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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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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레전드리 클래스라지만 너무 강한 것 아닌가?
이름난 랭커들을 단 수 초 만에 해치우다니? 밸런스 붕괴 급이다.
심지어 파그마의 후예는 순수한 전투 직업이 아닌, 절반은 생산직이지 않은가?
파그마의 후예의 강함, 정녕 의도된 것이 맞는가? 혹시 버그는 아닌가?
오러 마스터 휴렌트를 5초, 무패의 봉드레를 단 4초 만에 해치워버린 그리드.
Satisfy를 대표하는 최강자들을 단 일격, 이격에 해치워버린 그의 충격적인 세계데뷔는 커다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의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S.A그룹에 문의가 쇄도했다.
결국, 분위기를 진정시켜야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임철호 회장이 직접 입장을 밝혔다.
밸런스 붕괴가 아니다.
파그마의 후예의 강함은 버그가 아닌 제작진의 의도대로다.
레전드리 클래스는 총 9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선택받은 9명만을 위한 클래스이기 때문에 특별할 수밖에 없다.
모든 CC(Crowd control:군중제어기술)에 면역하는 것이 그 특별함 중 하나다.
그렇다. CC면역이라는 패시브 스킬은 9개의 레전드리 클래스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패시브 스킬로서 오로지 그들만을 위한 특권이다.
너무 과한 특권이 아니냐고?
어쩌겠는가?
본래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노력으로든, 행운으로든 성취를 얻어 남들보다 앞서나가는 자가 반드시 존재하는 법이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
당신들은 그런 세상이 정녕 재미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무리 노력하고 행운을 거머쥐어도 결국은 남들과 똑같아지는 게임? 당신들이라면 플레이하겠는가?
물론, 노말 클래스 유저들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평등하진 못할지라도,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며 창조한 세상이 바로 Satisfy다.
당신들은 이미 직접 체험하지 않았는가?
모든 노말 클래스들의 능력은 2차 전직 후 대폭 상향됐다. 그와 같은 공식으로 3차 전직 후 더욱 더 능력이 향상될 것이며, 그때부터 레전드리 클래스와의 격차가 차츰 좁혀질 것이다.
3차 전직으로 부족하다? 그러면 4차 전직을 하면 된다.
Satisfy는 노력만하면 누구에게나 보상이 돌아가게끔 시스템이 구축 된 게임이다.
히든 클래스 전직자들이 여러모로 앞서가는 건 어쩔 수 없는 현실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게임을 플레이하다보면 언젠가 당신도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가상현실의 창조자 임철호는 이미 신격화되고 있었다.
출시된 후 1년 8개월 동안 단 한 번의 버그조차 발견되지 않았던 Satisfy.
그만큼 완벽한 세상을 창조한 임철호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는 절대적이었다.
하여, 세계인 대부분은 임철호의 발언에 납득해버렸다.
그리드에 대한 논란이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내가 거짓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기자회견이 끝난 후.
사무실로 돌아온 임철호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파그마의 후예의 강함은 버그가 아닌 제작진의 의도대로다.
이 발언.
거짓이었다.
물론 버그는 아니다.
하지만 제작진의 의도와 어긋난 것은 사실이다.
파그마의 후예는 지금보다 약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리드가 비상식적인 인물인지라 파그마의 후예가 기획의도보다 강력해지고 말았다.
“으음.”
의자에 몸을 누인 임철호는 PvP에서 그리드가 선보인 활약상을 상기해보았다.
부족한 센스와 컨트롤을 무색하게 만드는 압도적인 강함.
그 강함의 기반은 템빨 이전에 비정상적으로 높은 스탯에 있었다.
그리드의 스탯이 높은 이유?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레전드리 아이템 5개를 너무 오랫동안 제작하지 못한 탓이다.
“본래라면, 4달은 더 일찍 레전드리 아이템 5개를 제작하고 스탯 성장에 제재를 받았어야만 했던 것인데…”
그리드는 게임 재능이 너무 부족했다.
그래서 직업의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시간낭비를 했다. 오랫동안 정체되어 있었다.
더군다나 자잘한 부분에서는 운까지 없었다.
심지어 마이너스 레벨 과정을 거친 것으로 모자라 레전드리 아이템을 거의 제작하지 못했다.
그 탓에 진작 받았어야할 패널티를 오랫동안 피해갔으니, 파그마의 후예는 아이템 제작 노가다를 통해서 제작진의 의도보다 훨씬 더 높은 스탯을 보유하게 됐다.
부족한 게임 재능으로 인해 더뎌진 성장이 도리어 행운으로 작용한 것이다.
“끌끌… 과연, 주인공이란 특별한 존재인 겐가.”
교황 드레비고 레이드 당시.
그리드는 스스로를 주인공이라 자처했었다.
그리고 정녕 주인공다운 활약을 펼쳤다.
타락한 교황을 해치움으로서 수천 만 레베카 교인들을 구원했고, 데미안이 최초의 유니크 클래스 <여신의 대행자>로 전직하게끔 도왔다.
여태까지만 보면, 현재 Satisfy의 주인공은 확실히 그리드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하는 일마다 Satisfy의 판도가 하나씩 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한 명이라는 법은 없지.”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가 보고해오고 있었다.
[현재시각 13시 01분 27초. RD-3991X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엄청나군.”
임철호의 시선이 사무실 벽면의 초대형 모니터로 고정되었다.
수십 개의 화면을 띄우고 있는 그 모니터 중앙에 한 사내가 당당히 자리 잡고 있었다.
아이디는 크라우젤.
Satisfy가 오픈한 이래 지금까지 쭉 랭킹 1위를 수호하고 있는 괴물이다.
그가 지금 이 순간 모든 유저 최초로 300레벨을 달성, 3차 전직하게 되었다.
노말 클래스 전직자임에도 불구하고 ‘검성 후보’의 칭호를 얻은 존재.
“RD-3991X 퀘스트라… 백의(白衣) 검객으로 전직한 것인가.”
이제 크라우젤의 무대는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옮겨졌다.
유저 최초였다.
크라우젤은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흰 눈길 위에 처음으로 발자국을 새길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대량의 퀘스트들을 선점함으로서 여러 개의 칭호를 독식하게 됐군. 이로서 그는 더욱 더 독보적인 존재로 군림할 게야.’
잠시 생각해본 임철호가 순수한 호기심으로 질문했다.
