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9화 (8권) (1,561/1,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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템빨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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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투 끝에 각성 수호자를 해치운 그리드가 획득한 아이템들을 감정하기 시작했다.

<푸른 오리하르콘>

오리하르콘에 숲의 수호자의 마력과 달빛이 깃들어 탄생한 광물입니다.

이미 숲의 수호자의 마력에 침식되어 새로운 마력을 부여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지상의 모든 광물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경도와 강도를 지녔습니다.

무게가 가볍고 어두운 곳에서 더욱 강해집니다.

*고급 대장장이 기술을 익히고 있어야만 제련이 가능합니다.

무게:3

<자색 오리하르콘>

두 개의 보름달 아래 각성한 숲의 수호자로부터 획득할 수 있는 광물입니다.

공격력과 마법력을 증폭시키는 고유 마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푸른 오리하르콘과 달리 강도가 지극히 떨어집니다.

무구의 제작 재료로 사용하기에는 부적합하며 액세서리의 제작 재료로 활용하면 좋습니다.

*대장장이 장인의 기술을 익히고 있어야만 제련이 가능합니다.

무게:1

<자수정 방패>

등급:에픽

내구력:200 방어력:200 마법저항력:200

각도에 따라 보랏빛, 붉은빛, 검은빛으로 반짝이는 아름다운 방패로서 적기사단의 단장에게만 수여되는 상징성 무구입니다.

3년 전, 아스모펠의 계략으로 인해 배신자라는 누명을 썼던 피아로가 에트날 왕국으로 도망쳐왔을 당시 잃어버린 물건입니다.

어째선지 사하란 제국의 제3황자가 이 방패를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그에게 가져다주기를 추천합니다.

사용 조건:적기사단장

무게:350

[숨겨진 기능이 존재하지 않는 아이템입니다.]

“소름 돋는다.”

그리드는 각성 수호자가 푸른 오리하르콘을 정확히 14개 드롭 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었다.

몸서리가 쳐졌다.

실패작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총 15개의 푸른 오리하르콘이 필요했는데, 각성 수호자는 마치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딱 14개의 푸른 오리하르콘만 드롭 했으니 노골적으로 엿 먹이려는 것처럼 보였다.

“기왕 많이 주려면 15개 이상을 주고, 적게 주려면 차라리 아예 적게 주던가 하지, 자식이 딱 1개 부족하게 드롭해서 사람 애타게 만들려고 하네.”

수개월 전, 행정관 블라디로부터 3개의 푸른 오리하르콘을 획득해놓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재료가 딱 1개 부족해서 실패작을 제작하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면?

“엄청나게 열 받았을 거야.”

들뜬 마음에 괜스레 투덜거려본 그가 자색 오리하르콘으로 시선을 돌렸다.

‘액세서리라…’

현재 그리드는 2개의 액세서리를 보유하고 있었다.

하나는 도란의 반지였고, 또 다른 하나는 혼인하면서 획득한 서약의 반지였다.

<서약의 반지>

등급:유니크

영원한 사랑의 증표입니다.

배우자와 함께 있을 시 ‘행복’ 상태가 됩니다. 이동 속도가 8퍼센트 상승하고 모든 능력치가 30 상승합니다.

*배우자와의 호감도에 따라서 배우자와 함께 있을 시 감정이 달라집니다. 행복, 기쁨, 만족, 보통, 불만, 우울, 애증. 총 7가지의 감정이 존재하며 서약의 반지는 감정에 따라서 다른 효과를 발생시킵니다.

반지를 끼고 배우자와 뜨거운 밤을 보낼 시 모든 스킬 경험치가 10퍼센트씩 상승합니다.

*뜨거운 밤은 한 달에 한 번만 가능합니다.

반지를 끼고 다닐 경우 배우자를 제외한 이성 NPC들과의 호감도가 쉽게 오르지 않습니다.

반지를 빼고 다니다가 배우자에게 발각당할 경우 배우자와의 호감도가 90퍼센트 하락하며 배우자의 임신 확률이 급격히 줄어듭니다.

무게:0.1

도란의 반지야 이미 몇 차례나 사기적인 효과를 입증하고 있는 최상급 액세서리였다. 하지만 서약의 반지는 썩 좋지 않았다.

추가 능력치라는 것이 배우자와 함께 있을 시에만 적용 되었고, 스킬 경험치 상승효과는 한 달에 한 번밖에 노려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반지를 끼고 다니다간 이성 NPC와 호감도가 쉽게 쌓이지 않는다고 하니 거슬리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해서 아이린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면 굳이 끼고 다닐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섣불리 빼고 다닐 생각을 못했다.

빼고 다니다가 만에 하나라도 아이린에게 들키면 호감도가 크게 하락할 터이니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보통 재수 없는 놈도 아니고, 요즘 행운이 잇따르고 있답시고 방심하다간 또 엿 먹는 수가 있어. 되도록 반지는 빼고 다니지 말자.’

