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71화 (66/1,794)

템빨 13권 - 18화

“이곳입니다.”

“뭐?”

그리드는 피아로가 정확히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몰랐다.

워낙에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니만큼 알아서 잘 존중 받고 편히 지내리라 막연하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이제 보니 착각이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지냈을 줄이야.’

<농민 합숙소>

저마다의 사연으로 가족을 잃은 홀아비, 노총각 농부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대규모 숙소이다.

쾨쾨한 땀내가 진동하는 이 허름한 곳에 검호가 머물고 있다니?

그리드는 당혹스러웠다.

“레이단 넓잖아? 집 한 채 내어주기가 그렇게 힘들었어?”

머잖아 검성이 될 검호를. 우리 모두의 스승을 왜 이리도 천대하는가?

책망의 시선을 보내오는 그리드에게 라우엘이 설명했다.

“피아로님 본인께서 원치 않으셨습니다. 자신에게는 편한 삶을 영위할 자격이 없다고 하시더군요.”

그리드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죄책감 때문인가.’

자신이 누명을 쓴 탓에 죽게 된 가족들과 동료들에 대한 죄책감.

어쩌면 피아로는, 지난 수년 동안 단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겉으로는 밝게 행동했으면서.’

최근에는 마음의 상처를 거의 다 극복한 줄 알았더니 오해였다.

“그리드 공작각하께서 행차하셨…”

“됐어.”

큰소리로 외치려하는 라우엘을 제지한 그리드가 아스모펠에게 물었다.

“마음의 준비는 됐나?”

레이단에 도착한 이후 쭉 잠자코 있던 아스모펠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죽을 각오는 오래 전부터 하고 있었소.”

“거참, 그놈에 죽는단 소리는.”

히든 퀘스트 <숨겨진 이야기>의 보상은 피아로, 아스모펠과의 호감도가 최대치로 오르는 것이었다.

그리드로서는 네임드 NPC인 아스모펠이 부디 죽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의 생사여탈권을 그리드가 아닌 피아로가 쥐고 있었으니 문제였다.

‘내가 다 떨리네.’

심호흡한 그리드가 숙소 안으로 들어갔다.

고단한 노동에 지쳐 깊이 잠든 농민들 사이로, 홀로 고상하게 앉아 명상 중인 피아로가 보였다.

조용히 눈을 뜨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그리드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강해졌다.’

피아로는 원래 강하다.

하지만 그리드는 피아로와 싸워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검술 실력이 차이 난다고는 하지만, 노에와 랜디를 소환하여 전투에 가세시키고 스킬을 연발하면 결코 패배할 리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오만이었다.

그리드의 높은 통찰력이 피아로를 가늠할 수 없는 괴물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5주 전과는 전혀 달랐다.

‘헬가오 이상의 존재감…’

설마, 내가 없는 사이에 검성의 경지를 이룩한 것인가?

두근! 두근! 두근!

그리드의 심장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면 내 사람이 될 존재가 검성이라고 상상해보자 흥분이 고조된 것이다.

“한층 더 강해졌군, 그리드 공작.”

자리에서 일어난 피아로가 그리드를 직시해온다.

그 깊은 눈동자 속에 옅은 투지가 깃들어 있음을 그리드는 엿볼 수 있었다.

‘싸우고 싶다.’

지금의 피아로를 상대로 내 실력을 시험해보고 싶다.

이제는 물욕뿐만이 아닌 무욕(武慾)까지 품게 된 그리드의 열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퀘스트가 먼저였다.

“아스모펠은 죽였는가?”

피아로의 눈동자 속 투지가 살의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아스모펠에 대한 그의 증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리드가 답했다.

“죽이지 않았다.”

“않았다?”

못한 것도 아니고, 안 했다고?

“무슨 의미인가?”

이해하지 못하는 피아로에게 그리드가 출입구를 가리켰다.

“어쩌다보니까 데리고 오게 됐어.”

“뭣이!”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간 원흉!

사지를 갈갈이 찢고 뼈까지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놈이 이곳에 찾아왔다는 말인가!

피아로가 당장에 뛰쳐나갔다.

