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빨-50화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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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50화 (9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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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템빨 9권 ======================================= 까앙! [화석을 획득하였습니다.] 그리드가 헬가오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동안 쉬지 않고 곡괭이질 하던 극검이 드디어 화석 채광에 성공했다. ‘해냈다!!’ 땅속 깊숙이, 아주 단단하게 박혀있던 빨간색 돌덩어리가 쏙~ 하고 빠져나오는 순간 극검은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콧등에 몇 년 동안 축적되어있던 커다란 피지덩어리를 한 번에 쫙! 뿌리까지 뽑아낸 느낌이랄까? “아싸! 성공이다! 화석을 채취했어!!” Satisfy를 1년 반 동안 플레이하면서 온갖 시련을 견뎌내고 경험을 쌓으며 통합랭킹 16위로 등극할 수 있었던 극검. 사냥을 통해서 레벨을 올리거나 득템을 하고, 강력한 보스를 레이드하거나 적대 세력과 싸워 이기는 방식으로 게임의 재미를 느껴왔었던 그가 이번에 처음으로 경험한 채광을 통해 또 다른 형태의 재미에 눈을 떴다. ‘광물 뽑아내는 순간 느껴지는 쾌감이 보통이 아닌데, 이참에 채광 스킬을 배워볼까?’ 성취감에 휩싸여 진지하게 고려해본 극검이 그리드에게 방금 캔 화석을 흔들어보였다. “어때! 잘했냐!!” 헬가오와 대치하고 있던 그리드가 엄지를 척하니 세웠다. “잘했어요.” “오우!” 신난다. 깐깐하게 굴던 녀석에게 칭찬 받았다. 기분 좋아진 극검이 헤실헤실 웃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지금 나 뭐하는 거야?’ 통합랭킹 16위이며 은기사 길드의 마스터인 자신이 족히 10년 이상 어려보이는 연하에게 칭찬 받았답시고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고 있다니? ‘정신 차리자.’ 최초로 등장한 레전드리 클래스, 파그마의 후예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필요이상으로 들뜬 듯하다. 헛바람 들어간 마음을 진정시킨 극검이 그리드와 헬가오를 차례대로 관찰했다. 그리드는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반면 헬가오는 상처투성이였다. 심지어 양손을 잘리기까지 했다. ‘굉장하다.’ 평균 레벨이 140 이상인 은기사 길드의 정예 200명을 순식간에 도륙한 저 무지막지한 괴물을 단신으로 저 지경까지 몰아붙이다니? ‘레전드리 클래스의 위엄…’ 극검은 4개월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바이란 전투를 회상해보았다. Satisfy에 존재하는 무력집단 중 최강이라 일컬어지던 체다카 길드를 수세까지 몰아붙였던 야탄교의 대공습. 당시 길드원들과 호프집에 모여 TV중계를 시청했던 극검은 체다카 길드가 그대로 전멸하리라 예측했었다. 야탄의 종 니베리우스와 발락이 압도적으로 강한 것으로 모자라 숫적으로도 열세였으니, 체다카 길드는 누가 봐도 소생할 희망이 없어 보였다. 한데 그때 한 명의 사내가 홀연히 등장했다. 반트너에게는 갑옷을, 툰에게는 무기를 던져줌으로서 전장의 균형을 맞춘 그가 니베리우스에게 ‘파그마의 검무’라는 스킬을 사용한 순간. 극검은 피가 끓어오름을 느꼈고 호프집을 가득 채우고 있던 사람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그 순간 지구 전체가 들썩였다고 표현해도 전혀 과장이 아닐 것이다. 전투가 끝난 후. 파그마의 후예는 강력한 아이템을 무장하고 있는 반면 컨트롤이 취약하다며 조롱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으나 극검의 생각은 달랐다. 알아본 바, 파그마라는 인물은 뛰어난 검사이기도 했지만 근본은 대장장이라지 않던가? 파그마의 후예는 직업 특색을 살려서 훌륭한 아이템을 제작, 무장하여 자신에게 적합한 방식으로 강함을 표출하였으니 올바른 것이며 조롱해선 안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실제로 만나게 된 파그마의 후예는 여전히 직업 특색을 잘 살리고 있었다. 레전드리 등급으로 예측되는 방어구와 무기, 그리고 스스로 움직이는 7개의 황금 칼날과 사기적인 회복 스킬이 귀속되어 있는 듯한 반지까지. 비록 컨트롤 실력은 떨어질지라도 템빨로 무장한 그는 네임드급 랭커들과 비교해도 손색없을 강함을 선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헬가오의 저력은 끝이 없었다. 양손을 잃고도 맹공을 펼쳐서 그리드를 몰아붙이기 시작하는 그를 보고 여유를 버린 극검이 곡괭이를 고쳐 쥐었다. ‘서두르자. 아직 채취해야할 화석이 2개나 남았다.’ 그리드는 Satisfy 약소국인 대한민국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애국자 극검은 기필코 그리드를 도와 이번 레이드를 성공시키고 싶었다. 무럭무럭 성장하여, 언젠가 대한민국국민들을 열광시켜줘야 할 그리드가 벌써부터 좌절을 맛보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가 넘어야할 산은 아직도 많으니까. “채광을 시작한다앗!” 까앙! 까앙!! 새로운 화석을 발견하고 곡괭이질을 시작하는 극검! 이 순간 그는 극검이 아닌 극괭이였다. *** “불안해… 불안하다.” 바이란 내성의 휴게실. 체다카 길드의 참모 토반은 좌불안석이었다. 사냥, 혹은 업무를 마친 뒤 돌아와 쉬고 있던 길드원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도대체 왜 그래? 정신없게.” 머리를 부여잡은 채 같은 자리만 빙글빙글 맴돌던 토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석을 채광하러간 그리드가…” “그리드가 뭐?” “…자기만 믿으라는 말을 2번이나 했다.” 코크로 섬으로 떠나기 전에 1번. 그리고 코크로 섬에 도착한 후 1번. 분명히 2번이었다. 까드득. 초조해진 토반이 손톱을 깨문다. 그리고 길드원들은 커다란 충격을 받고 있었다. “그리드가…” “자기만 믿으라는 말을 2번이나 했다고?” “허, 최악이군.” 야탄교의 대규모 공습을 막아낸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아이템 제작에 투자한 그리드가 지난 4개월 동안 ‘길드원들에게’ 제작해준 아이템은 총 142개였다. 그리고 그 142개의 아이템 중 25개가 노말, 84개가 레어, 30개가 에픽, 3개가 유니크 등급으로 완성됐다. 단순히 운이 나쁜 건지, 아니면 그리드의 주장대로 운영자의 농간인 것인지. 길드 가입 초창기엔 비교적 높은 확률로 에픽 이상 등급의 아이템들을 제작했었고, 심지어 2개의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기도 했던 그리드가 지난 4개월 동안은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거린 것이다. 그가 제작하는 아이템은 성능이 20퍼센트 이상 상향되기 때문에 레어 등급만 되도 충분히 쓸만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길드원들의 입장에서는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노말 아이템의 주인이 된 길드원들은 피눈물을 흘렸다. 