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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62화 (57/1,794)

템빨 13권 - 9화

“나는 레이단의 농부다.”

‘지랄!’

지발을 일격에 죽인 괴수가 자신을 농부라고 소개해봤자 설득력이 없었다.

백치가 아닌 이상 누가 저 말을 순순히 믿겠는가?

3개 길드원들은 피아로가 자신들을 조롱한다고 여겼다. 하지만 발생하는 감정은 분노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특히 스네이크 길드의 경우, 살해당한 마스터의 복수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선뜻 나서질 못하고 있었다.

마스터의 피로 물든 호미를 보고 있노라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기 때문이다.

‘보스 몹보다 강하다! 저 호미에 한방 맞았다가는 골로 갈 거야!’

사망 시 발생하는 페널티는 치명적이다. 경험치 하락은 기본이고, 아이템을 잃을 수도 있었다.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저런 괴수를 상대해야할까?

압도적인 강함을 목도하고 망설이는 길드원들에게 간부들이 호통 쳤다.

“뭣들 하냐! 상대는 마스터의 원수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복수해!”

겁먹고 물러서기라도 했다가는 명문이라는 간판을 잃게 된다. 세간에 비웃음거리가 될 것이며 길드 자체가 와해될 공산이 컸다.

그 당연한 사실을 인지한 길드원들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들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피아로를 포위했다.

‘시벌! 그래! 차라리 죽자! 길드가 망하는 것보단 낫지!’

‘우리가 다 뒈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는 죽인다!’

길드가 그들에게 주는 혜택은 천문학적이었다. 길드를 잃을 수는 없었다.

스네이크 길드원들의 흉흉한 살기가 피아로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피아로는 웃고 있었다.

‘얼마만의 전장인가.’

적기사단 시절, 피아로에게 있어서 전쟁이란 곧 삶이었고, 전장은 삶의 터전이었다.

수백의 적들과 마주하자 동료들과 함께 대륙을 호령하던 시절이 떠올라 즐거웠다. 피가 끓어올랐다.

“신나는구나.”

대련과는 다른 실전이다. 힘을 억누를 필요가 없다.

지난 수개월 동안 밭일을 하고 강자들과 대련하면서 성장시킨 무상검법을 마음껏 펼칠 기회다.

그냥 미쳐 날뛰면 된다.

푸욱!

“컥.”

괭이가 스네이크 길드원 1명의 심장을 관통했다. 피아로가 수개월 동안 반복 숙달하면서 깨우친 괭이술이었다. 상대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간극을 좁혀서 죽여 버린다.

“이 개자식이!”

마스터에 이어서 동료까지 당하자(심지어 농기구에) 격분한 스네이크 길드원들이 일제히 피아로를 덮쳤다. 이제 그들의 분노 수치는 두려움 수치보다 앞섰다.

피아로가 바라는 바였다.

그가 괭이를 회수함과 동시에 무상검법 5 장을 전개하였다.

사각에서부터 형성 된 강기의 줄기가 굽이굽이 파도치며 일대의 적들을 순식간에 도륙해나갔다.

방어와 회피가 불가능한 광역 스킬이었다.

사방에서부터 분출된 핏줄기가 마치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그 중심에 선 피아로에게는 피 한 방울 튀기지 않고 있었으니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을 광경이었다.

잔챙이들을 처리한 피아로의 시선은 아스카를 좇고 있었다.

아스카.

과거, 그리드를 수세에 몰아넣었던 경력이 있는 광전사 랭커다.

그녀의 강함을 피아로는 한눈에 간파하였다.

“감히 아가씨를 노리다니!”

달려오는 피아로를 가로막은 블랙테디가 5마리의 곰을 소환했다.

선글라스를 낀 백곰들이었다.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멋지게 등장한 녀석들이 학익진을 전개, 피아로를 요격했다.

쿠워어!

소환수 강화 버프까지 등에 업은 녀석들은 무척이나 빠르고 강했다. 진법 또한 견고하여 빈틈을 찾기 어려웠다. 3차 전직 유저를 상대로도 물러남 없이 싸우는 용맹한 녀석들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잘못 만났다.

[소환수 콜라곰1이 소멸하였습니다.]

[소환수 콜라곰3이 소멸하였습니다.]

“헉.”

호미로 공격을 차단한 후 괭이로 반격.

그 일련의 과정을 물 흐르듯이 반복하는 피아로에게 백곰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곰이 아니라 하룻강아지 꼴이다.

