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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7화 (52/1,794)

템빨 13권 - 4화

‘우리는 이대로 죽는 건가?’

어쌔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유지해야한다.

감시, 추행, 암살 등.

맡은 바 임무가 은밀함과 인내를 요했으니 감정의 억제는 기본 소양이다.

하지만 현재 검은 화살단 어쌔신들은 평정심을 상실하고 있었다. 명확하게 말하면 겁에 질렸다.

이는 그들의 경지가 낮다는 증거다.

만약 뛰어난 어쌔신이었다면, 제아무리 목표물이 강할지언정 평정심을 유지했을 테니까.

“그 주인에 그 개새끼라더니, 동네 양아치 수준이군.”

저벅저벅.

목표물이 조롱하며 접근해온다.

단검술에 능한 어쌔신들이었으니만큼 접근전은 환영할만한 일이었으나 지금은 예외였다.

‘정면으로 맞붙어서는 승산이 없다.’

동료 셋을 눈 깜빡할 사이에 죽인 놈이다.

빠르게 판단한 여섯 명의 어쌔신들이 일제히 산개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단도를 투척했다.

파파파파파팟!

공작새의 꼬리를 연상하게끔 펼쳐진 수십 개의 단도가 그리드에게 쇄도했다. 도무지 피할 틈이라고는 없어 보였다.

어쌔신들은 그리드가 피투성이가 되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었다.

극도로 빈약한 상상력이다.

스윽.

옥빛 대검이 조용하나 빠르게 나선을 그렸다. 그러자 그리드를 노리고 날아왔던 수십 개의 단도가 나선의 중심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나선이 수평으로 변화하는가 싶더니 단도가 일제히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파그마의 검무, 회(回)의 수법이었다.

푹! 푸푸푸푸푸푸푹!

“커억.”

“끅!”

<스킬 피해량 20퍼센트 상승> 효과가 적용된 단도 세례는 어쌔신들이 투척했을 당시보다 더 강력한 위력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에 적중당해 고슴도치가 된 어쌔신들이 주저앉았다.

‘내 공격에 내가 당하다니!’

황당한 일이다.

어쌔신들의 동공이 바람 앞의 등불마냥 마구 흔들렸다.

<대장장이의 분노>를 발동한 그리드는 푸른 대검을 벼락처럼 휘두르고 있었다.

서걱!

단숨에 2명의 동료가 목숨을 잃었다.

몸과 머리가 분리되더니 잿빛으로 산화해버렸다.

‘강해도 너무 강하다…!’

도살귀가 강하다는 사실은 어쌔신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9명이 협공할 수만 있다면 그 도살귀조차도 숨통을 끊어 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단지 지하실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이 3명으로 제한되었기에 나서지 못했을 뿐이다.

말인 즉, 목표물이 도살귀를 혼자서 해치운 괴물이라고는 하나 우리들 9명이 힘을 합하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목표물의 강함은 상정한 범위를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적기사단의 배반자가 재림한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지경이다.

지브라 백작을 따르며 숱한 악행을 저질러왔던 검은 화살단이 이날 처참하게 전멸했다.

***

‘급소를 노리면 절단 스킬의 발동 확률이 아주 약간 상승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 조금 더 실험할 필요가 있겠어.’

도살귀를 레이드하고 대량의 경험치를 획득했던 그리드.

그는 평균 레벨이 240에 육박하는 검은 화살단원 9명을 해치우면서 추가로 획득한 경험치 덕분에 레벨이 상승했다.

288.

레벨만 놓고 보자면 500위권 랭커 수준이다.

하지만 그 강함은?

감히 순위를 매길 수 없다.

‘민첩이 너무 낮아.’

획득한 10개의 스탯 포인트를 모조리 민첩에 투자한 그리드는 여전히 부족함을 느꼈다.

피아로의 근력과 민첩은 1대1 비율을 이루고 있었다. 그를 참고한 그리드도 이미 수개월 전부터 모든 포인트를 민첩에 투자하고 있었지만 아직도 비율이 엉망이다.

피아로를 만나기 전까지 거의 대부분의 스탯을 근력에 투자한 탓이다.

현재 그리드의 근력은 2,810인 반면 민첩은 1,606에 불과했다.

