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3권 - 19화
피아로가 전설의 농부가 됐다고?
터무니없는 억측. 아니, 이건 거의 망상 수준이다. 온통 악플로 도배되어 있는 삼류 웹소설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막장 전개다.
‘검성을 꿈꿨던 피아로가 생뚱맞게 농부가 됐을 리 없잖아?’
피아로가 풍작 확률을 올려주는 이유는 단지,
‘취미로 밭일을 즐기던 도중에 풍작을 발생시키는 기술을 습득한 거겠지.’
이야말로 타당한 추측이었다.
피아로는 원체 다재다능한 인물이었으니까 불가능할 일도 아니었다.
‘나도 참, 황당한 망상을 다 했군.’
지나가던 쥬드가 비웃을까 두렵다.
자조 섞인 미소를 흘린 그리드가 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살폈다.
둘만의 시간이 필요할 터.
“자리를 피해주자.”
그리드가 눈짓하자 템빨단이 그의 뒤를 따랐다. 데미안도 함께였다.
단둘이 남게 된 피아로와 아스모펠은 기나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날 두 사람은 다짐하게 된다.
친우와의 오해를 해소시켜주고 진정한 복수의 대상을 알려준 그리드 공작.
우리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해준 그에게 영원한 충성을 서약하겠노라고.
***
영주성으로 향하는 길.
크게 발전한 레이단의 멋진 풍경이 그리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확실히 바이란 이상.’
하지만 윈스톤보다는 한참 못하다.
규모는 그 2개 도시를 합친 것보다 곱절 이상 컸지만 전체적인 시설 수준은 소도시급에 불과했다.
애초에 인구가 적은 것이 문제다.
최고의 행정관 라빗이 활약하고 있다지만 인력이 없으니 발전 속도가 더뎠다.
“라우엘, 인구난을 해소할 방안은 마련 됐어?”
“당신께서 그리하셨듯이, 제국 도처에서 핍박 받고 있는 소수민족들을 확보하여 이주시켜올 계획입니다.”
울족의 경우를 말함이다.
하지만 그 방법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다.
템빨단원들이 너무 큰 고생을 하게 된다. 또한 제국과 척을 지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자연스럽게 인구를 늘리는 방법은 없나?”
“그건…”
그리드는 아직 모르는 일이었지만, 7대 길드의 침공 사건 덕분에 레이단은 범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실로 많은 사람들이 레이단에 관심과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라우엘이 확신하건데,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유저들이 레이단으로 이주해오고자 노력 중일 것이다.
하지만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게 문제였다.
그들 중 과연 몇이나 레이단까지 도달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우선 광산 개발을 완료하고 도로를 연결하면 병력의 배치가 용이해질 테고, 그때부터는 몬스터의 숫자가 서서히 줄어들 테니… 그때까지는 느긋하게 기다리는 수밖에 없어요.”
“광산 개발의 진척 속도는?”
“전문 인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광부의 확보가 어렵죠. 예정보다 더 시일이 걸릴 듯합니다.”
“광부라…”
광물 탐지기 마이너를 광부로 육성한다면 이상적일 테지만 파브라늄의 수색이 먼저다.
당장 마이너를 광산에 투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너무 초조해하지 않아야겠군. 그보다 마이너 이 녀석은 왜 이렇게 감감무소식이야?’
서부에 존재하는 골렘의 미궁을 발견하는 임무를 수행 중인 마이너.
혹시라도 몬스터들에게 잘못 걸려서 위기에 빠진 것은 아닐까 걱정이다.
아니, 그 영악한 놈이 쉽게 당할 리 없다.
‘쓸데없는 걱정은 삼가자.’
그리드가 화제를 전환시켰다.
“근데 라우엘, 다른 길드들은 이미 기사단을 보유 중이냐?”
“기사단이요? 아마 많이들 보유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길드 내에서 특정 조직을 만든 후 기사단이라는 이름을 부여하면 기사단이 되는 거니까요. 뭐, 양산하기가 쉽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것을 보면 기사단이라는 시스템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눈치이다.