그보다 정말로 임신이 되는 걸까?

Satisfy는 육성 시뮬레이션의 재미까지 구현해놓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여러모로 즐거울 것 같다고 그리드는 생각했다.

‘아이의 재능을 발견해서 그에 적합한 교육을 시키고 내게 도움이 되게끔 성장시킨다거나…?’

하지만 애 하나 낳아 키우려면 족히 십 년 이상 걸렸다. 여성 유저와의 형평성을 고려해 봤을 때 2세 육성 시스템은 그다지 중요하게 작용할 것 같지 않았다.

“음… 자색 오리하르콘으로는 목걸이를 만들어 볼까나.”

반지는 여러 개 낄 수 있는 반면 목걸이는 하나밖에 착용할 수 없다. 그래서인지 목걸이의 성능이 반지보다 전반적으로 뛰어났다.

마침 목이 허전하던 그리드는 쉽게 결정했다.

“좋아, 좋아. 목걸이가 좋겠어.”

액세서리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세공사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칸에게 뛰어난 세공사를 추천받아야겠다고 생각한 그가 이어서 자수정 방패를 살펴보았다.

“이건 완전히 퀘스트 아이템인데.”

가장 신경 쓰이는 물건이었다.

그리드는 파그마의 검무를 획득하기 위해서 케산 협곡을 찾아갔을 당시 만났던 피아로를 떠올렸다.

‘그자가 배신자의 누명을 쓰고 있다면서 아스모펠을 처단해주기를 바랐었지?’

아스모펠 또한 사하라 제국의 인물이었다.

‘언젠가 사하란 제국의 3황자를 찾아가게 되면… 그때 겸사겸사 피아로를 만나서 아스모펠 처단 퀘스트도 함께 진행해야겠다.’

사하란 제국까지의 거리는 매우 멀다.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리드는 훗날을 기약하며 자수정 방패를 인벤토리 구석에 고이 모셔두었다.

로미오와 병사들이 다가왔다.

“무사하신 겁니까?”

그들은 잔뜩 걱정하고 있었다. 각성 수호자가 죽기 직전, 강력한 섬광을 발사해 그리드를 공격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리드가 꼼짝없이 죽는 줄로만 알았었다.

혹 큰 상처라도 입지 않았을까 살펴봐오는 그들을 그리드가 안심 시켰다.

“내가 신의 축복을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은 거냐? 나는 안 죽어.”

간단명료하게 답한 그가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는 로미오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데크의 죽음은 안타깝게 됐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군.”

가식이 아닌 진심이었다.

칸이라는 벗과 아이린이라는 부인이 있는 그리드에게 있어서 NPC는 인간과 매한가지의 존재였다. 그는 한 치 거짓 없이 젊은 기사 데크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었다.

로미오가 눈물을 글썽였다.

“그의 용맹은 이 자리의 모두가 기억할 것입니다.”

이곳까지 오는 길, 연속되는 전투 속에서 병사들의 목숨을 수차례나 구해주었던 데크다.

그의 활약을 결코 잊지 않으리라 다짐한 병사들이 묵념했다.

한데 그때 하늘 저편에서부터 짐승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뭐지?”

“가, 가고일인가?”

어두운 밤하늘에 거대한 무엇인가가 포착되었다.

크게 날갯짓하며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그것은 일견 그리폰이나 가고일 같았으나 엄청 컸다. 그리고 달빛에 드러난 육중한 몸체는 온통 붉은 색이었다.

비룡이었다.

성체의 크기가 최대 4미터까지 자라며 그리폰이나 가고일 따위완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희귀 몬스터!

심지어 하늘의 패왕이라는 별명까지 가지고 있는, 퇴화한 드래곤의 한 종류였다.

녀석의 등 위에는 의외의 인물이 타있었다.

“주군,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그리드 덕분에 최초의 세컨드 직업을 획득했던 몽골인 사내 후로이였다.

거센 바람을 일으키며 착륙하는 그를 그리드가 반겨주었다.

“오랜만이다? 너, 많이 컸구나?”

그리드는 후로이의 전투력을 주시하고 있었다.

1만이다.

기사 로미오보다 무려 2천 이상 높았다.

‘레벨이 200을 넘겼군.’

웅변가라는 비전투직업을 가지고도 남들보다 앞서갔던 후로이다.

탁월한 게임 재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직업의 한계로 인하여 랭커는 노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세컨드 직업의 효과 덕분인지 랭커를 노려봐도 좋을 정도로 광렙할 수 있게 된듯했다.

“이 모든 게 주군의 은덕 덕분입니다.”

과거의 그리드는 후로이를 싫어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2인 레이드를 진행한 후부터 오히려 호감을 갖고 있었다.

피식 웃은 그리드가 다짜고짜 말했다.

“다 내덕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어서 다행이군. 은혜도 갚을 겸 날 위해서 봉사해라.”

“예?”

실로 오래간만의 재회였다.