이 2개 스탯의 비율을 1대1로 맞추려면. 그래서 힘과 속도가 균형을 이루는 이상적인 검술을 구사하려면 앞으로 레벨을 최소 120개는 올려야한다는 뜻이 된다.

‘눈앞이 캄캄하구만.’

그렇다고 자포자기하는가?

그럴 리가.

‘틈날 때마다 사냥에 집중해야겠군.’

이제 그리드는 스스로를 혹사시키는 행위에 거부감이 없다.

노력하면 노력한 만큼의 보상을 얻는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에가 날아오고 있었다.

“지옥 제일 마수를 찬양해라! 냥!”

기세등등한 모습을 보아하니 임무를 제대로 완수한 듯하다.

이로서 지브라 백작령에서의 용건은 완전히 끝났다.

“타이탄으로 간다.”

이제 그리드에게 챙 넓은 모자 따위 필요하지 않았다.

가면과 안대가 그의 생김새를 가려주었으므로 아이디가 저절로 비공개 처리 됐다.

그리드는 거침없이 전진했다.

타이탄으로 향하는 길에 만나는 몬스터들을 모조리 학살하면서 이도류와 급소 간파 스킬에 차츰 적응해갔다.

전투 후에는 내용을 복기하며 스스로의 단점을 찾아내고 그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타이탄까지의 거리는 약 보름.

그때까지 그리드의 목표는 최소 291레벨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랜디와 노에는 의외로 친해지고 있었다.

“노에! 귀여워!”

“컁! 이 무엄한 미물이 지옥 제일 마수의 머리를 쓰다듬다니! 턱도 쓰다듬어라! 컁!”

***

31번째 기사, 이단.

그는 적기사단의 막내다.

적기사단에 입단한지 채 4년이 안 됐고 나이도 23세에 불과했다. 이름난 가문의 적자도 아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못했다.

제국 최강의 기사 중 한명인 그를 감히 누가 우습게 여기겠는가?

“흐음~”

지브라 백작이 살해당한 현장.

수십 명의 귀족과 기사들이 도열해 있다.

석상처럼 굳어선 그들은 노심초사하며 이단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반면 이단은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지브라 백작을 살해한 일곱 명의 병사들에게 질문을 던지며, 지브라 백작이 살해당한 경위를 조사할 따름이다.

“음~ 그렇군요.”

잠시 후.

상황파악을 끝낸 이단이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지브라 백작이 살해당한 자리. 즉, 대전의 왕좌에 걸터앉았다.

그 예의 없는 행동을 누구도 지적하지 못했다.

이단이 명령했다.

“저들과 저들의 삼족을 멸하도록 하세요.”

“이, 이단 님!”

지브라 백작을 살해한 일곱 명의 병사들은 사색이 되었다.

수사에 잘만 협조하면 가족만큼은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지 않았던가?

한데 저 무자비한 명령은 뭐란 말인가!

애원과 원망의 눈빛을 보내오는 그들에게 이단이 빙그레 웃어주었다.

“당신들이 어째서 지브라 백작을 살해해야만 했는지, 그 이유는 납득합니다. 또한 지브라 백작이 죽어 마땅한 인물이라는 것도 잘 알겠고요. 하지만 범죄는 범죄죠. 법대로 집행할 따름입니다.”

“이제와 왜 그러십니까! 가족들만큼은 살려주겠다고 약조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당신들이 잘 협조해줬을 때의 이야기였죠.”

“성심성의껏 협조하지 않았습니까!”

“네~? 언제요?”

“……!”

병사들은 깨달았다.

이단 저놈은 철면피 중의 철면피였다. 아직 한참이나 어린놈이 지브라 백작만큼이나 악랄했다. 수십 명의 사람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도 웃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소름 돋았다.

발악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그들에게 관심을 접은 이단은 도열한 귀족들에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베라딘 남작이라고 했던가요.”

“그렇습니다.”

이단에게 호명된 베라딘이 한걸음 앞으로 나왔다.

곱슬진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그를 유심히 관찰하던 이단이 이내 눈웃음 지었다.

“지브라 백작이 병사들에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고 병사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했다… 훌륭하군요?”

노골적으로 비꼬고 있었다. 상황이 절묘하게도 베라딘을 돋보이게 만들어주고 있었으니 구린내를 맡은 것이다.

베라딘은 동요하지 않았다.

예의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조아렸다.