“현재의 크라우젤과 그리드가 대결하게 된다면, 누가 승리할까?”
[51.3퍼센트의 확률로 크라우젤이 승리할 것입니다.]
“아직 새로운 칭호들을 얻기 전인데도…?”
역시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
과학계에 임철호라는 독보적 천재가 존재하듯이 게임계에는 크라우젤이라는 독보적 천재가 존재했다.
본래라면 누구도 넘어설 수 없을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과학계에는 그리드라는 인물이 없는 반면 게임계에는 그리드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크라우젤의 독주체제가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리드는 이미 수많은 천재를 넘어선 둔재이니까.’
넘어섰다 뿐인가?
그리드는 천재들을 동료, 혹은 부하라는 형태로 곁에 두기 시작했다.
오로지 혼자인 크라우젤과는 대조되는 행보였다.
훗날 그리드는 크라우젤마저 넘어설 수 있을까?
임철호는 기대됐다.
내가 창조한 세상의 지존으로 군림하게 될 존재는 과연 천재일까, 둔재일까.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
통합랭킹 3위 크리스.
최강 길드 자이언트의 마스터이기도한 그는 대진표를 확인한 순간부터 예측하고 있었다.
‘내가 결승전에서 만나게 될 상대는 그리드다.’
32강에서부터 휴렌트와 대결하게 된 그리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드가 휴렌트에게 패배하리라 분석했다. 그리고 16강에서 휴렌트와 봉드레가 싸운 후, 그 싸움의 승자가 결국 결승전까지 진출하리라 예상했었다.
하지만 크리스의 생각은 달랐다.
그리드가 휴렌트와 봉드레를 상대로 승리하고 결승전까지 올라오리라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 둘을 4초, 5초 만에 해치워버릴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그래서 두렵냐고?
아니다.
다소 긴장되기는 하지만 두렵지 않다.
오히려 피가 끓어올랐다.
“나 또한 일격필살이 장기다.”
크리스는 대검술사였다.
같은 대검술사인 그리드보다 훨씬 더 대검을 잘 다뤘다. 정면승부에서 패배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스탯에서는 내가 다소 뒤처지는 듯하다만.”
스탯의 차이는 중요치 않다.
대검술사의 궁극기라면 일격에 그리드를 해치울 수 있었다.
크리스는 그리드보다 훨씬 더 뛰어난 대검술을 바탕으로 그리드와 정면승부, 압도해줄 요량이었다.
과거, 자이언트 길드를 박살냈던 ‘대로의 도살자’에게 복수할 기회라고 벼르고 있었다.
한데 고작 16강에서 그를 가로막는 존재가 나타났다.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상대다.
그건 바로 영국 대표 레가스였다.
분명, 레가스는 L.T.S 시절의 지존이었다.
크리스조차도 L.T.S에서는 레가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Satisfy가 오픈한 이후 입장은 완전히 바뀌었다.
레가스보다 반 년 이상 빨리 Satisfy를 접했던 크리스는 레가스를 훌쩍 앞서가고 있었다.
본래라면, 레가스 따위 손쉽게 해치웠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쿨럭…!”
무릎 꿇는 크리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레가스가 너무나도 강했던 탓이다.
무도가 특유의 현란함을 구사함은 기본이오, 강력한 일격까지 겸비했다.
궤도를 읽기 어려운 발차기는 실로 회심의 한 수였다.
정신없이 얻어터지다보니 생명력이 절반까지 떨어졌다.
물약의 재사용 대기 시간을 확인한 크리스가 시간을 벌기 위해서 대화를 유도했다.
“뭐지? 표적처리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되게 강해졌군. 무슨 요술을 부린 거냐?”
표적처리에서 레가스는 통합랭킹 33위 메드 따위에게 애를 먹었었다.
크리스의 상대가 아니었던 것이다.
한데 단 며칠 사이에 어찌 이리도 강해졌단 말인가?
혼란스러워하는 크리스에게 레가스가 설명해주었다.
“무기가 있고, 없고의 차이가 매우 크군요.”
“……!”
크리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레가스가 양손에 너클을 무장하고 있음을 뒤늦게 눈치 챈 것이다.
그동안 봐왔던 레가스는 항상 맨손이었음을 상기하게 된 크리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동안 레가스가 어떤 미친 짓을 해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네놈 설마…! 여태까지 쭉 무기도 없이 게임을 플레이해왔던 거냐!”
레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도인에게 무기의 사용은 사치라고 생각했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번 PvP만큼은 예외로 두고 있습니다. 최강의 강적들을 상대함에 있어서 최선을 다해야만 예의겠죠.”
<뇌공작(雷公爵)의 너클>
등급:유니크
내구력:107/149 공격력:201
방어구 관통력:+15% 전격 속성:+30%
치명타확률:+30%
*5회 콤보 성공 시 추가 물리 데미지.
*6회 콤보 성공 시 추가 전격 데미지.
*8회 콤보 성공 시 추가 물리&전격 데미지.
*10회 콤보 성공 시 <천둥 마차> 발동.
대단한 실력을 지닌 대장장이 ‘G’가 뇌석(雷石)과 푸른 오리하르콘을 융합하여 제작한 너클입니다.
공격력이 약하다는 너클의 기본 약점을 전격의 기운으로 극복했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280 이상. 근력 1,200 이상. 민첩성 1,000 이상. 고급 너클 마스터리 레벨 4.
Satisfy를 시작한 이후 단 한 번도 무기를 사용한 바가 없던 레가스.
덕분에 S.A그룹 내에서 ‘미친놈’으로 통해왔던 그가 최초로 템빨을 선보였다.
쩌정! 쩌저정!
[5회 콤보 달성!]
[<뇌공작(雷公爵)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추가 물리 피해를 입힙니다.]
퍼엉!
[6회 콤보 달성!]
[<뇌공작(雷公爵)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추가 전격 피해를 입힙니다.]
콰쾅!!
[8회 콤보 달성!]
[<뇌공작(雷公爵)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대상에게 추가 물리 피해와 추가 전격 피해를 입힙니다.]
쩌저정!! 꽈앙!
[10회 콤보 달성!]
[<뇌공작(雷公爵) 너클>의 옵션 효과가 발동하여 <천둥 마차>를 시전합니다.]
쿠르르르르릉!!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사자의 성이 뇌마에 집어삼켜졌다.
콰콰콰콰콰콰쾅!!
완전한 붕괴였다.
