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7화 (62/1,794)

템빨 13권 - 14화

영주성의 귀빈실.

템빨단원들과 마주보고 앉은 데미안이 입을 열었다.

어떤 사연으로 그리드를 알게 되었으며, 또한 어떤 경위로 레이단까지 찾아오게 되었는지.

데미안은 최대한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었거니와 템빨단에게 신용을 얻기 위함이었다.

잠자코 경청하던 반트너가 끝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사랑하는 여인을 살리기 위해서 고군분투하다니…!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덩치 산만한 대머리 아저씨가 엉엉 우는 모습은 보기에 썩 좋지 않았다.

이 자리에 폰이 있었다면 분명히 핀잔을 줬으리라.

하지만 폰과 레가스는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벌써 이틀째 행방불명이다. 외부와 단절되는 인스턴트 던전을 발견하고 클리어 중인 것으로 추정됐다.

콧물까지 훌쩍이는 반트너를 가볍게 무시한 라우엘이 데미안에게 질문했다.

“레베카의 딸을 살리기 위해서 그리드님을 만나야한다는 사정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밭일을 하고 계셨던 거죠? 당신 정도 되는 분이라면 바로 행정관을 찾아갔어도 귀하게 대접받았을 테고, 우리와 빠르게 접촉할 수 있었을 텐데요?”

Satisfy에는 크고 작은 종교가 수십 개나 존재하지만 그중 레베카교가 독보적으로 컸다. 교인의 숫자만 해도 8천만 명을 초과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교황 후보가 될 정도로 교내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데미안이라면 어딜 가나 귀빈 대접을 받고도 남았다.

한데 왜 밭일을?

“그건…”

납득하지 못하고 의아해하는 템빨단원들에게 데미안은 울분을 토하고 싶었다.

‘애초에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주질 않는데 행정관을 어떻게 만나냐?’라고 따지는 것부터 시작해서 피아로에게 당한 일들을 소상하게 일러바치고 싶었다.

하지만 창피해서 차마 진실을 고할 수가 없었다.

또한 히든 퀘스트를 획득한 이후 피아로에 대한 원한도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은 오히려 친하다.

하여 그는 진실을 은폐했다.

“제가 원래 밭일을 좋아합니다.”

“그렇습니까.”

사람의 숫자만큼 취미도 다양한 법이다.

애초에 거짓말할 이유도 없어보였으니, 템빨단원들은 데미안의 말을 굳이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다.

템빨단은 피아로가 밖에서 어떤 만행을 저지르고 다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피아로가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싸움을 건 다음 농부화 시킨다는 사실을, 그들은 상상조차 못하고 있었다.

앞으로 꾸준히 등장할 제2, 제3의 데미안들만 불쌍한 일이었다.

“함께 계셨던 일행 분은 누구십니까?”

“일행이 아닙니다. 그분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정체를 끝까지 밝히지 않으시더군요.”

“그렇군요…”

‘혹시 모르니 감시의 눈을 붙여야겠군.’

라우엘은 크게 경계하지는 않았다. 레이단에 해악을 끼칠만한 인물이었다면 피아로가 진즉에 걸러내 주었을 테니까.

그만큼 라우엘은 피아로를 신뢰하고 있었다.

지금 라우엘의 관심사는 오로지 데미안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리드님을 은인으로 여기고 있는 이자가 교황의 자리에 앉게 된다면…’

레이단과 레베카교의 관계가 무척이나 친밀해질 것이며 교류가 활발해질 것이다.

레베카 여신의 신전을 레이단에 세울 수만 있다면, 거주자 모두 버프 효과를 얻는 것은 기본이고 그 귀한 사제를 손에 넣을 수도 있다. 백성의 숫자 또한 자연히 늘어날 터.

라우엘이 데미안의 흙 묻은 손을 꼭 붙잡아주었다.

“데미안님, 우리 템빨단은 당신을 전심전력으로 도울 것을 약조합니다. 그리드님을 설득하여 레베카의 딸을 살리는 것은 물론이고 당신이 교황 선거에서 승리하실 수 있도록 성심껏 돕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지 말씀만 하세요.”

넝쿨째 굴러온 호박이다.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다짐한 라우엘이 최대한 친절한 미소를 지었다. 누가 봐도 접객용 미소였다.