설마 전설의 대장장이가 노말 아이템을 제작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들의 실망감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컸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드가 노말 아이템을 제작하기 전마다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음을 눈치 챘다. 그건 바로 ‘나만 믿어’였다. 그리드가 ‘이번엔 반드시 레전드리 등급을 띄울 것 같다’면서 ‘나만 믿어’라고 할 때 마다 꼭 노말 등급의 아이템이 만들어졌었다. 그렇다보니 길드원들은 그리드의 ‘나만 믿어’라는 발언을 들을 때마다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게 되었고, 실제로 그리드의 ‘나만 믿어’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일이 많았다. 한데 이번에 또… “자기만 믿으라니…” 불의 방패를 제작하기 위해서 필요한 화석은 총 3개. 과연 그리드가 3개의 화석을 채취해올 수 있을까? 아무래도 아닐 것 같다. 토반은 슬펐다. 그의 불길한 예감은 대부분 적중해왔기 때문이다. 다른 길드원들도 난색을 표했다. “불의 방패를 제작하지 못할 경우… 피닉스 레이드는 다음으로 미뤄야하는 건가?” “아무래도 그래야겠지. 메인탱커가 버텨주지 못하는 레이드를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니까.” 초상집 분위기다. 템빨로 무장하여 각성된 숲의 수호자를 쉽게 레이드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게 된 만큼, 이제는 더 상위 등급의 보스 몬스터를 레이드해보자며 의욕으로 불타올랐던 길드원들이 허망함에 휩싸였다. *** 코크로 섬 던전 4층. 주르륵. 헬가오의 절단 된 손목들로부터 질척하고 뜨거운 피가 줄줄 흘렀다. 치이익! 떨어진 피가 지면을 태우자 새카만 연기와 역겨운 냄새가 발생했다. 인상 쓰며 코를 막은 그리드가 제안했다. “악취가 진동해서 그러는데, 지혈이라도 해줄까?” “닥쳐라!” 어느새 온몸이 상처투성이다. 상급 마족 피우다스의 육신은 헬가오의 생각 이상으로 연약했다. 그리고 벌써 2개째 화석을 채취당하며 헬가오 본인의 마력도 약화되고 있었다. 그를 상징하는 순수한 흑색 불길 중 절반 이상이 비취색으로 변질되었을 지경이다. 낭패다. ‘내가 인간 따위에게 또 이런 치욕을 겪게 될 줄이야…!’ 검성 뮐러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뮐러가 죽고 100년여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 또 다시 특별한 인간이 등장했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잠재력이라는 것, 다른 대악마들의 말대로 무시해선 안 되는 것이었다. ‘또 다시 인간에게 당했다가는 지옥에서 한껏 조롱당하게 될 것이다.’ 결코 이대로 물러날 순 없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소리친 헬가오가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절단 된 손목에서부터 피가 쏟아지더니 그리드를 덮쳤다. [1,8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1,79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고작 핏방울만으로 데미지를 입혀? 빌어먹을 괴물 새끼!’ 당황한 그리드가 움찔하는 사이, 헬가오는 상처부위를 스스로 불태워서 지혈하고 있었다. 그리고 숨을 턱 막히게 만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증오를 표출했다. “네놈의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 영원히 내 노예로 삼아주마!!” 콰콰쾅!! 헬가오의 전투 방식이 바뀌었다. 양손이 멀쩡했을 때는 지팡이를 주무기로 사용하며 열풍과 지옥불을 보조 공격 용도로 사용했던 그가, 양손을 잃은 지금은 오로지 열풍과 지옥불만 발사하며 거리를 벌리고 마법사처럼 싸웠다. 퍼퍼퍼퍼펑!! “윽!” 그리드는 피하기 급급했다.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고 난처해하는 그를 보면서 헬가오는 속이 다 후련해졌다. ‘그래, 저놈은 검사이니 차라리 이렇게 거리를 벌리고 싸우는 편이 내게 유리하군.’ 헬가오는 처음 등장했을 때보다 2배 이상 약해진 상태였다. 하지만 인간의 기준으로 봤을 때 그의 마력은 여전히 무한에 가까웠다. 지옥불을 0.3초 간격으로 생성, 계속해서 발사하였으니 마치 태양에너지를 독점하고 있는 레이저포를 보는 듯했다. “어서 잿더미가 되란 말이다!!” 쿠콰콰콰콰콰쾅!! 일직선으로 날아오는 3줄기의 화염! 공기를 억누르는 열풍의 방해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생겨있던 그리드는 피하기가 난처했다. 그러자 파브라늄이 나섰다. 촤촤촤촤촤촤촥!! 그리드의 전면으로 결집한 7개의 황금 칼날이 세모꼴 방패의 형상을 갖췄다. 쿠콰콰콰쾅!! 화염과 충돌한 황금 방패! 부르르, 경련하며 경직되는 그 방패 뒤에 숨어서 한숨 돌리고 있노라니, 지면에서부터 솟구친 열풍에 의해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른다. 허우적거리는 그리드의 심장을 겨냥한 헬가오가 단언했다. “너는 곧 죽는다.” 콰아아아아앙!! [3,9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4,15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8,87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아오!” 털썩! 실컷 얻어맞은 그리드가 지면에 널브러졌다. 그는 굉장히 당황하고 있었다. ‘2라운드 KO승은 개뿔, 손을 괜히 잘랐다. 차라리 지팡이 휘둘러댈 때가 상대하기 더 편했어.’ 극검이 화석을 채취한 이후 헬가오는 확실히 약해졌다. 지옥불의 피해량부터가 눈에 띄게 하락했다. 하지만 여전히 강했다. 심지어 전투력은 아직까지도 측정불가다. ‘거리를 좁혀야하는데…’ 초(超)를 사용하면 원거리에서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초(超)의 지속 시간은 30초에 불과했다. 비장의 공격수단으로 아껴둬야만 했고, 확실히 끝장을 내기 위해서는 접근해서 싸우는 편이 이상적이었다. 하지만 헬가오는 화염을 발사함과 동시에 열풍을 제어하고 있었으므로 거리를 좁힐 방안이 쉽사리 떠오르질 않았다. 화르르륵! 상처 입은 그리드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는 사이, 헬가오의 주변으로는 칠흑의 불꽃 구체가 계속해서 생성되고 있었다. 순식간에 30개의 구체를 완성시킨 헬가오가 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 이걸로 끝이다!!” 퍼퍼퍼퍼퍼퍼펑!! 30개의 불꽃 구체가 동시다발적으로, 온갖 궤도에서부터 쏟아져온다. 단 7개의 황금칼날만으론 모든 불꽃 구체를 방어하는 것이 실질적으로 불가능해 보였다. ‘피해는 감수해야겠군.’ 판단한 그리드가 벨트에서 꺼낸 3개의 표창을 던졌다. 퍼퍼펑!! 그리드가 서있던 자리에 자욱한 안개가 펼쳐졌다. 그리고 30개의 불덩어리들이 안개 속으에 직격하며 일제히 폭발을 일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윽!” 구석에서 곡괭이질하고 있던 극괭이… 아니, 극검이 엉덩방아 찧고 말았다. 거대한 폭발로 인하여 던전 전체가 들썩인 여파다. 그리드가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본 극검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자욱한 연기가 걷히고 드러난 폭발 지점. 움푹 파인 그곳에 그리드는 온데간데없었다. “설마…” 조금 전 공격으로 인해 죽어서 잿빛으로 화해버린 것인가? “안 된다…!” 극검이 좌절했다. 그리고 헬가오는 미친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크하하하하하!! 바퀴벌레 같던 놈이 드디어 잿더미가 되어 소멸하였구나!!” 