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3권 - 17화
7대 길드가 레이단을 침공해오기 하루 전.
사막 곳곳을 탐사하고 다니던 폰과 레가스는 개미지옥을 연상하게 만드는 던전 입구를 발견하게 된다.
“지도에는 표기되어 있지 않은 던전이죠?”
레가스의 질문이었다.
지도를 재차 확인한 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레가스가 냉큼 던전으로 몸을 날렸다.
말릴 틈조차 없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힌 행동력이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폰이 레가스를 뒤따랐다.
그들이 던전에 입장하고 10초 후.
던전 입구가 사막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헐.”
“이런…”
던전에 입장한 폰과 레가스는 연달아 떠오르는 알림창을 마주하고 당황했다.
[뱀파이어들의 지하도시(13)에 입장하였습니다.]
[던전 최초 발견자로서 혜택이 주어집니다! 던전 내 골드와 아이템 획득률이 8퍼센트씩 상승합니다! 이 혜택은 열흘 동안 유지되며 사망 시 사라집니다.]
경험치 획득률이 증가하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어쨌든 여기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 뒤가 문제였다.
[던전의 입구가 봉쇄되었습니다. 외부와의 연락이 차단됩니다.]
[던전 보스를 처치하거나 사망하기 전까지는 던전을 탈출할 수 없습니다.]
특이한 형식의 던전이다.
‘서부에 존재하는 던전들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상적인 사냥터를 찾아낼 것.’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던 템빨단 최강의 듀오.
그들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진 순간이었다.
“갇히다니…”
폰은 뱀파이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흡혈 스킬과 공격 무효화 스킬, 그리고 매혹 스킬을 기본적으로 보유한 최상위 전투 종족. 특히 어두운 곳에서 강하다.
빛의 유입이 완전히 차단되어 새카만 이곳, 뱀파이어들의 도시에 단 둘이 갇혔다는 말은 즉…
‘우린 죽었다.’
폰이 좌절하는 그때, 레가스는 협곡 아래 펼쳐진 던전의 전경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여기 엄청 멋진데요?”
높은 건물과 뾰족한 첨탑.
노트르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 등을 연상하게 만드는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어두운 던전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 장엄하고도 음산한 풍경은 보는 이를 압도하고도 남았지만 레가스는 새로운 던전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에 기뻐할 따름이었다.
“버프 끝나기 전에 어서 사냥하죠.”
“…”
죽음으로 발생하는 페널티는 누구라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특히 랭커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다.
하지만 레가스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통합 랭킹 12위가 된 지금도 몸을 사리기는커녕 도전을 즐겼다.
‘하여튼 난놈이라니까.’
싱글벙글 웃는 레가스를 보고 있노라니 위축 된 내가 바보 같아진다.
피식 웃은 폰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가자.”
어차피 싸워야한다면 철저하게 임한다.
버프의 지속 시간이 끝나기 전까지 뱀파이어들을 몰살시키고 보스까지 레이드한다면 이상적일 것이다.
폰과 레가스가 은밀하게 움직였다.
기나긴 사투의 시작이었다.
***
쥬드.
그리드의 기사인 그는 레이단의 치안대 대장직을 겸임하고 있다.
위대하신 그리드 공작각하의 도시에서 그 어떠한 해악도 발생하지 않게끔 억제하는 것.
그것이 쥬드의 지상과제였다.
“대장님, 이제 좀 쉬십시오.”
“싫다.”
쥬드에게 휴식이란 없었다.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곤 언제나 레이단의 안전에 힘썼다.
심지어 끼니도 순찰을 돌면서 해결할 정도였다.
‘대장님이 존경스럽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어!’
마른 빵을 씹어 삼키면서 사위를 살피는 쥬드의 모습은 병사들의 귀감이 되었다.
레이단의 병사들은 날이 갈수록 부지런해졌다. 혹독한 훈련까지 견뎌내면서 그들의 성장 속도가 무척 빨라졌다.
기본적으로 템빨을 갖춘 병사들이었기에 정예로 거듭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오늘도. 레이단은. 안전하다.”
쥬드는 몰랐다.
