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 13권 - 5화
데미안은 그저 갈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이다. 딱히 트집 잡힐 만한 행동을 한 기억이 없다.
한데 다짜고짜 앞길을 가로막으면서 누구냐니? 농부들의 태도가 상식적이지는 않았다.
의문을 느끼며 생각해 본 데미안이 이내 합당한 추측을 내놨다.
‘내가 오타쿠라서 마음에 안 드나보군.’
데미안이 무장한 무구들에는 온갖 문구가 음각되어 있다.
금빛의 필기체로 휘갈겨진 그 문구들은 백색 무구와 감각적인 조화를 이뤘으므로 무척 멋졌다.
하지만 문구의 내용을 살펴보면 멋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린 쨩 사랑해, 이사벨 쨩 아름다워, 루나 쨩 귀여워, 레베카의 딸 포에버 등등.
문구의 내용이라는 것이 이처럼 오글거리고 유치찬란한 것들뿐이었으니까.
이를 꼴 보기 싫다며 시비를 걸어온 사람이 여태껏 한둘이 아니다.
현실에서나 게임에서나 오타쿠는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미안은 굴복하지 않았다.
레베카의 딸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내 마음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싶었다.
애초에 누군가를 순수하고 열렬하게 사랑하는 행위가 왜 비난 받아야하는지, 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레베카 교단에 소속 된 성기사입니다만. 제가 누군지는 왜 물어보는 겁니까?”
데미안의 태도가 냉랭했다.
농부 중 하나가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평범한 성기사는 아닌 듯한데.”
데미안이 울컥했다.
“그래요! 저는 평범한 성기사가 아니라 오타쿠 성기삽니다! 그래서 뭐! 괜히 때려주고 싶기라도 합니까!”
“오타쿠? 그게 뭔지 모르겠군. 어쨌든 그대, 나와 겨뤄보지 않겠는가? 그대로부터 느껴지는 신성력이 여태까지 내가 만나왔던 성기사와 성직자들 중 단연 돋보여 흥미가 생기거든.”
“이런.”
데미안이 드디어 사태를 파악했다.
이 농부들은 내가 오타쿠라는 이유로 시비를 걸어온 것이 아니라 그냥 미친 거다.
내 강력한 신성력을 간파한 눈썰미만큼은 칭찬해줄만하지만, 성기사에게 대결을 신청하는 농부라니?
비상식을 넘어 정줄을 놓았다고 봐도 무방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데미안은 농부에게 측은지심을 느꼈다. 그리고 진심어린 마음으로 기도했다.
“빛의 여신께서 이 불쌍한 백성에게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잠시 후.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끝낸 데미안이 농부들에게 작별을 통보했다.
“레베카 여신의 가호 아래 부디 정신을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데미안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저 미친 농부들과 오래 상종하고 싶지 않았기에 성문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한시라도 빨리 그리드 님을 만나야 한다.’
리파엘의 창을 봉인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다.
그 탐욕스러운 그리드가 부탁을 순순히 들어줄지는 의문이지만.
‘내 전재산을 드리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이사벨 쨩을 살릴 거야.’
그녀를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바치리라.
재차 다짐하는 그때였다.
퍼엉!
폭음과도 같은 파공성이 들려오기에 고개를 돌려보았더니 괭이가 날아들고 있었다.
“헉?”
명확한 살기.
압도적인 기세.
막지 않으면 크게 다친다.
본능적으로 감지한 데미안이 황급히 방패를 뽑아 세웠다.
쩌엉!
흙투성이 괭이와 순백의 방패가 충돌하면서 강력한 기파가 발생했다. 일대의 밀밭이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데미안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강하다!’
믿기지 않는 공격력이다.
고작 괭이 따위로 레베카교의 제일 성기사인 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다니!
그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괭이를 회수한 농부는 밀짚모자를 벗어 던지고 있었다.
피아로라는 이름의 NPC였다.
한 손에는 호미를, 한 손에는 괭이를 마치 검처럼 거머쥔 그가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훌륭한 방어력이다. 그대에게도 무상검법을 사용해야겠군.”
