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64화 (59/1,794)

템빨 13권 - 11화

20억 유저의 정점, 크라우젤.

하오는 그를 만난 경험이 있다.

1년 전 엘가드의 숲에서.

<엘가드의 숲>

그 당시 통합랭킹 100위권 유저들이 최소 7인 파티를 구성해야지만 사냥이 가능했던 최상위 필드.

그곳에서 크라우젤은 솔로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

묘목 거미와 범나비를 홀로 도륙하더니 엘가드마저 레이드하는 그를 본 순간 하오는 깨달았다.

‘오를 수 없는 산이다.’

차원이 달랐다.

지형을 완벽하게 활용하는 전투 센스와 레벨의 개념을 상실시키는 컨트롤 솜씨가 가히 신의 경지였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라는 생각조차도 불허하는 수준.

크라우젤은 오로지 경외의 대상이었으며 넘지 못할 벽이었다.

그가.

천재 중의 천재라고 칭송받던 내게 최초로 열등감을 안겨줬던 그가.

‘왜?’

레이단에 있는가.

수에론과 싸우는 수수께끼의 농부.

저자는 필시 크라우젤이었다.

하오는 알 수 있었다.

1년 전 보았던 크라우젤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머릿속으로 수천, 수만 번도 더 반복해서 그려봤기에.

농부와 크라우젤의 움직임을 매치시킬 수 있었다.

“백광 검.”

상태이상 실명을 대단위로 유발하는 공격 스킬이 발현되었고, 넋을 잃은 채 서있던 하오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수에론은 잿빛으로 산화하고 있었다.

“하…하하.”

하오는 웃음밖에 나오질 않았다.

나와 동급의 강자라고 인정하였던 수에론을 저토록 쉽게 해치우다니.

과연 천외천.

크라우젤은 여전히 강하다. 아니, 더 강해졌다.

태어나 두 번 째로 느껴보는 전율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온다.

“도망쳐.”

길드원들에게 명령했다.

레이단 침공?

불가능하다.

크라우젤이 버티고 있는 이상 이곳은 이미 난공불락의 요새다.

“어서 도망치라고!”

하데스 길드가 퇴각하였다.

***

“저들을 그냥 보내도 됩니까?”

데미안의 질문이었다.

크라우젤이 반문했다.

“그럼 쫓을까요?”

“음… 그럴 필요 없겠군요.”

생각해보니 쫓을 이유가 없다.

우리는 레이단의 수호 기사 같은 게 아니라 농부일 뿐이니까.

밭만 무사히 지켰다면 그걸로 족하다.

‘굳이 싸울 필요도 없었던 건데.’

맞다.

레이단의 방위는 그리드와 템빨단의 재량이지 우리가 나설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피아로가 나서는 바람에 얼떨결에 전투에 개입하고 말았다. 무사해서 망정이다. 자칫 저들이 악바리처럼 덤볐다면 큰일 날 뻔 했다.

‘어쨌든 무사했으니까 됐지.’

대은인 그리드님의 영지를 지키는데 눈곱만큼이라도 일조하였다는 사실이 조금 뿌듯하기도 하다.

“그런데 당신은 도대체 누굽니까?”

수에론의 명성은 데미안 또한 익히 들어왔다.

그리드 이상의 강자라는 평가.

데미안은 그를 쉽게 해치운 농부의 정체가 궁금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단 한 번도 벗지 않고 있는 저 밀짚모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거슬렸다.

크라우젤이 미소 지었다.

“딱히 당신께서 흥미를 가질만한 인물은 아닙니다.”

신경 끄라는 뜻.

“그렇군요.”

데미안은 굳이 집착하지 않았다.

데미안이 구차하게 집착하는 대상은 레베카의 딸들밖에 없었다.

“제길! 빌어먹을 하데스 놈들! 지들끼리 도망치다니!”

“우리도 튀자!”

“썩을! 내가 두 번 다시 이 땅을 밟으면 사람도 아니다!”

농부들이 하데스 길드를 잠자코 보내주자 골든 길드 또한 도망치기 시작했다. 길드의 명예 따위를 챙길 상황이 아님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3개째 레인보우 포테이토를 먹어치운 블란드가 근심걱정을 표출하였다.

“석식 시간 지나지 않았습니까? 우리 오늘 저녁 굶어야하는 겁니까?”

“…”

데미안과 크라우젤은 블란드가 측은했다.

