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53화 (12권) (48/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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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1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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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시간으로는 한 달, Satisfy 시간으로는 세 달이 지났다.

그동안 레이단은 풍작을 맞았다. 피아로가 발견한 수맥이 땅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그리드가 제작한 농기구들이 토질을 향상시킨 덕분이었다.

레이단은 더 이상 타지로부터 높은 가격에 식량을 수입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재정 부담이 줄어들었다. 또한 초목이 자라나기 시작하여 황사가 약해졌고 백성들이 건강해졌다.

매일 앓기만 하던 아이들이 뛰노는 모습은 백성들의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만들었다.

“이게 다 그리드 공작각하 덕분이야.”

“암! 그렇고말고!”

지난 10년 동안 고생만하다가 굶어죽기 직전이었던 백성들에게 있어서 그리드와 템빨단은 레베카 여신이 내려준 천사와도 같았다.

백성들은 생명의 은인인 그리드와 템빨단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다.

농부로서, 대장장이로서, 건축가로서, 병사로서 명령대로 교육 받고 활약했다.

그에 따라 합당한 녹봉을 받았으니 더 이상 배를 곯을 일이 없었을 뿐더러 스스로의 힘으로 도시를 부흥시킨다는 성취감을 느낄 수 있었다.

레이단은 활력으로 넘쳤다.

“거리에 나가보셨습니까? 온통 주군을 찬양하는 목소리뿐입니다.”

“그래? 바빠서 바깥에 나가볼 시간이 있어야 말이지.”

과거, 후로이가 그리드를 섬기겠다고 다짐했던 이유는 오로지 은혜를 갚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후로이는 성장한 그리드를 마음 속 깊이 존경하였고 그를 기반으로 충성하고 있었다.

“주군이 자랑스럽습니다.”

멸망 직전의 유령 도시가 이제는 시끌벅적하다.

템빨단 덕분에 몬스터들이 레이단을 위협하지 못하였고, 쥬드 덕분에 소규모지만 강력한 군대가 육성되고 있었다.

칸 덕분에 젊은 대장장이 인재들이 양성되었으며 라빗 덕분에 레이단의 전반적인 내정 발전 속도가 상승했다.

유페미나는 몬스터 테이머 스킬과 대장장이, 건축 관련 스킬 등을 복제함으로서 여러 분야에 힘을 보탰다.

특히 바이란의 영주 지슈카가 엄청난 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두 명의 템빨단원과 함께 기사와 병사를 육성, 지속적인 숲의 수호자 레이드와 서리 오크족 토벌을 진행했다.

덕분에 길드 창고에는 각종 광물과 실피드의 비늘이 쌓여가고 있었다. 머잖아 템빨단원 전원 투명망토를 보유하게 될 예정이었다.

이토록 뛰어나고 개성 강한 인재들을 하나로 결집시킨 인물?

다름 아닌 그리드다.

후로이의 그리드를 향한 존경심은 날이 갈수록 더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직 멀었다.”

그리드는 현재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전히 레이단은 적자 도시였던 탓이다.

“갖춰진 시설이라고는 밭, 대장간, 병영, 연금술 연구소뿐이잖아.”

백성이 늘어날 생각을 않고 있다. 세금 또한 걷히지 않는다.

하루 최소 5개의 아이템을 제작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익이 전혀 없으니 손해만 보는 기분이었다.

그리드가 지난 세달 동안 제작한 450여개의 아이템을 레이단에 투자하지 않고 유저들을 상대로 판매하였다면?

‘세금 떼고, 원재료 값 떼고 했어도 한화로 최소 15억은 벌었을 텐데…’

450여개의 아이템 중 레전드리 아이템은 단 1개도 제작되지 않았으나 무려 2개가 유니크 등급으로 제작됐다.

한데 그것들을 유저들에게 판매하지 못하고 각 시설에 보급품으로 지급했으니 솔직히 아까운 심정이었다.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하는 그리드를 라우엘이 격려했다.

“당장의 손해에 연연하지 마세요. 당신께서 제작해준 아이템들 덕분에 각 분야의 업무능률이 몇 배로 상승하였고 이는 머잖아 당신께 더 큰 이익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알고 있다.”

늦은 점심시간.

일이 밀린 탓에 대장간에 주저앉아 식사 중인 그리드는 이렇듯 후로이와 라우엘을 통해서 멘탈을 관리하고 있었다.

한쪽에서 칸은 젊은 대장장이들을 교육시키느라 바빴다.

라우엘이 혀를 내둘렀다.

“칸님은 날이 갈수록 목청이 커지는 군요. 점점 더 건강해지시는 저분을 보면, 레이단의 사막모래가 정말로 장수의 비약이 아닐까 의문이 들 지경입니다.”

“저 영감은 타고난 거고. 그러고 보니 장수의 비약 판매량이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며?”

“예, 이번 달 매출은 1,230골드를 달성했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라빗이 받는 녹봉의 4분의 1도 안 되네.”

라빗은 자작으로서 500골드의 품위유지비를 받는 한편 행정관으로서 5,300골드의 녹봉을 또 따로 받고 있었다.

이 녹봉은 라빗 스스로가 정한 자신의 ‘최소’ 가치였다.

충성을 맹세해놓고도 매달 5,300골드의 녹봉을 주지 않으면 일할 수 없다하니 참으로 철두철미한 인물이었다.

현재 레이단이 적자를 보고 있는 이유가 라빗 탓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라빗 경의 가치는 값으로 환산이 안 될 정도니까요.”

“알고 있어.”

실제로 레이단의 내정은 라빗 덕분에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타 도시의 내정 상승 속도와는 비교가 불허한 수준이었다.

과연 라빗은 S등급 행정 스킬을 보유한 네임드 NPC답게 밥값 이상의 일을 하고 있었다.

‘초조해하지 말고 미래를 본다.’

레이단을 발전시킨 후 자이언트 웜을 멸살, 서부를 회복시킨다. 그 뒤 서부를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왕이 될 기반을 다진다.

그것이 당면한 목표였다.

‘돈벌이는 그때부터다.’

재벌이 될 것이다.

두 번 다시는 돈이 없어 곤욕을 치루고 싶지 않다.

따앙! 따앙!

3개월 만에 생산할 수 있었던 식량 ‘레인보우 포테이토’를 꾸역꾸역 먹어치운 그리드가 휴식도 취하지 않고 곧장 일하기 시작했다.

지난 세달 동안 사냥을 못해서 여전히 레벨은 275로 정체되어 있었지만, 에픽 이상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할 때마다 상승하는 소량의 스탯 덕분에 딱히 초조할 것도 없었다.