피아로는 고양되어 있었다.
그리드 공작과 템빨단원들, 그리고 크라우젤에 이어서 지금 저 데미안까지.
제국검법만으로는 제압할 수 없는 강자들이 지척에 널렸음이 그를 흥분시켰다.
‘크라우젤을 상대할 때처럼 진지하게 가볼까.’
로란의 폭포에서 그리드 공작과 실력을 겨뤘을 때.
그 당시 피아로는 온전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제대로 된 실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을 뿐더러 정황상 굳이 기를 운용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리드 공작과 함께해온 지난 몇 달 동안 피아로는 정서적으로 안정됐다. 이제는 온전한 실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자, 대결을 시작하자.”
“싫은데요!”
데미안이 냉큼 거절했다. 이유 없는 싸움은 사양이었다.
하지만 피아로는 막무가내였다.
“레이단에 입장하려면 필히 나를 쓰러뜨려야만 한다.”
“뭐 그딴!”
데미안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농부가 수문장 노릇을 하는 도시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내내 묵묵히 서있던 다른 농부가 피아로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적당히 상대하고 제게 넘기세요. 저 또한 저자와 붙어보고 싶으니까.”
그는 크라우젤이었다.
피아로와 함께 밭일하고 수련하기를 어느덧 보름째.
피아로와 형님, 아우하는 사이가 된 그는 전보다 확실히 더 강해져 있었다.
이제 피아로와 대결하면 피아로의 생명력을 절반까지 떨어뜨리는 수준이다.
한데 그만한 괴물조차도 데미안과의 대결을 기대하고 있었다.
이도저도 아니라 모두에게 외면 받는 <레베카교의 성기사>임에도 불구하고 성기사 랭킹 2위까지 오른 파격적인 인물.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랭킹 목록에서 사라짐으로서 히든 클래스를 획득한 것이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았던 인물.
그게 바로 데미안이다.
크라우젤이 진작부터 흥미롭게 소식을 접해왔을 정도로 데미안은 유명했다.
하지만 데미안 본인은 스스로가 유명인이라는 자각이 없었다. 그는 오직 레베카의 딸들에게만 관심이 있었고 본인에게는 무관심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그 유명인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였다.
대륙 최강의 검사, 피아로.
20억 유저의 정점, 크라우젤.
그 둘과 차례대로 싸워야할 운명이었으니까.
***
아이스 플라워 길드는 7대 길드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총원은 30명.
숫자는 적지만 30명 전원이 마법사 랭킹 100위권 안에 드는 정예들이다.
특히 길드 마스터 봉드레가 압도적 실력자였다.
마법사 랭킹 부동의 1위인 그는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통합 랭킹 11위였다.
최근에는 템빨단원들에게 밀려 랭킹이 17위까지 하락했지만, 그가 강하다는데 이견을 제시할 사람이 과연 세상에 있을까?
아, 그리드가 있다.
국가대항전 당시 그리드는 봉드레를 4초 만에 로그아웃 시켰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국가대항전에서의 개망신 이후 절치부심한 봉드레는 S급 마법들을 획득하기 위해서 고군분투해왔다.
모든 재산과 시간, 그리고 노력을 쏟아 부었다.
그 결과 현재 봉드레는 국가대항전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해졌다.
S급 마법을 무려 3개나 보유 중이다.
9개월 후, 조국 프랑스에서 개최될 제2회 국가대항전에서 그는 그리드에게 철저하게 복수할 계획이었다.
“그때는 내가 네놈을 3초 만에 로그아웃시켜주마.”
하지만 그 전에.
“일단 오늘 네놈의 영지부터 박살내놓고 말이야.”
그 빌어먹을 그리드 놈이 영주로 있는 레이단.
텅텅 빈 그곳을 오늘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 것이다.
놈이 지난 수개월 동안 공들여 발전시켰을 도시를 처참하게! 잔혹하게! 완벽하게!
“짓뭉개버리겠다! 크하하하하!”
