의 육신을 탈피할 수 있게끔 도와주겠다.]
유라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고행의 길(SS)>퀘스트를 클리어하였습니다.]
[아모락트의 마력을 받아들일 경우, 종족이 인간에서 반(半) 마족으로 변경됩니다. 마족은 악마로 진화할 수 있습니다.]
[아모락트의 마력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선택권을 준다고?’
보상을 받을 것인지, 받지 않을 것인지. 그 선택을 유저에게 떠넘기는 형식의 퀘스트는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이가 시사하는 바가 뭘까?
유라의 영민한 두뇌가 활성화됐다.
그동안 축적해온 온갖 정보와 경험을 토대로, 고도의 지능이 현재 상황을 빠르게 분석한다.
유라가 이내 해답을 찾았다.
“거절할게요.”
아모락트의 영혼이 일렁거렸다.
예상치 못한 선택에 동요하는 것이다.
[아이야, 어째서냐? 왜 힘을 거부하는 것이냐?]
“…”
[아이야, 너는 설마 야탄 신을 배반할 작정인 것이냐?]
흑마법사로 전직하여 야탄교의 일원이 된 후.
유라는 실로 많은 악행을 저질러왔다. 그것은 흑마법사의 숙명이었다.
흑마법사 유저들이 부여받는 퀘스트는 늘 사람을 해치고 분란을 조정하는 것들이었다.
그에 대한 죄책감?
마음이야 불편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Satisfy는 근본적으로 게임이다. 현실과 달랐다.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한 편이었고, 악이 됨에 있어서 거리낄 것이 없었다.
유라는 악의 길을 선택한 유저로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왔다. 그 결과 야탄의 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염증을 느낀다.
뒤늦게 죄책감을 느껴서?
아니다.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네, 배반할 생각이에요. 당신의 힘을 받아들여서 영원히 야탄의 종으로 남게 된다면, 저는 결국 어떤 남자와 적이 될 수밖에 없거든요.”
[남자? 누구를 말하는 게냐?]
“그리드.”
유라의 호수 같은 눈동자가 아모락트의 영혼을 꿰뚫는다.
“야탄의 종 학살자죠.”
[뭣이!]
얼마 전, 유라는 그리드가 다크버스를 살해함으로서 총 3명 째 야탄의 종을 죽였다는 소식을 전달 받았다.
야탄교에 그리드 척살령이 내려진지는 오래다.
유라는 굳이 야탄교에 남아서 그와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야탄교를 떠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되었으니 어리석은 행위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황이 변했다.
무려 SS등급 퀘스트 보상에 선택권이 존재하는 이유가 뭘까?
추측하기는 쉬웠다.
보상을 거절할 경우, 그에 상응하는 ‘숨겨진 보상’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터다.
“야탄의 종 노릇, 그만둘게요. 사실 저는 처음부터 야탄이 마음에 들지 않았거든요.”
흑마법사를 선택한 이유는 단지 재미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무조건 야탄 신을 섬겨야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애초에 흑마법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엄한 년!!]
아모락트의 상냥하고 따스하던 목소리가 무시무시하게 변모했다. 단지 외침만으로 유라를 죽여 버릴 기세였다.
하지만 유라는 위축되지 않았다.
아모락트가 지상에 강림하는 것이 현재로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띠링!
[아모락트의 마력을 거부하였습니다.]
[야탄의 종 지위를 박탈당합니다.]
[야탄교에서 추방당합니다.]
[흑마력을 상실합니다.]
[야탄교와 영원히 적대하게 됩니다.]
[레전드리 클래스, 데빌 슬레이어로 전직합니다.]
[레벨이 하락합니다.]
[레벨이 1이 되었습니다.]
“어머.”
레전드리 클래스를 획득하리라고 예상은 했다. 하지만 설마 레벨이 1로 떨어질 줄은 몰랐다.
당황하는 유라의 시야로 새롭게 습득한 스킬 목록이 쉴 새 없이 나열되고 있었다.
이날.
랭커 목록에서 유라의 이름이 사라졌다.
당연히 큰 화제가 되었다. 세계 곳곳에서 온갖 추측들이 난무했다.
***
눈을 뜨니 새벽 4시 반이다.
장장 13시간을 잤다.
영우가 멍한 표정으로 방에서 나오자 부모님께서 반겨주었다.
“아들! 한 집에 살면서 어쩜 이렇게 얼굴 보기가 힘드니?”