인간의 나약한 육신 따위가 30개 지옥불의 폭격을 얻어맞고도 멀쩡할 리 만무했다. 제아무리 뛰어난 방어구를 무장하고 있고, 황금 칼날들의 비호를 받는다지만 한계가 있는 법이다. 헬가오는 그리드가 죽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한데. “…뭣!!” 웃음을 뚝 그친 헬가오가 갑자기 등 뒤로 시선을 돌렸다. 던전 중앙. 그리드가 잿더미가 된 이후 오직 헬가오 홀로 존재하던 그곳에. “…파그마의 검무.” 회색 구름 문양의 자수가 놓여있는, 백색 후드짚업을 뒤집어 쓴 그리드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33인의 대악마 중 하나인 헬가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 정도의 증오와 살의가 백광이 맴돌고 있는 푸른 대검 끝에 집약되었다. “살(殺).” 푸우욱!! 헬가오의 가짜 육신에 또 하나 커다란 상처가 아로새겨졌다. 정확히 24초 전. ‘염병.’ 순식간에 수십 개의 검은 불꽃을 생성한 헬가오를 목도한 그리드가 위축되었다. 개당 3,700에서 4,200의 데미지를 입히는 저 불덩어리들의 대량 폭격을 무슨 수로 감당하란 말인가? ‘29, 30… 설마 저걸 다 한 번에 날릴 생각은 아니겠지?’ 헬가오가 쏘는 불꽃은 속도도 빠르고 폭발 범위도 넓었다. 30개의 불꽃이 한 번에 발사되기라도 했다간 그리드로서도 완벽히 피하고 방어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웠다. ‘최악의 경우 무적 패시브에 의존해야할 수도 있다.’ 현실적으로 생각하며 방어에 집중하려던 그가 찰나지간에 생각을 바꿨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들었던 것 같은데.’ 퍼퍼퍼퍼퍼펑!! 시야를 가득 매우며 날아오는 30개 불덩어리들 사이로 그리드가 시선을 집중시켰다. 암사자와 인간 남성의 얼굴을 섞어놓은 듯한 형상. 기세가 약해진 불길 너머 엿보이는 헬가오의 기괴한 얼굴에는 짙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저 괴물 자식, 이겼다고 확신해서 방심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숱한 전투경험을 통해 방심이야말로 최고의 허점을 노출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던 그리드. 그가 지금의 위기에 소심하게 대처하기보다 과감하게 맞서리라 결심했다. ‘어차피 무적 패시브에 의존해야 한다고 가정하면, 방어하기보다 반격하는 편이 훨씬 더 현명하니까.’ 위기를 기회로 극복한다. 저레벨 시절에는 전(前) 윈스톤 영주의 기사 레오와 케샨 협곡의 몬스터들. 중레벨 시절에는 말락서스와 미궁의 파수꾼. 이후에는 샤이 일당과 교황, 각성한 숲의 수호자와 니베리우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강적들을 물리치며 승부사적 기질을 갖게 된 그리드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모했다. ‘피해는 감수해야겠군.’ 퍼퍼펑! 안개, 혹은 독안개가 생성되면 좋고, 정 안되면 단순한 폭발만 발생해도 좋다. 헬가오의 시야를 잠시만 가려주면 된다. 그렇게 바라고 발치에 집어던진 케넨의 표창 3개가 자욱한 안개를 발생시켰다. ‘좋은 징조다.’ 회심의 미소를 그린 그리드가 파브라늄에게 명령했다. ‘나를 최대한 보호해라.’ 명령을 받든 7개의 황금 칼날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때마침 안개를 꿰뚫고 도달해온 칠흑의 불덩어리들을 검면으로 방어했다. 쿠콰콰콰콰쾅!! 월등한 운동성을 발휘하는 황금 칼날들이었으나 30개나 되는 불덩어리들을 모조리 방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칼날들의 방어벽을 돌파한 불덩어리들이 그리드에게 직격했다. 콰콰콰콰콰콰콰쾅!! [3,87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92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치명적인 일격을 당했습니다!] [8,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크윽!” 피해를 최소화시키고자 신성의 방패를 무장하였으나 방패로 보호할 수 있는 부분은 한정되어 있었고 생명력이 급격히 떨어졌다. 벌컥벌컥. 서둘러 물약을 복용한 그리드가 후드짚업을 꺼내 착용했다. 스으윽. 전설의 제단사 크루제가 제작했던 투명 망토의 고유기능을 완벽하게 재현한 후드짚업! 연달아 발생하는 폭발 속, 그리드의 몸이 완벽하게 투명해졌다. 그리고. “크하하하하하!! 바퀴벌레 같던 놈이 드디어 잿더미가 되어 소멸하였구나!!” 은신상태에서 이상적인 단검을 착용, 신속한 몸놀림을 사용한 그리드가 속 시원하다는 듯이 웃으며 떠드는 헬가오를 향해서 내달렸다. 약화된 헬가오의 감지능력은 처음 등장했을 때와 달리 굉장히 떨어져있었고. [지옥불의 주인, 헬가오에게 기척을 감지 당하였습니다.] [은신이 해제됩니다.] “…뭣!!” 헬가오와 거리를 3미터 이내로 좁힌 시점에 와서야 기척이 감지당하고 은신이 해제된다. “파그마의 검무.” 이미 실패작을 무장하고 붉은 벼락을 소환, 대장장이의 분노까지 사용한 상태였던 그리드가 경악하는 헬가오의 심장을 노리고 최강의 스킬을 전개했다. “살(殺)!!” 푸우욱-! [크리티컬!] [대상에게 538,0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붉은 벼락 소환구와 대장장이의 분노를 사용하고 +9실패작을 무장한 상태로 발휘한 살(殺)에 치명타까지 적용되자 압도적인 데미지가 위용을 뽐냈다. 10분의 3만 손실되어 있던 헬가오의 생명력 게이지가 순식간에 절반까지 떨어졌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만족하지 못했다. 성스러운 빛의 장갑과 실패작 둘 모두에게 귀속되어 있는 ‘5연격’스킬이 단 1개도 발동하지 않았음에 실망한 것이다. ‘5연격이 둘 다 발동해서 10연격이 됐다면 원킬 냈을 수도 있었겠는데…’ 아쉽지만 지난 일이다. 접근에 성공한 것에 의의를 둔 그리드가 아쉬움 따위 금세 떨쳐버렸다. “쿨럭…! 이, 이 빌어먹을 놈이…!” 더 이상 간과할 수 없는 피해를 입고 말았다. 위험을 감지한 헬가오의 기괴한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촤악! 헬가오의 가슴을 관통하고 있던 실패작을 참혹하게 비틀며 뽑아낸 그리드가 선언했다. “이제 네가 당할 차례다.” 전투가 지속되면서 초연(超聯)을 제외한 모든 스킬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돌아와 있었다. 그중 살(殺)은 방금 사용했지만 아직 연(聯)이 남아있었다. “파그마의 검무, 연(聯)!” 피핏! 피피피피피피피피핏!! 그리드가 파그마의 검무 중 유일하게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 광속의 검술이 수십 가닥의 검광을 그렸다. [파그마의 검무, 연(聯)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피해량이 상승합니다. 대상을 가격하는 횟수가 5회 추가됩니다.] <연(聯)> Lv.3 나비의 날갯짓처럼 현란한 검무를 춥니다. 단일 대상에게 최대 1,100퍼센트의 피해를 입힙니다. 스킬 사용 조건:도검류 무기 장착 스킬 마나 소모:500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00초 교황을 레이드했던 시점이 무려 5개월 전이다. 그 후 지금까지 수백 번도 더 사용해왔던 연(聯)의 레벨이 드디어 하나 상승한 것이다. 그리드가 희열에 찬 미소를 지었고, 헬가오의 얼굴은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크아아아아아악!!” [대상에게 154,6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제아무리 2번이나 약화된 헬가오라지만 고작 15만대 피해량으로는 생명력을 많이 깎지 못했다. 