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3권 - 8화
레이단의 황금빛 밀밭.
‘힘들다…’
<여신의 대행자>
그 이름부터 찬란한 ‘유니크 클래스’ 전직자 데미안은 열심히 밭일 중이었다.
밀짚모자로 뙤약볕을 가린 채 서걱서걱, 낫으로 밀을 수확해나가는 그의 모습은 숙달 된 농부 그 자체였다.
도대체 왜?
교황 후보로서 한창 바쁜 시기를 보내야할 그가 왜 먼 타향까지 와서 밭일을 하고 있단 말인가?
사연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일주일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일주일 전.
“나를 쓰러뜨리지 않으면 레이단에 입장할 수 없다.”
괴상한 농부와 엮이게 된 데미안은 자신이 아주 고약한 똥을 밟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슬프다.’
피아로.
이 농부는 미쳤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고 다짜고짜 결투를 신청하더니, 거절당하자 뒤늦게 수문장 행세를 하는 농부가 그럼 어디 제정신이겠는가?
호전적이고 막무가내인 기질이 정상인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나고 있었다.
거기에 또 강하다.
강한 놈이 미쳤으니 피하기도 어려웠다.
‘잘못 걸렸어.’
데미안은 한숨만 쉬었다. 그리드를 만나기 위해서 이 먼 곳까지 찾아왔건만, 그리드를 만나기도 전에 미친놈에게 발목을 붙잡히자 현실이 가혹하다고 느꼈다.
‘후… 피할 수 없다면 싸워야지.’
데미안은 그리드를 꼭 만나야 했다. 그리드에게 리파엘의 창을 봉인해달라고 부탁해야만 했다. 앞길을 가로막는 이 미친 농부를 일단 쓰러뜨려야할 필요성이 있었다.
결심한 그가 <빛의 가호>를 발동시켰다.
쩌엉!
하늘에서부터 황금색 기둥이 떨어졌다.
그에 휩싸인 데미안의 공격력과 방어력, 그리고 명중률이 순간적으로 80퍼센트 치솟았다.
빛의 가호.
재사용 대기 시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으나 그 효과만큼은 탁월한. 아니, 탁월함을 넘어 사기적인 최강의 버프 스킬이다.
피아로가 감탄하였다.
“실로 놀라운 신성력이다!”
데미안의 흉흉한 시선이 그를 노려보았다.
“쓰러뜨리겠습니다. 죽지 않도록 조심하세요.”
“좋은 기세다.”
더 이상 긴 말은 필요치 않았다.
두 사람은 곧바로 격돌했다.
철벽과도 같은 방패를 수족처럼 부리며 안정적인 한손검술을 구사하는 데미안. 호미와 괭이에 이어 이 빠진 검을 사용하기 시작한 피아로.
두 사람의 대결은 얼핏 치열해 보였다.
결과?
데미안이 10분 만에 패배했다.
“그대의 방어력은 황제의 친위대가 펼치는 수호진 이상으로 견고했고, 치유력은 사제와 버금갔다. 나를 상대로 이토록 오래 버틴 사람은 그대가 최초야. 때리는 맛… 아니, 검술을 단련하는 재미가 있었다.”
피아로의 극찬이 이어졌다.
하지만 데미안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말도 안 돼.’
그리드 덕분에 여신의 대행자로 전직한 후 지금까지.
그간 얼마나 많은 전투에서 승승장구 했던가?
일방적으로 도륙한 몬스터의 숫자를 헤아릴 수조차 없다.
악명 높은 보스 몬스터? 놈들의 강력한 공격도 단신으로 몇 시간씩 견뎌냈다.
나야말로 성기사의 정점이다.
데미안에게는 그러한 자부심이 있었다.
한데 농부에게 패배한 것이다.
그것도 고작 10분 만에!
“말도 안 된다고!”
데미안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작금의 결과를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었다.
의외로 승부욕이 강해 길길이 날뛰는 그에게 또 다른 농부가 다가왔다.
정체를 숨긴 크라우젤이었다.
“나하고도 싸워봅시다.”
“…제길! 좋아! 싸웁시다! 싸우자고! 젠장! 내가 농부한테 질 리가 없다고!”
극도로 흥분한 데미안.
안타깝게도 그는 크라우젤과의 대결까지 받아들이고 말았다.
결과?
이번에도 패배였다.
다행히(?) 이번에는 20분 이상 버텼다.
하지만 조금의 위안도 되지 않았다.
“이럴 수가!”
농부에게 2연패.