원수를 눈앞에 둔 그의 얼굴은 무시무시하여 흉악한 악귀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그리드를 제외한 템빨단원들과 데미안 모두 위압이라는 상태 이상에 빠질 지경이었다.

“아스모페엘!!”

“…피아로.”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

3년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의 간극이 순식간에 좁혀진다.

꽈악!

피아로의 우악한 손이 아스모펠의 깡마른 목을 잡아 조였다.

아스모펠의 창백한 얼굴이 콱 일그러졌다.

물리적 고통 때문만이 아니다. 피아로를 보자 온갖 감정이 복받치면서 울음이 터지려했기 때문이다.

이 빠진 검을 뽑아 쥔 피아로가 그의 면상을 단번에 꿰뚫으려던 도중 멈칫했다.

“네놈…! 네놈이 무슨 염치로 눈물을 흘리는 것이냐!!”

“미안…하다…”

목을 꽉 조여진 탓에 끅끅 거리면서도, 아스모펠은 지난 수년 동안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홀로 외쳤던 그 한 마디를 뱉어내는데 성공했다.

그 순간 피아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낌새를 읽고 눈치 챈 것이다.

아스모펠이 자행하였던 극악무도한 행위들이 어쩌면 그의 의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제 와서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숨겨진 사연이 어찌되었든 간에 아스모펠의 죄악을 합리화시킬 수는 없었다.

“놈!!”

이를 악 물어 사념을 털어낸 피아로가 아스모펠의 목을 쥔 손에 더욱 더 강한 힘을 실었다.

아스모펠은 일말의 저항조차 하지 않았다. 호흡이 곤란하여 질식사하게 생긴 와중에도 그저 미안하다는 말만을 속으로 되풀이했다.

그는 죽음으로서 속죄할 각오가 이미 오래전부터 되어있었다.

‘어서 죽여라. 잔인하게 찢어 죽이고 시신을 불태워 내 더러운 영혼을 지옥으로 떨어뜨려라. 그로서 너의 원한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나는 여한이 없다.’

아스모펠의 그 애절한 마음, 피아로가 눈빛을 통해서 읽고야 말았다.

아스모펠과 친구로 지낸 세월이 못해도 25년이다.

철전지원수가 된 지금까지도 눈빛만으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니, 엿 같을 따름이다.

지독한 배신감이 더욱 더 뼈저리게 엄습해온다.

“가증스러운 놈!”

이 빠진 검이 아스모펠의 턱밑으로 매섭게 날아들었다.

그를 본 그리드가 고개를 돌렸다.

‘아스모펠까지 얻는 건 실패다.’

아스모펠은 이대로 죽는다.

아쉽지만 내가 개입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판단한 그리드가 물러나려하는 그때였다.

“제기랄!”

피아로의 욕설이 들려왔다.

그리드가 다시 고개를 돌려보니, 이 빠진 검이 아스모펠의 턱 바로 밑에 멈춰져 있었다.

“빌어먹을!”

피아로가 아스모펠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대로 주저앉았다.

고귀한 친우, 아스모펠.

배신의 그날이 오기 전까지만 해도 한 줌의 부끄러움도 없었던 훌륭한 사내.

그의 본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피아로였다.

“이야기라도 들어 보자.”

용서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오래전부터 궁금했을 뿐이다.

우리들의 관계가 어찌하여 파국으로 치닫아야만 했는지, 피아로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

아스모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떠한 말을 해봤자 결국 핑계밖에 되지 않음을 알았기에.

피아로가 그의 멱살을 거칠게 붙잡았다.

“뭐라고 핑계라도 대보란 말이다!!”

모든 것을 잃었다.

그 결과 아이러니하게도 내게 남은 유일한 친구-였던 존재-는 이 원수뿐이다.

먼저 죽은 가족과 동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부디 이 자식이 내게 구구절절한 사연을 읊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피아로의 그러한 심정을 읽은 아스모펠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오래토록 가슴 속에 묻어둘 수밖에 없었던 진실들을 있는 그대로 토해냈다.

“…”

긴 이야기를 들어 나가는 피아로의 얼굴이 점차 참혹하게 구겨졌다.