“병이 재발했군.”
길드원들은 연신 혼잣말하더니 급기야 광소를 터뜨리는 마스터를 측은하게 바라보았다.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에게 패배한 이후 마스터의 상태가 구리다. 예전 모습이 그립다.
“응? 저게 뭐지?”
사방이 온통 정체불명의 가시덩굴로 형성 된 기이한 숲.
이제 이곳만 지나면 에트날 왕국 서부다. 곧 사막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걸음을 재촉하던 아이스 플라워 길드원들이 행군을 멈췄다.
저 멀리 수백 명의 인파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숲의 협소한 길목을 가로막고 있었다.
“난민 같은데?”
“거참 타이밍 한 번 더럽네.”
레이단이 지척인 상황이다.
한데 약 900명의 난민들이 행군을 지체하게 만드니 아이스 플라워 길드원들은 짜증이 솟구쳤다.
“확 다 죽여 버릴까.”
얼굴을 구긴 봉드레가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그에 질겁한 길드원들이 봉드레를 진정시켰다.
“저 많은 사람을 죽였다가는 악명수치가 하늘을 찌르게 될 거야. 한동안 정상적인 게임 플레이가 불가능할 거라고.”
“그래, 마스터. 제발 진정해.”
“제길! 제길! 제길! 나는 당장 레이단을 박살내고 싶단 말이다!”
“봐! 하늘을 날면 되잖아!”
철천지원수의 빈집을 앞에 두고 이성을 상실한 봉드레.
길드원들이 그를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플라이 마법을 사용하더니 하늘로 떠올랐다.
“숲을 벗어날 때까지만 하늘을 날아서 이동하자. 어때? 괜찮지?”
길드원들이 재차 말하자 그제야 간신히 이성을 되찾은 봉드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 좋아. 마나 소모가 아쉽지만 저것들을 다 죽이는 것보단 싸게 먹히겠지.”
둥실.
봉드레가 길드원들을 따라서 플라이 마법을 사용하는 그때였다.
가시덩굴 속에서부터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길드원 하나를 낚아채갔다.
“…엥?”
아이스 플라워 길드원들은 상황 파악이 잘 안 됐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그들의 시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길드원 렌이 사망하였습니다.]
“뭐라고!”
“이런 미친!”
이게 무슨 개 같은 경우란 말인가?
봉드레가 정체불명의 손이 튀어나온 방향을 노리고 마법을 사용했다.
“어떤 개자식이냐!”
콰자자자자작!
광속의 얼음 폭탄이 가시덩굴을 급속 냉각시킨 후 이어서 파괴시켜버렸다.
그러자 사망한 렌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적은?’
렌을 죽인 놈을 찾아야만 한다.
봉드레와 길드원들이 사위를 경계하였지만 도무지 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푹!
“캭!”
[길드원 실버가 사망하였습니다.]
흠칫.
봉드레와 길드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바로 곁에 서있던 동료가 살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적을 감지하지 못했다. 귀신에 홀린 심정이다.
‘어쌔신이다.’
303레벨인 봉드레조차 기척을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며, 200 후반 레벨대의 마법사들을 순살할 정도로 강력한 어쌔신.
그래, 마치 페이커 같은…
‘페이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봉드레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설마.’
정말로 페이커인가?
만약 그렇다면!
봉드레가 다급히 소리쳤다.
“여기선 안 된다! 당장 숲을 벗어나!”
어쌔신은 마법사의 카운터다.
생명력과 방어력, 그리고 민첩성까지 낮은 마법사의 입장에서는 신속을 무기로 삼는 어쌔신을 감당할 재간이 없다.
특히 이처럼 장애물이 많고 어두운 장소에서는 더욱 더 그렇다. 넓은 곳으로 이동해야만 한다.
판단을 내린 아이스 플라워 길드원들이 일제히 헤이스트를 사용했다. 이동 속도를 상승시킨 후 숲을 벗어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어둠 속 사신은 그들을 순순히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신의 경지에 오른 단도 투척술이 마법사들을 농락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