데미안은 좌절했다. 이제는 나 또한 주인공급 인물이 되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실상은 엑스트라에 불과했던 것이다.
하얗게 질려있는 그에게 피아로가 제안했다.
“사실… 현재 그리드 공작은 자리를 비우고 있다네. 그가 돌아오려면 최소 3주의 시일이 걸릴 터인데, 그때까지 우리와 함께하지 않겠나?”
함께?
‘뭘?’
선뜻 이해하지 못하는 데미안에게 피아로가 밀밭을 가리켜보였다.
“오전에는 밭일, 오후에는 대련.”
“…?”
내가 왜?
역시 이 농부는 미쳤다.
데미안은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때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퀘스트도 보통 퀘스트가 아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히든’ 퀘스트였다.
<즐겁고 신나는 수련!>
★히든 퀘스트★
레이단의 농부 피아로와 함께 생활하십시오. 그와 함께 한다면 당신은 크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 클리어 조건:3주 동안 피아로와 함께 생활. 피아로가 지시하는 일정을 완벽하게 소화해야 함.
퀘스트 클리어 보상:근력+30. 체력+60. 소드 마스터리 레벨 2단계 상승. 스킬 <농사> 생성.
“헉.”
고급 소드 마스터리의 경우, 레벨 하나를 올리려면 최소 3달 이상의 단련 기간이 필요했다. 그것도 쉴 새 없이 사냥을 한다는 가정 하에서의 이야기다.
한데 단 3주 만에 소드 마스터리 레벨을 2개나 올려준다고?
심지어 스탯도 90개나 상승한다고 한다. 이는 9레벨을 올린 것과 같은 가치다.
‘거기에다가 농사 스킬까지… 아니, 농사 스킬은 쓸데없잖아?’
어쨌든, 거절하기에는 너무 매력적인 퀘스트였다. 이 퀘스트의 단점은 퀘스트명이 재수 없다는 것 외에 없었다.
이제 보니 이 미친 농부들은 악연이 아니라 기연이었던 것이다.
결국 데미안은 피아로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현재.
데미안은 강해졌다.
아직 퀘스트를 완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레벨이 오르거나 스탯이 성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일 같이 두 사람(한 명은 피아로, 다른 한 명은 아직도 이름 모름)의 농부와 대련을 하다 보니 컨트롤 실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이제 피아로를 상대로 15분 이상 버틸 수 있게 되었다.
‘기뻐해야하는 건가…’
아직도 피아로의 진정한 정체를 모르는 데미안은 혼란스러웠다. 지금 자신이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꼭 만나야만 했다. 지금을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초조해할 필요가 없었다.
마음을 비운 데미안은 열심히 일했다. 수확한 밀 10단을 양쪽 어깨에 짊어지고 날 듯이 뛰어다녔다.
“응?”
노을빛으로 물든 밀밭 너머 저 멀리.
일단의 무리가 다가오고 있음이 보였다.
데미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지?”
지난 일주일 동안 레이단을 찾아온 방문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레이단은 완전히 고립 된 도시였다. 근데 갑자기 수백 명의 인파가 몰려오다니, 뭐 하는 작자들일까?
데미안이 의문을 느끼는 그때.
“이것 참, 무척이나 반가운 손님들이 오셨군.”
피아로가 허허 웃었다. 그 눈빛에는 투지가 번들거리고 있었으니 데미안은 불안했다.
***
천칭좌의 오아시스.
7대 길드의 집결 장소이다.
“시간 개념이 부족한 놈들이군.”
약속한 시간이 지났다.
원래라면, 이번 연합에 불참한 자이언트 길드를 제외한 6개 길드가 이미 10분 전 이곳에 집결했어야한다.
하지만 아이스 플라워 길드와 야크 길드, 그리고 제라프 길드가 아직까지도 도착하지 않고 있었다.
골든 길드의 마스터 수에론이 불만을 표출했다.
“이봐, 지발. 나와 내 길드원들의 황금 같은 시간을 하찮은 것들 기다린답시고 얼마나 더 낭비해야하는 거지?”
골든 길드.
스네이크 길드와 자이언트 길드의 뒤를 잇는 최대 규모의 길드다.
원래부터 권위의식이 강했던 그들의 최근 자존감은 하늘을 찔렀다.
마스터 수에론이 유니크 클래스로 전직한 여파였다.
국가대항전 시즌 당시만 해도 통합랭킹 70위권에 머물렀던 그의 현재 랭킹은 무려 23위.