일주일 전 야심한 밤.
자신이 잠들어 있는 사이 수백의 외적들이 레이단을 침략해왔었다는 사실을.
그들을 단 4명의 농부가 격퇴하였다는 사실을 그는 꿈에도 몰랐다.
최대 지력이 20밖에 되지 않는 백치라서?
아니다.
이는 라우엘의 의도였다.
라우엘은 백성들이 괜한 불안에 떨지 않도록 레이단 침공 사건을 공표하지 않았다.
사건 은폐는 쉬웠다.
야간이기도 했고, 적들은 외성벽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밀밭 초입까지밖에 진입하지 못했었다. 심지어 금세 퇴각하기까지 했다.
그날 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소수에 쥬드가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이 안타까운 점이지만.
“쥬드. 오늘도. 힘낸다.”
오늘도 레이단은 평화롭다.
치안대장 쥬드의 공로라고 백성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쥬드 대장님! 오늘도 고생해주십시오!”
“언제나 감사합니다!”
마주치는 백성들마다 인사해오니 쥬드는 뿌듯했다. 더욱 더 열심히 순찰을 돌았다.
모든 것은 그리드 공작각하를 위해서였다.
***
[히든 퀘스트<즐겁고 신나는 수련!>을 완료하였습니다.]
그 알림창이 떠오른 순간, 크라우젤이 한 달 동안 정들였던 농기구들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끝이다.’
시원섭섭하다.
새로운 모험을 떠날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쁘나, 레이단과 작별해야 한다니 아쉽다.
돌이켜보면, 이처럼 정을 들인 곳은 또 처음이었다.
‘그리워지겠군.’
광활한 밀밭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아본다.
결코 잊을 수 없을, 지난 한 달 동안의 즐겁고 소중한 추억들이 마음 한편에 각인되었다.
“떠나려는 겐가.”
당당한 풍채와 깊은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인이 다가왔다.
순박한 행색을 하고 있으나 그가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피아로였다.
랭킹 1위 크라우젤이 끝까지 이길 수 없었던 인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에게 크라우젤이 깊이 고개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피아로를 만난 것은 일생일대의 행운이었다.
그와 쉬지 않고 밭일하며 대련한 덕분에 크라우젤은 드디어 벽을 넘을 수 있었다.
<검성 후보> 4단계.
검성의 경지까지 앞으로 1단계 남았다.
“자주 놀러 오게나. 언제라도 환영일세.”
피아로가 손을 내밀었다.
굳은 살 가득한 흙투성이 손이다.
그동안 피아로가 걸어온 길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크라우젤이 그 손을 공손히 두 손으로 맞잡았다.
“예, 형님.”
다음에 찾아올 때는 반드시…
‘당신의 호적수가 되어있겠습니다.’
피아로가 농부로 전직하였을 때, 사실 크라우젤은 크게 실망했었다.
피아로가 검성의 길을 포기한 것이라 보았기에.
하지만 아니었다.
함께 지내면서 깨달았다.
피아로는 포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더 적합한 길을 선택했을 뿐이다.
직업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전설이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검술에 농기구술을 결합시키는데 성공한 현재의 피아로는 검성 뮐러와 비교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최강의 사내가 되었다.
그와 맞수가 되기 위해서는,
‘나 또한 전설이 된다.’
검성.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를 일이었으나 크라우젤은 그 경지를 반드시 이룩할 각오였다.
피아로와 동등한 존재가 되어, 그와 보다 당당히 마주하고 싶었다.
***
‘눈치 채고 있었던 건가.’
피아로와 작별하고 떠난 밀짚모자의 사내.
그는 끝까지 모자를 벗지 않았다. 그리고 레이단을 벗어나는 순간 백광의 검술을 전개함으로서 페이커의 미행을 따돌렸다.
‘역시 저자는…’
백광이 걷히고 간신히 눈을 뜬 페이커가 확신했다.
‘천외천이다.’
20억 유저의 정점, 크라우젤.
그라면 내 미행을 눈치 채고 따돌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을 터.
페이커의 무심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레이단과 인연을 쌓은 크라우젤이 훗날 그리드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으리라 추측한 것이다.