하지만 라우엘에 대해서 잘 모르는 데미안은 순수하게 감격했다.

“이렇게 친절하실 수가…! 감사합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나의 아름다운 이사벨 쨩을 프린팅한 베개를 선물해 드리고 싶을 정도입니다!”

“후후훗… 저 또한 당신을 도울 수 있게 되어서 기쁩니다. 과거에 봉인했던 제2의 자아가 꿈틀꿈틀 춤을 출 정도로요.”

‘쟤네들 도대체 뭐라는 거냐?’

‘나도 몰라.’

템빨단원들은 라우엘과 데미안의 대화 내용을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었다. 난감한 일이었다.

***

템빨단원들이 피아로의 정체를 아직 몰랐을 무렵부터 라빗 행정관은 피아로의 실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범인의 경지를 아득히 초월한 그의 안목이라면 사람의 실체를 파악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기에.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로를 일개 농부로 방치한 이유는 오직 하나.

레이단의 재정을 위해서다.

만약 피아로의 실력을 인정하고 그에게 적합한 직급을 줬다면 고액의 녹봉을 지불해야만 했을 터.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레이단 입장에서는 부담이 컸다.

하여 라빗은 피아로의 진정한 실력을 모르는 척 하였고, 피아로가 농부로서 살아가게끔 방관했다.

그 결과 최저 임금으로 최고 효율을 뽑았다.

외성 밖 밀밭은 농부의 영역.

녹봉 73실버의 농부 피아로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외적을 격퇴함으로서 레이단을 피해 없이 수호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다.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난감해졌다.

‘활약에 따른 보상을 해드려야 할 텐데…’

피아로의 활약의 가치를 재물로 환산한다면 최소 수백 만 골드에 육박한다.

물론 레이단에는 그만한 자금이 없다.

‘작위를 드리는 수밖에 없겠지만.’

작위 수여는 행정관의 권한이 아닌 영주의 권한이었다.

그리드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지금 피아로에게 적합한 보상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라빗은 현재 자신의 권한으로 할 수 있는 영역 내에서 피아로에게 최대한의 성의를 보였다.

<나, 행정관 라빗은 농부 피아로를 밀밭 관리인으로 임명한다.>

피아로의 녹봉이 2골드 30실버로 인상되는 순간이었다. 무려 3배 이상의 임금 상승이었다.

피가 돈으로 되어 있는 라빗 행정관에게도 나름의 양심이라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

<대륙 10대 마법사가 그리드 공작을 위해서 싸우다!>

그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전 세계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각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를 그리드, 아슈르 백작, 대륙 10대 마법사, 7대 길드, 레이단 침공전 등등이 장악하고 있었다. 전설의 농부 출현이라는 뉴스가 묻힐 지경이었다.

이번 사건을 유포시킨 장본인 버니버니는 그야말로 대박이 터졌다.

‘자이언트 길드를 제외한 7대 길드가 공모하여 레이단을 침공하였고, 그 과정에서 야크 길드와 제라프 길드가 아슈르 백작에게 무참하게 짓밟혔다.’

그 내용과 영상을 담은 버니버니의 인터넷 방송은 동시 시청자수 30만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누적 시청자수가 하루도 안 되어 60만을 돌파하고 있었다.

버니버니는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음은 물론이고 명성까지 회복했다.

세계 최고의 게임BJ로 화려한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그리드 대박일세. 아슈르 백작을 부하로 삼다니.ㄷㄷ

-아슈르 백작이 에트날 왕국 최강자 죠…? 와, 정말. 괜히 갓리드가 아니네요.

-나 미국 사는데 반나절 내내 TV에서 그리드 나옴 ㅋㅋㅋ 미국인 중에 그리드 모르는 사람 하나도 없을 듯ㅋㅋ

-저는 일본에서 학교 다니는데, 국가대항전 이후로 일본인 친구들이 저한테 맨날 그리드에 대해서 물어봐요. 그리드님 덕분에 한국인인 게 자랑스러움. ㅎ

-님들 근데 야크 길드랑 제라프 길드 말고 나머지 4개 길드는 어떻게 됨?

-내 친구의 사촌 형의 부인의 외국인 친구가 골든 길드원인데, 그 사람 말에 의하면 레이단의 농부들한테 7대 길드 전멸했다던데.