근본적으로 대장장이인 그리드는 레벨업이 늦으면 늦을수록 도리어 더 강해진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사하란 제국의 부틴 남작령은 제국 기준으로 동쪽 끝에 위치한 오지였다.

볼거리라고는 천해의 자연경관밖에 없는, 한마디로 시골 중의 시골이었다.

더군다나 몬스터도 출몰하지 않는 무척이나 평화로운 곳이었던 탓에 유저가 이곳을 찾는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소규모 상단을 운영하고 있는 상인 랭킹 3위, 뮤토는 부틴 남작령과의 거래에 주력하고 있었다.

부틴 남작령이 비록 유저들에게는 버림받은 땅일지언정 NPC 부자와 귀족들에게는 휴양지로서 각광받았기 때문이다.

“명품 장수의 비약?”

부틴 남작령을 방문한 부자와 귀족들이 관광품으로 구매할만한 명품들의 납품에 주력해왔던 뮤토.

그는 최근 자신이 납품하는 상품들의 판매율이 저조해지기 시작하자 원인 파악에 나섰다.

그리고 작은 유리병에 담긴 소량의 모래를 발견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이딴 모래가 명품 장수의 비약이라는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고? 내가 납품한 상품들은 고작 이 따위 것 때문에 판매율이 떨어진 거고?”

뮤토는 그동안 수많은 아이템들을 감별해왔다. 상인으로서 그의 식견은 무척이나 뛰어난 편이었기 때문에 명품 장수의 비약이 사실은 단순한 모래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간파할 수 있었다.

“아이디어 진짜 좋네.”

레이단의 사막 모래는 어째서 명품 장수의 비약으로 둔갑할 수 있었는가?

그 내막을 부틴 남작령의 NPC들로부터 전해들은 뮤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정도 상술이면 거의 사기꾼 수준이야.”

레이단에는 필시 엄청난 장사꾼이 숨어있을 것이다.

뮤토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장사꾼을 상대로 어떻게 경쟁해야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묘안을 떠올렸다.

“레이단에는 지천에 널린 게 사막이잖아?”

씨익.

회심의 미소를 그린 뮤토가 당장 상단을 이끌어 레이단으로 출발했다.

하지만 그는 국경을 넘자마자 난관에 봉착했다.

“이, 이게 뭐야?”

뮤토 상단의 호위병들은 레벨이 무려 200대였다. 비싼 돈 주고 고용한 용병답게 어지간한 몬스터와 산적으로부터 상단을 완벽하게 보호해줬다.

하지만 레이단 영내에 진입하자마자 마주한 자이언트 웜이나 사막 두꺼비 등의 몬스터들은 그 강력한 호위병들을 한입에 집어삼킬 정도로 막강했다.

“이, 이런 미친…!”

무슨 몬스터가 이리도 강하단 말인가?

여태까지 봤던 몬스터 중 가장 강했던 트윈 오우거들조차도 이놈들 앞에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할 것이었다.

“도, 도망쳐라!”

뮤토는 상단을 통째로 집어 삼키고자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진땀을 빼야만 했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사막의 모래를 포대에 퍼 담는 일을 잊지 않았으니 대단한 프로근성이었다.

“헉헉! 우라질! 개털 될 뻔 했네!”

간신히 목숨을 연명해 부틴 남작량으로 되돌아온 뮤토가 치를 떨었다.

고작 모래 한 포대 담아오느라고 호위병의 절반 이상을 잃었으니 절망적이었다.

“이거라도 갖다 팔아서 손해를 조금이나마 메꿔야겠다.”

뮤토가 거래처 NPC를 찾아갔다. 그리고 명품 장수의 비약을 가져왔다며 레이단의 사막 모래 한 포대를 내놨다.

그러자 NPC가 쯧쯧 혀를 찼다.

“명품 장수의 비약은 레이단 중심부에서 채취하는 모래를 뜻하는 것이지 사막에 널려있는 일반 모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외다. 우리는 오직 레이단 영주의 인가가 떨어진 모래만을 명품 장수의 비약으로 인정하고 거래하니 그 쓰레기 모래더미 가지고 썩 꺼지시오. 그리고 앞으로 거래를 끊도록 합시다. 내 당신 같은 사기꾼과는 더 이상 상종하기 싫으니.”

“…”

낭패다.

너무 쉽게 생각했다.

상대는 나 같은 하수의 머릿속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고작 모래 때문에 다수의 호위 병력과 거래처를 상실한 뮤토가 좌절했다.

***

“마늘 까시네.”

Satisfy에서 로그아웃한 신영우는 저녁식사를 위해 거실로 나왔다. 그리고 거실에 자리를 펴고 앉아 마늘을 까고 계시는 부모님을 발견하더니 곁에 앉았다.

“도와드릴게요.”

채소가게를 운영하는 영우의 부모님은 마늘 또한 상품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한데 깐 마늘이 아니면 팔리지가 않았으니 일일이 마늘을 까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과거의 영우는 힘들게 일하는 부모님을 스스로 나서 도운 적이 없지만 이제는 달랐다.

인격적으로 성장한 그는 부모님을 기꺼운 마음으로 돕고자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이 만류했다.

“영우 너는 게임하느라 힘들잖니? 쉴 땐 푹 쉬도록 하렴.”

“그래. 이건 우리의 일이다. 영우 넌 어서 밥 먹고 다시 게임에 집중해라.”

예전에는 게임이라면 치를 떨었던 부모님이 이제는 게임을 직장으로 인정해주신다.

그에 뿌듯함을 느낀 영우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깔고 앉았다.

“에이, 제가 돕고 싶어서 그래요.”

경험이 적은 사람은 마늘 까는 일도 쉽지 않았다.

마늘이란 겉껍질이 단단하고 속껍질은 무척이나 얇은데 표면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에 껍질을 까려면 요령이 필요했다.

그리고 영우는 어릴 때부터 손재주가 없었다. 군대에 입대하기 전까지는 스스로 신발 끈조차 못 묶었을 정도다.

마늘 하나 까는데 한 세월이 걸렸으니, 사실 영우가 돕는다고 해도 별로 도움이 되질 않았다.

영우의 부모님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기특하게도 돕겠다고 나서니 굳이 끝까지 말리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어머? 영우 너 손재주가 어쩜 그리 좋아졌니?”

어머니가 감탄하셨다.

영우는 마늘 껍질을 마치 프로마냥 순식간에 벗겨내고 있었다. 수십 년 동안 채소가게를 운영해온 부모님과 비견될 정도로 빠른 속도였다.

아버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게 무슨 영문이냐?”

어안이 벙벙해진 부모님 틈에 앉은 영우는 부모님 이상으로 놀라고 있었다.

‘이럴 수가. 마늘 껍질 까는 게 왜 이렇게 쉬워졌지?’