***
[히든 퀘스트<즐겁고 신나는 수련!>을 완료하였습니다.]
크라우젤이 떠나고 8일 후.
데미안 또한 퀘스트 기간을 충족시켰다.
“좋았어!!”
퀘스트 보상으로 상승하는 스탯들과 스킬 레벨을 확인한 데미안이 희열에 휩싸였다.
짧은 기간 만에 획득한 보상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끔 대단했으니까.
데미안은 3주 전과 비교해서 비약적인 성장을 이뤘다.
“이 기쁨을 린 쨩들과 나눴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신 데미안.
그가 밀밭 너머 지평선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리드님만 기다리면 된다.’
오늘은 그리드가 돌아오기로 예정 된 날이었다.
데미안은 기대했다.
‘그리드님께서 리파엘의 창을 봉인해주신다면…’
이사벨 쨩을 살릴 수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었다.
‘그리드님께서 내 부탁을 거절하시면 어쩌지?’
데미안이 겪었던 그리드는 무척이나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
단순한 선의로 남을 도울만한 인물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
‘라우엘님은 믿어보라고 하셨지만…’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야만 한다.
데미안은 그리드에게 바칠 재물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주력 장비만을 제외한 모든 아이템을 처분하여 골드로 바꿨고, 심지어 적금도 깼다.
‘집을 팔 각오도 해야 하려나…’
마음을 단단히 먹는 데미안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드디어 그리드가 귀환했다. 아스모펠도 함께였다.
“잘들 지냈어?”
5주 만에 돌아온 그리드의 레벨은 295.
긴 여정 끝에 한층 더 성장한 그의 모습은 템빨단원들을 벅차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특히 라우엘은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머, 멋지다!!’
칠흑의 안대 너머로 은은한 적광을 흩뿌리는 눈동자라니!
완전히 라우엘의 취향이었다.
동경의 시선을 보내오는 그의 머리를 그리드가 쓰다듬어주었다. 애정이 묻어났다.
“별일 없었지?”
템빨단원들의 뒤편에 서서 그리드를 훔쳐보던 데미안이 혀를 내둘렀다.
‘별일 없었냐고? 저분은 자신의 도시가 침략 당했었다는 사실을 모르시는 건가?’
7대 길드의 레이단 침공 사건은 범세계적 이슈였다. 하도 뉴스에 많이 나와서 Satisfy를 플레이하지 않는 일반인들조차 이번 사건을 알고 있을 정도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 그리드가 그 사실을 모르는 눈치였으니 황당할 따름이었다.
라우엘이 하하 웃었다.
“퀘스트 때문에 바빠 TV도 못 보셨나보군요?”
“말도 마라. 잠자는 시간도 줄이고 게임만 했다.”
이번 퀘스트는 여러모로 성가신 구석이 있었다.
타이탄까지의 거리가 먼 것은 둘째 치고 아스모펠의 저택을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다크버스가 설치해 놓은 환영의 결계 탓이었다.
레이단보다 훨씬 더 거대한, 대륙 제일 도시 타이탄을 정처 없이 헤맸던 그날을 떠올리면 그리드는 지금도 치가 떨렸다.
정작 마지막 보스가 약해서(?) 다행이었지, 보스마저 강했더라면 막말로 피눈물 흘렸을 것이다.
‘고생한 보람은 있어. 보상도 좋았고, 무엇보다도 히든 퀘스트와 연계되었으니까.’
그리드는 한시라도 빨리 피아로와 아스모펠을 재회시킴으로서 퀘스트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어서 로그아웃하고 씻은 후 마음 편히 푹 자고 싶다. 어머니의 밥도 그립다. 며칠 동안 가족들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근데 TV 얘기는 왜 나와? 뭔 일 있었나?”
“사소한 일이 조금… 나중에 천천히 확인해보십시오.”
“별거 아닌가 보네. 피아로의 집이 어디더라?”
대수롭지 않게 넘긴 그리드가 질문하자 라우엘과 템빨단이 안내했다. 데미안은 아직 자신이 나설 차례가 아님을 눈치 채고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