한때는 융성했던 사자의 성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과거, 말락서스의 저주로 인해 쇠퇴의 길을 걸어온 본거스트 공국의 실태를 대변하는 장면이었다.
『크, 크리스 로그아웃…!』
최강의 우승후보 중 하나였던 크리스.
이제 그리드와 맞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라 여겨졌던 거물이 통합랭킹 13위 레가스에게 처참히 패배할 줄이야?
사람들이 충격에 휩싸였다.
특히 캐나다인들은 캐나다가 종합순위 3위에조차 들지 못하게 되었음에 분개하고 좌절했다.
『이변의 연속 끝에 4강 대진표가 확정되었습니다.』
『놀랍군요. 4강 중 무려 3명이 체다카 길드원입니다.』
『그리드와 레가스, 그리고 폰이군요. 현존 최강의 무력집단이라고 일컬어지는 체다카 길드의 위상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다들 힘내.”
지슈카가 모두를 응원해주었다.
하지만 그중 특히 그리드를 응원하는 기색이었던지라 레가스와 폰은 피식 웃고 말았다.
이후.
4강에서 만난 레가스와 폰은 무려 17분 동안 싸웠다.
화려한 창술과 태권도의 격돌이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결국 레가스가 승리했다.
단 한 끗 차이의 승리였다.
“다음엔 내가 이긴다.”
폰은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이미 서로를 인정하고 있던 두 사람의 우정은 더욱 더 견고해졌다.
한편, 그리드는 통합랭킹 25위 부바트와 대결하게 되었다.
결과는 부바트의 기권이었다.
CC가 장기인 부바트의 입장에서 CC에 면역하는 그리드와 굳이 겨뤄봤자 시간낭비였던 것이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결승전에서 그리드는 레가스를 상대로 승리했다.
여태까지와 달리 압도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레가스의 현란한 발재간에 8콤보까지 허용한 그리드는 잠시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9 실패작의 압도적인 공격력으로 전황을 금세 역전시켜버렸다.
레가스는 템빨의 중요성을 점차 깨달아가기 시작했다. 무도인으로서의 쓸데없는 오기가 차츰 희미해져갔다.
『그리드 우승! 이로서 한국의 종합 순위가 3위가 되었습니다!!』
한국은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동메달 하나조차 획득하지 못하고 꼴찌할 가능성이 높았던 국가다.
한데 그리드가 표적처리와 PvP에서 금메달을 1개씩 획득하여 한국의 순위를 무려 3위까지 끌어올려버렸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실로 어마어마한 업적이었다.
대한민국이 열광했다. 완전히 축제 분위기였다.
종합 순위.
1위 미국:금메달 3개. 은메달 2개. 동메달 1개.
2위 프랑스: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2개.
3위 한국:금메달 2개.
4위 캐나다:금메달 1개. 은메달 2개.
아직 국가대항전은 끝나지 않았다.
펫 마라톤이 남아있었다.
“이제 그리드의 활약도 끝이다.”
미국은 1위를 공고히하기 위해.
프랑스는 1위를 빼앗기 위해.
캐나다는 3위를 탈환하기 위해.
비룡을 펫으로 부리는 선수들을 대거 펫마라톤에 참가시켰다.
『비룡을 펫으로 다루는 유저는 Satisfy를 통틀어서 채 100명조차 되지 않는다고 알려졌죠.』
『비룡은 최강의 펫입니다. 엄청난 속도와 체력, 그리고 전투력을 보유했습니다. 비룡 유저를 많이 보유한 국가가 이번 펫 마라톤의 승자가 될 것입니다.』
『그리드 또한 펫 마라톤 참가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요. 그리드도 비룡 유저일까요?』
『설사 그리드가 비룡 유저라고 해도 부질없습니다. 한국에 비룡을 펫으로 부리는 유저는 단 한 명조차 없습니다. 그리드의 비룡은 타국 비룡들에게 집중 견제당하고 결국 탈락의 고배를 마실 겁니다.』
『결국 한국은 종합순위 4위로 국가대항전을 마감하겠군요.』
당연한 분석이었다.
펫 마라톤은 선수 본인이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펫만 참가하는 대회였다.
그리드의 비룡이 그리드처럼 레전드리 등급이 아닌 이상 이번 대회에서 승리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비룡의 등급은 모두 똑같았다. 속성만 다를 뿐이었다.
“비룡 소환!”
유레아 섬.
제주도만한 면적의 그 초대형 섬에 각국을 대표하는 40명의 선수들이 로그인했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비룡을 소환하여 위용을 뽐냈다.
캬오오!
쿠워어!
불, 냉기, 독, 바람 등등.
각기 다른 속성의 브레스를 내뿜으며 포효하는 비룡들!
관중들이 보기 드문 비룡들이 나란히 서있는 장관에 압도당해 할 말을 잃고 있는 그때.
“냐옹!”
그리드가 고양이를 소환했다.
사람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드래곤이 자신과 닮은 생명체를 재미삼아 ‘대충’ 창조했다.
그 창조물이 바로 비룡이다.
비룡은 드래곤과 비교하면 지능과 신체적 능력이 무척이나 떨어졌다.
크기도 수십 미터나 되는 드래곤과 비교하면 매우 작아서, 꼬리를 제외한 몸체의 길이는 고작 3미터밖에 안 됐다.
하지만 그래도 무시할 게 못된다.
드래곤의 피가 조금이나마 흐르고 있는 이상 비룡은 최강의 몬스터였다.
최소 레벨이 260인 그리폰보다 무려 2배 이상 강하고 빨랐다. 최대 시속이 120킬로미터에 육박했고 심지어 브레스까지 쐈다.
그렇다.
비룡이 괜히 최고의 펫으로 여겨지는 게 아니다.
길들이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을 제외하면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속성에 따라서 각기 다른 개성을 보유한 비룡들.
수십만 관중들과 수억 명의 시청자들은 이번 펫 마라톤을 통해서 과연 얼마나 다양한 비룡을 구경할 수 있게 될 것인가,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었다.
그중 특히 그리드를 주목했다.
“그리드라면, 그 귀하다는 암흑 속성의 비룡을 길들이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암흑 속성의 비룡? 그런 것도 있었어? 난 처음 듣는데?”
“생소해할 만도 하지. Satisfy에 비룡을 펫으로 길들인 유저는 채 100명도 되지 않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암흑 속성의 비룡을 길들인 유저는 1, 2명밖에 없다는 모양이니까.”