“열흘만이로구나.”
영우의 부모님은 직접 농사를 짓고 그 농작물들을 판매하는 채소 가게를 운영하신다. 매일 새벽 일찍부터 일을 나가 밤늦게야 들어오셨다.
반면 영우는 하루 중 대부분을 캡슐 안에서 보냈다. 특히 최근 12일 동안은 퀘스트를 진행하느라 유난히 플레이 시간이 길었다.
세 사람이 마주치기 힘든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요 며칠 동안 뉴스에서 계속 영우 네 이야기가 나오더구나. 큰일을 하느라 바쁜 건 알지만 너무 무리하지 말거라.”
“건강부터 챙기렴. 최근에는 운동도 안하는 것 같던데 걱정이다. 네가 어디 아프기라도 했다가는 우리도 우리지만 국민들이 슬퍼할 거야.”
‘큰일… 국민…’
국가대항전에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인 뒤로 영웅 대접 받게 된 영우였다.
솔직히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게임 폐인이라고 조롱 받았던 시절과 괴리감이 너무 컸다.
‘역시 어느 분야든지 성공하고 볼 일이라니까.’
기분이야 좋다. 무척 뿌듯하다. 나를 자랑스러워하시는 부모님을 볼 때면 특히 더.
스트레칭하면서 두 분의 말씀을 새겨 듣던 영우가 문득 의아해했다.
“근데 제가 뉴스에 나왔다고요?”
“그래, 7대 길드인가 8대 길드인가 뭔가 하는 사람들이 연합하여 너의 도시를 침략하였다면서?”
“네?”
“영우 너와 네 동료들이 그들을 아무런 피해도 없이 격퇴하였다면서?”
“네?”
“아수라? 아슈르? 인가 하는 백작이 엄청 대단한 사람인데, 그 또한 너를 도와주었다면서?”
“엥?”
“TV에 나온 전문가라는 양반들이 매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우리아들을 칭찬하던걸? 오호홋.”
“…”
영우는 눈 뜨자마자 혼란스러웠다.
당최 두 분이 하시는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충 종합해 보면… 7대 길드가 연합하여 레이단을 침공해왔고, 템빨단이 아슈르 백작과 함께 그를 격퇴했다는 말씀 같은데.’
근데 왜 나는 그 사실을 몰랐지?
‘라우엘 그 녀석.’
녀석이 말한 ‘사소한 일’이라는 게 바로 이번 사건이었던 건가.
‘사소하기는 개뿔.’
영우가 피식 웃었다.
템빨단원들이 내게 이번 사건을 굳이 보고하지 않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발생한 피해도 없었으니, 괜히 내가 근심하지 않게끔 배려한 거군.’
퀘스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을 터다. 퀘스트를 끝내고 돌아온 날에는 내가 너무 피곤해하니까 차마 오래 붙잡고 있지 못한 것일 테고.
동료들이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날로 깊어지고 있음을 느낀다.
‘뿌린 대로 거둔다더니.’
못난이였던 과거에는 독기로 충만하여 오로지 내 안위만을 살폈던 신영우.
그때의 영우는 늘 혼자였다. 그 누구에게도 존중받지 못했다. 그 본인부터가 타인을 배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성공한 이후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타인을 배려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본인도 존중받게 되었다.
이제는 ‘친구’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존재들이 많았다.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오랜만이네?”
부모님과의 아침 식사 후.
목욕하고 나온 영우에게 막 일어난 세희가 인사해왔다.
오래간만에 만난 동생은 더 예뻐져 있었다.
“성장기라 그런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밀하게 살펴오는 영우의 눈길이 세희의 얼굴을 붉어지게 만들었다.
“변태처럼 뭘 보는 거야!”
“변태라니?”
오빠가 동생의 성장한 모습을 확인하는 행위를 어째서 변태라고 비난받아야 하는가?
어리둥절해하는 영우에게 세희가 운동복을 던져주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겼나 본데, 오래간만에 운동이나 하지 그래?”
“그럴까?”
지난 12일 동안, 간단한 스트레칭과 팔굽혀펴기를 할 때를 제외하면 몸을 딱히 움직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답답하던 차였는데, 동생이 먼저 이렇듯 제안해주자 영우는 기뻤다. 오래간만에 밖으로 나가 신나게 달렸다. 폐부로 들어오는 맑은 공기가 영우의 정신과 신체를 단련시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한 사내가 영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실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군.”
극괭… 아니, 극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