곧바로 태세를 정비한 헬가오가 그리드를 떨어뜨려놓기 위해서 열풍을 사방으로 방출했다. “어딜!” 기껏 힘들게 거리를 좁혀놓고 헬가오의 의도대로 당해줄 그리드가 아니었다. 파그마의 검무, 파(波)를 발동시킨 그가 열풍을 상쇄시켜버렸다. 그리고 이어서 제(制)를 전개, 헬가오를 3초 동안 아무 것도 못하게 만들어버렸다. ‘돌이켜 보면, 초연(超聯)의 융합은 연(聯)의 레벨이 2가 된 후에나 가능했었다.’ 이 순간 그리드의 두뇌는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제(制)의 영향을 받아 위축되어 뒷걸음치고 있는 헬가오를 향해, 그는 2개의 검무를 연속해서 펼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聯)의 레벨이 3이 된 지금, 어쩌면 초(超)가 아닌 다른 검무와의 융합도 가능해지지 않았을까?’ 시도해본다. 우선은 가장 기대되는 살(殺)과의 융합. 그게 안 되면 이어서 파(波)와 융합해볼 작정이었다. “파그마의 검무…!” 그리드가 춤사위를 펼치자 백광이 맴도는 푸른 대검의 끝에 또 한 번 증오와 살의가 집약되기 시작했다. 한편, 제(制)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 헬가오가 왼손에는 불꽃을, 오른손에는 열풍을 소환한 뒤 두 기운을 하나로 합치고 있었다. ‘또 다시 저 무식한 기술에 당할 수는 없다.’ 이를 악 문 헬가오가 불꽃의 소용돌이를 직선으로 방출시켰다. 쿠콰콰콰콰콰콰쾅!! 지면을 짓뭉갬과 동시에 불태우고 지나온 불꽃의 소용돌이가 순식간에 그리드를 덮쳤다. 그리고 그리드의 춤사위가 끝났다. “살(殺), 연(聯).” 이 스킬 융합에 실패하게 되면, 현재 생명력이 바닥을 기고 있는 그리드는 불꽃의 소용돌이에 정통으로 얻어맞고 무적 패시브에 의존해야하는 상태에 직면할 운명이었다. ‘제발…!’ 1초도 안 되는 시간. 그리드는 살연(殺聯)의 융합이 성공적으로 이뤄지기만을 기원했고, 헬가오는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그리드가 죽어버리길 바랐다. 그리고. 콰작! 그리드가 힘껏 뻗은 실패작과 불꽃의 소용돌이가 충돌했다. 휘몰아치는 소용돌이에 집어삼켜진 실패작의 백광이 어느 때보다 더 강렬하게 번쩍이고 있었다. ‘해냈다!’ 그리드가 환희했다. 성공한 것이다. [새로운 스킬 융합에 성공하였습니다.] [융합 스킬 살연(殺聯)이 생성되었습니다.] [새로운 스킬 융합에 성공하여 지력이 10 상승합니다.] <살연(殺聯)> 증오와 살의를 표현한 검무와 날갯짓의 현란함을 표현한 검무를 하나로 승화시킨 검무입니다. 연격이 묵직해졌으므로 현란함은 지극히 떨어지지만 증오와 살의가 깃들어 강력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매 타격당 1500퍼센트{현재 살(殺)의 피해량-300%}를 입히는 연격을 최소 3회에서 최대 7회까지 무작위로 전개합니다. *이 스킬은 살(殺), 연(聯)과 재사용 대기 시간을 공유하지 않습니다. *7회 타격 발동 시 스태미나가 고갈되니 주의하십시오. 스킬 마나 소모:현재 마나의 90퍼센트. 스킬 재사용 대기 시간:1시간. 약화버전 살(殺)을 최소 3번 보장해주는 스킬이다. 살(殺)에 5연격 스킬이 적용되는 것보다 위력은 못할 수 있겠으나, 5연격 스킬은 의도대로 사용하는 것이 불가능한 반면 이 스킬은 의도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 크나큰 장점이다. 두근! 두근! 만족감을 넘어 전율한 그리드의 심장이 격동했다. 그리고 살연(殺聯)의 최초 검격이 불꽃의 소용돌이를 힘으로 짓눌러 파쇄시키고 있었다. 쩌정! ‘아직까지도 저만한 힘이 남아있었다고?’ 현재 그리드는 분명히 넝마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력적인 공격을 연달아 펼치자 헬가오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놈이 정녕 인간인가?’ 끈질긴 생명력. 과연 뮐러와 동급이기를 자처할만한 녀석답다. 이제 그리드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헬가오가, 산산이 흩어지는 불꽃 소용돌이의 잔재를 꿰뚫고 닥쳐온 푸른 대검에 1회. [215,0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2회. [219,8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3회. [214,6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4회. [220,1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5회. [218,7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6회. [219,200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끝? 아니다. 중국집만 봐도 신장개업한 가게는 서비스가 좋은 편이지 않은가? 짜장면 1그릇만 시켜도 군만두 2개를 서비스로 주는 집이 허다하다. 그리드 또한 새로운 스킬 융합에 성공한 대가로 잔뜩 서비스 받게 되었다. [실패작의 옵션 효과로 인하여 ‘5연격’ 스킬이 발동합니다.] 헬가오에게 계속해서 실패작을 쑤셔 넣고 있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연달아 갱신됐다. [대상에게 1,057,3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성스러운 빛의 장갑의 옵션 효과로 인하여 ‘5연격’ 스킬이 발동합니다.] [크리티컬!] [대상에게 2,230,900의 피해를 입혔습니다.] “……!” 헬가오는 더 이상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눈깔이 뒤집혀진 녀석의 전신에 휘둘러져 있던 칠흑의 불길은 이미 진즉부터 비취색으로 변해있었고 이제는 심지어 완전히 소멸되어갔다. 최강의 스킬이 최상으로 발동하고 덩달아 최강 아이템들의 옵션 스킬들까지 발동하여 순식간에 헬가오를 죽음까지 몰아넣은 그리드. 그가 무릎 꿇는 헬가오에게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나는 뮐러와 동급이다.” 피식. 콧방귀 뀐 헬가오가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그리드라는 이름의 이 인간 놈, 전투 중에 성장하고 있음을 똑똑히 보고 느꼈다. 필시 훗날에는 뮐러의 발끝 정돈 따라가게 될 것이다. “내가 졌다. 인간들의 영혼을 섭취하여 힘을 키우고 봉인당한 육신을 되찾겠다던 목적, 당분간 또 미뤄둬야겠구나.” 패배를 속 시원하게 인정하는 헬가오의 육신. 정확히는 마족 피우다스의 육신이 스멀스멀 안개로 소멸해갔다. 그리고 동시에. 퍼펑! 퍼퍼펑! 헬가오의 현현과 함께 생성되었던 화석들 중 아직 채취하지 못한 2개의 화석이 폭발하며 산산 조각났다. “화, 화석이?” 넋을 잃은 채 전투를 지켜보다가 곡괭이질을 잊고 있던 극검이 당황했다. 도끼눈 뜨고 그를 노려보는 그리드의 시야에 알림창이 갱신되고 있었다. [인간의 영혼을 탈취해온 지옥불의 주인, 헬가오를 패퇴시켰습니다.] [멤피스의 알을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118,411,132를 획득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한 번에 무려 11개의 레벨이 올랐다. 이로서 그리드의 레벨은 253이 되었다. 이는 통합랭킹 300위권 유저들과 비견되는 레벨이었지만 체다카 길드 내에서는 여전히 가장 낮은 레벨이었다. 더군다나 보상이라고는 이상한 아이템(?)하나가 전부다. “결국 화석도 2개밖에 못 캤고… 개 손해네.” 여태까지 만난 보스 중 가장 강력했던 헬가오. 그를 처치하고 얻은 대가치고는 이렇다 할 수확이 없자 맥빠진 그리드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태미나 0으로 고갈 된 탓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달려온 극검이 그를 부측했다. “괜찮냐?” “괜찮냐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그리드가 극검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안 괜찮다면 어쩔 건데요? 