내 손재주가 과거와 달리 비약적으로 상승했음이 절실히 체감된다.

이유가 무엇일까?

영우는 마늘을 까면서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이내 해답을 얻었다.

‘반복 작업의 결과구나!’

아이템 제작에는 섬세한 손놀림이 요구된다.

그리고 영우는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수천 개의 아이템을 제작해왔다.

그 경험과 기억을 통해 현실에서도 자연스럽게 손재주가 늘어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전에 뉴스에도 나왔었지.’

Satisfy에서 검술 연습을 반복하면 현실에서도 검술 실력이 상승한다는 실험 결과가 있었다.

반복 숙달을 통한 당연한 결과다.

물론 현실의 신체 능력은 Satisfy의 신체 능력보다 현저히 뒤떨어지니 모든 기술을 구현할 수는 없었지만 어렵지 않은 기술들을 따라함에 있어서는 무리가 없었다.

지금 영우의 손재주가 상승한 것도 그와 같은 이치였다.

“흐흐흐…”

영우의 입가로 음흉한 미소가 번졌다.

현실에서 애인이 생길 경우, 그녀를 나의 손재주로 행복하게 만들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자 기뻤던 것이다.

여성에게 황홀경을 선사해줄 전설의 손기술 달인이 현실 세계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부모님을 도와 마늘을 까고 식사까지 마친 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팬카페에 접속해본 영우가 환호했다.

“드디어…!”

어제 이 시간에는 정확히 199만 8,411명이었던 팬카페 회원수가 지금은 200만 명을 돌파하고 있었다.

국가대항전에 이어 골렘 침공전에서 활약하고, 유저 최초로 공작위를 수여받았으니 유명세가 더해져 팬 확보 속도가 대단한 것이다.

‘기쁘다.’

무려 200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내게 호감과 관심을 표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우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오랜 세월 남에게 무시와 멸시만 당해왔던 그에게 있어서 타인이 보내는 호감은 매일 봐도 새롭고 신비로우며 행복한 일이었다.

‘노에의 팬카페는 요즘 좀 어떠려나.’

오래간만에 노에의 팬카페에 접속해본 영우가 헛웃음 지었다.

“이 녀석의 인기는 도무지 따라잡을 수가 없군.”

노에의 팬카페 회원수는 275만 명에 육박했다.

영우의 팬카페보다 회원수 상승 속도가 훨씬 더 빠른 것이다. 두 팬카페의 회원수 차이는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다.

과거의 영우였다면 질투심에 눈이 멀어 치를 떨었을 테지만 이제는 달랐다.

뿌리 깊숙이 눌어붙어 있던 열등의식을 완전히 떨쳐낸 그는 남을 쉽사리 질투하지 않게 됐다.

‘노에의 인기가 오를수록 녀석의 주인인 나의 인지도 또한 상승하겠지.’

심지어 영우는 몇 달 동안 라우엘을 곁에서 지켜본 결과 사고력마저 상승해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한 그가 노에의 팬카페를 쭉 살펴보던 도중 멈칫했다.

“그리드는 노에에 대해서 모른다고?”

일간 최고 인기 게시글의 제목이었다.

이건 또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노에는 나의 펫이다. 내가 노에에 대해서 모를 리가 없다.

노에의 귀여운 외모와 강력한 힘 뒤에 감쳐져 있는 멍청하고 단순한 성격은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다.

영우는 이딴 추측성 게시글이 어떻게 최고 인기글로 등극해 있는지 의문이었다.

제목:그리드는 노에에 대해서 모른다.

내용:라인하르트에서 실로 오래간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노에는 우리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노에의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와 윤기가 흐르는 털은 우리의 시선을 강탈하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여전히’ 아름다웠다.

또한 ‘여전히’ 강했다.

노에는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진화한 고대의 병기를 한입에 집어삼킴으로서 약화시키는 맹활약을 펼쳤고, 덕분에 그리드와 템빨단은 골렘 대군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본래 펫이란, 레벨이 오를수록 모습이 변화하며 더욱 더 강해지는 존재가 아닌가?

한데 노에는 국가대항전 당시와 변치 않은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즉, 노에의 레벨이 국가대항전 시점과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다는 뜻이며 그리드가 노에를 제대로 육성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그리드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로서 숱한 화제를 몰고 다니는 그는 현재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당장 TV를 틀어보면 그가 출현한 CF가 연달아 방영되는 실정이다. 그는 명실상부한 톱스타로서 Satisfy를 플레이하는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읽은 그리드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헛소리.”

최근 TV에 방영되고 있는 CF들은 그리드가 국가대항전 직후 촬영해 놓았던 것들이며, 현재 그리드는 방송활동을 완전히 접은 상태였다. 레이단의 관리에 힘쓰느라 밥 먹고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쭉 Satisfy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한데 이 게시글 작성자는 자세한 내막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고 있다.

영우는 답답함을 느끼면서도 남은 내용을 마저 읽어보았다.

그리드가 Satisfy를 플레이하는 시간이 적다는 것은 노에의 활동 시간이 적다는 뜻을 의미한다.

그래서 노에의 레벨이 국가대항전 당시와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그리드의 ‘최상급 펫’에 대한 이해도가 심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일반적인 펫들은 주인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길어질 경우 주인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고 야생상태로 되돌아간다.

하여, 펫의 주인들은 펫과 함께 행동할 수 없는 경우(예:로그아웃) 펫을 인벤토리에 가둬둔다.

하지만 비룡은 어떤가?

‘최상급 펫’으로 분류되는 비룡의 경우, 주인과 떨어져 활동하는 기간이 길지라도 주인에 대한 충성심을 쉽게 잃지 않는다.

비룡의 주인들이 비룡을 자유롭게 방목할 수 있는 이유이다.

비룡의 주인들은 비룡 홀로 사냥하면서 레벨을 올리도록 유도하며, 심지어 로그아웃 할 때조차도 비룡을 인벤토리에 가둬두지 않는다.

그럼 이제 문제점을 지적해보자.

노에는 비룡 이상의 펫이다.

국가대항전에서 홀로 수십 마리의 비룡을 압도하였으며 스스로를 지옥제일 마수라고 지칭함이 그 증거다.

즉, 노에에게는 비룡 이상의 자유를 만끽할 권리가 있다는 뜻이다.

만약 그리드가 노에에게 자유를 주었더라면, 지금쯤 노에는 엄청난 성장을 이룩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그리드는 펫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기 때문에 노에에게 자유를 주지 않았고, 자신이 직접 다룰 수 있는 경우가 아닌 이상 노에를 인벤토리에 가둬놓고 있다.

노에의 성장이 정체되어 있는 원인이다.