-에휴… ㅉㅉ 어딜 가나 판타지 소설 작가가 있네. 소설을 쓰려면 좀 말이 되게 쓰던가. 양판소 극혐이다.

한국 네티즌들이 특히나 열광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인인 그리드가 매번 전 세계의 관심을 받으며 활약하자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고 뿌듯해했다.

하지만 정작 그리드 본인은 레이단이 침공 당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의 퀘스트를 방해할까 염려한 템빨단이 그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리드는 오로지 퀘스트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

사하란 제국의 수도, 타이탄.

3주 동안의 긴 여정 끝에 아슈모펠의 대저택 앞까지 당도한 그리드가 상태창을 열었다.

이름:그리드

레벨:291

직업:파그마의 후예

근력:2,770(+140) 체력:1,246(+120)

민첩:1,626(+110) 지력:711(+310)

손재주:1,634(+660) 끈기:958(+110)

평정:658(+110) 불굴:913(+220)

위엄:1,566(+110) 통찰력:1,406(+110)

용기:602(+110) 악마력:31

화려함을 넘어서 압도적인 능력치다.

5번째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한 대가로 발생한 패널티 탓에 과거와 비교하면 스탯 성장 속도가 몇 배나 더뎠지만 아쉬워할 것 없었다.

여전히 아이템을 제작할 때마다 스탯은 성장하고 있었고 온갖 고난을 극복하고 획득한 칭호들이 스탯을 대폭 상승시켜주고 있었으니까.

여기에 템빨과 스킬빨, 그리고 이제는 컨트롤 실력까지 갖췄다.

그리드는 단언할 수 있었다.

‘내가 갑이다.’

28년 가까이 살아온 끝에 드디어 맞이한 전성기다. 자신감과 의욕이 끓어올랐다.

“아스모펠.”

피아로에게 배반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피아로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원수.

“이제는 네가 빼앗길 차례다.”

백색 후드짚업을 걸치자 도살귀 안대 너머의 붉은 안광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

아스모펠은 고귀하고 성실한 사내였다.

제국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무가(武家), 포르도 백작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나 심한 중압감에 시달리면서도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다.

가문을 위해, 더 나아가서는 제국을 위해 검술과 병법의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약관의 나이에는 적기사단에 입단하여 명성을 높였다.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인생이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운 업적을 쌓으며 인맥을 넓혔다. 절친한 친우 피아로와 나란히 제국의 기둥이 되리라 칭송 받았다.

하지만 황비 마리의 계략에 빠진 순간 모든 것을 잃었다.

내 손으로 동료들과 친우의 심장에 비수를 꽂았다.

매일 같이 악몽을 꾼다.

“빌어먹을 년!”

쿠당탕탕!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던 아스모펠이 급기야 술상을 뒤집어엎었다.

황비 마리.

그 빌어먹을 년의 낯짝을 잊기 위해서 술의 힘을 빌려보았으나 부질없게도 잊을 수가 없다.

그 강렬한 아름다움이 뇌리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피아로…! 내 친우여!”

미안하다. 정말로 미안하다.

수백 번도 더 외쳐본다.

하지만 이 마음이 피아로에게 전해질 리 없다는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슴이 더 아팠다.

“무슨 일이십니까?”

기사들이 소란을 듣고 달려왔다.

적색 갑주를 무장한 이들.

아스모펠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감시하는 마리의 충복들이다.

그들 탓에 아스모펠은 저택에 몇 년 째 갇혀 있는 중이었다.

“개새끼들…”

아스모펠은 증오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무기를 찾기 위해서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무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기사들이 저들끼리 뭐라고 속삭이더니 이내 마법사 한 명을 데리고 왔다.

흑마법사 디브였다.

그를 본 순간 아스모펠이 가시나무 떨듯 몸을 떨며 두려워했다.

“그, 그만 둬라!”

저항해보지만 부질없다.

피아로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이후 지금까지 수년 동안 약물과 흑마법에 농락당해온 그의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여 허점투성이였다.

터엉!

강력한 세뇌 마법이 뇌리를 뒤흔드는 순간, 분노와 공포로 일그러져 있던 아스모펠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모했다.

“피아로가 누구입니까?”

“제국의 배반자이자 나의 원수다.”

디브의 질문에 거리낌 없이 대답하는 아스모펠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세뇌 당하기 전에 흘린 눈물의 잔재였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