블랙테디는 실감할 수 있었다.

‘차, 차원이 다르다.’

스네이크 길드의 간부들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리드 놈은 저런 괴물을 어디서 주워온 거지!’

네임드 NPC.

쉽게 만날 수도 없을뿐더러 구속이 불가능한 존재다. 그들은 Satisfy의 세계관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일개 유저가 거느리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다.

한데 그리드는 부하로 부리고 있었다. 심지어 평소에는 농부로 써먹는 듯하다.

이건 질투조차 할 수 없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놀라움을 넘어서 경외심이 무럭무럭 샘솟을 지경이었다. 그리드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폭! 폭! 폭!

어느새 블랙테디의 소환수들을 모조리 해치워버린 피아로가 블랙테디의 마빡을 호미로 연신 내리찍었다.

[7,3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7,3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7,3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허억?”

방어력을 무시하는 고정 데미지.

강기의 발현이었다.

블랙테디는 죽음을 직감했다.

소환수 랭킹 1위가 호미에 찍혀 죽게 생긴 것이다.

하지만 크게 창피하지는 않았다.

통합 랭킹 2위도 호미에 찍혀 죽은 마당에 자신이라고 뭐 대수겠는가?

‘블랙테디, 호미에 찍혀 사망!’이라는 소문은 ‘지발, 호미에 찍혀 사망!’이라는 소문에 묻힐 것이었으니 천만다행이었다.

[사망하였습니다.]

궤도를 읽기 어려운 호미 공격을 계속 허용한 블랙테디가 끝내 쓰러졌다.

그 광경에 모두 다 할 말을 잃었다.

최초에 지발이 호미에 죽었을 때까지만 해도, ‘즉사 계열 스킬이 발동한 거구나.’라고 생각했기에 사람들은 그나마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까 즉사 스킬이 문제가 아니었다. 기본 공격력 자체가 너무 강했다. 오러 마스터 휴렌트의 업그레이드 버전을 보는 심정이었다. 저걸 과연 누가 감당할까?

석상처럼 굳어버린 사람들 사이에서 아스카만큼은 투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광전사.

위기에 강하다.

<광기> 패시브 스킬의 보정효과로 인해 공포심이 쾌감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그녀의 호전적인 성향이 극대화되었다.

“예전에 그리드에게 당했던 복수를 그리드의 부하인 당신에게 해주겠어!”

레전드리 아이템 <아이나스의 낫>을 꺼내 쥐며 선포하는 아스카였다.

피아로가 그녀를 격려해주었다.

“부디 힘내다오.”

그리드 공작의 부하는 아니지만. 뭐, 오해하든 말든 크게 상관없다.

촤르르륵!

아스카가 힘껏 낫을 던졌다. 쇠사슬이 펼쳐지면서 날아간 낫의 끝부분이 벼락처럼 떨어진다.

“호오, 훌륭한 솜씨.”

감탄한 피아로가 낫을 괭이로 방어했다.

‘걸려들었어!’

아스카가 회심의 미소를 그렸다. 그녀가 사슬을 잡아당기자 낫이 피아로의 괭이를 그녀 쪽으로 끌어당겼다.

“멋진 기술과 완력이로군.”

피아로의 칭찬이 이어졌다. 그를 어느덧 지척까지 끌어온 아스카가 <유프라의 대검>으로 무기를 스왑했다.

과연 현질 파워는 위대하다. 재벌의 딸답게 레전드리 아이템을 몇 개나 소유한 그녀였다.

“죽어!”

유프라의 대검이 대기를 일그러뜨렸다.

3차 전직 광전사의 궁극기 <광기의 분격>이 지존급 무기를 통해 전개되는 순간이었다.

한껏 달아올랐던 피아로의 흥이 확 식었다.

“대검술 솜씨는 많이 부족하다. 그리드 공작과 비교하면 하찮군.”

아스카는 스네이크 길드의 2인자로서 통합 랭킹이 무려 31위였다. 템빨단원들 못지않게 강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봤자 전력을 다하는 피아로의 상대는 못되었다.

무상검법 4 장을 전개한 피아로가 광기의 분격을 무력화시킨 후 무상검법 1 장을 연계하였다.

퍼엉!

균열을 일으킨 대검과 맞물린 호미로부터 방출 된 강기가 아스카의 명치에 적중했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꺅!”

광전사는 방어력이 약하다. 모든 스탯을 근력과 민첩성에 투자하고 체력은 등한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스킬 한방 맞았다고 생명력이 3분의 2나 손실되다니?