명문 귀족 출신이라고 들었는데, 매번 걸신 들려있는 모습을 보면 볼모 생활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어지간히 큰가싶다.

***

스네이크 길드의 참모 박스.

링커 랭킹 1위로서 명성 높은 그가 스네이크 길드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그대의 능력은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동료들의 스킬을 혼합하여 더욱 강하고 효율적이게끔 승화시키다니, 실로 훌륭한 인재다.”

피아로가 칭찬해주었지만 박스는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앞서 살해당한 동료들 중에서도 칭찬 받은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살해당했다.

어쨌든 난 죽는다는 뜻이다.

박스가 최후의 발악을 하였다. 링커의 궁극기 마리오네트를 전개, 피아로를 자신의 뜻대로 조종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부질없었다.

피아로는 이번 전투를 통해서 한층 더 성장한 상태였다. 박스가 스킬을 채 발동하기도 전에 접근, 그를 제압하였다. 설령 스킬이 발동되었다고 해도 그가 박스에게 조종당할 리는 만무했다.

폭!

무색의 강기에 휩싸인 호미가 박스의 이마에 박혔다.

‘호미에 찍혀 죽다!’라는, 어디 가서 고개도 들지 못할 소문의 275번째 주인공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끄… 끄윽!”

박스가 잿빛으로 산화했다.

그를 묵묵히 지켜보는 피아로의 눈동자는 마치 바다의 심연처럼 깊었다.

레이단에서 밭일을 시작한 이후 꾸준히 성장해왔던 피아로는 오늘의 전투를 토대로 큰 깨달음을 얻고 있었다.

‘나는 뮐러가 아니다.’

그렇다. 나는 피아로다.

사하란 제국의 귀족 피아로.

적기사단의 단장 피아로.

배반자 피아로.

검호 피아로.

농부 피아로.

그리드, 템빨단, 크라우젤, 데미안, 블란드라는 친구들을 둔 피아로.

그래, 나는 피아로다.

뮐러와 나는 엄연히 다르다.

굳이 뮐러의 망령을 좇을 필요가 없었다.

‘나는 나로서 족하다.’

사아아아아-

2개의 달을 등지고 선 피아로의 몸에 은하수를 연상하게 만드는 찬란한 빛이 맴돌았다.

형용할 수 없이 강렬한 기운이 발생하면서 일대의 대기를 진동시키더니 이내 피아로에게 갈무리되었다.

이 순간 피아로는 전설이 되었다.

그토록 갈망하던 검성의 경지를 이뤘는가?

아니다.

이미 피아로에게 ‘검’이라는 도구는 필요치 않았다.

그는 호미, 낫, 괭이, 쇠스랑 등등의 농기구와도 물아일체의 경지를 이룰 수 있었다.

굳이 검성이라는 칭호에 얽매일 필요가 없었다.

[전설의 농부가 탄생하였습니다!]

[이 세상 모든 농부가 그를 칭송하며 우러러볼 것입니다!]

접속 중인 모든 유저들의 시야로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알리는 알림창이 떠올랐다.

각국의 언론매체들이 속보를 준비했다.

한편, 피아로의 진화를 바로 곁에서 지켜본 데미안과 크라우젤은 황당해하고 있었다.

‘왜 하필 농부지?’

피아로의 근본은 검사다.

한데 농부가 되다니…

여러모로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피아로 본인은 흡족해하고 있었다.

검성이면 어떻고, 농부이면 어떤가?

나는 이미 충분한 존재다.

칭호 따위로 나를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파그마… 당신 또한 나와 같았던 건가?”

검호이되 대장장이였던 전설, 파그마.

그를 생각해 보면서 피아로가 허허 웃었다.

농부지존.

그가 밭을 갈면 토지가 비옥해지고, 그가 땅을 파면 수맥이 터진다.

그가 농기구를 휘두르면 풍작이 발생하고 수백의 적을 멸할지니.

새로운 전설은 검호이되 농부였다.

***

“헉헉… 제길, 이동하기가 힘들군.”

밤의 사막은 뼛속마저 시릴 정도로 추웠다.

그렇지 않아도 사기가 완전히 꺾여있던 골든 길드의 잔당들에게 있어서 사막 횡단은 고역이었다.

‘우리가 농부 따위에게 당하다니.’

‘설마 추격자를 보내는 건 아니겠지?’

비현실적인 경험에 의한 혼란과 두려움이 점차 가중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은 골든 길드원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었다.

쿠워어어!

캬오!