“암흑 속성의 비룡은 뭐가 좋은데?”
“본 드래곤처럼 몸이 뼈로 구성되어 있다더라. 정확히 말하면 언데드야. 스태미나가 무한인 거지.”
“헐? 지치지 않는다는 뜻이야? 개사기잖아? 암흑 비룡만 있으면 대륙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거네?”
“제약이 아예 없진 않아. 신체를 구성하는 뼈들마다 내구력이 존재하기 때문에 수시로 뼈를 교체시켜줘야 한다고 하더라. 그리고 고질적인 약점이 있어. 일반 비룡보다 지능이 현격하게 떨어진다는 점이야.”
암흑 비룡은 워낙에 멍청해서 복잡한 명령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전투적인 측면에서 약했다.
하지만 스태미나가 무한이니만큼 나는 것 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잘했다.
이번 펫 마라톤.
골인 지점까지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목적인, 단순한 대회다.
암흑 비룡이 아무리 무식해도 펫 마라톤에서야 간단히 활약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드라면…”
“…암흑 비룡을 펫으로 다룰 수도 있겠군.”
사람들은 기대했다.
표적처리와 PvP의 금메달리스트.
국가대항전에 등장한 이후부터 쭉 충격적인 모습을 선보인 그리드라면 암흑 속성의 비룡을 길들이고 있어도 이상할 게 없을 것 같았다.
한데.
“냐옹!”
“…….”
그리드가 소환한 생물은 최강의 펫이 아닌 자그마한 고양이였다.
“고양이라고?”
“아니, 웬…”
실망한 관중들과 시청자들의 표정이 일순간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일 따름이었다.
사람들이 이내 헤실헤실 웃기 시작했다.
“귀엽다.”
“큐트…!”
“카와이~”
“미뇽!”
“리프리히~”
“까리노!”
“아모로쏘…”
“둘키스~”
한국어, 영어, 일본어, 불어, 독일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라틴어 등등!
각국의 언어로 귀엽다는 감탄사가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왔다.
평소에 고양이에 별 관심 없던 사람들조차도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특히 귀여운 것을 사랑하는 아이들과 여자들은 떼를 쓰기 시작했다.
“엄마! 나 저거 사줘!”
“자기야~ 우리도 고양이 키우자. 웅?”
그리드가 소환한 고양이.
그것은 전형적인 페르시안 고양이의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한데 털의 색상 조화가 무척이나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자그마한 네 발만 흰색이었고 나머진 완전히 검었다.
만약 녀석을 한밤중에 보게 된다면, 하얀 네 발만 떠다니는 것으로 인식할 것 같았다.
더군다나 녀석의 등에는 자그마한 악마 날개까지 달려있었다.
파닥파닥 날갯짓하면서 그리드의 주변을 맴도는 녀석의 모습은 무척이나 신비로웠다. 동화 속에 등장하는 정령 같았다.
귀여운 모습에 매료되어 잠시 넋을 잃었던 해설자들이 펫 전문가들에게 질문했다.
『저 날개달린 고양이는 뭐죠?』
『…….』
4명의 이름난 펫 전문가들 중 섣불리 입을 여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 모두에게 날개달린 고양이 펫은 생소했던 탓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단언할 수 있었다.
『어찌됐든, 저 고양이는 비룡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겠죠.』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다.
최강의 몬스터인 비룡과 고양이 따위가 맞상대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크기부터가 엄청난 차이가 났다.
비룡은 몸체의 길이가 3미터인 반면 고양이는 40센티미터 정도에 불과했다.
비룡이 커다란 아가리를 쩍! 벌려서는 한 입에 꿀꺽! 삼켜버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귀여운 고양이가 불쌍하게 됐네…”
사람들이 안타까워했다.
그리고 펫 마라톤 참가자들은 그리드를 노골적으로 비웃고 있었다.
“고양이? 하하! 레전드리 클래스라고 해서 펫도 최고의 펫을 거느리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펫 길들이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 재능이 없나보지, 재능이. 낄낄.”
“펫 길들이기에도 템빨을 세울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어? 그치?”
“근데 너무하네. 고양이는 너무 심하다, 야. 한국이 비룡 하나 없는 허접한 국가라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고양이를 참가시킬 생각을 하냐?”
“맞아. 최소 그리폰은 돼야하는 거 아니야? 그리폰이라고 해봤자 비룡들의 먹잇감이 됐겠지만. 그리폰은 비룡들의 배라도 불려주지 고양인 뭐냐, 한 입 거리도 안 되게.”
본래 한국은 국가대항전에서 꼴찌를 해야만 정상인 국가였다.
하지만 그리드 하나 덕분에 3위까지 등극해 버렸다.
그에 자연스럽게 순위가 뒤로 밀린 타국 선수들이 원한을 감추지 못하고 그리드를 마구 비꼬아댔다.
그리드가 콧방귀 뀌었다.
“지껄일 수 있을 때 마음껏 지껄여둬라.”
노에.
멤피스는 보통 고양이가 아니다.
겉모습은 엄청나게 귀엽지만 실상은 무시무시한 마수다.
심지어 ‘지옥 최강’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있을 정도였다.
“가소로운 것들.”
고작 비룡 따위로 기고만장해있는 참가자들을 비웃어준 그리드가 노에에게 음흉한 미소를 던져주었다.
한데 노에의 상태가 이상했다.
일전에 봤을 때는 기고만장하기가 이를데없던 녀석이 오늘은 웬일인지 위축된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뭐야?”
불안을 감지한 그리드가 노에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이름:노에
종:멤피스
레벨:1(0/200)
호감도:5/100
생명력:5,000/5,000
물리공격력:60 마법공격력:30
방어력:50 마법저항력:80
속성:암흑
상태:두려움
(여긴 뭐냐, 냥? 왜 이렇게 드래곤이 많냐, 냥? 캭! 미친 주인이 나를 드래곤한테 먹이로 던져주려고 한다! 냥! 살려주라, 냥!)
멤피스는 영리한데다가 성체의 전투 능력이 상급 마족보다 강해서 대악마들에게 사랑 받는 존재였다.
지옥 최강의 마수로서 실로 부족함이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엄청났던 터라 위축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하지만 드래곤 앞에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드래곤은 지옥과 지상을 통틀어서 최강의 생명체였다.
멤피스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존재였다.