이야기 속 가장 큰 피해자는 다름 아닌 아스모펠이었다.

아스모펠이 스스로를 합리화시킨 것이 아니다. 아스모펠은 스스로를 가장 나약하고 못난 쓰레기로 묘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전혀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니 문제였다.

“…”

최대한 덤덤하게 말하고자 노력하는 아스모펠.

그는 자신이 죽어야할 이유를 끊임없이 나열했다. 스스로의 죄를 자꾸만 부각시켰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피아로의 아스모펠에 대한 증오와 살의는 도리어 누그러졌다.

“빌어먹을!!”

대상을 잃은 분노가 담긴 주먹이 괜한 땅을 후려친다.

고개 숙인 피아로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쏟아졌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된 그는 혼란스러웠다.

아스모펠을 죽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탓에 죽게 된 내 가족과 동료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서는 죽이는 게 옳았다.

어찌할 바 모른 채 머리를 감싸 쥐는 그의 곁으로 그리드가 다가왔다.

“용서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알게 된 지금, 그를 죽인다는 건 더없이 어리석은 행위가 아닐까?”

“…”

“복수의 대상은 따로 있잖아?”

황비, 마리.

괜한 과욕을 부려서 수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간 계집.

“그년을 잡아 족치자.”

저급하고도 화끈하게 말하는 그리드였다.

라우엘은 골치가 아팠다.

‘제발 멋지게 좀 말씀하시면 어디 덧납니까?’

‘그대들 내 사람이 되어라. 그대들의 능력으로 나의 힘을 부풀려 그를 무기 삼아 황비에게 복수하라.’라던가, ‘나만 믿고 따라라. 내가 그대들의 검이 되어 진정한 적에게 단죄를 내리겠다.’ 등등.

멋진 대사는 차고 넘치지 않는가?

중2병 라우엘이 그리드의 언어 구사 능력을 아쉬워하는 그때 피아로는 아스모펠을 용서하고 있었다.

“마리의 간악한 계략에 빠져 이용당했을 뿐인 너를 더 이상 원망할 수는 없다.”

아스모펠이 숨죽여 울었다.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바라던 엔딩이다.

미소지은 채 그들을 지켜보는 그리드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히든 퀘스트 <숨겨진 이야기>를 완료하였습니다.]

[피아로와 아스모펠의 관계가 개선됩니다.]

[두 사람과의 호감도가 최대치가 됩니다.]

[피아로를 가신으로 영입하면 소속 영지의 병영 효과가 30퍼센트, 풍작 확률이 100퍼센트 증가합니다. 또한 <기사단>을 창설하실 수 있습니다.]

[아스모펠을 가신으로 영입하면 영지의 기술연구소 효과가 20퍼센트 증가합니다. 또한 <기사단>을 창설하실 수 있습니다.]

<기사단>

보유한 기사들을 소속시킬 수 있습니다.

어떤 인물을 단장으로 임명하느냐에 따라서 소속 기사들이 버프 효과를 획득합니다.

<병영 효과>

병사들의 훈련 속도에 영향을 줍니다.

훈련을 거듭할수록 병사들은 레벨과 능력치가 상승하고 사용할 수 있는 무기의 종류가 늘어나며 새로운 전술을 습득합니다.

<기술연구소 효과>

병사들과 백성들의 스킬 경험치 획득 속도에 영향을 줍니다.

스킬 레벨이 오를수록 병사들과 백성들이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기술의 위력이 증가합니다.

히든 퀘스트의 보상이란 상상이상이었다.

‘대박이다.’

그냥 대박도 아니다.

인생 폈다고 표현해도 무방할 수준의 초대박이다.

그리드는 세상을 다 가진 심정이었다. 전율이 일어나며 주먹이 절로 불끈 쥐어졌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풍작 확률 100퍼센트는 뭐지?’

검성과 풍작이 도대체 무슨 관계란 말인가?

의아해하던 그리드가 문득, 일전에 타이탄에서 보았던 알림창을 떠올렸다.

[전설의 농부가 출현하였습니다!]

‘설마…’

아니다.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없다.’

불길한 상상을 애써 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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