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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4화 (13권) (49/1,794)

템빨 1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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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13권 - 1화

레이단에서 타이탄까지 이동하는 최단거리 루트는 웰콘 자작령을 경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지브라 백작령을 경유하고 있었다. 그 탓에 무려 열흘이라는 시간을 지체하게 되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라우엘은 이곳에 들러서 <도살귀의 안대>를 얻으라고 했다.’

꼭, 반드시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도살귀의 안대라는 아이템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 된다.

‘도살귀라.’

라우엘의 말에 따르면, 도살귀는 지브라 백작성 지하에 서식하는 마물이다.

사람을 고문하고 처참하게 죽이는 것이 취미인 지브라 백작이 육성한 반인반마라고 하는데…

‘제어가 불가능하게 됐다던가.’

반인반마.

성장 환경에 따라서 인간이 될 수도 있고, 마물이 될 수도 있는 존재다.

성정이 잔악한 지브라 백작에게 길러진 녀석이 마물로 타락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직접 가서 만나보면 알겠지.’

나흘 동안 사냥에 집중하여 악명 수치를 해소한 그리드가 걸음을 옮겼다.

***

‘기분 나쁜 곳이군.’

암운 아래 지브라 백작성.

유난히 어둡고 스산한 그곳의 새카만 입구는 마치 용의 아가리를 연상하게 만들었다. 일단 들어가면 두 번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제아무리 담대한 사람일지라도 저곳에 섣불리 발을 들이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그리드는 일말의 공포심도 느끼지 않았다.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자존감이 성장한 만큼 겁도 없어진 것이다. 귀신을 보고 오줌을 지렸던 과거의 그는 이제 없다.

“누구요?”

성문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이 그리드를 수상하게 보았다. 모자를 깊이 눌러 써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 경계함이 마땅했다.

그리드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무려 1,500을 초과하는 위엄 스탯과 25,000을 초과하는 대륙 전역 명상이 영향력을 발휘했다.

병사들은 그리드로부터 왠지 모를 후광을 엿봤다. 근거 없는 신뢰감을 느꼈다.

“어디서 납신 귀한 분이신지요?”

그리드를 제국의 고위 귀족쯤으로 오해한 병사들이 급 공손해졌다.

이제는 익숙한 태세변환이다.

별반 감흥을 느끼지 못한 그리드가 무심한 표정으로 답했다.

“도살귀를 퇴치하러 왔다.”

“헉.”

병사들이 숨을 삼켰다.

그 무시무시한 도살귀를 퇴치하겠다니!

‘게다가 혼자서?’

‘남들은 동료 하나라도 더 데려오려고 발악을 하거늘…’

“진심이십니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재차 묻는 병사들에게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

“흐음.”

지브라 백작의 몸무게는 0.1톤을 가뿐히 넘겼다.

기름진 면상에 출렁이는 뱃살이 보기에 썩 좋지만은 않다.

축 늘어진 턱살을 쓰다듬으며 그리드를 유심히 관찰하던 그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뭐하시는 분인고?”

지브라 백작은 능력적으로 평범했다. 딱히 뛰어난 재능도 없었다. 백작이라는 작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뿐이다. 그의 아버지가 그러했듯 말이다.

하지만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있었다. 사교계에서 고위 귀족들과 교류를 맺다보니 겉모습만으로도 상대방의 품격을 느낄 수 있었다.

그가 보기에 그리드는 황족과 비견되는 위엄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황족 중에 저런 자는 없고.’

애초에, 황족이 이런 변방까지 찾아와서 괴물 퇴치를 하겠답시고 나댈 리 만무했다. 황족은 지상세계의 신이니 안전만을 추구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타국의 왕족인가?’

의문을 거두지 못하는 지브라 백작에게 그리드가 대답했다.

“당신의 골칫덩이를 해결해줄 사람이다. 그걸로 충분하지 않나?”

“허.”

참으로 건방진 말투다.

지브라 백작은 신분도 밝히지 않고 툭툭 내뱉는 그리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괜한 심력을 소모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뒈질 놈.’

도살귀가 마물로 진화한 것은 반 년 전의 일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백성 한 ‘마리’를 잡아와 고문하고 죽였더니, 그 광경을 벌벌 떨며 지켜보던 놈이 갑자기 포효하면서 이성의 끊을 놓아버렸다.