“드, 드래곤 무섭다! 냥!”
덥썩!
비룡의 냄새만 맡고 드래곤인 줄로 착각한 노에가 그리드의 품에 안겨들었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은 채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이 악마 같은 주인아! 나를 드래곤 먹이로 던져줄 생각이냐? 냥! 넌 죽어서 지옥에 갈 거다! 냥!”
원망하듯이 따지는 노에였다.
그리드는 난감해졌다.
‘지옥 최강의 마수라더니, 염병. 고작 비룡 따위한테 이렇게 쪼는 거야?’
완전히 실망이다.
칫, 혀를 찬 그리드가 노에의 목덜미를 잡아 쥐었다. 그러자 노에의 몸이 축 늘어졌다.
“노에 살려라! 노에 살려! 냥!”
뽈록 튀어나온 배를 내민 채 아등바등 거리는 노에!
짧은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는 녀석은 그리드가 자신을 드래곤들의 아가리에 던져 넣을까 두려워 울상을 짓고 있었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불쌍해할 법도 하건만 그리드는 냉담했다.
“살고 싶으면 비룡들을 피해서 힘껏 날아. 목적지까지 무사히 살아서 도착하기를 기원해주마.”
괜히 지옥 최강의 마수가 아닐 터.
그리드는 노에를 신뢰했다. 이 녀석이 아직 새끼인지라 고작 비룡 따위에게 쫄고는 있지만, 이미 비룡보다 훨씬 더 뛰어난 존재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가라!”
강압적으로 등을 떠미는 그리드 탓에 노에만 죽상이었다.
“이 악마! 이 손 놔라! 냥! 노에 살리란 말이다! 냥!”
한편.
세계인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그리드와 노에의 모습이 고스란히 중계화면에 잡히고 있었던 탓이다.
『아이고… 고양이가 엄청나게 겁에 질려있군요.』
『날개가 달린 것만으로도 모자라 말까지 하는 고양이라니, 참 신기하네요. 한데 노예 살려라니… 고양이의 이름이 노예인가 보죠?』
『참으로 안타까운 광경입니다! 그리드는 본인의 펫을 노예 취급 하는 것으로 모자라 지금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천인공노할 일입니다!』
『아무리 가상현실 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라지만 너무 함부로 대하는 군요. 동물보호단체에서 들고 일어날 게 분명합니다. 특히 어린아이들의 정서발달에 악영향을 끼칠 장면입니다. 부모님들의 시청지도가 필요한 순간입니다.』
관중들이 야유했다.
“그리드, 이 나쁜 자식아! 고양이 괴롭히지 마라!”
“그렇게 귀여운 고양이를 펫 마라톤에 참가시키겠다니, 네가 그러고도 제정신 박힌 인간이냐!”
“고양이가 비룡들한테 잡아먹히는 광경을 우리 딸자식한테 보여줄 수는 없다! 진행위원들은 당장 그리드를 퇴장시켜라!”
“작은 동물을 노예취급 하다니! 악마 같은 놈!”
“고양이가 겁에 질린 모습이 너무 불쌍해… 흑흑…”
“엄마, 저 고양이, 용들한테 잡아먹히는 고야?”
“으아앙! 무서워!”
심지어 어린아이들은 울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그리드가 악마 같아보였다.
혼란이 가증됐다.
진행위원들은 정말로 그리드를 퇴장시켜야하는 게 아닌지 고민했다.
하지만 Satisfy에 접속해있는 선수들과 해설자는 바깥 사정을 몰랐다.
타앙!
해설자가 예정 된 시간을 확인한 순간 마법탄을 발사했다.
바깥사정과 관계없이 펫 마라톤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냥?”
비룡의 냄새만 맡고 드래곤이라 착각했던 노에.
그리드의 등쌀에 떠밀려 아등바등 거리던 녀석이, 마법탄 발사 소리를 듣고 놀라 질끈 감고 있던 두 눈을 드디어 처음으로 떴다.
그러자 에메랄드빛 두 눈에 비룡들의 모습이 투영됐다.
“…드래곤이 아니다, 냥?”
드디어 노에가 정신을 차렸다.
“도마뱀 새끼들이 나를 속였다! 캬악!”
털을 곤두세우는 노에!
녀석의 상태가 변화했다.
상태:분노
(저 도마뱀 새끼들은 뭐냐? 냥! 드래곤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개먹이었다! 냥! 위대한 지옥의 대마수인 이 몸을 속이고 농락하다니! 냥! 용서 못한다! 냥냥!)
대악마 헬가오는 파브라늄을 보고 멤피스와 견줄만한 속도라 감탄한 바 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멤피스가 파브라늄보다 훨씬 더 빨랐다.
괜히 지옥에서 가장 빠른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캬악!”
펫 마라톤이 시작 된 순간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남자 엄지손가락 만하던 노에의 자그마한 주둥이가 순식간에 거대하게 벌려지더니 비룡 한 마리의 몸을 통째로 삼켜버린 것이다.
“어, 어어…?”
삼켜진 비룡의 주인이 질겁했다.
그의 시야에 어처구니없는 알림창이 떠오르고 있었다.
[당신의 비룡 ‘존슨’의 이동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하였습니다.]
반면 그리드의 시야에는 정 반대의 알림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이동속도가 50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영혼 섭취>Lv.1
대상의 가장 높은 능력치의 절반을 일시적으로 빼앗아 주인에게 전이시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자기 마음
영혼 섭취 스킬의 단계 중 ‘주인에게 전이시킵니다’를 생략시킨 효과가 발동하는 순간이었다.
존슨은 바람 속성의 비룡이었다.
다른 속성의 비룡보다 이동 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을 보유했다.
펫 마라톤에서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는 비룡이었던 것이다.
존슨의 주인, 페스토는 펫 마라톤에서 존슨의 우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어떤 비룡보다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여 조국 이탈리아에 최초의 금메달을 안겨 주리라 믿었었다.
한데.
‘이동 속도의 절반이 하락하다니?’
허무할 정도로 쉽게 무기를 잃고 말았다.
페스토는 그리드의 펫을 귀신 보듯이 하고 있었다.
‘뭐지, 저 괴물은?’
그리드의 펫은 고양이었다. 날개가 달렸다 뿐이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고양이와 생김새며 크기가 완전히 같았다.
한데 저 ‘ㅅ’모양의 자그마한 주둥이가 3미터 크기의 비룡을 한입에 삼켜버릴 정도로 확 커졌었다.
