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3권 - 13화
강함이란 상대적인 것이다.
지존들의 집합소인 템빨단 내에서도 강자와 약자를 구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라우엘 일행은 템빨단 기준으로 약자 집단이었다.
그리드, 폰, 레가스, 지슈카, 페이커, 유페미나, 툰, 반트너 등의 주력들이 죄다 빠져있는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5대 1의 싸움.
하오는 정말로 5분을 버텼다. 정확하게는 5분 3초.
폰이나 레가스라도 못해낼 일이었다.
‘그 두 분이었다면 3분 내에 우리 중 절반 가까이를 죽이고 자신들도 죽었겠지.’
그리드였다면?
‘…우리를 전멸시키는데 몇 분이나 걸리시려나.’
도플갱어 레이드 이후 비약적으로 강해진 그리드를 적으로 가정한다는 것은… 상상하기도 싫다.
혀를 내두른 라우엘.
그가 하오에 대해서 분석해보았다.
‘영리해.’
용족으로 변신한 것이 신의 한수였다.
하오는 반용족의 특성과 사막이라는 지형을 완벽하게 활용했다.
모래를 겨냥하여 용족의 권능 <화염 폭발>을 전개, 지속적인 모래 폭풍을 발생시킴으로서 템빨단의 시야를 방해하는 한편 비행 능력으로 치명적인 스킬들을 회피했다.
적을 쓰러뜨리기보다는 오로지 시간을 벌기 위한 목적의 전투를 철저하게 수행했다.
양손에 각 3개씩의 쇠사슬을 쥐고 휘두르며 템빨단원들의 발을 묶는 그의 집요하고도 궁극에 이른 컨트롤 실력은 템빨단원들을 전율시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죽여라.”
라우엘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이벨린에게 개처럼 붙잡혀 끌려온 하오가 당당하게 말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길드원들을 무사히 퇴각시켰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반면 템빨단원들의 얼굴은 죄다 일그러져 있었다.
15명이서 1명에게 5분 이상 발이 묶여있었으니 자존심이 짓뭉개진 것이다.
하오가 그들을 위로해주었다. 승자의 여유였다.
“너희들은 약하지 않다. 오히려 소문 이상으로 강했다. 다만 내가 특별히 뛰어났을 뿐이지.”
오만이 아니다.
하오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틈날 때마다 피아로와 대련해온 템빨단은 과거보다 더 강해져 있었지만 하오가 그들 이상으로 뛰어났다.
‘흐음.’
라우엘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사실 이번 전투에서 라우엘은 누구보다도 큰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다수인 점이 오히려 독이 되게끔 유도한 연환술.
쇠사슬을 수족처럼 부리는 하오만이 수행할 수 있을 치명적인 전술.
참모로서 그것을 저지해야할 의무가 있었던 라우엘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그 탓에 하오가 날뛸 수 있었다.
라우엘이 하오에게 전술적으로 패배하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전략에서는 이겼다.’
라우엘의 입가에 번져있던 미소가 짙어졌다.
그가 하오에게 진실을 전했다.
“하데스 길드는 퇴각에 실패했습니다.”
“흥, 이제와 그런 거짓을 지껄여봤자 너희들에게 무슨 이득이지?”
“거짓이 아닙니다. 못 믿겠으면 길드 채팅으로 확인해 보시죠.”
잠시 후.
하오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네놈…! 도대체 무슨 수작을 부린 거냐!”
라우엘이 설명해주었다.
“하데스 길드의 퇴각 경로를 추측하여 별동대를 대기시켰습니다. 마침 골든 길드와 교전을 끝낸 선발대에게도 추적하게끔 지시했고요.”
별동대.
아이스 플라워 길드를 몰살시킨 후 제국령에서 회복하고 있던 페이커를 말함이다.
현재 하데스 길드는 에트날 왕국 서부와 제국령의 경계선에서 페이커와 후로이 팀에게 고립된 상태였다.
“빌어먹을…”
하오가 좌절했다.
어차피 죄다 죽게 될 것이었다면, 버티는 싸움을 하지 말고 적을 하나라도 더 저승길 동무로 삼았으면 좋았으리라 싶었다.