제어할 수 없게 된 괴물이 성 지하에 살게 되다니.

심각한 일이다.

방치할 수 없었던 지브라 백작은 녀석을 퇴치하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가문 최강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을 투입했고, 최상급 용병들을 고용하였으며 심지어 모험가들까지 모집했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여태까지 도살귀를 해치우겠답시고 나선 사람의 숫자가 족히 800명을 넘었지만 여전히 도살귀는 멀쩡했고 그 800명은 죄다 죽어버렸다.

그만큼 도살귀는 강했다.

그리고 공간적으로 문제가 많았다.

지하실은 좁고, 도살귀는 컸다.

지하실에 입장할 수 있는 최대 인원은 단 3명밖에 되지 않았다.

가문 최강의 기사들과 마법사들이 도살귀를 해치우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고작 3명이서는 도살귀를 해치우는 일이 불가능했다.

한데 눈앞의 흑발 놈은 사정도 모르는지 혼자서 나대는 것이다.

“크크큭. 그래, 그래. 알았소. 당신이 누구인지는 상관없지. 내 골칫덩이를 해결해주기만 한다면.”

도살귀 퇴치는 이미 적기사단에게 부탁해놓은 상태.

나흘 후 도착할 적기사단이 퇴치해줄 것이다.

지브라 백작은 그리드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고, 그저 건성으로 부탁했다.

그리드는 퀘스트 창과 마주하고 있었다.

<도살귀 퇴치>

난이도:S+

과거, 지브라 백작은 흉측한 외모의 반인반마를 노예시장에서 발견하고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성의 지하에 가둔 채 장난감을 가지고 놀 듯이 고문하기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즐거움은 존재하지 않는 법입니다.

언어조차 구사하지 못하는 멍청한 괴물을 고문하는 일에 금방 싫증을 느낀 지브라 백작은 ‘멀쩡한 인간’을 고문하는 새로운 재미에 중독됐습니다.

죄 없는 백성들에게 누명을 씌워 죄수로 만들고, 그들을 성의 지하로 끌고 와 고문한 뒤 살해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매일 지켜봐야만 했던 반인반마는 겁에 떨다가 결국 자기 보호 본능을 발휘하였습니다. 마물의 힘을 개방한 것입니다.

숱한 고문을 당하고, 또한 지켜봄으로서 인간의 급소를 파악하는 능력을 갖게 된 도살귀.

녀석은 강하고 위험한 존재입니다.

이대로 방치하였다가는 언젠가 큰 재앙이 될 터이니 반드시 퇴치하십시오.

퀘스트 클리어 조건:도살귀의 사망.

퀘스트 성공 보상:흑수정 귀걸이.

퀘스트 실패 시:레벨 -6. 대륙 전역 명성 ?1,000.

‘S+라.’

S급 난이도의 퀘스트와 비할 바 없이 어렵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도살귀 퇴치 퀘스트의 최대 참가 인원은 단 3명에 불과하다고 들었다.

‘라우엘은 폰, 레가스, 페이커가 셋이 한 팀을 이루지 않는 이상 클리어가 불가능한 퀘스트라고 말했지.’

하지만.

‘나라면 혼자서도 클리어할 수 있을 거라 했고.’

라우엘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말이라면 신뢰할 수 있다.

“가시죠.”

“음.”

그리드가 병사들의 안내를 받아 지하실로 내려갔다. 좁은 계단을 무려 3분가량이나 걸어 내려간 끝에 굳건히 닫혀있는 철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여, 여깁니다.”

도살귀의 숨소리를 듣고 사색이 된 병사들이 떨리는 손으로 자물쇠를 열었다. 그리고 철문이 채 열리기도 전에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혼자 남겨진 그리드의 눈빛은 고요했다.

‘네가 아무리 세봤자 헬가오보다는 약할 테지.’

헬가오라는 최강의 악마와 싸워 이긴 경험.

새롭게 획득한 두 개의 검무.

비약적으로 발전한 컨트롤 실력과 노에, 그리고 랜디까지.

지금의 그리드는 Satisfy를 시작한 이래 가장 강했다.

전 세계에 위용을 떨쳤던 국가대항전 당시? 그때의 그리드는 지금의 그리드와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뚜벅뚜벅.

그리드가 메아리치는 스스로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지하실에 입장했다.