너무나도 찰나지간에 일어난 일이라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다른 참가자들도 술렁이고 있었다.
“방금 어떻게 된 거야?”
“그리드의 고양이가 페스토의 비룡을 잡아먹었다.”
“근데 비룡은 멀쩡하잖아?”
“겉모습만 멀쩡한 거겠지. 페스토의 안색을 봐. 하얗게 질려 있잖아. 분명히 황당한 일을 당한 거야.”
“과연 그리드… 평범한 고양이를 데리고 다닐 리 없다는 건가.”
펫 마라톤은 진즉에 시작했다.
출발선상에서 트러블을 일으킨 그리드와 페스토의 펫을 제외한 나머지 38마리 비룡들은 이미 힘차게 날갯짓하여 날아가고 있었다.
선수들은 안도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 됐군.’
존슨은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녀석이 정확하게 무슨 일을 당했기에 넋 놓고 있는지는 몰랐으나, 다른 선수들 입장에선 희소식이었다.
그리드의 펫도 평범한 고양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됐지만 딱히 문제될 것 없어 보였다.
다른 비룡들은 이미 500미터 전방까지 앞서가고 있는 반면 그리드와 페스토의 펫은 여전히 출발선상에 대기 중이었기 때문이다.
저 둘은 낙오했다.
선수들은 그렇게 확신했다.
“꺼윽.”
한편, 배가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노에는 트림하느라 바빴다.
한가하게 구는 놈에게 그리드가 재촉했다.
“빨리 출발해.”
최근의 그리드는 후로이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그러면서 후로이의 비룡을 직접 타보기도 했다. 그리고 비룡의 속도와 스태미나에 감탄했었다.
솔직히 말해서, 노에가 이렇게 여유를 부려도 좋은 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불안해하는 그리드에게 노에가 피식, 명백한 조소를 보냈다. 통짜 허리에 핑크색 발바닥을 얹고 선 녀석이 기고만장하게 말했다.
“주인은 겁쟁이냐, 냥? 지옥 제일 마수인 이 몸께서 고작 도마뱀들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 냥! 재촉하지 말란 말이다! 냥!”
유레아 섬 동쪽에는 거대한 산이 우뚝 솟아있었다.
칭즈 산이었다.
펫들은 누가 가장 빨리 칭즈 산 정상에 도착하는가를 놓고 겨뤄야만 했다.
그리고 노에는 자신만만했다.
“내가 가장 빠르다! 냥!”
때마침 알림창이 떠올랐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이동속도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
그렇다.
<영혼 섭취>로 인해 발생하는 효과의 지속 시간은 단 3초에 불과했다.
그건 헬가드 레이드 이후 충돌했던 요시무라의 스탯을 빼앗았을 때부터 이미 확인한 사항이다.
그리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이 멍청한 고양이가…”
반면 페스토의 안색은 밝아졌다.
[당신의 비룡 ‘존슨’의 이동속도가 정상화 되었습니다.]
‘효과가 엄청난 대신 지속 시간은 무척이나 짧은 디버프였던 거군!’
환희에 찬 페스토가 존슨에게 명령했다.
“어서 출발해라! 앞서가는 놈들을 모두 제쳐버려!”
캬오!!
힘차게 대답한 존슨이 날갯짓하여 날아올랐다. 그리고 앞서가고 있던 비룡들을 빠르게 추격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다. 과연 바람 속성의 비룡다웠다.
하지만 속도에서는 노에도 뒤처지지 않았다.
“냐앙!”
존슨의 뒤로 바짝 따라붙은 노에가 또 한 번 존슨을 집어삼켜버렸다.
[당신의 비룡 ‘존슨’의 이동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하였습니다.]
“뭣…!”
페스토가 경악했다.
저 미친 위력의 디버프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뭐 저리 짧다는 말인가? 완전히 사기다!
“왜 내 존슨만 괴롭히는 거냐앗!!”
기운 잃은 존슨을 확인하며 격노한 페스토의 외침이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노에는 어느새 38마리 비룡들까지 따라잡고 있었다.
“포식이다! 냥!”
쩌억!
노에의 입이 확 벌어졌다. 그리고 3미터 크기의 비룡들을 한 번씩 집어 삼켰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이동속도가 30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생명력이 250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방어력이 500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공격력이 400퍼센트 상승하였습니다.]
“뭣…!”
노에에게 집어삼켜진 비룡의 주인들이 경악했다.
[당신의 비룡 ‘썬더’의 이동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하였습니다.]
[당신의 비룡 ‘울티마’의 생명력이 50퍼센트 하락하였습니다.]
[당신의 비룡 ‘뿌꾸’의 방어력이 50퍼센트 하락하였습니다.]
[당신의 비룡 ‘올레’의 공격력이 50퍼센트 하락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황당한 경우란 말인가?
내 비룡의 가장 높은 능력치가 반 토막 나버렸다.
캬악!
노에에게 한 번씩 집어삼켜진 비룡들은 완전히 겁에 질려있었다.
노에가 자신들보다 상위포식자임을 인식하고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워하며 뒤처지는 비룡들!
반면 노에는 압도적인 속도로 놈들을 앞서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죠…?』
상황을 설명해줘야 할 해설자가 도리어 질문을 던진다.
그에 관중과 시청자들은 답답함을 느꼈다.
전문가들은 지대한 흥미를 보이고 있었다.
『단지 인간의 언어를 구사하고 날개가 달렸을 뿐인 고양이가 아니었군요.』
『부분 거대화가 가능한 종이었습니다! 저런 생물은 무척이나 희귀해서 가치가 높죠!』
『비룡을 집어삼킬 때마다 고양이의 기세가 상승하는군요! 저 집어삼킨다는 행위는 대상의 능력이나 스탯을 빼앗는 것 같습니다!』
정확한 분석이었다.
괜히 전문가가 아니었다.
관중과 시청자들이 슬슬 노에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었다.
“고양이 짱 좋다!”
“대상의 능력이나 스탯을 빼앗는 스킬을 구사할 수 있다니…!”
“더군다나 재사용 대기 시간도 짧아 보여. 저거 완전히 사기잖아?”
“그리드는 펫조차도 레전드리 등급의 펫을 보유한 건가!”
세계가 감탄한다.
그리고 펫 마라톤에 참가하고 있던 지발은 이를 갈고 있었다.