내 대신 화석 구해다가 주기라도 할 겁니까?” “당연하지.” 자신감 넘치게 대답한 극검이 직접 채취한 화석을 꺼내보였다. “이걸 네게 주겠다.” 화석의 가치는 시세를 매기기 어려울 정도로 높았다. 하지만 그리드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랭킹 하락을 면할 수 있었던 극검은 고마운 마음으로 그 귀한 물건을 순순히 그리드에게 넘겼다. “하나 더 필요한데…” 냉큼 화석을 받아 챙긴 그리드가 연신 투덜거렸다. “에휴… 헬가오를 혼자서 10분도 넘게 묶어놨는데, 어떻게 그 사이에 화석을 1개밖에 채취하지 못한 거지? 그 레벨 될 동안 곡괭이질 하나 제대로 못하고… 상당히 한심하네.” “…….” 극검은 통합랭킹 16위다. 현실과 Satisfy. 두 세계 모두에서 성공적인 삶을 구축한 통합랭킹 16위 극검에게 면박주는 인물은 흔치 않았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니… 17년 전 군대 선임들 이후 너 같은 남자는 처음이다, 그리드.’ 극검은 그리드의 낯선 대우에 적응이 되질 않았다. 하지만 딱히 기분 상하지도 않았다. 애국심이라는 마약에 도취되어 있는 그에게 있어서 그리드는 찬사의 대상이었으니, 그리드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더라도 무조건 예쁘게 보였다. “득템은 좀 했고?” “전혀요.” 그리드가 새카만 알을 꺼내보였다. “드롭템이라고는 이게 전붑니다. 심지어 돈도 1실버조차 못 얻었어요.” “콩?” “알입니다.” “뭐? 이 쥐똥만한 게 알이라고?” 극검이 놀랄만도 했다. 새카만 알의 크기는 메추리알보다 2배 이상 작았으므로 알이라기보다는 콩이나 작은 구슬처럼 보였다. 그리드가 멤피스의 알의 상세 정보를 공유해주었다. <멤피스의 알> 멤피스의 알입니다. 무게:1 극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허… 진짜 알이네? 그렇다면 이거 펫알 아니냐?” 지옥불의 주인 헬가오는 엄청난 강적이었다. 그가 드롭한 아이템이 하찮은 것일 리 없다. 극검은 이 검정색 알에서부터 멤피스라는 이름의 어마무시한 괴물이 부화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그리드의 생각은 달랐다. “멤피스가 뭔지 알아요?” “아니? 처음 듣는데?” “거봐요. 완전히 듣보잡인데 무슨 펫알이라는 겁니까.” Satisfy의 펫들은 주인에게 다양한 효과를 부여한다. 드물지만 경험치 획득량이나 아이템 획득률을 상승시켜주는 펫도 존재했기 때문에 유저들의 펫에 대한 관심도는 매우 높았다. 한국만 해도 Satisfy 펫 관련 프로그램이 여러 개 방영되는 판국이었으니, 그리드 또한 본의 아니게 펫에 대한 기본 정보와 상식을 습득하고 있었다. 한데 멤피스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더군다나. “이게 펫알이었다면 아이템 설명칸에 부화 방법이 서술되어있었겠죠.” 그리드의 지적이 예리했다. 모든 펫알에는 부화 방법이 간략하게나마 설명되어 있었다. 하지만 멤피스의 알에는 부화 방법이 서술되어 있기는커녕 ‘멤피스의 알입니다’라는 짤막한 설명이 전부였으니 펫알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백번 양보해서 펫알이 맞다하더라도, 고작 콩만한 알에서 부화할 펫 따위 기대도 안 됩니다.” 극검이 동의했다. “그것도 그렇다. 콩알만한 펫 따위 보나마나 볼품없을 테니 있으나마나겠지.” 입을 대빨 내민 그리드가 멤피스의 알을 인벤토리로 되돌려 넣었다. “대체 이 알의 정체가 뭔지, 길드원들한테 조사해달라고 부탁해봐야겠어요.” “나도 내 정보망을 이용해서 알아보도록 하마.” “고맙습니다.” 그리드는 딱히 기대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알이되 펫알이 아니라함은 단순한 요리재료에 불과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헬가오가 엄청난 녀석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스탯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영약쯤 되려나.’ 섭취 시 스탯을 영구적으로 상승시켜주는 영약은 일반 유저들에게 엄청 진귀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리드 같은 제작계열 직업군 유저들의 경우 아이템 제작 시 스탯이 상승했기 때문에 스탯 상승 영약에 큰 메리트를 느끼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에휴, 헬가오 그 빌어먹을 자식. 이딴 거 말고 장비 아이템을 드롭할 것이지.’ 헬가오보다 훨씬 더 약한 교황조차도 레전드리 세트 아이템을 3개나 드롭하지 않았던가? 그리드는 헬가오가 당연히 레전드리 아이템을 드롭하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최악이었으니 영 기분이 별로였다. ‘정확히 무슨 아이템인지를 모르겠으니 판매하기도 까다롭게 생겼고.’ 바닥에 드러누운 채 천정만 올려보고 있는 그에게 극검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나의 성으로 초대하마. 가서 맛있는 음식과 술 잔뜩 먹고 푹 쉬어.” 그리드는 의문이었다. “아까부터 나한테 꽤나 호의적이군요? 뭐, 바라는 거라도 있습니까? 헬가오가 드롭한 아이템은 거짓말 안치고 이게 전붑니다. 나눠줄 수 있는 것도 없어요.” “바라는 거라니? 너는 이미 내 목숨을 구해줬잖아? 단지 그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내가 당신네 길드의 사냥감을 가로챈 셈이 됐잖아요? 열 받을 텐데요.” “애초에 우리만의 힘으로는 해치우지 못했을 사냥감이다. 그러니 뺏겼다는 기분은 들지 않아. 네가 우리 길드의 통제구역에 함부로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거슬렸었지만 너, 한국인이라고 하지 않았냐? 최초의 레전드리 클래스 전직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 것만으로도 기쁘고 감사할 따름이다.” “별게 다.” 피식 웃은 그리드가 극검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 순간 극검의 표정이 서늘하게 굳었다. 그리드가 흠칫했다. ‘꿍꿍이속이 있었던 건가?’ 극검이 소리쳤다. “로그아웃해!” “갑자기 무슨?” “사쿠라 길드가 쳐들어왔다고 한다!” 은기사 길드원들의 부활 포인트는 코크로 성이었다. 그 탓에 헬가오에게 전멸 당했던 길드원들 전원이 코크로 성에서 부활했었다. 그리고 극검은 그들에게 굳이 여기까지 되돌아오지 말고 대기하고 있으라 명령을 내려놓은 상태였다. 한데 첩자가 있던 것일까? 최소한의 경계 병력밖에 남지 않은 이곳 상황을 어떻게 알고 사쿠라 길드가 쳐들어왔다는 길드 채팅이 떠올랐다. 이미 2층까지 진입했다고 한다. “놈들이 오늘 우리가 헬가오 레이드에 도전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대기하고 있었나보다.” “도대체 사쿠라 길드가 뭔데요?” Satisfy의 세력도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그리드였다. 그에게 극검이 간략하게 설명해주었다. “일본을 대표하는 3개의 길드 중 하나다. 다른 2개의 길드들과 달리 민족주의자들로만 구성되어있는, 매우 악질적인 놈들이지. 같은 일본인들조차도 기피할 정도다.” “그놈들이 당신네 길드에게 원한이 있고, 지금 당신을 해치우기 위해서 이리로 오고 있다, 이겁니까?” “그래.” 고개를 끄덕인 극검이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발도 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어서 로그아웃해라.” “당신은요?” “왜놈들을 상대로 도망치는 추태를 보일 순 없지. 길드원들이 달려오고 있다고 하니 그때까지 버텨보련다.” 