‘진정한 기사단의 주인이 되는 건 내가 최초이려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네임드 NPC는 아무나 거느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최초의 기사단…’
Satisfy에서 최초라는 수식어가 갖는 의미는 무척이나 크다.
특정 업적을 최초로 달성할 경우 특별한 혜택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과연 어떤 혜택을 받게 될까?’
그리드의 마음이 다시금 들뜨기 시작한다. 하지만 결코 해이하지는 않다.
신중하지 못했던 과거에 수도 없이 겪었던 고난과 좌절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그는 항시 적절한 긴장 상태를 유지하는 중이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그리드 공작각하! 환영!”
영주성 입구.
그리드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한 라빗 행정관과 쥬드가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대영주의 검을 장착, 그들을 관찰한 그리드가 미소 지었다.
‘이들도 발전했군.’
라빗 행정관은 지력과 정치력 스탯이 대폭 성장해 있었고 쥬드는 무력과 체력 스탯이 성장해 있었다.
평소 이들이 맡은 바 역할에 얼마나 충실히 임해왔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나 없는 동안 그대들의 고생이 많았다.”
그리드가 두 사람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라빗 행정관은 겸허히 고개를 숙였고, 쥬드는 황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기뻐했다.
이제 그들까지 대동한 그리드가 영주성에 입장한다.
긴장한 채 도열하고 있던 1천 병사가 일제히 경례했다.
“구국의 영웅! 레이단의 태양! 위대하신 그리드 공작각하를 뵙습니다!”
“충!!”
쩌렁쩌렁한 외침이 내성을 뒤흔들었다.
그들의 면면을 살피는 그리드의 눈빛에 이채가 실렸다.
‘제국의 병사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겠다.’
엄청난 성장 속도다.
탈주병을 발생시킬 정도로 무식한 쥬드의 훈련법이 큰 효과를 보이고 있다는 증거다.
<나, 아무 생각 없다(SS-)> 스킬의 위력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막말로 대책 없이 병사들을 혹사시키는 쥬드의 활약(?)이 그리드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를 예의주시하고 있던 한 사내의 눈이 번뜩인다.
데미안이었다.
‘이때다!’
그리드가 레이단에 도착한 이후.
그에게 인사할 타이밍만을 엿보고 있던 데미안이 드디어 기회를 포착한 순간이었다.
그리드의 기분이 좋아 보이는 바로 지금!
“그리드님!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데미안이 나서서 인사했다.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대은인 그리드에게 정녕 깍듯하게 행동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 숙여 예를 갖췄다.
그리드가 질문했다.
“누구냐, 넌?”
“헉.”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다.
“기, 기억조차 못하시는 겁니까?”
데미안이 울상 지었다.
서운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그를 보면서 그리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드의 입장에서는 교황 레이드 당시 엑스트라나 다름없던 데미안을 기억할 리 만무했다.
벌써 오래 전 일이기도 했고.
도통 떠올리지 못하는 그에게 데미안이 자신을 정식으로 소개하였다.
“저는 레베카교의 성기사이자 여신의 대행자인 데미안이라고 합니다. Satisfy 시간으로 약 1년 2개월 전, 그리드님께서 교황 드레비고를 레이드하실 당시 곁에서 버프를 걸어드렸었죠.”
“아.”
그제야 그리드는 데미안을 기억할 수 있었다.
오타쿠 성기사.
그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이 녀석의 버프 능력은 가히 경이적이다.
“기억났다. 근데 네가 여긴 왜 있냐?”
혹시 템빨단에 가입하고 싶어서?
기대하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넙죽 절을 올렸다.
“제발 이사벨 쨩을 살려주십시오!”
“이사벨?”
그건 또 누구야?
‘아, 생각난다.’
레베카의 딸 중 하나다. 백금발 머리카락이 유난히 눈부셨던 창술사.
‘걔한테 뭔 일이라도 있나?’
아니, 근데 왜 나한테 살려달라는 거지?
‘아차.’
의아해하던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기억해낸 것이다.
‘리파엘의 창.’
파그마가 레베카의 딸들을 위해서 봉인해놓았던 신급 무기.