Satisfy 시간으로 대략 4~5개월 만이었다.

후로이는 그간 서로가 어떻게 지냈는지 그리드와 대화 나누며 회포를 풀고 싶었다.

자신이 무슨 수로 빠르게 렙업하였고 어떻게 비룡을 얻게 되었는지, 그 환상적인 모험담을 들려주고 싶었다. 그리고 영주의 남편이 되어 귀족 작위까지 얻은 그리드의 이야기도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대화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는 20억 유저 중 100명도 안 되는 인원밖에 길들이지 못했다고 알려진 최강의 펫, 비룡에게조차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명령했다.

“가서 서릿빛 오크들을 사냥해.”

“…?”

굳이 왜 그런 잡몹들을 사냥하라고 지시하는 것일까?

생뚱맞아서 두 눈만 껌뻑이는 후로이에게 그리드가 이유를 설명했다.

“걔네들이 실피드의 비늘이라는 걸 드롭하거든? 그게 필요하니까 그거 28개만 모아와. 드롭률이 더럽게 낮기는 하다만, 한 열흘 정도 쉬지 않고 사냥하면 모을 수 있을걸?”

그리드는 투명 망토의 제작법을 창조한 바 있다.

정확한 명칭은 후드짚업이었다.

그것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실피드의 비늘 20개가 필요했다.

파그마의 검무를 습득하기 전, 그리드는 실피드의 비늘을 직접 구하고자 사냥했었지만 12개밖에 구하지 못하고 사정상 중도 포기했었다.

그리고 자신이 포기했던 일을 지금에 와서 후로이에게 떠넘기고 있었다.

‘2개 만들어서 1개는 내가 쓰고 1개는 팔아야지.’

“…….”

후로이는 윈스톤 지하 감옥에 200시간 가까이 갇혀있었던, 지옥 같은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오로지 절망하고 있을 때 나타나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준 이분이 나는 신처럼 보였다.’

서릿빛 오크 족장 레이드도 회상했다.

‘오크 족장에게 얻어맞고 기절해있는 나를 지켜주기 위해서 이분은 스스로를 희생하기까지 하셨어.’

역시, 돌이켜보면 돌이켜 볼수록 그리드에게는 큰 도움을 받았다. 은혜에 보답할 기회가 찾아오다니, 기쁘게 행할 따름이다.

“당장 다녀오겠습니다.”

랭커를 노리고 있는 입장에서 열흘 이상 저렙 사냥터에 발이 묶인다는 것은 엄청난 출혈이었다. 하지만 후로이는 지체 없이 즉각 떠날 채비를 했다.

그를 그리드가 제지했다.

“날지 말고 걸어가.”

“예?”

되묻는 그에게 그리드가 멀뚱멀뚱 서있는 로미오와 병사들을 지목해보였다.

“네가 그걸 타고 날아가면 얘들이 못 따라가잖아?”

“저들은 왜…?”

“어차피 사냥하는 김에 얘들을 데려가서 훈련 시켜줘.”

“…….”

“싫어?”

“…아닙니다.”

결국, 후로이는 기껏 힘들게 길들일 비룡을 두고도 두 발로 땅을 걷는 신세가 됐다. 상당한 시간을 허비하게 된 것이다. 그뿐이랴? 얼떨결에 병사들의 보모역할까지 맡게 되었으니 기분이 조금 별로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리드에게 크나큰 은혜를 입고, 그 은혜를 갚겠다고 스스로 맹세했던 본인이 짊어지어야할 책임이다.

위대한 푸른 늑대의 후손은 맹세를 결코 가벼이 여기지 않는 법!

징기스칸의 후예 후로이는 그리드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할 생각이었다.

“자식, 참 좋은 타이밍에 와줬네.”

떠나는 후로이와 병사들을 바라보면서 그리드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실패작을 제작하는 김에 후드짚업도 함께 제작할까 싶었지만, 서릿빛 오크들은 너무 저렙이라 직접 사냥하기엔 메리트가 적었다.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고민하고 있던 차에 때마침 후로이가 나타나서 부려먹을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조만간 좋은 아이템 만들어줄 테니까 너무 섭섭해 하지 마라.’

빚쟁이 신분에서 벗어난 뒤 마음에 한결 여유가 생긴 그리드는 전보다 훨씬 덜 이기적인 인물이 되어있었다.

은혜를 갚겠답시고 애쓰는 기특한 후로이를 언제까지고 일방적으로 등쳐먹을 생각은 없었다. 조만간 섭섭잖은 보답을 해줄 계획이었다.

“자… 그럼 우선 실패작을 만들어 볼까나.”

그리드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그리고 후로이의 비룡에는 한참 못 미치지만 충분히 빠른 속도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칸의 대장간이었다.

수 시간 후.

텅텅 빈 회색 숲 가장 깊은 곳으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직 전투의 흔적이 복구되지 않아있는 그곳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각성 된 숲의 수호자는 체다카 길드의 수준으로는 레이드가 불가능할 텐데?”