“그리드, 이 놈…!”
미국은 압도적인 우승후보였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전문가들은 이번 국가대항전에서 미국이 금메달을 최소 5개 이상 획득할 거라고 전망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고작 3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이라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던 허접한 국가에게 금메달을 2개나 빼앗긴 여파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또 하나의 금메달을 빼앗기게 생겼다.
금메달 개수가 한국과 동률이 될 판국이었다.
은메달과 동메달의 보유 숫자 차이 때문에 종합순위 1위는 따 놓은 당상이었지만, 역시 자존심이 상했다. 이대로 우승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았다.
국가대항전 꼴찌 후보였던 한국에게 금메달을 3개나 빼앗기다니?
그것도 고작 그리드 하나 때문에!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 미국이 오로지 한 명의 인물 때문에 이런 꼴을 당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치욕이다…! 자존심이 용납 못한다!”
펫 마라톤에 참가한 미국인 선수는 총 6명이었다.
과연 최강 전력의 국가답게 비룡 유저도 가장 많이 보유했던 것이다.
지발이 그들에게 명령했다.
“저 고양이 새끼를 죽여 버려!”
쿠오오오오!
브레스의 향연이 시작됐다.
앞서가는 노에를 노리고 비룡들이 화염, 냉기, 독기, 전격의 브레스를 집요하게 발사했다.
아직 1레벨에 불과한 노에에게는 사뭇 부담스러운 공격 세례였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가 2,43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초 버프가 끝나고 모든 스탯이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던 노에.
녀석이 브레스 일격에 얻어맞고 생명력이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노에…!”
그리드가 걱정했다.
하지만 노에는 지옥 제일의 마수였다.
드래곤을 제외하면 녀석의 적수가 없었다.
아직 새끼였지만 천부적인 재질이 비룡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열 받는다! 냥!”
앞서가던 노에가 선회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덤벼오는 6마리 미국팀 비룡들을 마주하더니 도끼눈 떴다.
“캬악!”
곤두서는 노에의 털!
움찔!
덩칫값 못하고 위협을 느낀 비룡들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공격해!”
주인들의 명령을 받들고 용기를 낸 비룡들이 거리가 가까워진 노에를 향해 브레스를 쏘는가 하면 꼬리를 휘둘러 공격했다.
이때부터 노에의 본격적인 활약이 시작됐다.
사뿐한 움직임으로 브레스를 회피한 녀석이 유체화를 사용, 비룡들의 꼬리 공격을 무력화시켜버렸다. 그리고 주둥이를 확 벌려 6마리 비룡들을 한 번씩 집어삼키더니 모든 능력치를 상승시켰다.
캬오!
기겁하는 비룡들!
녀석 중 한 마리의 면상 앞으로 접근한 노에가 앞발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할퀴기>Lv.1
앞발로 대상을 할퀴어 데미지를 입히고 중독 시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내킬 때
[당신의 비룡 ‘캡틴 아메리카’가 2,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중독되어 3초간 석화 상태가 됩니다.]
“헉…!”
캡틴 아메리카는 지발의 비룡이었다.
레벨이 무려 150에 육박했다.
한데 쪼그마한 고양이에게 조금 할퀴어졌답시고 3초 석화라니?
생명력 피해는 크지 않았지만 상태이상에 당한 것이 너무 컸다.
다른 비룡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재사용 대기 시간 없이 사용되는 할퀴기에 한 번씩 명중당한 녀석들은 석화에 걸려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그리고 급기야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콰앙!
커다란 충격을 받고 움찔거리는 미국 팀 비룡들!
그중 레벨이 가장 낮았던 녀석은 빛으로 화해버렸다.
노에의 레벨이 폭등했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레벨이 올랐…]
순식간에 26레벨이 되어버린 노에!
“이 몸은 지옥 제일 마수다! 냥!!”
수십 대의 카메라에게 집중 포커싱 당하고 있던 녀석이 포효한다.
그에 수십 만 관중과 수억 시청자들이 술렁였다.
“지옥 제일 마수?”
“저 고양이는 지옥의 마수였던 거야?”
“와… 마수라니, 실제로 본적조차 없는데.”
전문가들은 흥분했다.
『지옥은 아직 정보가 하나도 밝혀진 게 없는 미지의 땅입니다! 가끔 지옥에서부터 출몰한 마수나 마족들이 각 지역 보스 몬스터로 등장하는 경우는 있지만…!』
『그 마수를 펫으로 길들이다니! 그리드는 실로 놀라운 인물이군요!』
『크…! 괜히 갓리드가 아닙니다!』
『지옥 제일 마수임을 자처하는 저 고양이를 제대로 분석해보고 싶은데요. 이 대회가 끝난 후 갓리드 님께서 협조를 해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군요.』
지발은 그리드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지옥의 마수라고…? 그것도 제일 마수? 네놈은 대체 뭐냐! 이미 지옥까지 섭렵한 거냐!”
그리드는 차원이 다른 모험가인 듯했다.
미지의 영역에서부터 제일 마수를 길들여 오다니?
경외심이 느껴질 지경이다.
고작 비룡을 가지고 내가 최고의 펫 마스터라 자부해왔던 지발을 비롯한 비룡의 주인들은 이 순간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진실은 달랐지만.
‘나도 지옥에는 가본 적 없다.’
그리드는 심지어 지옥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른다.
평생 가고 싶지 않은 장소이기도 했다.
그리드가 소리쳤다.
“가라! 노에!”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이제 고작 1킬로미터밖에 남지 않았다.
가장 가깝게 뒤따라왔던 미국 팀 비룡들을 제압한 노에를 막아설 적수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때마침 아주 좋은 먹잇감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로 존슨이었다.
“하하하하! 이 틈이다! 저 괴물 고양이가 다른 비룡들에게 정신 팔려있는 틈에 네가 우승하는 거야, 존슨!”
미국 팀 비룡들과 노에를 지나쳐가는 초록색 비룡!
노에에게 두 번이나 잡아먹혀 꼴찌였던 녀석이 어느새 가장 선두에 서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노에의 좋은 양분이 되었다.
“냐옹!”
이미 제압한 미국 팀 비룡들을 무시하고 존슨을 집어삼킨 노에!
[당신의 멤피스 ‘노에’의 이동속도가 50퍼센트 상승합니다.]
[당신의 비룡 ‘존슨’의 이동속도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켁.”