이는 그리드의 무지를 증명하는 것이며 최상급 펫인 노에를 모독하는 행위나 다름이 없다.

“아…!”

게시글을 끝까지 읽어본 영우는 깨닫는 바가 컸다.

‘나는 펫에 대한 이해도가 정말로 부족했구나.’

일반적인 펫의 경우, 주인과 함께 사냥한 몬스터의 경험치를 주인과 분배하여 갖는 형태로 레벨을 올린다.

영우가 노에의 레벨을 올리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굳이 레벨을 올리지 않아도 스킬빨 덕분에 강력한 노에를, 굳이 내 경험치를 나눠주면서까지 육성하기에는 아까웠던 것이다.

‘하지만 최상급 펫인 노에는 주인과 별개로 활동하면서 스스로 성장할 수 있다, 이거지?’

심지어 쉽게 배신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앞으로는 노에 스스로 활동하면서 성장할 수 있도록 자유를 줘야겠다.’

골렘 침공전 이후 노에를 소환한 경우는 밥을 먹일 때밖에 없었다. 그 외 시간에 노에는 항상 인벤토리 안에 갇혀있었다.

“…답답했겠군.”

영우는 노에의 고충을 새삼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노에에게 괜스레 미안해졌다.

그리고 내게 새로운 지식을 준 게시글 작성자에게 감사함을 느꼈지만.

“도를 지나쳤어.”

동시에 분노도 느꼈다.

무려 275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고 있는 공개된 커뮤니티에서, 단순한 추론만으로 사람을 무지하다고 비난하는 것은 정도가 너무 심하다.

‘나는 템빨단을 대표하고 있다.’

나를 욕함은 곧 템빨단을 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결코 간과할 수가 없다.

이를 간 영우가 당장 조치에 나섰다.

‘갓리드 대머리 아님’님의 댓글:네, 다음 펫알못.^오^ 존문가 클라스 극혐~

영우가 읽은 게시글의 작성자는 현역 펫 전문가였다.

하지만 오랜 세월 내공을 쌓은 키보드 워리어 앞에서는 한낱 ‘펫에 대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자 ‘비전문가’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자존심에 큰 흠집을 입었다.

이후.

“냥! 지옥제일 마수 노에님의 등장이시다!”

고대의 병기를 해치우고 폭렙을 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35레벨에 불과한 노에가 소환됐다.

“밥 먹을 시간이냐? 냥?”

기대의 눈빛을 보내오는 녀석에게 그리드가 명령했다.

“앞으로 이곳 레이단 근방에서 자유롭게 활동하도록 해라. 몬스터들은 마음껏 먹어치워도 좋지만 인간에게 피해를 줄만한 행동은 자제해라. 또한 수상한 동향을 포착할 경우 내게 보고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 내가 부르면 어떤 상황일지라도 곧장 부름에 응해 날아오도록 해라. 나만이 너의 유일한 주인임을 절대로 잊지 마.”

“니용…”

노에의 바둑알 같은 눈동자에 촉촉한 물기가 맺혔다.

얼마나 감격한 것인지 ‘ㅅ’모양 주둥이를 작게 벌린 채 멍하니 있던 녀석이 이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주인은 정말로 노에에게 자유를 주는 거냐…? 노에 마음대로 해도 되는 거냐…? 노에를 믿는 거냐! 냥!”

“그래, 내가 정한 룰을 지켜준다면 말이야.”

“고맙다! 냥! 주인이 최고다! 냥!”

작은 악마모양 날개를 연신 펄럭거리며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던 노에가 신나가지고는 하늘 높이 비상했다.

“고양이…?”

레이단의 백성들은 웬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토실토실한 뱃살을 출렁이며 하늘을 비행하자 어안이 벙벙해졌다.

훗날, 레이단의 백성들에게 수호신이라 경외 받게 될 노에가 백성들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역사적인 날이었다.

***

세희와 예림은 대한민국 고교계의 스타였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매번 10위권에 드는 재원임과 동시에 미모는 어지간한 연예인의 뺨을 후려쳤으니 선망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데 최근 그녀들의 인기가 또 수직상승했다.

그녀들이 전에는 단지 고교계의 스타였다면 이제는 대한민국의 스타였다. 심지어 외국인들조차도 그녀들을 알아봤다.

현실시간으로 약 1달 반 전 발생한 ‘라인하르트 골렘 침공전’의 여파였다.

“루비다!”

“섹시여고생이다!”

그리드와 함께 활약하여 에트날 왕국을 구원하고 유저 최초의 백작위를 획득한 두 소녀!

사람들은 그녀들을 볼 때 마다 열광했다.

“어떻게 템빨단에 가입할 수 있었던 거야?”

“갓리드와는 무슨 사이?”

“공부도 잘 하면서 게임까지 잘 하는 비결은?”

“아이디가 섹시여고생인 이유는…?”

세희와 예림은 어디를 가나 질문공세에 시달려야만 했다.

각종 언론매체에서도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녀들에게 관심을 보이는 기획사는 샐 수도 없이 많았고 CF모델이나 피팅모델 제안이 쇄도했다.

“이 정도면 못 알아보겠지?”

세희와 예림은 이제 변장하지 않으면 외출이 불가능한 지경까지 이르러 있었다.

종례 후.

두 소녀는 교실을 나서기에 앞서 마스크를 쓰고 스카프를 두르는 등 최대한 얼굴을 가렸다. 그리고 학생들 틈에 섞여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간신히 학교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 뒤 그녀들이 향한 곳은 집이나 독서실이 아닌 캡슐방이었다.

일주일에 딱 3번은 Satisfy를 플레이하기로 계획했기에 그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3시간 후.

“오늘도 너무 재밌었어! 그치?”

“응. 새로운 스킬의 사용법에도 이제 완전히 적응했고, 게임이란 참 즐겁네.”

골렘 침공전에서 폭렙을 했던 성녀 세희의 레벨은 어느덧 70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면 성녀의 기사 예림은 골렘 침공전에서 레벨을 올리지 못한 탓에 아직 51레벨에 불과했지만 두 소녀가 파티 플레이를 함에 있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성녀와 성녀의 기사라는 클래스가 발휘하는 시너지가 가히 훌륭한 덕분이다.

또한 영우가 그녀들에게 아이템을 제작해준 덕분에 그녀들이 힘을 합칠 경우 100레벨대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것도 가능했다.

라우엘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수저를 물고 게임을 시작한’ 그녀들의 목표는 어서 레벨을 올린 후 영우 오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역시, 루비랑 섹시여고생 맞네.”

계산한 뒤 캡슐방을 떠나는 세희와 예림의 뒤를 쫓아온 대학생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변장하고 있는 세희와 예림을 용케도 알아보고 귀찮게 굴었다.