통합랭킹 5위권 유저 중 누군가가 이곳까지 친히 발걸음 했던 것일까?

“쯧, 덕분에 시간낭비하게 됐군. 괜히 여유부리다가 4개월에 한 번밖에 찾아오지 않는 기회를 놓쳐버렸어.”

숲 속으로 사라지는 사내의 머리 위에는 ‘아그너스’라는 아이디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드가 돌아왔다!

때마침 윈스톤 성에 머물러있던 지슈카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칸의 대장간으로 달려갔다.

‘엄청 화난 상태겠지?’

그녀는 각성된 숲의 수호자에게 호되게 당하여 좌절하고 있을 그리드의 모습을 상상했다.

‘앞으로는 길드 커뮤니티에 신경 쓰라고 주의 줘야지.’

기본적인 의사소통조차 거부하고 개인행동만 일삼는 그리드의 버릇을 고쳐놓을 절호의 기회라고 그녀는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지슈카? 네가 여긴 웬일이냐?”

그리드의 표정은 밝기만 했다.

‘정보 부족으로 레이드에 실패하고 경험치 떨어뜨려서 우울해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예상치 못한 모습에 당황한 지슈카가 내색하지 않고 물었다.

“숲의 수호자를 레이드 했다며?”

“어떻게 알았어? 맞아.”

“…설마 성공한 거니?”

“당연하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는 그리드였다.

‘뭐야? 숲의 수호자가 각성을 안 했었나?’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에게 그리드가 투덜거렸다.

“근데 수호자가 각성인지 개뿔인질 했더라? 너무 세서 꽤나 고생했다.”

“에?”

지슈카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정말로 각성된 숲의 수호자를 레이드했다는 거야? 고작 2명의 기사와 100명의 병사만 데리고?’

거짓말 같았다.

반신반의한 지슈카가 길드 정보창을 불러왔다. 그리고 그리드의 레벨을 확인하더니 경악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180대에 불과했던 그리드의 레벨이 200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각성된 숲의 수호자를 레이드했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어이가 없네.’

파그마의 후예라는 레전드리 직업의 사기성은 충분히 파악했다고 자부했었다.

전설적인 대장장이 실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레어 전투직업군과 비슷한 수준의 전투능력을 발휘했고, 거기에 추가적으로 모든 아이템을 착용 가능한 특성까지 보유했다.

딱 그 정도로 파악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사기였다.

하지만 이제 보니 레전드리 직업의 사기성이란 그녀의 상상 이상이었다.

‘그리드 한명이 우리 길드원 전원을 합친 것보다 세다는 거잖아?’

체다카 길드의 현재 전력으로는 각성 수호자를 레이드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무려 혼자서 레이드를 성공했다.

지슈카가 오해할 만도 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리드가 각성 수호자를 비교적 쉽게 해치울 수 있었던 이유는 파브라늄과 브라함의 부츠 덕분이었다.

각성 수호자의 공격을 대부분 파브라늄으로 무력화시키고, 대공전에 취약했던 각성 수호자를 공중에서 일방적으로 공격했기 때문에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그리드가 체다카 길드와 싸운다면?

단 2개밖에 안 되는 파브라늄으로는 다수를 상대로 완벽한 보호막을 펼칠 수 없을 뿐더러, 하늘 위로 피해봤자 도리어 무방비하게 포격당해 낭패를 겪을 것이다.

5초 무적이라는 패시브 스킬이 발휘되는 동안 몇 명을 흑백화면 동지로 삼을 수 있을 테지만 그게 고작이다.

하나하나가 강력하며 온갖 클래스로 구성되어 다양한 전술 조합이 가능한 체다카 길드를 상대로 그리드 혼자 압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하지만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지슈카는 그리드를 단단히 오해했다.

‘밸런스 붕괴 수준을 넘어서 버그 수준으로 센 거네?’

고민되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야탄교 신도들이 바이란을 꾸역꾸역 염탐하고 있는 실정이다.

말락서스를 해치운 대가로 잔뜩 찍힌 탓에, 언제라도 야탄교의 대규모 공습을 당할지 몰랐다.

이런 상황에 그리드만한 전력을 고작 대장장이로 방치해도 옳은 걸까?

지슈카가 뒤늦게 그리드의 전투능력에까지 욕심을 갖게 됐다.

“그리드, 너 혹시 바이란으로 이주…”

“지슈카.”

두 사람이 동시에 말했다.

그리드는 지슈카가 하는 말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끝까지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오직 자기가 할 말만 했다.

“특별한 용건 없으면 이만 가지 그래?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거든.”

“…….”

그리드는 엄연히 길드 소속 대장장이다.

우선적으로 길드원들의 아이템을 제작해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근데 또 개인적인 용무가 있다면서 사람보고 가라마라 한다.

울컥한 지슈카가 한소리 해주려다가 문득 생각을 고쳐먹었다.