자이언트 웜과 사막 두꺼비가 끊임없이 출몰하였다.

“이런 제길…! 마스터만 있었어도!”

골든 길드원들은 자이언트 웜 하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평균 레벨이 230 이하인 그들에게 서부의 몬스터들은 너무 강했다.

이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단칼에 해치웠던 수에론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실감됐다.

그런 수에론을 해치운 농부는 또 얼마나 괴물인 건지…

“집중해라! 이대로는 전멸이다!”

골든 길드원들은 살기 위해서 발악했다.

쉴 틈 없이 덤벼오는 몬스터들에게 이를 악 물고 대항하였다.

하지만 노력만으로는 항거 불가능한 일이 있기 마련이다.

희생자가 속출하였고, 이제 골든 길드의 생존자는 채 100명도 안 됐다.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도 생명력과 마나, 스태미나가 간당간당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Satisfy를 대표하는 최강의 길드 중 하나인 우리가 왜 이런 처참한 꼴을 당하고 있는 거지?

모두 다 깊은 의문과 절망에 빠진 그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리드를 건드리면 안 되는 거였어…”

“…”

골든 길드원들은 그리드를 만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이번 사태의 원인은 분명히 그리드였다.

그리드가 세력을 확장하였기에 7대 길드는 견제의 필요성을 느꼈고, 레이단을 침공하게 됐다.

그 결과가 이거다.

그냥 망했다.

만나보지도 못한 그리드에 대한 두려움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골든 길드원들은 이제 그리드의 이니셜 G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날 정도였다.

앞으로 평생 그리드의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리라 몇 번이고 다짐했다.

쿠오오오오!

밤하늘에서부터 거대한 무엇인가가 날아오고 있었다.

적색의 비룡이었다.

“이런!”

한계까지 지쳐있었던 골든 길드원들은 비룡까지 나타나자 곤혹스러웠다.

“대열을 정비해!”

“으아아악!!”

콰콰콰콰콰쾅!

노에의 등장 이후 그 위엄을 일정부분 상실하기는 하였으나, 비룡은 여전히 최강의 펫으로 분류된다.

녀석이 화염을 내뿜자 차갑게 식었던 사막의 모래가 타오르며 일대가 붉게 물들었다.

불바다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는 골든 길드원들의 눈앞으로 3명의 사내가 등장했다.

그들은 골든 길드원들에게도 낯익은 인물들이었다.

“이 개새끼들… 벌써 레이단을 박살내고 돌아가는 길이냐?”

산만한 덩치의 대머리 사내가 마치 잘 익은 문어처럼 얼굴을 붉혔다.

극도로 분노한 그가 도끼눈 뜬 모습은 골든 길드원들을 지리게 만들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바, 반트너…!”

수호 기사 랭킹 부동의 1위.

압도적인 탱킹능력을 자랑하면서 오우거 못지않은 괴력을 행사하는 괴물.

그가 골든 길드원들을 방패로 내리 찍고, 도끼로 양단하면서 살육하기 시작했다.

야수 인간 툰의 파괴력은 한층 더 무서웠다.

“네놈들 따위가 감히 우리의 도시를! 그리드의 도시를 넘보다니!”

은빛의 크로우가 삽시간에 피로 물들었다. 골든 길드원들의 피였다.

골든 길드원들은 억울했다.

우리가 정말로 레이단을 박살낸 후에 이런 꼴을 당했다면, 그래도 덜 억울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레이단을 박살내기는커녕 제대로 공격조차 시도하지 못했다.

레이단에 진입하기도 전에 농부들에게 패퇴하고 도망치는 길이다.

근데 레이단을 박살냈다는 누명을 쓰고 처참하게 목숨을 빼앗기자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구원자가 필요했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던 골든 길드원들이 후로이를 발견하였다.

후로이는 반트너, 툰과 달리 비교적 냉정한 표정을 지은 채 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괴물들 사이에 유일하게 이성적인 인물 같았다.

그에게 골든 길드원들이 도움을 요청했다.

“후로이 님! 제발 우리를 좀 살려주십시오! 우리는 레이단에 자그마한 해도 입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크게 반성하고 있스니다! 제발 저 두 분을 진정시켜주십쇼!”

울며불며 애원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후로이가 입을 열었다.

“너희들 부모님 만수무강.”

“헉…”

넘지 말아야할 선이라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남의 부모님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이다.

독설에 당한 골든 길드원들은 깨달았다.

후로이가 반트너와 툰보다 더 악독한 놈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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