후회하는 그에게 라우엘이 제안하였다.
“그리드 공작각하를 섬겨볼 의향 없습니까?”
“뭐라고?”
7대 길드 중 하나인 하데스의 수장이며 수십억 인민을 대표하는 내게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라고?
심지어 레전드리 클래스를 획득했다는 점 이외에는 별 볼 일 없는, 하찮은 놈의 밑으로?
“용이 개를 섬길 순 없지.”
단칼에 거절하는 하오.
그가 그리드를 개라고 지칭하자 템빨단원들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죽여 버리자!”
전투 내내 쇠사슬에 끌려 다니느라 고생했던 이벨린이 누구보다도 분노한다.
프람베르그를 하오의 심장에 겨누는 그를 라우엘이 제지했다. 그리고 하오에게 물었다.
“그리드 공작각하께서 개가 아닌 하늘이라면… 그 사실을 증명해 보인다면 그분을 섬길 수 있겠습니까?”
라우엘은 하오가 탐났다.
단지 강력한 무력 때문만이 아니었다.
동료를 위하는 숭고한 정신과 영민한 판단력, 돌격대장에 적합한 전술능력 그 모든 것이 탐났다.
개인의 무력에만 치중되어 있는 경향이 심한 템빨단에 있어서 그는 꼭 필요한 인재였다.
하오가 콧방귀 뀌었다.
“하늘이라면 용을 품을 수 있겠지.”
그래, 하늘.
크라우젤 같은 하늘이라면 말이다.
그리드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조소하고 있는 그에게 라우엘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좋아요. 그럼 기대하죠.”
“…?”
라우엘이 포박을 풀어주자 하오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라우엘이 목례했다.
“재회할 날을 기대하겠습니다. 당신의 길드원들 전원 무사히 보내드리도록 할 테니, 걱정 말고 돌아가도록 하세요.”
“네가 이런 호의를 베풀어봤자 나는 그리드를 섬길 생각이 없다니까?”
“그리드님께서 하늘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섬기겠다면서요?”
“그렇긴 하다만…”
개나 소 따위가 어찌 하늘이 되겠는가?
어처구니없어 하는 하오에게 어느새 미소를 거둔 라우엘이 말을 이었다.
“그분의 행보를 지켜보십시오. 그분만이 유일한 하늘임을 머잖아 알게 될 수 있을 테니까.”
“…핫.”
하오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건 무슨 광신도 수준이 아닌가?
그리드라는 놈은 사이비 교주쯤 되는 듯싶다.
“그래, 알았다. 지켜보도록 하마.”
기대는 하지 않을 테지만.
그 말은 삼키며, 호의를 받아들인 하오가 그 즉시 자리를 떠났다.
이벨린은 침략자를 순순히 보내준 라우엘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자식들은 이유도 없이 레이단을 침공해온 개새끼들이라고! 근데 순순히 보내줘? 미친 거 아니야?”
“후로이님의 보고 못 들었어? 골든 길드원들의 진술에 따르면, 레이단은 무사하다지 않냐? 사사로운 원한보다야 실리를 따져야지.”
“제길! 우리를 만만하게 보고 또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그때는.”
라우엘의 푸른 눈동자가 얼음장처럼 차갑게 가라앉았다.
“모조리 죽인 후 놈들의 영지를 짓밟는다.”
두 번 다시는 허무한 침략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두 번 이상의 용서는 없다.
***
동이 터온다.
레이단의 밀밭.
이른 아침부터 땀 흘리는 농민들로 바글거리는 그곳에 템빨단원들이 찾아왔다.
라우엘이 모두를 대표하여 피아로에게 깊이 고개 숙였다.
“레이단을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큰 은혜, 앞으로 평생을 갚아나가도록 하겠습니다.”
피아로가 허허 웃었다.
“되었다. 나는 그저 밥값을 했을 뿐이다.”
“밥값…”
녹봉 73실버의 농부가 대도시를 수호해놓고 고작 밥값이라고 한다.
‘레이단이 73실버짜리도 아니고…’
복잡미묘한 심정이다.
피식 웃은 라우엘이 광활한 밀밭을 쭉 둘러보았다.