“제가 현장에 조금만 더 빨리 도착했더라면 지브라 백작님을 구원할 수 있었을 터.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이단의 눈동자에 이채가 실렸다. 베라딘이 제법 만만찮은 인물임을 파악한 것이다.

“도살귀 슬레이어에 대해서는 일절 모르는 것이 맞나요?”

공교롭게도, 지브라 백작이 살해당하기 직전 누군가가 도살귀를 홀로 퇴치했다고 한다.

이단은 이 모든 일들이 연관되어 있으리라 의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건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베라딘이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하였으니 문제였다.

“그에 대해서는 병사들에게 들은 것이 전부입니다. 혼자였고, 기품이 넘치는 흑발 사내였다는 것. 저는 그를 직접 보지도 못했습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걸로 끝이다.

이단은 뒤도 안 돌아보고 지브라 백작성을 떠났다.

그리고 도살귀 슬레이어가 어느 방향으로 향했을까 추측해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누굴까나.”

도살귀는 황실 감별사단이 A+급으로 판별한 몬스터다.

3명의 흑기사로는 퇴치할 수 없다는 판단이 내려졌고, 그 탓에 적기사인 자신이 혼자 이 먼 곳까지 파견됐다.

안 그래도 짬밥에 밀려서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된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데, 일이 복잡하게 꼬이니 슬슬 짜증난다.

‘A+급 몬스터를 혼자서 해치울 수 있는 실력자가 그리 흔할 리도 없고… 그자의 정체가 뭔지 조사하지 않고 귀환했다가는 선배들한테 욕먹을 텐데.’

“하아.”

한숨만 나온다.

***

“확실한 정보인가?”

“예.”

“좋아, 지금이 적기다.”

국가대항전에서 고배를 마셨던 랭킹 2위 지발.

그가 이끄는 스네이크 길드는 염려와 달리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길드원의 숫자가 총 275명이었고 평균 레벨은 230을 웃돌았다.

1,000위권 랭커가 무려 100명 이상 포진되어 있는 실정이다.

최근 하켄 왕국의 백작으로 승작한 지발의 목표는 오직 하나.

유저 최초의 왕이 되는 것.

하지만 커다란 걸림돌이 있었다.

다름 아닌 그리드다.

골렘 침공전이라는 대규모 에피소드 덕분에 단숨에 공작이 되어버린 그놈.

이대로 두면 유저 최초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놈이 차지할 공산이 크다.

좌시할 수 없었던 지발은 계획을 세웠다.

7대 길드와 연합하여 레이단을 침공, 그리드가 세를 확장하지 못하게끔 견제하는 것이다.

7대 길드의 수장들은 협력을 약조했다. 그들 역시 그리드를 방관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리드가 거느리고 있는 템빨단이 세도 너무 세다는 점이었다.

통합랭킹 10위에서 40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는 그 괴물들이 집합해 있는 레이단을 어찌 함부로 침공 하겠는가?

7대 길드의 힘을 합친다면 템빨단이고 나발이고 간에 몰살시키는 것이 가능은 하겠으나 그만한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오히려 손해다.

지발과 7대 길드의 수장들은 섣불리 행동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전전긍긍하며 때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에트날 왕국 서부에 파견한 정찰대의 보고에 의하면, 최근 그리드가 종적을 감췄으며 템빨단원들 또한 광산 개발을 이유로 레이단을 떠나있다고 한다.

현재 레이단은 완전히 빈집인 셈이다.

이때 침공하여 내정시설들을 초토화시킨다면?

그리드는 극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을 터다.

“지금 당장 레이단으로 향한다. 전원 투구나 가면을 착용하여 아이디와 소속을 숨기고 최대한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동하라 전해라.”

같은 시각, 레이단.

“이곳이 그리드 님의 도시…!”

광활한 밀밭과 끝이 보이지 않는 성벽을 목도한 데미안은 압도당하고 말았다.

숱한 모험을 다니면서 제법 많은 대도시를 방문해봤지만 규모면에서 레이단은 가히 최고였다.

“공작이란 정말 대단한 거구나! 이만한 도시를 다스리시다니! 굉장하다! 인구가 최소 10만은 넘겠어!”

연신 감탄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데미안의 모습은 영락없는 촌놈 같았다.

촌놈은 환영받지 못하는 걸까?

두 명의 농부가 불쑥 다가오더니 난데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대는 누구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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