‘가입조건에 무조건 길드원을 우선시하라는 조항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자유를 약속하기도 했었으니 이제와 너무 몰아세우면 기분 상해하겠지?’

생각한 지슈카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그리고 가슴선을 살짝 강조했다.

그녀는 그리드가 커다란 가슴에 취약하다는 점을 진즉부터 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미인계로 정신 못 차리게 만든 다음 구워삶아야지.’

단순한 그리드를 구워삶기에 이보다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한 그녀의 행동이었지만 그리드는 눈 하나 깜빡 안했다.

동정 딱지를 떼고 드디어 성인 남성으로 거듭난 그에게 옷에 가려진 가슴 따위 별다른 자극제가 못됐던 것이다.

“뭐하냐? 안 가냐?”

“어? 으, 응. 갈게.”

너무나도 냉담한 반응 탓에 민망해진 지슈카가 도리어 얼굴을 붉혔다. 새삼 부끄럽다는 듯이 양손으로 가슴을 가린 그녀가 그대로 도망치듯이 대장간을 떠났다.

“흥, 뭐야? 저 바보, 예전이 차라리 더 낫잖아?”

불과 2달 전까지만 해도 그리드는 멍청하고 쪼잔하고 찌질할지언정 다루기 쉬워서 편했다. 하지만 성격이 변한 지금은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심지어 서운할 지경이다.

“좀 컸다 이거지? 바보가!!”

대로변에 나온 지슈카가 멀쩡한 남의 가게 화분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워낙 유명인인데다가 아름다워서 항상 주목 받는 그녀가 공공장소에서 돌발행동을 하자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심지어 인터넷에 기사까지 떴다.

[체다카 길드 마스터, 길에서 난동 부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남자에게 실연당한 것으로 추정]

[(칼럼)화내는 모습마저도 섹시한 지슈카! 그녀의 매력 집중탐구!]

[지슈카의 열애상대는 꽃미남 무도가 레가스?!]

[지슈카 헐리웃 러브콜 또 고사…]

Satisfy의 2대 미녀 중 하나인 지슈카가 오래간만에 가십거리가 된 날이었다.

하지만 칸의 대장간에 틀어박힌 그리드는 세상물정 몰랐다.

갑자기 찾아온 지슈카 탓에 괜히 시간 낭비했다며 칫, 혀를 찬 그가 뒤늦게 용광로 앞에 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용해온 제작용 망치를 꺼냈다.

<이름 모를 장인의 대장장이 망치>

등급:에픽

내구력:350/350 공격력:70~80

레어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17%

에픽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7%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지만, 경험과 명성은 비교적 부족한 이름 모를 장인이 제작한 대장장이 망치입니다.

장인 본인이 사용하기 위해서 제작한 망치이기 때문에 다른 대장장이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용 조건:파그마의 후예

무게:80

‘이걸로는 부족해.’

현재 보유하고 있는 푸른 오리하르콘의 개수는 17개. 단 하나의 실패작밖에 제작하지 못한다.

그리드는 그 한 번의 기회를 최대한으로 살리고 싶었다.

‘실패작은 절대지존 무기야. 지존이라는 간판에 누가되지 않게끔 완성되는 등급 또한 최고여야만 해.’

그랬다.

그리드는 실패작을 반드시 레전드리 등급으로 완성시키고 싶었다.

<실패작>

등급:유니크~레전드리

실패작은 제작 시 최소 유니크 등급을 보장받는 아이템이다.

그리고 애초에 기본 성능이 사기적인 아이템이니만큼, 설사 유니크 등급으로 완성되더라도 절대지존 무기라는 사실에는 변함없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그리드는 명색이 지존 무기를 유니크 등급으로 완성시킬 경우, 2프로 부족한 느낌이 강하게 들어서 사용하는 내내 거슬릴 것만 같았다.

‘꼭 레전드리 등급으로 완성해주마.’

결심은 해보지만, 레전드리 아이템을 원하는 대로 제작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던가?

그간 그리드는 수천 개의 아이템을 제작해왔다.

매번 최선을 다했다. 하나의 아이템을 제작함에 있어서 20시간 이상을 투자한 경험도 적잖았다.

하지만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획득한 경험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레전드리 아이템은 단 3개밖에 만들지 못했으며 노말, 레어 등급 아이템만 공장장처럼 찍어댔다.

‘레전드리 아이템의 제작 확률을 높여야 돼.’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건?

바로 레전드리 등급의 제작망치다.

“망치부터 만들자.”

실로 오래간만에, 대검술사가 아닌 대장장이로서의 그리드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따앙! 따앙!

한번 타오르기 시작한 용광로 속 불꽃은 결코 꺼지는 법이 없었다.

그리드의 망치질도 멈추지 않았다.

그리드는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오로지 작업에만 열중했다.

불의 열기와 그리드의 열의로 인하여 한껏 달아오른 칸의 대장간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손님 안 받소.”