“아직 밤 10시도 안 됐는데 벌써 집에 가려는 건 아니지?”

“오빠들이 맛있는 거 사줄게 같이 가자. 같은 Satisfy 유저로서 친분을 좀 쌓자고.”

4명의 대학생들은 하나 같이 외모가 준수하고 눈빛에 자신감이 넘쳤다. 실제로 쇼핑몰 피팅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그들은 아직 고등학생밖에 되지 않은 순수한 소녀들 따위 쉽사리 함락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세희와 예림은 남자를 외모만 보고 평가하는 소녀들이 아니었다.

세희는 오빠 외의 남성을 혐오하였으며 예림은 남자를 오로지 돈으로만 봤다.

“오빠들 돈 많아요? 우리는 비싼 것만 먹는데?”

예림이 이성을 현혹하는 눈웃음을 지으며 대학생들을 도발했다.

그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대학생들이 콧김을 내뿜으며 소리쳤다.

“원하는 건 뭐든 말해! 다 사줄 수 있으니까!”

“됐네요. 사실 우리한테는 이미 임자가 있어서.”

“설마 그리드를 말하는 건가?”

“맞아요.”

“…”

대학생들의 눈빛이 사늘하게 식었다.

사실 이들은 유라와 지슈카의 열렬한 팬이었다. 하지만 국가대항전에서 그리드가 그녀들을 손아귀에 넣고 주무르는(?) 등 스캔들을 일으키자 그리드의 격렬한 안티로 전향하고 말았다.

현존 세계 최고 미녀인 유라와 지슈카에 이어 세희와 예림까지 독식하려하는 그리드를 그들은 도무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리드 그 쓰레기 새끼…”

“야, 너희들. 그딴 바람둥이랑 어울리다가는 정말 큰 코 다친다. 그딴 쓰레기 놈은 버리고 오빠들이랑 놀자.”

그리드의 이름을 듣자 흥분한 대학생들이 세희와 예림의 손목을 강제로 낚아채는 지경에 이르는 그때였다.

“그 손 놔라.”

분노로 떨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물론이고 전 세계인들에게 친숙한 음성이었다.

“오빠!”

“그리드…!”

그렇다.

신영우의 등장이었다.

세희와 예림이 유명세를 탄 후, 그녀들을 걱정한 영우는 매일 밤마다 그녀들을 집까지 데려다주는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다.

하여 오늘도 그녀들을 데리러 온 것인데, 때마침 웬 후레자식들을 목격하였으니 영우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당장 그 손 놓고 물러나. 그러면 이번 한 번만 봐준다.”

위압적으로 말하는 영우의 손에는 112 버튼이 눌려있는 핸드폰이 들려있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영우의 핸드폰은 배터리가 떨어지기 일보직전이었다.

삐리릭…

급기야 맥없는 소리를 흘리며 핸드폰이 종료되자 영우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아, 나, 진짜…’

나한테 왜 이러냐고.

영우의 인간관계는 여전히 협소했다.

방송활동을 접은 현재 영우가 휴대폰을 사용하는 경우는 음식을 배달시킬 때밖에 없었다.

휴대폰을 거의 장식품 수준으로 취급하였으니 배터리 관리에 신경 쓰지 않았고, 결국 지금과 같은 사태를 초래한 것이다.

‘엿 됐다.’

여차하면 경찰에 신고해서 대학생들을 쫓아낼 심산이었던 영우는 상황이 여의치 않게 돌아가자 위축되었다.

주춤거리는 그를 4명의 대학생들이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리드 당신, 어장관리 한번 기가 막힌데?”

“국가대항전 때는 유라와 지슈카를 끼고 다니더니 이제는 고딩들을 거느리고 다니셔?”

“인터넷에서 프로필 보니까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더만? 아청법 위반으로 수갑 차고 싶은 거 아니라면 나잇값 좀 해라. 엉? 철컹철컹 몰라? 철컹철컹?”

대학생들은 영우가 본인들보다 연장자임을 뻔히 알면서도 버르장머리 없이 지껄였다. 세희와 예림의 손목을 놓아줄 생각 또한 없어보였다.

‘저 개자식들이.’

영우는 대학생들의 말투는 둘째 치고 동생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자 화가 솟구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가서 저놈들을 혼쭐내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Satisfy가 아닌 현실이다.

현실에서 영우는 무력했다.

언제나 강자에게 일방적인 폭력을 당해온 약자이다.

수없이 맞아만 봤을 뿐, 주먹다짐은 단 한번조차 해본 적 없는 그가 신체 건강한 대학생 4명을 상대로 폭력사태를 유도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선 영우는 주변을 살폈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 밤 10시가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번화가로 나갔다가는 유명세 탓에 고생하는 세희와 예림이 일부러 인적 드문 장소를 찾은 결과다.

‘이렇게 된 이상…’

영우가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최대한 화를 억누르고 미소 지었다.

“일단 애들부터 놔줘라. 응? 무슨 드라마 찍는 것도 아니고, 상황이 좀 웃기잖아? 안 그래?”

영우가 대학생들을 좋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학생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싫은데?”

대학생들은 영우가 혼자서만 예쁜 여자들을 독식하는 꼴을 용납할 수 없었다.

우리들의 여신 유라와 지슈카를 독점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미래의 유망주들하고 또 혼자 놀아나겠다고?

분노한 대학생들이 세희와 예림을 더욱 더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그녀들을 강제로 끌어안으며 영우를 도발했다.

“오늘 밤 얘들은 우리가 데리고 놀 거야. 어차피 발랑 까진 년들이잖아? 고딩 주제에 돈 많은 남자 꾀여서 같이 게임이나 하고 말이야. 돈만 주면 아무 남자랑 놀아나도 상관없는 거 맞지?”

“이거 놔요!”

세희가 대학생들을 뿌리치기 위해서 발버둥 쳤다. 하지만 가녀린 여고생이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남성의 힘을 이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가만히 있어!”

대학생들이 세희를 놓아주기는커녕 도리어 더 세게 구속했다. 그리고 윽박지르면서 마치 손찌검이라도 할 것처럼 손을 치켜들었다.

“적당히 안 해요?”

잠자코 있는가 싶던 예림의 눈살이 찌푸려지는 그때였다.

“이 씨발 양아치 새끼들이… 죽여 버린다?”

영우가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싸움을 잘하고 못하고가 문제가 아니다.

오빠로서 소중한 동생이 모욕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가 비록 찌질이였을 지라도.’

고등학생시절.

영우는 일진 이준호에게 이유도 없이 모욕당하고 얻어맞기 일쑤였다.