추수가 한창이다. 품질 좋은 밀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다. 앞으로 레이단의 백성들은 감자가 아닌 빵을 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피아로의 은덕이었다.
혼자서 족히 100명분의 일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꾸준히 수맥을 발견하여 밭에 생기를 불어주는 그.
검호이면서도 오만하지 않고 궂은일을 충실히 수행해주는 그에게 무한한 호감과 존경심이 피어오른다.
“한데… 적들의 수가 상당히 많았다고 들었는데요. 그들을 혼자서 어찌 격퇴하셨습니까?”
아무리 검호일지언정 수백 명의 적들을 홀로 해치우다니, 솔직히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특히 적들 중에는 지발, 수에론 등 하오와 비견되는 명성을 쌓고 있는 강자들이 다수 포진되어 있지 않았던가?
그들을 모조리 피아로 혼자서 격퇴시켰다?
피아로가 뮐러나 파그마 등의 전설급 위인이 아닌 이상 결코 불가능할 일이었다.
‘설마… 어젯밤 떠올랐던 ‘전설의 농부 출현’ 알림창이 피아로님을 지칭하는 건 아닐 테고.’
피아로는 검성을 목표로 삼은 인물이다. 그가 농부가 되었을 리 없다.
그렇게 확신하고 의아해하는 라우엘에게 피아로가 3명의 농부를 가리켰다.
1명은 블란드였고, 나머지 2명은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 쓰고 있었기에 누군지 알아 볼 수가 없었다.
“저들이 도와줬다네.”
“그렇습니까?”
레이단의 농부 중에 훌륭한 전사의 자질을 보유한 인재들이 있었다는 말인가?
들뜬 라우엘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낫으로 열심히 밀을 베고 있던 2명의 농부가 당황했다.
‘별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크라우젤은 랭킹 1위였다.
자신이 벌써 2주 넘도록 이곳에서 밭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굳이 남들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괜히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 뻔했기에.
하여 그는…
“어머니가 부르셔서 잠시 나가봐야겠군요. 로그아웃.”
“…”
어머니, 혹은 아버지의 개입에 의한 로그아웃.
그것은 Satisfy의 수많은 유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현상 중 하나였다.
레이드 도중에 엄마가 밥 먹으라고 했다며 강제로 게임을 종료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그런 경우 블랙리스트에 등록되어 두 번 다시는 레이드 공대에 참가하기 어려워지지만 뭐, 어쨌든 덕분에 혼자 남게 된 데미안만 민망해졌다.
“어라? 방금 곁에 계시던 분은?”
NPC인 줄 알았던 농부가 로그아웃하자 라우엘은 매우 놀랐다.
유저가 레이단에서 농부로 활동하고 있었다니?
이곳 레이단까지 찾아올 정도면 랭커급 고레벨 유저일 텐데, 왜 농부 활동을…?
라우엘의 혼란과 의문이 모두 데미안에게 쏟아졌다.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어째서 이곳에서 밭일을 하고 계신 거죠?”
“…”
데미안이 울먹였다.
성기사의 정점인 내가 농부에게 협박과 회유를 당한 끝에 결국 밭일을 하고 있다는 진실을 밝히기에는 무척 부끄러웠다.
나도 로그아웃 할 것을 싶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고쳐먹었다.
‘이들은 그리드님의 최측근.’
이들에게 그리드님과 꼭 만나야하는 사정을 설명한다면 그리드님과의 만남이 보다 수월해질 수 있을 터다.
스윽.
마음을 단단히 먹은 데미안이 밀짚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자주색이 감도는 짙은 푸른색의 머리카락이 찰랑이며 좌중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 당신은…”
굵은 눈썹이 매력적인 미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자 라우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데미안.
모두에게 외면 받는 레베카교의 성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성기사 랭킹 2위까지 올랐던 입지전적 인물.
어느 날 갑자기 랭킹 목록에서 사라짐으로서 히든 직업으로 전직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았던 화제의 주인공.
그리고 오타쿠.
그 유명한 사내가 어찌하여 이곳에서 밭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당황하여 할 말을 잃은 라우엘과 템빨단에게 데미안이 어색한 인사를 건넸다.
“하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