비좁은 지하실 안에는 육중한 도살귀가 버티고 있었다.

쿠오오오.

구슬프게 우는 도살귀의 행색은 끔찍하고 안타까웠다.

피부는 죄다 벗겨져서 선홍색 속살을 고스란히 내놓고 있었고, 몸 곳곳에 녹슨 쇠붙이가 깊숙이 박힌 채 방치되어 있었다. 살점도 군데군데 떨어져 나가있다.

지브라 백작에게 당했던 고문의 흔적일 터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안대를 두르고 있다하니 한쪽 눈알도 뽑힌 듯 하고.

“불쌍한 녀석. 더 이상은 고통 받을 일 없도록 빠르게 죽여주마.”

측은지심을 느낀 그리드가 두 자루 대검을 꺼내 무장했다.

푸른 대검은 오른 손에, 옥빛 대검은 왼 손에.

[+9 실패작을 장착하였습니다. 푸른 오리하르콘의 영향으로 어두운 장소에서 공격력이 30퍼센트 상승합니다.]

[+8 도플갱어의 대검을 보조 무기로 장착하였습니다. 이도류 페널티 발생으로 무기 공격력이 50퍼센트만 적용됩니다.]

크아아아아아!

도살귀가 포효했다.

날붙이를 보자 고문당하던 시절의 악몽이 떠올라 흥분한 것이다.

[도살귀의 외침이 공포심을 자극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도살귀의 집요한 눈동자가 당신의 약점을 간파합니다.]

[저항하였습니다.]

쿵쿵!

도살귀가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돌진했다. 그리고 피가 눌어붙어 있는 대도를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어설퍼.’

파그마의 능력을 복제했던 랜디와 무려 83번을 싸웠던 그리드다.

결국 그 랜디마저 쓰러뜨렸던 그에게 검술의 검자도 모르는 도살귀가 휘두르는 대도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챙강!

옥빛 대검으로 대도의 경로를 차단한 후.

푸욱!

푸른 대검으로 도살귀의 심장을 꿰뚫는다.

여기서 주목해야할 점은 그리드가 평타를 때린 게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드는 이 일련의 동작에 살(殺)의 검무를 녹여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아앙!

핵폭탄급 위력의 스킬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도살귀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이처럼 울었다.

그리드는 옥빛 대검으로 녀석의 하단을 베어 넘김과 동시에 극(極)의 검무를 펼쳤다.

벼락처럼 떨어진 푸른 대검이 도살귀의 가슴을 깔끔하게 베어버렸다.

고름 섞인 썩은 피가 분출되며 지하실의 한쪽 벽을 수놓았다.

도살귀가 격노했다.

나는 왜 항상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하는가! 나라고 해서 이런 괴물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다!

마치 그렇게 외치는 듯했다.

놈의 한 맺힌 대도가 그리드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채앵!

그리드의 모습을 복제하며 나타난 랜디가 회(回)로 반격했다.

“이만 끝내도록 하자.”

스으윽.

일곱 자루의 칼날이 허공에 전개된다.

어두컴컴한 지하실 속에서도 찬란하게 빛나는 그 황금의 칼날들이 도살자의 시야를 집요하게 노리며 쇄도했다.

노에도 그 사이에 섞여있었다.

“맛있게 먹겠다! 냥!”

쩍 벌어진 아가리가 황망해하고 있는 도살귀를 집어삼켰다.

[근력이 1,831 상승하였습니다.]

노에로부터 전달 받은 스탯으로 강화된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연살(聯殺)을 전개했다.

도플갱어의 대검의 옵션 효과로 <스킬 피해량 20퍼센트 상승>이 적용되고 실패작, 성스러운 빛의 장갑의 옵션 효과 <5연격>이 발동하면서 연살(聯殺)은 사상 최강의 스킬로 거듭나 있었다.

[도살귀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108,950,109을 획득 하였습니다. 이중 3분의 1을 ‘노에’와 ‘랜디’에게 공평하게 분배합니다.]

[도살귀의 안대를 획득하였습니다.]

[도살귀의 가면을 획득하였습니다.]

[무기 강화석 3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축복받은 무기 강화석 1개를 획득하였습니다.]

영원한 고통에 종지부를 찍게 된 도살귀.

녀석이 드롭한 아이템을 감정한 그리드는 어째서 라우엘이 꼭 이곳을 들르라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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