하지만 더 큰 보복이 두려워 반격하지 못했다. 덜 맞고 싶다는 생각에 심지어 헤실헤실 웃기까지 했다.

그 비굴한 행동이 원인이 되어 다른 학생들에게도 무시당하기 시작했고, 이후 성인이 되어서도 쭉 트라우마에 시달려왔지만.

‘극복한지 오래다.’

더 이상 영우는 찌질이가 아니었다.

단지 두렵다는 이유만으로 양아치들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뭐? 죽여 버린다고?”

“푸하하하!”

대학생들이 영우를 비웃었다.

사실 영우의 학창시절은 인터넷에서 유명했다.

영우의 동창생 중, 아직도 철 들지 못한 일부 날라리들이 영우가 과거에 찌질이었다는 사실을 인터넷에 유포했기 때문이다.

“병신 새끼가 현실과 게임을 분간 못하네.”

“어이, 그리드 형씨. 여기는 Satisfy가 아니라 현실이야. 여기서 당신은 파그마의 검무! 살! 이딴 개지랄 못한다고. 근데 무슨 배짱이야? 엉?”

대학생들은 영우를 한 주먹거리로 여기고 있었다.

심지어 영우 본인조차 대학생들과 싸워 이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물러설 수 없기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떨린다.’

가래침을 뱉으며 껄렁껄렁, 팔자걸음으로 다가오는 한명의 대학생.

영우는 내가 저놈 하나라도 쓰러뜨릴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

과거의 영우였다면 중압감을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도망쳤으리라.

하지만 Satisfy를 통해 자존감을 향상시킨 현재의 영우는 ‘용기’라는 감정을 보유하고 있었다.

‘싸워야한다면 싸운다.’

영우의 눈에 투지가 깃들었다.

현실의 그는 Satisfy의 그리드와 달라 나약할지라도 기개만큼은 같았던 것이다.

“병신 새끼가 눈깔 부라리기는.”

영우를 보고 콧방귀 뀐 대학생이 주먹을 휘둘렀다.

일진 출신인 대학생의 주먹은 빠르고 매서웠다. 사람을 때림에 있어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날아오는 주먹을 보고 움찔하던 영우가 이내 당황했다.

‘느려?’

Satisfy에서 수많은 강적들과의 전투를 경험했던 신영우.

그의 단련 된 동체시력은 손재주와 같이 미약하게나마 현실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따로 격투기를 배우지 않은, 그저 학창시절에 조금 놀아봤을 뿐인 평범한 대학생의 주먹 따위, 영우가 여태까지 쓰러뜨려왔던 강적들에 비하면 조금도 위협적이지 못했다.

슬쩍.

영우가 어설픈 몸놀림으로나마 대학생의 주먹을 피하는 것에 성공했다.

“어쭈? 뽀록 보소?”

대학생이 가소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입에 꼬나물고 있던 담배를 퉤, 뱉더니 발차기를 날렸다.

대한민국 국민답게 어린 시절 태권도를 배운 대학생의 발차기는 앞서 날린 주먹보다 월등히 강력한 위력과 속도를 내포하고 있었다.

‘대퇴부와 엉덩이에 힘을 집중하면 상체의 전진 속도가 상승한다.’

검호 피아로의 가르침이 영우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영우의 상체가 앞으로 불쑥 이동했다.

그러자 영우의 머리통을 향해 날아갔던 대학생의 발차기가 허공만 때렸다.

영우는 자신의 뒤통수를 스쳐지나가는 발차기의 섬뜩한 감각을 느끼면서도 연신 피아로의 가르침을 상기했다.

‘사지는 물론이고 목의 근육까지 총 동원하여 검끝에 체중을 싣는다.’

검?

수만 번도 더 휘둘러봤다.

근육을 제어하는 법?

피아로에게 철저히 교육 받았다.

영우가 자신의 손끝을 검이라 생각하고 휘둘렀다.

뻐억!

“……!”

사각의 하단에서부터 치고 올라온 손칼에 대학생은 반응하지 못했다.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더니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혼절했다.

“…엥?”

“뭐, 뭐야?”

친구가 당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대학생들이 경악했다.

그들보다 더 놀란 사람은 다름 아닌 영우 본인이었다.

‘이겼어?’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을 때려봤다.

그리고 쓰러뜨렸다.

언제나 불의 앞에 무릎 꿇거나 도망치던 내가 도리어 불의를 쓰러뜨린 것이다.

두근! 두근!

전혀 새로운 경험이 영우의 심장을 격동하게 만들었다.

희열에 휩싸인 채 멍하니 있는 그를 향해 다른 대학생이 달려들었다.

“이 찌질이 새끼가 무슨 수작을!”

몸을 힘껏 띄운 대학생이 영우를 마치 죽이기라도 할 기세로 날라 차기를 꽂았다.

그를 마주한 영우는 처음과 달리 침착해져 있었다.

‘허접해.’

정면으로 쇄도해오는 날라 차기의 궤도는 무척이나 단순했다.

그를 간파한 영우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면서 팔을 휘둘렀다.

쩌엉!

영우의 손칼이 아직 체공 중인 대학생의 발목을 정확하게 가격했다.

“꺼윽…!”

화석을 채취하기 위해서 코크로 섬을 찾아갔을 당시.

쉬지 않고 달리며 비행했던 영우는 신체를 극한까지 몰아붙일 경우 맛볼 수 있는 쾌감에 휩싸인 바 있다.

그 중독성 있는 감각을 현실에서도 맛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후 매일 아침마다 세희와 함께 조깅을 하였으며 주말에는 등산을 다녔다. 근육을 풀어주기 위한 간단한 웨이트 트레이닝도 매번 잊지 않았다.

그렇게 반복한 것이 벌써 3달째다.

그 결과 단련 된 영우의 신체는 술과 담배에 찌든 양아치 대학생의 허술한 신체와 비할 바 없이 단단했다.

“아, 아파…”

영우의 손칼에 발목을 가격당한 대학생이 고통에 몸서리쳤다.

마치 쇠파이프에 얻어맞은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당연했다.

검호의 가르침을 고스란히 따른 영우의 일격은 일반인이 감당할 수 없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저, 저런…!”

인터넷에 떠도는 루머에 의하면 영우는 찌질이 중의 상찌질이었다.

한데 저렇게 싸움을 잘하다니?

남은 두 명의 대학생은 영우에게 위축되어 함부로 덤빌 수가 없었다.

반면 스스로의 능력에 감탄을 거듭한 영우는 조금 더 싸워보고 싶어졌다.

자신의 힘을 보다 만끽하고 싶었던 것이다.

“뭐해? 안 덤벼?”

영우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도발했다.

그러자 남은 두 명의 대학생이 참지 못하고 동시에 덤볐다.