그리드의 집중력이 혹 흐트러지기라도 할까, 염려한 칸이 사람들의 원성을 무시하고 대장간 문을 걸어 잠갔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서 그리드를 보좌했다.

나흘이 지났다.

그간 그리드가 제작한 5개의 망치는 노말, 레어, 에픽, 레어, 레어 등급이었다.

그리드는 반복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았다.

성숙 된 정신력을 기반으로 동요하지 않고 끝까지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

그리고 5일째 되는 날.

원하던 물건을 드디어 손에 넣었다.

<전설의 대장장이 망치>

등급:레전드리

내구력:550/550 공격력:130~150

레어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30%

에픽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20%

유니크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8%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 제작 확률:+1%

*제작 관련 스킬 경험치 획득량이 상승합니다.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녔고, 이제는 경험과 명성까지 쌓아가고 있는 이름 모를 장인이 제작한 대장장이 망치입니다.

장인 본인이 사용하기 위해서 제작한 망치이기 때문에 다른 대장장이들이 사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사용 조건:파그마의 후예

무게:50

[레전드리 아이템을 제작하여 모든 능력치가 +25 영구적으로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무아지경의 검, 신성의 방패, 통한의 가시에 이어 그리드가 제작한 4번째 레전드리 아이템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게 획득할 수 있었던 결과물에 그리드는 기뻐할 법도 했지만 오히려 인상을 찌푸렸다.

“별로네.”

그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에픽 아이템 제작 확률 20퍼센트와 유니크 아이템 제작 확률 8퍼센트의 상승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높은 수치였다. 체감될 정도일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정작 필요로 했던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 확률은 단 1퍼센트 상승하는 것으로 그쳤으니 기뻐할 수가 없었다.

‘고작 1퍼센트의 확률 상승은 실질적으로 도움 될 것 같지 않은데… 아니, 아니다. 이 정도면 기대 이상이라고 봐야 돼.’

그리드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동안 그가 제작한 아이템 개수를 감안해보면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 확률은 0.01퍼센트 미만이었다.

그 상태에서 1퍼센트가 추가된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효과였다.

확률적으로만 계산하면 100개의 아이템을 제작할 경우 1개의 레전드리 아이템을 손에 넣을 수 있는 셈이 아닌가?

수천 개를 만들어야했던 전과 비교하면 비약적으로 상승한 확률이다.

‘확률은 어디까지나 확률일 뿐이지만, 전보다는 훨씬 더 나아진 게 확실하지.’

그리드는 지체하지 않았다.

5일 간의 작업으로 인해 집중력은 최고조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이야말로…!’

그리드가 전설의 대장장이 망치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더없이 경건한 자세로 푸른 오리하르콘을 제련하기 시작했다.

따앙! 따앙!

숙달 된 망치질이 반복됐다.

제련 된 푸른 오리하르콘이 섬세하게 단련되어갔다.

“오오…!”

칸이 감탄했다.

그리드가 망치질을 한 번 할 때마다 모루 위에 푸른 상어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뜨거운 대장간이 사실은 시원한 바다 속이 아닐까? 착각을 느끼게 해줄 정도로 생동감이 일품인 상어 모양이었다.

‘믿기지가 않는군.’

투명하게 번들거리는 상어모양의 대검은 실로 놀라웠다.

칸이 여태까지 봐왔던 그 어떠한 무구보다도 창의적이며, 동시에 실용성까지 갖추고 있는 모양을 보면 드워프들이 제작한 무구들보다 월등히 대단해 보였다.

따앙! 따앙!

해가 저물고, 달이 뜨고, 다시 달이 희미해질 때까지 그리드의 망치질은 그치지 않았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인내심 효과가 발동합니다. 1시간 동안 집중력과 체력, 방어력이 극도로 상승합니다.]

그리고 새벽닭이 울 무렵.

[전설적 대장장이의 숨결이 제작 아이템의 효과를 증폭시킵니다.]

그리드가 보기 드물게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실패작>

등급:레전드리

내구력:1,090/1,090

공격력:1,040~2,166 방어력:80

*민첩성 +50

*낮은 확률로 적의 공격을 차단.

*일정 확률로 ‘5연격’ 스킬 발동.

*높은 확률로 ‘절단’ 스킬 발동.

*스킬 ‘이등분’ 생성.

*착용자보다 레벨이 20 이상 낮은 적에게 공포 효과.

*어두운 장소에서 공격력 +20퍼센트.

전설이 된 대장장이가 설계한 무기입니다. 대검으로 만들어졌지만 검신 특유의 생김새 때문에 절삭력이 매우 뛰어납니다. 바다의 포식자 상어를 닮은 모습이 적에게 공포심을 주며, 검등에 뾰족하게 솟아 있는 작은 검날이 방어에 도움을 줍니다.

푸른 오리하르콘을 재료로 사용하여 가볍기 때문에 공격 속도가 하락하지 않습니다. 푸른 오리하르콘의 특성으로 인해 어둠 속에서 더욱 강한 면모를 보입니다.