깜짝 놀란 페스토가 혀를 깨물었다.
그는 억울했다.
‘아니 저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이 아예 없는 거야?’
말도 안 된다.
지옥 제일 마수라더니 과연, 어째서 제일인지 증명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결국.
노에가 가장 먼저 목적지에 도착했다.
칭즈 산 정상에 우뚝 선 녀석이 짧은 두 팔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나는 지옥 제일 마수다! 냥! 주인의 노에다! 냥!”
“…….”
그리드의 노예임을 자처하는 고양이.
사람들은 녀석에게 측은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마수를 노예처럼 부리는 그리드가 악마 같아 보였다.
『그리드 우승!』
그리드는 실로 굉장한 인물이었다.
참가하는 종목마다 족족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이번 펫 마라톤에서 미국은 동메달 하나조차 획득하지 못했다.
그렇게 결정 된 종합순위 1위는 미국, 2위는 한국, 3위는 프랑스였다.
“와아아아아아!!”
믿을 수 없는 결과에 한국인들은 환호했다.
애초에 3위권을 목표로 했던 프랑스인들은 나름 만족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썩 개운치 못한 표정이었다.
압도적인 전력을 보유했으니만큼 종합순위 1위는 ‘당연한’ 것이었던 미국.
원래는 보다 월등한 차이로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었던 미국이지만 오직 그리드 1명 때문에 간신히 우승한 꼴이 되었으니 체면이 서질 않았다.
지발은 언론의 몰매를 맞았다.
팀의 리더로서 무능력한 게 아니었냐고 비난 받았다.
반면 그리드는 대한민국의 영웅으로 부상했다.
한국 정부는 그에게 금메달 하나당 3억이라는 어마어마한 포상을 제공했다. 수많은 기업들이 CF출연을 요청했다. 각종 토크쇼와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섭외 요청이 쇄도했다.
매니저를 둬야할 판국이었다.
“갓리드! 갓리드! 갓리드!”
금천구 XX동 000-0번지.
집에 돌아온 영우는 당황했다.
동네 사람들이 대거 몰려나와서는 그를 열렬히 환영해주었기 때문이다.
동네 입구에는 <경)대한민국의 영웅 갓리드 탄생!(축>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부모 등골 빼먹는 백수로 취급 받았던 영우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순간이었다.
동네 아이들과 젊은이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 어른들에게는 1등 신랑감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유라는 영우에게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영우가 빌딩을 세우고자 한다는 뜻을 알게 된 그녀는 자신의 정보력을 이용, 현재는 시세가 낮지만 향후 시세가 껑충 뛸만한 땅들을 물색하여 영우에게 구매를 추천했다.
마침 9억을 받고 목표액 100억을 간신히 채웠던 영우는 곧바로 땅을 구매, 유라에게 시공사까지 추천받아 7층짜리 빌딩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슈카는 선언했다.
“나도 그리드가 짓고 있다는 빌딩 옆에 빌딩 하나 세울까 해. 아무래도 그리드랑 가까운 곳에서 지내고 싶어.”
“나도 그럴까 생각 중이었는데. Satisfy를 플레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태권도에 열중하고 싶었거든.”
“난 한국 여자가 마음에 들더라…”
지슈카와 레가스, 그리고 폰은 한국으로 이주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불법 도박으로 떼돈을 벌었던 차인 체다카 길드원들도 대부분 그들을 뒤따랐다. 즐거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뒤늦게 접한 유라도 영우의 빌딩 바로 옆에 빌딩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지슈카를 경계하는 것이다.
이후.
영우와 유라, 그리고 체다카 길드원들 덕분에 아직 번화하지 못했던 서울의 한 위성 도시 특정 구역이 초호화 빌딩단지로 변모해버렸다.
그리고 영우는 기겁했다.
직장가입자가 아닌 지역가입자로서 수익비례 건강보험료와 연금보험료, 그리고 소득세를 비롯한 토지세, 건물세까지 통보 받게 된 탓이었다.
안 그래도 Satisfy의 골드를 현금으로 환산하기 위해서는 아이템 거래 사이트를 거쳐 수수료를 떼야만 했던 그리드의 입장에선 세금 폭탄까지 맞자 피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한동안 적자에 허덕이게 됐다.
유라에게 유능한 세무사를 추천 받기 전까지는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아 원형탈모까지 앓을 지경이었다.
유바다칸은 하켄 왕국에서 가장 발전한 도시 중 하나다.
막대한 자본력과 유능한 정치가들의 내정 덕분에 이상적인 인프라를 구축할 수 있었던 그곳은 인구가 무려 7만을 초과하고 있었다.
특히 많은 사냥터를 보유했던 터라 유동 인구도 많았다. 도시 내 시장들이 항상 북새통을 이루었다. 덕분에 경제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했다.
매달 세금을 150만 골드 이상씩 거두어들이는 이 부유한 도시의 주인?
NPC가 아닌 유저다.
다름 아닌 지발이었다.
“깔깔깔! 그리드를 엄청나게 얕보더니만, 꼴이 아주 우습게 됐네?”
유바다칸 성.
스네이크 길드의 12번째 간부이자 최대 물주인 아스카가 지발을 비꼬았다.
“나와 블랙테디에게는 고작 그딴 놈에게 당했냐면서 핀잔주더니, 정작 너는 뭐야? 비룡 부대를 통솔하면서 고양이 한 마리한테 탈탈 털리는 모습, 아주 재미있게 잘 봤어! 깔깔깔!”
그리드가 교황 드레비고를 레이드한 직후.
당시 체다카 길드원이었던 아스카는 블랙테디, 박스, 토반과 함께 그리드에게 싸움을 걸었다가 처참하게 패배한 전력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 탓에 그녀는 지발에게 쭉 우습게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고 보니 어떤가?
그리드는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지발도 큰 코 다쳤다.
속이 후련하다.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린 듯하다.
아스카는 웃음을 그치지 못했다.
“그렇게 무시하던 상대에게 혼쭐 난 기분이 어때? 응?”
“아스카, 좀 적당히…”
연신 비꼬는 아스카를 박스가 제지하려는 순간이었다.
“미안했다.”
지발이 아스카에게 정중히 사과했다.
“내가 그리드를 너무 과소평가했었다. 그래서 덩달아 너까지 우습게봤던 점, 진심으로 사과하마.”
아스카도 속 좁은 인물은 아니었다.
13명의 간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