일본인을 왜놈이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 사쿠라 길드를 민족주의자라 비방하는 극검 본인 또한 어지간한 민족주의자 같았다. ‘피곤하게 사는군.’ 그리드가 로그아웃을 시도했다. 하지만. [대악마 헬가오의 마력 잔재가 대기 중에 산재하여 있습니다. 방해로 인해 로그아웃이 불가능합니다.] “씨벌.” 빌어먹을 괴물 자식이 죽어서까지 엿을 먹인다. 그리드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살연(殺聯)을 사용한 여파로 스태미나가 고갈됐던 그의 현재 스태미나는 고작 60밖에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리고 60의 스태미나로는 채 1분도 싸우지 못할 것이다. 스태미나는 생명력과 개념이 다르기 때문에 엄청난 위기였다. ‘무적 패시브가 발동해봤자 스태미나가 0이 되면 손끝하나 움직이지 못 하니까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스태미나를 회복하는 포션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는다. 스태미나는 오로지 휴식을 취해야지만 서서히 회복됐고 음식을 섭취함으로서 회복 속도를 약간 빠르게 만들 수 있는 게 고작이었다. 한 마디로 엿 된 거다. 비상식적으로 높은 끈기 스탯 덕분에 스태미나의 제약을 거의 느끼지 못해왔었던 그리드에게 이런 형태의 위기는 생소한 것이었고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급한대로 육포를 입안에 쑤셔 넣은 그가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사쿠라 길드의 전력은? 가장 강한 놈들은 레벨이 몇이나 됩니까? 당신 혼자서 벌 수 있는 시간은 최대 몇 분이죠? 길드원들은 언제쯤 도착한답니까?” 극검은 Satisfy를 플레이해온 지난 세월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위기를 겪어본 바 있다. 하여, 그리드와 달리 침착할 수 있었던 그가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사쿠라 길드의 구성원은 약 180명이다. 마스터 요시무라는 궁사랭킹 2위, 통합랭킹 98위의 실력자고, 그를 제외하고도 통합랭킹 300위권에 들어가는 랭커가 8명 더 있다.” ‘만만찮은데?’ 그리드의 표정이 굳었다. 극검도 회의적인 예측을 했다. “길드원들이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최소 15분이 걸릴 테고, 나 혼자 놈들을 상대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은… 아무리 넉넉하게 잡아도 7분일까.” 꽈드득. 말하던 중 이를 악 문 극검이 그리드에게 소리쳤다. “굳이 도울 생각일랑 마라! 어차피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어서 로그아웃 해!” “…로그아웃 안 되는데요.” 레이드방은 본래 로그아웃이 안 된다. 하지만 그것은 보스가 존재하고 있을 경우의 이야기다. 보스를 해치운 뒤의 레이드방에서 로그아웃이 안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극검은 단단히 오해했다. “그리드… 너 또한 내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도우려는 거냐? 온전한 상태도 아니면서? 핫, 역시 한국인의 정이란…” “아니, 정 같은 소리하고 앉았네! 로그아웃이 안 된다니까 무슨 헛소립니까? 아저씨가 로그아웃 해 봐요! 진짜로 안 된다고!” 때마침 사쿠라 길드원들이 계단을 타고 우르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마른 침 삼킨 극검이 계속해서 헛소리를 지껄였다. “너는 내가 로그아웃하게끔 유도하려는 거구나. 괜한 수고 하지마라. 왜적들을 앞에 두고 로그아웃하는 추태를 보일 생각 없다고, 나는 분명히 말했다.” ‘왜적? 얼씨구, 놀고 있다.’ 그리드는 몰랐다. 극검이 어려서부터 존경해온 유일무이한 위인이 다름 아닌 이순신 장군이었음을. “왜놈들아! 오늘 네놈들의 피로 강을 만들어주마!” “흥! 극검! 오늘 이 땅에 피를 뿌리게 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네놈이다! 네놈에게 다케시마를 빼앗긴 원한을 오늘 비로소 되갚아주마!!” 사쿠라 길드원들 사이로 키 작은 사내가 나타나 소리쳤다. 통합랭킹 98위이자 지슈카 다음으로 활을 가장 잘 쏘기로 유명한 요시무라의 등장이었다. ‘사극 찍냐.’ 그리드는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고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은기사 길드와 사쿠라 길드. 이 두 세력, Satisfy 내에서의 한일전을 그 누구보다 본인들이 즐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시무라가 이죽거렸다.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을 보니 헬가오 레이드를 잘도 성공했나보군? 놈, 얼마나 득템을 했을지 모르겠다만 그 기쁨도 잠시일 것이다. 네가 얻은 모든 것을 지금 빼앗아주마.” 극검이 호통 쳤다. “가능할 성 싶더냐! 그리고 코크로 섬을 다케시마라는 너희 집 개 이름으로 부르는 짓은 이제 그만 관둬라!!” “흥! 고작 혼자인 주제에 사태파악을 못하는군!” 마치 일본사극 속 간신배처럼 비열한 미소를 짓는 요시무라! 굳은살 배긴 손가락으로 메기수염을 한 번 훑은 그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빌어먹을 조센징을 오늘 기필코 죽여 버려라!” “오오오!!” 수개월 전, 코크로 섬 쟁탈전 당시. 사쿠라 길드는 극검에게 엄청난 곤욕을 치렀었다. 오로지 극검 탓에 길드전에서 대패하였고 코크로 섬을 잃었으며 수많은 길드원들이 경험치 손실을 당했었다. 그때의 원한을 갚아줄 절호의 찬스다. ‘혼자 있는’ 극검을 향해 달려드는 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극검이 칼집에서 검을 뽑았다. “발검, 섬(殲).” 빛이 여러 번 번쩍였다. 그러자 선두에서 돌진해오던 사쿠라 길드의 중갑 기사 8명이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실력이 전혀 녹슬지 않았군!” 150레벨대 기사들을 일격에 빈사상태로 만들어버리다니, 과연 통합랭킹 16위의 위엄이다. 요시무라는 실로 감탄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에 긴장감은 조금도 엿볼 수 없었다. 이끌어온 180명의 길드원 중 고작 7명이 부상당했다고 해봤자 전황이 변할 리 만무했기 때문이다. 한편, 극검도 모르는 사이 후드짚업을 뒤집어쓰고 살금살금 자리를 피하고 있던 그리드가 흠칫 놀랐다. 해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배고파. “…?” -먹을래. “…….” 어린 소년, 혹은 소녀의 음성이었다. 환청은 아니다. 강한 탐욕이 깃들어 있는 이 목소리, 도대체 어디서부터 들려오는 것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그리드의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지옥의 제일 마수 멤피스가 탐욕으로 물든 인간들의 영혼을 감지하고 부화합니다.] [Satisfy 최초로 지옥 마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칭호, ‘지옥과 연이 닿은 자’를 획득하였습니다.] [생명력이 3,000 상승합니다.] [악마력 능력치가 개방됩니다.] “뭐?” “응?” 생뚱맞은 알림창들을 보고 놀란 그리드가 헛바람을 삼켰고, 그 소리를 듣고 놀란 요시무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뭐냐? 웬 놈이냐!” 자신을 제외한 모든 부하들이 10미터 전방의 극검과 사투를 벌이는 이때. 