“기고만장하기는!”

퍼퍽! 퍽!

개싸움이 시작됐다.

대학생들은 영우에게 주먹과 발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둘이 동시에 때리면 지가 격투기 선수가 아닌 이상 어찌 감당하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영우는 파그마의 검무를 사용하면서 수도 없이 밟았던 보법을 활용, 둘의 공격에 대응했다.

연신 물 흐르듯이 움직여 둘의 공격을 회피하는 모습이 마치 이소룡의 재림과도 같았다.

하지만 잠시 뿐이었다.

영우의 육체는 고난이도의 동작을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되지 못했다. 그냥 건강한 일반인 수준에 불과했다.

파그마의 검무를 언제까지고 완벽하게 재현하지 못했고, 도리어 보법을 잘못 밟아 발이 꼬여 자세가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핫! 찌질이 새끼가 깝치긴!”

저 홀로 자빠진 영우를 비웃은 대학생들이 무차별 공격을 시작했다.

“윽! 엑!”

퍽퍽퍽!

영우는 눈앞에 별이 반짝이는 착각을 느낄 정도로 정신없이 얻어터졌다.

하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세희와 예림을 챙겼다.

“어서 도망쳐!”

빨리 경찰 불러 오라는 말은 차마 목구멍에 삼키는 영우였다.

굳이 구차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녀들이 어련히 경찰서에 신고하리라 믿었던 것이다.

한데 그때였다.

“그만 까불어요.”

계속 비명 지르며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세희와 달리 내내 잠자코 있던 예림이 가볍게 도약했다.

영우는 대학생들에게 얻어맞고 있는 도중에도 그녀의 희고 매끈한 다리에 시선을 사로잡혔고.

빠각!

짧은 교복치마를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호선을 그린 예림의 발차기가 대학생들의 뒤통수를 내리찍었다.

“컥…!”

“윽!”

죽은 게 아닐까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단 일격에 흰자위를 드러낸 대학생들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뭐야? 왜 저렇게 세?’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영우에게 예림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어요? 나의 왕자님.”

가로등 아래 예림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지 않게도 성숙한 외모를 지닌 그녀가 그리는 반달모양의 눈웃음은 상대가 누구일지라도 매료시킬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미성년자는 이성으로 인식하지 않는 영우만큼은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후.

“뭐? 태권도 3단? 야, 그럼 좀 진작 나서주지, 그걸 구경하고 있었냐? 진짜 너무하네.”

편의점 앞.

세희와 예림은 영우의 멍투성이 얼굴에 달걀을 문질러주고 있었다.

미소녀 둘을 마치 종처럼 부리고 있는 영우의 모습은 흡사 만화영화 속에나 등장할법한 하렘왕 같았기에 지나가는 사람 모두 흘깃거렸다.

하지만 영우는 남의 시선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연신 투덜거리기 바빴다.

“예림이 네가 처음부터 같이 싸워줬으면 오빠가 이 모양 이 꼴이 안 났어도 됐던 거잖아?”

“남자 대 남자의 싸움에 끼어드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참았죠.”

“남자 대 남자의 싸움은 개뿔… 1대 4였구만.”

“히히, 어쨌든 멋졌어요.”

영우는 일반인치고 충분히 강했다.

그리고 설령 강하지 않았더라도 동생을 지키기 위해 나서는 오빠의 용기는 칭찬 받아 마땅했다.

오늘 일을 계기로 예림은 영우에게 더 큰 호감을 갖게 되었다. 진심으로 영우에게 시집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끙… 이만 돌아가자. 그리고 너희들 앞으로 캡슐방 금지야. 역시 캡슐을 사주는 게 좋겠어. 어? 어라?”

의자에 앉아있던 영우가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싸움의 여파로 평소에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들이 놀란 것으로 모자라 흠씬 얻어맞기까지 하였으니 몸을 온전히 가누지 못했다.

급기야 옆으로 쓰러지려하는 영우를 예림이 껴안아 멈추는 순간.

“하앙.”

예림이 이상야릇한 숨소리를 냈다.

영우의 손가락이 그녀의 겨드랑이 아래부터 허리까지 스쳐 내려갔던 탓이다.

“뭐, 뭐야?”

의미심장한 소리에 놀란 영우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고, 예림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오빠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네요.”

무슨 의미일까?

세희는 몰랐지만 영우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민망해서 헛기침할 따름이었다.

“드디어! 드디어 나도 300레벨이다!!”

템빨단이 레이단으로 이주해오고 4개월이 지난 오늘.

토반을 끝으로 전(前) 체다카 길드원 전원이 300레벨을 달성했다.

서부의 강력한 몬스터들이 그들의 성장을 촉진시킨 것이다.

“통합 랭킹 또한 대격변을 맞이했습니다.”

“대격변?”

“최상위 7명의 랭커들은 여전히 굳건히 순위를 지키고 있습니다만… 그 외 40위권 랭킹은 대부분 템빨단원들이 장악하게 되었다고 보셔도 무방합니다.”

“그게 뭐가 대격변이야? 별거 없네.”

전 체다카 길드원들은 원래부터가 통합 랭킹 50위권 랭커들이었다. 평균 랭킹이 고작 10계단 상승했다고 해봤자 그리드는 대수롭지 않다고 여겼다.

‘내가 그렇게 아이템을 만들어 주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도 탑 7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그리드가 실망마저 하는 그때, 세계는 경악하고 있었다.

100위권 랭킹은 쉽게 변동되지 않는 격차가 존재하는 법인데, 템빨단원들이 유래 없는 성장 속도로 랭킹을 올리자 연일 화제가 되었다.

각국 언론사들이 ‘레이단에는 무슨 비밀이 숨어있기에 템빨단은 저리도 빨리 성장할 수 있는가?’를 놓고 심층보도에 나섰을 정도이다.

『취재진이 서부 진입에 실패하였습니다.』

『에트날 왕국 서부에는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이 추측하기로는 최소 280레벨 이상의 랭커들이 파티를 이뤄야지만 진입이 가능한 것으로…』

『템빨단은 서부의 강력한 몬스터들을 사냥함으로서 레벨을 빠르게 올린 것으로 파악되는군요.』

『음… 서부의 몬스터들은 템빨단에게 양날의 검으로 작용할 겁니다. 템빨단원들의 레벨 업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지만, 그 대신 진입장벽이 높아 레이단으로 이주할 수 있는 유저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아무래도 그렇죠. 레이단의 발전 속도가 상상 이상으로 느릴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드 공작도 골치 아프겠군요.』

따앙! 따앙!