아스카가 파괴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졌다. 하지만 마치 오뚜기처럼 곧바로 벌떡 섰다.

광전사는 생명력 하락과 비례하여 신체 능력이 상승하는 존재. 상처를 입으면 입을수록 강해진다.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야!”

망가진 대검을 회수한 아스카가 <산화의 창>으로 스왑했다. 그리고 현란한 창술을 구사했다.

피아로가 또 다시 실망하였다.

“폰 자작과 비교하면 하찮은 창술.”

쩌엉!

괭이가 조악한 창로를 차단했다. 이어서 호미가 날아갔다. 수없이 호미질하며 터득한 오의와 무상검법이 결합된 기술이었다. 아스카는 도무지 방어할 수가 없었다.

폭!

“아얏!”

이마를 찍힌 아스카가 울상 지었다.

호미에 2번 찍혔답시고 생명력이 바닥을 기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녀가 이를 악 물었다. 그리고 다시금 낫을 들더니 더욱 더 상승한 신체 능력을 기반으로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녀의 컨트롤 실력으로는 피아로에게 치명타를 입히지 못했다. 뼈를 내주고 살을 취하는 최후의 수단을 시도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아로는 노련하여 쉽게 당하지 않았다.

교차하는 호미와 괭이의 장벽이 아스카에게 절망감만을 주었다.

결국 그녀도 사망하고 말았다.

‘호미에 찍혀 죽다!’라는, 자손대대로 창피할만한 소문의 주인공 중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스네이크 길드의 참모 박스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저건 쓰러뜨릴 수 없다.’

절대적인 존재다.

높은 능력치와 결합 된 완벽한 전투 능력이 현재 유저들의 수준으로는 결코 넘을 수 없는 벽과 같았다.

박스가 장담하건데, 설령 이 자리에 랭킹 1위 크라우젤이 있었더라도 피아로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할 것이었다.

‘유저들의 레벨이 최소 360은 넘어야 그나마 좀 상대가 가능할 존재다. 그렇다면…’

쓰러뜨리는 건 포기한다.

과감히 결단한 박스가 수에론과 하오에게 소리쳤다.

“우리가 저자의 발을 묶겠습니다! 당신들은 그 틈에 레이단을 박살내주십시오!”

그래, 손해만 입고 돌아갈 수는 없다.

당초 목적은 레이단의 초토화.

그리드의 세력 확장 속도를 늦춰야만 한다. 그를 위해서라면 희생할 수 있다.

박스의 결심이 수에론과 하오를 웃게 만들었다.

“좋은 판단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수에론과 하오조차도 저 피아로라는 NPC를 상대하기는 꺼려졌다.

그냥 이대로 퇴각할까 싶었는데, 스네이크 길드가 결단을 내려주는 덕분에 그럴 필요가 사라졌다.

그들은 스네이크 길드가 피아로의 발을 묶어두는 사이 레이단을 향해서 진격했다.

앞길을 3명의 농부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래서 뭐?

네임드 NPC가 어디 흔한가?

저 3명의 농부들은 피아로와 달리 약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냥 평범한 농부일 수도 있었다.

영혼 약탈자 수에론이 앞장섰다.

이미 사망한 스네이크 길드원들의 영혼을 회수하고 있던 그가 3개의 영혼을 매개로 <영혼 창> 3자루를 소환, 발사했다.

“꺼져라.”

유니크 스킬 영혼 창은 일격필살의 위력을 내포하고 있다.

최상위 랭커들조차도 공격력을 감당하기 어려워했으니 3명의 농부들 따위 단번에 꿰어 죽일 수 있었다.

한데.

퍼엉!

입에 감자를 물고 있는 농부가 마법을 소환하더니 영혼 창 1자루를 소멸시켰다.

“뭣!”

수에론을 비롯한 골든 길드원 211명 전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놀라운 광경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또 다른 농부가 방패를 꺼내 영혼 창 2자루를 가볍게 막아낸 것이다.

“뭐, 뭐 저딴 놈들이!”

네임드 NPC는 피아로 하나 뿐만이 아니었단 말인가!

수에론은 구멍을 찾아야만 했다.

그가 3명의 농부 중 유일하게 활약하지 않고 멀뚱멀뚱 서있는 농부를 표적으로 정했다.

“저놈이다! 저놈이야말로 평범한 농부다! 저놈을 돌파한다!”

“예!”

골든 길드원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직면해오는 그들을 마주한 농부, 크라우젤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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