내가 그것의 봉인을 풀었다.
그리고 방치한 채 돌아왔다.
‘이런 염병.’
이사벨이 나 때문에 죽어가고 있나보다.
사태를 파악한 그리드의 표정이 불편해졌다.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고, 당장 데미안이 손해배상을 청구해 올까봐 걱정이었다.
‘돈도 없는데.’
노심초사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데미안이 재차 부탁하였다.
“제 전재산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부디 이사벨 쨩을 살려주십시오!!”
“어?”
손해배상을 청구해올 줄 알았더니, 도리어 보상을 주겠다고? 그것도 전재산을?
‘호군가?’
어처구니없어 하고 있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귓속말을 보내왔다.
-데미안님은 교황 후보입니다. 그를 도와 힘을 실어 주심이 어떻겠습니까? 그가 교황으로 등극하게 될 경우, 레베카교라는 막강한 세력과 레이단은 친교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에 따른 이익 창출은 감히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수준이죠.
‘교황 후보…’
사실 그리드는 처음부터 데미안을 도와줄 생각이었다.
무엇보다도 이사벨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고, 또한.
‘리파엘의 창.’
신급 아이템.
그것을 자세히 관찰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드디어.’
신급 아이템의 모작을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실패작 이상. 아니, 어쩌면 파그마의 작품들을 상회하는 아이템이 탄생할 수도 있다.
그리드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얼마?”
“네?”
침묵을 지키고 있던 그리드가 두서없는 질문을 던지자 데미안이 당황했다.
어리둥절한 그에게 그리드가 답답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리파엘의 창을 봉인해주는 대가로 전재산 주겠다며? 그게 얼마냐고.”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야한다.
이건 유별한 욕심이 아니다. 호구가 아닌 이상, 이득을 취할 기회를 놓치는 건 어리석은 행위였다.
‘호구 짓은 과거에 골백번 더 한 것으로 충분하지.’
데미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당장 준비한 금액은 53만 골드입니다…”
적금까지 털어서 준비한 금액이다.
“흠.”
한화로 계산하면 얼마지?
‘6억 3천 6백만 원…’
그리드가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는 그때였다.
그리드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불안감을 느낀 데미안이 다급히 말을 이었다.
“하, 하지만 맨션을 처분한다면 약 120만 골드를 추가로 더 준비할 수 있습니다!”
“맨션?”
“예! 일본 도쿄에서 제가 거주 중인 작은 맨션입니다!”
‘NPC를 살리기 위해서 현실의 집을 팔겠다고?’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데미안을 병신이라며 비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아이린, 칸, 피아로.
그들을 겪고 NPC 사랑이 각별해진 그리드였기에 데미안에게 도리어 동질감을 느꼈다.
‘이 녀석 마음씨 곱네.’
호감이 생긴다.
그뿐만이 아니다.
데미안은 교황 후보다. 교황이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한다.
‘당장의 금전에 욕심을 내기보다는 미래의 관계를 생각해야겠지.’
지금 데미안에게 은혜를 베풀어 놓는다면, 훗날 내게 큰 도움이 되리라.
“53만 골드만 받겠다.”
“헉?”
데미안은 그리드가 얼마나 탐욕스러운 인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사벨 쨩을 살리고 싶어 하는 내 마음을 고묘하게 이용하여 밀고 당기기를 반복, 어마어마한 금액을 뜯어 가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어쩌면 장기까지 매매해야하는 지경에 이르지는 않을까 이미 각오를 다진 상태였다.
하지만 오해였다. 그리드는 그 정도로 사악한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애가 깊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이렇게 흔쾌히 도와주실 줄이야!
감격한 데미안이 눈물 흘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에 떨고 있을 이사벨 쨩을 살려주겠다고 흔쾌히 나서는 그리드가 그는 천사처럼 보였다.
한편 그리드는 격앙되어 있었다.
‘신급 무기를 관찰할 기회를 돈 까지 받아가면서 얻게 되다니.’
로또 당첨금액 받으러 가는 길에 돈다발 주운 심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