바로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요시무라는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이어 질겁했다. 아무 것도 없는 허공에서부터, 새카만 고체 같은 것이 길쭉하게 튀어나오더니만 쩌억! 커다랗게 입을 벌리는 게 아닌가? “히, 히익?” 간담이 서늘해진 요시무라가 반사적으로 활을 쏘려했지만 이미 늦었다. 커다란 입에 몸이 통째로 삼켜지고 말았다. [멤피스에게 영혼의 일부를 빼앗겼습니다.] [상태이상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3초 동안 주 능력치가 50퍼센트 하락합니다.] 스윽. 요시무라를 삼켰다가 뱉은 검은 고체가 어느새 고양이의 형상을 갖추고 있었다. 전형적인 페르시안 고양이었다. 한데 털은 검고 이마에는 조그마한 뿔이 솟아있었으며 등에는 작은 악마 날개 한 쌍이 달려있었다. 녀석이 낼름, 혀로 앞발을 핥더니 윙크했다. “안녕!” 뿔과 날개가 달린 것으로 모자라 말하는 고양이라니? 특히 보송보송한 털의 색상이 매력적이다. 온통 검지만 네 발의 털만 눈처럼 하얗다. “카, 카와이…” 고양이 애호가인 요시무라가 감탄을 넘어 감격했다. 그의 심정 같아서는 저 고아한 자태의 고양이를 현실로 데려가 집에서 키우고 싶었다. 그리고 고양이가 캬릉, 송곳니를 드러냈다. “맛있었어!” “나, 나니잇?!” 요시무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고양이의 등 뒤로 갑자기 웬 정체모를 사내놈이 나타난 탓이었다. 조금 전까지 아무도 없던 그곳에 마치 원래 존재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모습을 드러낸 그가 칠흑의 대검을 찔러왔다. “컥!” 워낙 불의불식간의 기습이었다. 그리고 민첩성이 50퍼센트나 하락하여 몸놀림이 느려진 상태였던 반면 상대는 너무 빨랐다. 피하지 못하고 크게 베인 요시무라가 단 일격에 3분의 2나 되는 생명력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마스타!!” 뒤늦게 마스터의 위기를 눈치 챈 사쿠라 길드원들이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목격할 수 있었다. 날아다니는 고양이를 대동한 악마를. 황금색 꼬리가 달린 적흑색 갑옷을 무장한 흑발의 정체모를 놈이 마스터의 목을 참혹하게 베어버리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통합랭킹 98위를 저렇게 손쉽게 해치우다니? 극검 하나만으로 힘든데 저런 괴물을 또 어떻게 감당하란 말인가? 대장을 잃은 사쿠라 길드원들이 황망해하며 후퇴했다. 그리드와 극검이 그들을 말릴 리 만무했다. 뱅글뱅글, 빠방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드러낸 채 그리드의 주변을 맴돌던 고양이가 즐거워했다. “내 주인은 살인자~~ 내 주인은 살인자~~ 라네~~~ 냥!” 섬뜩한 가사의 노래를 천진난만하게 부르는 이 고양이가 바로 지옥의 제일 마수 멤피스다. 영혼을 섭취한 대상의 능력치 중 일부를 빼앗아 주인에게 일시적으로 심어주는, 최강최악의 펫이었다. 그리드는 요시무라를 해치운 대가로 생소한 알림창과 마주하고 있었다. [악마력이 1 상승하였습니다.] <악마력> 마수와 교감할 수 있습니다. 수치가 높아지면 지옥에 출입이 가능해집니다. *이 능력치에는 능력치 포인트를 분배할 수 없습니다. “난 천국에 가고 싶은데.” 지옥이라는 어감이 썩 좋지 않다. 지옥? 결코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다. ‘지옥이라고 해봤자 헬가오 같은 놈들 밖에 더 있겠어?’ 악마라는 족속은 강해도 너무 강했다. 반면 드롭하는 아이템은 형편없었으니 두 번 다시는 싸우고 싶지 않았다. ‘아니, 드롭 아이템이 형편없다는 건 착각이었지.’ 그리드가 할짝할짝, 빨간 혀로 털을 정돈하고 있는 멤피스를 애정어린 눈길로 바라보았다. ‘이런 굉장한 펫을 드롭하다니… 헬가오 녀석, 과연 여태껏 만난 보스 중 가장 강했던 보스답다. 비록 화석은 2개밖에 채취하지 못했지만 녀석을 레이드한 대가로 엄청난 보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어.’ <멤피스> 지옥에 존재하는 수천 종의 마수 중 가장 강력한 종입니다. 성체의 전투 능력이 상급 마족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33인의 대악마들에게 사역마로서 가장 선호 받습니다. 하지만 번식능력이 부족하여 멸종 위기에 처해있는, 지옥의 천연기념물입니다. 무려 지옥의 천연기념물이란다. ‘이렇게 귀한 녀석을 듣도 보도 못한 잡것이라고 무시했던 몇 분 전의 내가 한심할 지경이군.’ 스스로를 책망한 그리드가 펫의 상태창을 불러왔다. 이름:미설정 레벨:1(0/200) 호감도:0/100 생명력:5,000/5,000 물리공격력:60 마법공격력:30 방어력:50 마법저항력:80 속성:암흑 상태:자아도취 (나는 태어나자마자 스스로의 힘으로 인간의 영혼을 섭취한 것이다! 나는 지옥 제일 마수답게 태어나자마자 짱 센 것이다! 냥!) -현재 습득하고 있는 스킬 목록- <유체화> 공격받을 경우, 육체를 슬라임처럼 유체화시켜서 피해를 최소화합니다. 일부 속성 마법에 한해서는 도리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영혼 섭취>Lv.1 대상의 가장 높은 능력치의 절반을 일시적으로 빼앗아 주인에게 전이시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자기 마음 <할퀴기>Lv.1 앞발로 대상을 할퀴어 데미지를 입히고 중독 시킵니다. 재사용 대기 시간:내킬 때 ‘요시무라를 해치웠는데도 불구하고 경험치 획득량이 0인걸 보면 PK로 인한 경험치 획득은 불가능한 건가? 어쨌든 고작 1레벨인 주제에 능력치가 어마어마하군. 영혼 섭취라는 스킬은 완전히 사기급이고.’ 상태라던가 스킬들의 재사용 대기 시간이 꽤나 거슬리기는 했지만 차근차근 알아 가면 될 것이었다. 그리드는 마냥 기뻐서 싱글벙글 웃었다. “주인은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이냐? 냥!” 멤피스의 대사였다. 기분 좋은 표정을 짓고 털을 정돈하던 녀석이 그리드와 눈을 마주치자 질문해왔다. ‘세희가 보면 엄청 예뻐하겠네. 공부만 하느라 딱히 취미도 없어 보이는 게 걱정되기도 하고… 이참에 캡슐 하나 사줄까?’ 멤피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ㅅ’모양의 입은 그리드가 봐도 앙증맞고 귀여웠다. 단지 멤피스를 보여주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동생에게 캡슐을 선물해줄까 고민하게 될 지경이었다. 사랑스러움을 느낀 그리드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난 네가 마음에 쏙 든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나는 우아하고, 아름답고, 강력한! 지옥 제일 마수이니까! 냥!” 피식. 마치 바둑알처럼 크고 동그랗게 반짝이던 멤피스의 눈동자가 게슴츠레하게 가늘어졌다. 자화자찬하더니 이내 가소롭다는 듯이 콧방귀 뀐 녀석이 그리드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근데 난 주인이 싫다.” “엉? 왜?” “못 생겼다! 못 생겨서 싫다!” “…….” “두 번 보고, 다시 봐도 못~ 생~ 겼~ 다~~ 냥!” 그나마 최근, 외모에 물이 올라서 못 생겼다는 말을 못 듣고 지냈던 그리드였다. 요즘엔 길가다 눈 마주쳐도 헛구역질하거나 도망치는 여자가 없기에 외모에 자신감을 쌓아가는 중이었건만, 사람도 아닌 고양이 따위에게 못생겼다는 말을 연속으로 듣자 솔직히 충격이었다. 치를 떠는 그에게 멤피스가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넸다. “걱정 마라! 못 생겼다고 버리지는 않을 것이다! 못 생겨도 된다! 주인은 그저 나를 극진히 대접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공경하고 섬겨야할 주인에게 도리어 극진한 대접을 요구하다니? ‘이 빌어먹을 고양이 녀석, 주인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건가?’ 