앞으로 더욱 더 발전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그의 클래스 <영혼 약탈자>의 전투 능력은 <파그마의 후예> 이상이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
“10분 동안 기다린 것으로 의리는 충분히 지켰다고 본다. 우리끼리 행동하도록 하지.”
하데스 길드의 마스터 하오 또한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하오의 랭킹은 16위.
그는 과거, 유라가 자신이 결코 이길 수 없는 랭커 중 한 명으로 지목한 바 있는 실력자이다.
지발의 입장에서는 굳이 이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레이단은 빈집.’
사실 스네이크 길드만으로도 레이단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지발이 7대 길드에게 연합을 요청한 이유는 친목 도모를 위함이었다.
특히 자이언트 길드, 골든 길드, 하데스 길드와의 친목.
이들과는 되도록 동맹관계를 유지해야 안심할 수 있었으니까. 아직은.
“좋아, 우리끼리 짓밟고 약탈하도록 하자고.”
스네이크 길드원 275명.
골든 길드원 211명.
하데스 길드원 70명.
거침없이 레이단을 향해 진격했다.
레이단의 방어병력에 대비한 전략 구상?
필요 없다.
NPC 군대 따위 이들이 힘으로 찍어 누르고도 남았다.
“이런 대도시를 고작 농업도시로 발전시키다니, 그리드 그 자식은 내정에도 재능이 전무하군.”
광활하게 펼쳐진 밀밭을 보면서 조소한 지발.
그가 길드의 최강 마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선 이 밀밭부터 잿더미로 만들어 볼까?”
“저한테 맡기십쇼.”
자신만만하게 말한 빅보이가 화염을 소환하는 그때였다.
“그대들은 누구지?”
“…?”
웬 농부 4명이 나타났다.
호미, 낫, 괭이 등의 농기구를 들고 있는 농부들.
하나같이 밀짚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는 그들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지껄였다.
“살기가 흉흉하군. 그대들은 레이단의 적인가?”
“푸하하하핫!!”
지발이 박장대소하였다.
일개 농부 따위가 감히 이 대군의 행군을 가로막은 것으로 모자라 당당하게 질문하자 가소로움을 넘어 황당할 지경이었다.
“주인을 닮았나? 이 동네는 농부마저도 멍청한데?”
한참을 웃던 지발의 눈빛이 일순 차갑게 가라앉았다.
“죽여.”
지발이 명령했다. 마치 파리라도 잡으라는 마냥 쉽게. 그에게 있어서 일개 농부란 파리 이하의 존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빅보이가 농부들을 향해서 마법을 발사했다.
<플레임 쓰나미>
밀밭을 단번에 불살라버리기 위해서 캐스팅되었던 A급 대단위 마법이 고작 4명의 농부들을 향해서 진격한다.
화염의 해일에 의하여 일대가 불바다가 되었고, 겁 대가리 상실한 농부 4명은 그대로 잿더미가…
“어? 어어억?”
빅보이가 기겁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리의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농부가 괭이를 크게 휘두르자 맹렬한 화염의 해일이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던 탓이다.
“저게 뭐야!”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에 혀를 내두르는 3개 길드원들!
어느새 밀짚모자를 벗어 던진 피아로가 환하게 웃어주었다.
“레이단에 온 것을 환영한다.”
“전원 전투태세를 갖춰라! 헉?”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 챈 지발이 급히 길드원들을 통솔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피아로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필멸.”
콰르릉!
천둥치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흙투성이의 호미가 붉게 물들었다.
폭!
세모꼴 호미의 날카로운 끝 부분이 지발의 이마에 꽂혔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습니다!]
[사망하였습니다.]
“???”
랭킹 2위가 단 일격에 사망하는 순간이었다.
지발 본인은 물론이고 550여 명의 길드원들 모두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한편, 크라우젤과 데미안은 경악하고 있었다.
“확정 즉사 스킬…!”
사기다.
피아로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강력한 존재였다.
‘당최 정체가 뭐지?’
크라우젤과 데미안이 깊은 의문을 느끼는 사이, 구심점을 잃은 3개 길드원들은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네, 네놈은 뭐냐!”
고작 한 명의 농부를 상대로 최강 길드원 수백 명이 뒷걸음치다니, 참으로 괴이한 광경이었다.
피아로가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레이단의 농부다.”
거짓이 아니다.
지금의 그는 정말로 일개 농부에 불과했다. 실제로 라빗 행정관에게 매달 73실버의 녹봉을 받고 있었다. 저축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참고로 라빗 행정관은 매달 5,300골드의 녹봉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