레이단의 초대형 대장간에는 오늘도 망치질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칸이 육성한 30명의 젊은 대장장이들이 레이단에 필요한 각종 보급품들을 쉴 새 없이 제작하고 있었다.

‘지치네.’

일손이 늘었지만 그리드는 여전히 바빴다.

3차 전직 이후 더욱 강력한 아이템을 장비할 수 있게 된 템빨단원들이 계속해서 아이템 제작 의뢰를 맡겨왔던 탓이다.

‘하지만 이 지긋지긋한 망치질도 곧 끝이다.’

의뢰 물품이 앞으로 5개밖에 남지 않았다. 그 5개의 아이템만 제작하면 그리드는 당분간 자유였다.

‘향후 계획을 세워야겠군.’

그리드에게는 개인적으로 해결해야할 과제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전직 퀘스트를 완수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든 파브라늄의 회수, 세 번째는 피아로의 복수 대행 퀘스트이다.

영주로서의 업무?

나와 비할 바 없이 똑똑한 라우엘과 라빗이 알아서 처리해주고 있으니 한동안 자리를 비우더라도 문제될 것 없다.

“거기, 너.”

잠시 망치질을 멈춘 그리드가 대장간 입구를 지키고 선 병사를 호명했다.

“부르셨습니까!”

군기 바짝 든 병사가 곧바로 뛰어왔다.

‘내가 위대하신 공작각하의 부름을 받다니!’

고양되어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병사에게 그리드가 명령했다.

“마이너를 데려와라.”

“옙!”

30분 후.

“아, 또 왜요?”

얼굴표정에 불만이 가득한 소년이 대장간을 찾아왔다.

훌륭한 광부의 재능을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광물 마스터(S+)>라는 스킬을 보유했다는 이유만으로 ‘광물 탐지기’로 육성 된 비운의 소년, 마이너였다.

“호위를 붙여줄 테니까 이곳 서부에 골렘의 미궁이 존재하는지 탐사해봐.”

“호위가 아니라 감시겠죠.”

“언젠가 네가 내게 진정한 충성을 맹세한다면 자유를 주도록 하마.”

“…뭐, 요즘은 당신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평민 출신으로 공작각하가 되신 입지전적인 인물이니까요. 하지만 저 같은 천재가 일생토록 충성을 바쳐야할 정도의 그릇인지는 여전히 의문이군요.”

마이너는 <낭중지추(SS)>스킬을 보유하고 있다.

재능이 매우 빼어나 저절로 남의 눈에 드러나기 때문에 살면서 수많은 유혹을 받게 될 운명이라 한다.

하여 오만하고 배신을 밥 먹듯이 할 인물이라더니 과연, 아무리 어르고 달래봤자 충성심이 오르질 않았다.

“너를 부하로 두려면 공작으로도 부족하다?”

“그렇죠. 최소한 국왕쯤은 되어야 섬길 맛이 나지 않겠습니까?”

“호오… 그 말 기억하고 있으마.”

반드시 왕이 되어 네놈을 진정 개처럼 부려먹어 주리라.

이를 갈며 다짐한 그리드가 손을 저었다.

“어서 출발해.”

“네이, 네이.”

마이너는 대답조차도 무성의했다.

하지만 일처리 하나만큼은 완벽하다는 사실을 그리드는 잘 알고 있었다.

‘이로서 서부에 존재할 파브라늄의 수색은 해결됐고…’

남은 건 전직 퀘스트와 피아로의 복수 대행 퀘스트다.

하지만 전직 퀘스트는 현재 진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파브라늄에 야탄 신의 축복을 받는 것이 그리드로서는 불가능했다.

‘유라조차도 야탄의 첫 번째 종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니, 원… 우선은 피아로의 원한을 풀어주도록 할까.’

피아로의 마음을 병들게 만든 원인, 아스모펠.

적기사단의 전 부단장이었다는 그를 처단하면 피아로는 은원의 고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그리고 온전한 상태가 된다면 내 부하가 되어줄 수도…’

희망을 품은 그리드가 아이템 제작에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5일 후.

길드원들이 제작을 의뢰한 아이템을 모조리 완성시킨 그리드가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스킬을 사용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스킬 레벨이 하나 오를 때마다 장비 아이템 제작법을 3개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창조할 수 있는 아이템 제작법 횟수 12/15.

*이 스킬을 사용해서 창조한 아이템을 생산 시, 아이템에 창조자의 이름이 자동으로 새겨집니다.

이제는 익숙해진 알림창이 연달아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템을 창조하시겠습니까?]

“헤비 부츠.”

[헤비 부츠로 결정하시겠습니까?]

“그래.”

[어떤 재질을 사용하시겠습니까?]

“음…”

흑철과 미스릴, 푸른 오리하르콘 등의 상급 광물만을 재질로 사용하면 안 된다.

그리드가 굳이 헤비 부츠를 제작하려는 이유는 무게감을 원했기 때문이다.

피아로의 조언에 의하면, 무거운 신발을 신을수록 대검술의 위력이 증폭된다 하였으니 말이다.

“주재료는 강철. 거기에 푸른 오리하르콘을 섞어서 강도와 경도를 더하고, 어두운 장소에서 만큼이나마 더욱 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유도하자. 아, 그리고 현재 내 방어구들과 색감이 조화를 이루도록 하려면 흑철을 섞어서 톤도 어둡게 만들어야겠군.”

[결정하시겠습니까?]

“그래.”

[설계해주십시오.]

최초에 실패작을 창조했을 당시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능숙하고 현명한 그리드였다.

그가 눈앞에 떠오른 공백의 설계도 위로 자신이 원하는 부츠의 모양을 완벽하게 그려나갔다.

“이걸로 됐어.”

지난 4개월 동안 600개 이상의 아이템을 제작한 그리드의 손재주 스탯은 3천을 가뿐히 초과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림도 섬세하게 그릴 수 있게 된 그리드는 설계도 위로 멋지고 실용적인 부츠의 모양을 금세 완성시킬 수 있었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검은 빛깔의 큼지막한 부츠였다. 섬세한 아름다움은 없지만 투박한 멋이 있었다.

[결정하시겠습니까? 설계도를 완성할 경우, 사용 가능한 창조 스킬 횟수가 영구적으로 1회 소멸합니다.]

그리드는 망설이지 않고 결정 버튼을 클릭했다.

그러자 설계도에 그려진 부츠의 모양이 시스템의 보정을 받아 더욱 완벽하게 모습을 갖췄다.

[아이템의 특징을 설명해주십시오.]

“무겁고 단단한 부츠다. 푸른 오리하르콘의 특성 덕분에 어두운 곳에서는 푸른빛에 휩싸이며 방어력이 더욱 더 상승한다.”

심플하지만 정확한 설명이었다.

납득한 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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