그리드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곁에서 지켜보던 극검은 재미있답시고 하하 웃어댔다. “외모만 고양이 같은 것이 아니라 성격까지 고양이 같군. 앞으로 집사 생활하느라 고생 좀 하겠어?” “뭐… 이 정도 펫이라면 어느 정도의 고충은 감내할 수 있습니다.” 펫과의 호감도를 쌓는 첫 번째 방법은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다. 우선 이름부터 지어줘야겠다 싶었던 그리드가 고민했다. ‘마침 날개도 달려있으니, 생긴 게 고양이가 아니라 개였다면 이름을 개새라고 지어주면 딱이었을 텐데…’ 뭔가, 이 오만방자한 고양이에게 주제 파악시켜줄만한 이름은 없을까? 생각해 본 그리드가 적합한 이름을 떠올렸다. “노예.” “냥?” “네 이름은 노예다.” “캬악!” 파닥파닥! 열심히 날갯짓해서 그리드의 코앞까지 떠오른 멤피스가 털을 곤두세웠다. “주인의 작명 센스가 형편없다!” 고귀한 지옥 제일 마수에게 노예라니? “주인은 미친 거냐! 냥!” 심지어 발톱까지 세우는 멤피스를 보고 그리드가 내심 놀랐다. ‘주인이라는 단어의 뜻은 제대로 모르는 것 같더니만, 노예라는 단어의 뜻은 정확히 알고 있군?’ 혹시라도 호감도가 마이너스가 됐다가는 펫이 도망갈 수도 있었다. 최악의 사태를 방지해야만 했던 그리드가 노예라는 이름을 강요하지 않고 살짝 변화를 주었다. “네가 잘못 들었나본데. 노예가 아니라 노에다, 노에.” “노에?” 멤피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노에는 무슨 뜻이냐? 냥?” 그리드가 대충 둘러댔다. “노예인 듯 노예 같은… 노예 아닌 듯한 노예인 너… 라는 뜻이다.” “오…! 우오오옷!!” 사납게 변모해있던 멤피스의 눈이 다시금 초롱초롱해졌다. 지옥 제일 마수인 녀석은 태어나자마자 많은 지식을 자연적으로 습득하고 있었으나 아직 새끼에 불과했다. 그리드가 말을 길게 늘여서 하자 속뜻을 파악하지 못하고 뭔가 대단하고 멋지다고만 느꼈다. 그리고 급기야… “좋다! 난 노에인 것이다! 냥!” 기분 좋아진 녀석이 기뻐하며 그리드에게 뺨을 비벼댔다. 그 가여운 녀석을 속으로 비웃어준 그리드가 결정했다. “좋아! 이걸로 네 이름은 노에다!” [멤피스의 이름을 ‘노에’로 설정하시겠습니까?] ‘그래.’ [멤피스의 이름이 ‘노에’로 설정되었습니다.] [노에와의 호감도가 5 상승하였습니다.] 볼록 튀어나온 배를 쏙 내밀고 앞발로 허리를 짚어 기고만장한 자세를 취한 멤피스가 소리쳤다. “너는 주인이고, 나는 노에인 것이다!” “정확하다.” 그리드가 진지한 표정으로 엄지를 척 세워주었다. 멤피스. 아니, 노에가 만족해서는 하하핫! 웃어댔다. 지켜보던 극검이 혀를 내둘렀다. ‘명색이 마수를 상대로 약을 팔다니…’ 역시 그리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이후, 일행은 던전을 떠나 코크로 성으로 향했다. “오오! 영웅들의 귀환이시다!” “요시무라 놈을 베어버렸다면서?!” 은기사 길드원들은 단 둘이서 헬가오를 해치우고 사쿠라 길드까지 패퇴시킨 그리드와 극검을 영웅이라 칭송했다. 그리고 그리드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으려고 했지만 극검의 중재로 인하여 무산됐다. ‘랭킹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것은, 대중에게 파그마의 후예라는 사실을 밝히고 싶지 않기 때문일 테지.’ 한 조직의 수장답게 최소한의 식견을 갖추고 있었던 극검은 길드원들에게 그리드의 정체를 함부로 발설하지 않았다. 그리고 헬가오 레이드를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도 화석이라는 약점을 부각해서 설명했다. 하룻밤 동안. 그리드는 은기사 길드원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연회를 만끽하며 친분을 쌓았다. 중간에 술에 취한 노에가 길드원들의 영혼을 집어삼키는 사태가 발생하기는 했지만 다행히 해프닝으로 끝났다. 다음날. 이른 아침부터 떠날 채비를 갖추는 그리드에게 극검이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올해 국가대항전에는 참가할 생각이 없는 거겠지?” 그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이상한 여자가 멋대로 참가자 명단에 제 이름을 올리긴 했는데, 저는 참가할 생각이 추호도 없어요. 굳이 정체를 노출하고 싶지도 않고, 공교롭게도 대회의 메리트가 제게는 별로 없거든요.” “그래. 하지만 내년에는 생각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남자로서 조국의 명예를 위해서 싸워보는 것도 나쁜 경험은 아닐 테니… 내년엔 나도 참가할 테니까 반드시 함께하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보죠. 예비군으로서 조국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입장인지라.” 그리드가 테라스로 나갔다. 그리고 소금 냄새가 물씬 풍기는 바람 냄새를 만끽하더니 극검에게 부탁했다. “다음 주기 때 헬가오가 정상적으로 리스폰 된다면 제게 꼭 알려주세요. 화석 채취하게.” “알았다. 하지만 어제도 말했다시피 아마 당분간은 헬가오가 출현하지 않을 거야. 스토리상 다른 고위 마족의 출현으로 대체될 것 같다.” “기대는 해봐야죠. 그럼 이만.” 작별 인사한 그리드가 곧바로 플라이 마법을 사용했다. 그리고 금세 섬을 벗어나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한동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극검은 생각했다. ‘사기적인 위력의 대검과 황금 칼날들을 보유한 것만으로도 모자라 투명 망토와 플라이 마법이 귀속 된 부츠까지 가지고 있다니… 대단하다. 역시, 게임은 템빨이야.’ 솔직히 엄청 부럽다. ‘나는 언제쯤 저런 아이템들 가져보려나.’ 손가락만 빨고 있는 그의 귓가로 그리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템 제작 의뢰 맡기고 싶은 거 있으면 연락해요. 스케쥴 맞으면 제작해 드릴게. 당연히 유료 서비스고. “오오…!” 전설의 대장장이에게 아이템 제작을 부탁할 수 있게 되다니! 극검이 기쁨에 몸서리쳤다. -고맙다, 그리드! 비밀을 공유하면서 급속도로 사이가 가까워진 두 사람이었다. *** “그리드!” 장장 6일 만에 칸의 대장간에 돌아온 그리드를 토반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에를 얻은 이후부터 쭉 기쁨에 벅차있던 그리드의 표정이 그를 본 순간 굳어버렸다. “수고했다! 화석은 어떻게 됐어?” 일말의 기대감을 품고 질문하는 토반에게, 그리드가 단 2개의 화석을 꺼내 보였다. “…1개가 부족하다.” “큭…!” 이미 그리드가 ‘나만 믿어’라는 발언을 했을 때부터 지금의 상황을 예측하고 있던 토반이었다. 하지만 정작 현실로 다가오자 실망을 금할 수가 없었다. 좌절하는 그에게 그리드가 사과했다. “미안하다. 최선을 다했지만 헬가오가 너무 강했어. 채광에 집중하는 게 불가능했다.” 토반이 당황했다. “사과는 무슨 사과야? 네가 사과할 일이 아니잖아? 나를 위해서 나서줬다는 것 자체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설마 사과까지 할 줄이야. 그리드는 변해도 너무 변했다. 토반은 처음 만났을 당시의 그리드와 현재의 그리드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내적으로도 성숙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레벨업을 하면 누구나 외적으로 강해질 수 있다. 그게 전부다. 레벨업은 내면을 성장시켜주는 시스템이 아니다. 한데 그리드는 어째서 이렇게 변화해갈 수 있는 것일까? 토반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지난 4개월 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