사용 조건:레벨 300 이상. 근력 5,000 이상. 고급 소드 마스터리 8레벨 이상.

무게:550

치칙. 치치칙.

넓은 검면의 하단 가장자리에, 필기체로 greed라는 이름이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리드가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한 이후 최초로 창조한 아이템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해냈다!!’

단 한 번의 기회를 성공적인 결과로 이끌어낸 그리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희열에 휩싸였다.

그간 제작했던 레전드리 아이템들.

무아지경의 검, 신성의 방패, 통한의 가시 또한 최상급 무구들임은 분명했으나 지존이라고 칭할 정도는 아니었다.

심지어 알바티노가 제작한 유니크 아이템, 다인슬레프에도 살짝 못 미치는 수준이 아니던가?

하지만 실패작은 달랐다.

그리드가 직접 창조한 제작법을 기반으로 제작한 이 아이템은 부정할 수 없는 지존 무기였다.

다인슬레프? 그딴 모작, 개나 줘버리라고 해라.

“격이 다르단 말씀.”

그리드는 확신했다.

“이제 난 지존이다.”

현존 최강의 방어구 세트에 이어서 최강의 무기까지 보유했다.

당연히 천하무적 아니겠는가?

‘세상에… 나처럼 게임 재능 없는 놈이 지존 먹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감회가 새로웠다.

파그마의 후예로 전직하기 전, 1년 동안 열심히 게임했음에도 불구하고 80레벨밖에 안 됐던 지난날을 회상하자 눈가가 촉촉해질 지경이었다.

“결국…”

불끈! 두 주먹을 말아 쥔 그리드!

그가 억눌러왔던 온갖 감정들을 분출하듯, 목청이 터져라 소리쳤다.

“나야말로 승자다!!!”

상위 랭커들? 게임 천재면 뭐하는가?

진정한 템빨의 위엄 앞에 무력해질 운명일 뿐이다.

“하하하핫! 게임 잘해서 레벨 빨리 올리면 뭐해? 템이 구리면 나보다 못한 거지, 뭐. 푸~하하핫!!”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라 사냥하면서 렙업하고 있을 랭커들을 비웃어주는 그리드였으니, 랭커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통탄할 노릇이었다.

“핏빛마녀 유라? 다음에 만나면 안 쫄아! 이제 내가 너보다 셀걸? 푸하하핫! 켁! 켁! 응?”

실성한 사람처럼 웃다가 사레 걸린 그리드가 알림창을 확인했다.

[레전드리 아이템을 5회 제작함으로서 당신의 잠재력을 입증해보였습니다.]

‘이건?’

<전설적 대장장이 기술>에는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의 제작 횟수가 5회가 될 때마다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라는 설명이 명시되어 있었다.

그리드가 상기하는 사이 알림창이 갱신됐다.

[당신은 충분히 성장하였습니다. 더 이상 이름 모를 대장장이가 아닙니다.]

[앞으로 당신이 제작하는 모든 아이템에 당신의 이니셜 ‘G’가 음각됩니다.]

[파그마의 기술을 계승한 존재가 탄생하였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당신의 잠재력이 개화되었습니다.]

[사용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아이템 착용 시 발생하는 페널티가 등급별로 15퍼센트씩 감소합니다.]

[사용 조건을 달성하지 못한 아이템에 귀속 된 스킬 사용 시 발생하던 ‘효과 50프로 절감’ 페널티가 사라집니다.]

[아이템 이해도가 상승하는 속도가 2배 빨라집니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특히 사용 조건 미달성 아이템 착용 시 발생하던 페널티가 급격히 줄어든 것은 엄청난 이득이었다.

안 그래도 기쁨에 벅차 있던 그리드는 기분이 더 좋아져서 심장마비에 걸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잠재력이 개화된 반동으로 성장력이 저하됩니다.]

[아이템 제작 시 획득하던 스탯 수치가 하락합니다.]

[앞으로 레어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 시 추가 스탯을 획득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에픽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 시 추가 스탯을 획득하지 않습니다.]

[앞으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 시 모든 스탯이 +4 상승합니다.]

[앞으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을 제작 시 모든 스탯이 +10 상승합니다.]

“…….”

여태까지 그리드는 레어 등급 아이템 제작 시 모든 스탯 +2, 에픽 등급 아이템 제작 시 모든 스탯 +4, 유니크 등급 아이템 제작 시 모든 스탯 +12,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 제작 시 모든 스탯 +25를 획득했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잠재력이 개화(라고 쓰고 고갈이라고 읽는다) 되었다는 명목으로 아이템 제작 시 추가 스탯 획득량이 현격하게 떨어져버렸다.

“뭐, 이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손해다.

그냥 손해도 아니고 막대한 손해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운영자 이 쓰레기 같은 새끼들이!!”

레전드리 직업 전직자랍시고 너무 노골적으로 경계하는 게 아닌가?

Satisfy는 그대로인데 오직 자기 혼자만 밸런스 패치 당한 그리드가 이성을 잃고 절규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알림창은 갱신되고 있었다.

[파그마의 후예라는 직업이 세상에 공개되었습니다. 랭킹에 등록하여 당신이 파그마의 후예라는 사실을 공표하겠습니까?]

과거의 그리드였다면 유명인이 되고 싶다는 일념으로 냅다 YES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싫다.”

지슈카를 비롯한 체다카 길드의 유명인들은 어딜 가나 인파에 휩싸여 고생한다. 그 모습을 몇 차례나 목격한 그리드는 이제 유명인이 되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애초에 방송 출현해서 돈 버는 것보다 아이템 제작해서 돈 버는 편이 훨씬 더 이득이고.’

[당신은 랭킹에 등록되지 않습니다.]

[스킬 <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정보가 갱신됩니다.]

<(신의 무기를 목격한)전설적 대장장이의 기술>

Lv.3(87.1%)

제작법을 알고 있는 아이템을 제작합니다.

‘전설적 대장장이의 창조’ 스킬로 제작법을 창조한 아이템을 제작합니다.

신화급 아이템의 모작을 제작합니다.

높은 확률로 레어~에픽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일정한 확률로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희박한 확률로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이 제작됩니다.

매우 희박한 확률로 신화급 아이템 모작 제작을 성공합니다.

*제작 아이템의 모든 능력치가 17퍼센트 상승합니다.

*유니크 등급의 아이템 제작 시 모든 스탯이 +4 영구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150 상승합니다.

*레전드리 등급의 아이템 제작 시 모든 스탯이 +10 영구 상승, 대륙 전역에 명성이 +500 상승합니다.

*신화급 아이템 모작 제작 성공 시 대륙 전역에 명성이 +1,000 상승합니다.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의 제작 횟수가 5회가 될 때마다 특수한 일이 발생합니다.(현재 5/10)

“…이거 진짜냐. 농담 아니라 진짜로 너프당하는 거냐…”

전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스킬 설명이다.

레전드리 등급 아이템의 제작 횟수가 5회가 될 때마다 특수한 효과가 발생한다는 부분을 주목한 그리드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레전드리 아이템? 안 만들어, 썩을 놈들아.”

한 번 더 특수한 일이 발생했다가는 밸런스 패치 또 당하고 똥캐가 될 것 같았다.

‘사실 썩 그렇지만도 않지.’

아이템 페널티가 줄어드는 등 장점도 있다. 다음에 또 다시 발생할 특수한 효과는 어쩌면 이번보다 더 나을 수도 있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노력하는 그의 시야로 마지막 알림창이 떠올랐다.

[현재 당신의 대륙 전역 명성 수치는 11,830입니다. 명성 수치가 3만 이상일 때부터 명성 상점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명성 상점>

모든 유저가 이용할 수 있는 특수 상점입니다. 명성을 소모하여 상품 구매가 가능합니다.

희귀한 상품이 많으므로 필히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상점의 위치는 주기적으로 바뀝니다.

아이템 제작으로 획득 가능한 명성수치까지 하락시킨 후에야 명성 상점의 존재를 알려주다니?

고의적으로 사람을 놀리는 행위가 아닌가?

그리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운영자 이 @$&*(!~$#@#[email protected]*!”

“…….”

최강의 무기를 제작한 후.

기뻐 날뛰다가 갑자기 씩씩거리며 욕설을 지껄이는 그리드를 바라보는 칸의 눈에 측은지심이 어렸다.

‘오래간만에 병이 도졌구먼…’

***

S.A그룹 본사.

운영팀장 윤나희와 팀원들이 모니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최초의 레전드리 전직자 그리드가 실패작을 제작하는 순간이었다.

팀원들이 감탄했다.

“우와, 쩔어. 저기서 바로 레전드리를 띄워버리네?”

“전직 초기에는 죽어라 노말, 레어만 띄우더니 요즘에는 행운이 잇따르잖아? 대기만성형이구만. 낄낄.”

구석에 함께하고 있던 윤상민 이사가 오만상을 썼다.

“젠장, 레전드리 전직자가 최강의 무기까지 손에 넣었으니 밸런스가 급속도로 붕괴되겠군.”

그에게 윤나희 팀장이 고개 저었다.

“밸런스는 오히려 조정될 거예요.”

모니터 속 화면이 그리드의 시점으로 변경됐다. 그러자 갱신되고 있는 알림창 목록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됐다.

“아이템 제작 시 획득 가능한 스탯과 명성 수치가 확 줄었군? 뭐야, 저 뒤늦은 너프는?”

때늦은 수습을 비웃듯 윤상민 이사가 콧방귀 뀌었다.

팀원들이 반박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Satisfy의 모든 시스템은 이미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새로운 에피소드, 혹은 이벤트성 퀘스트를 추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중에 특정 시스템을 패치하는 일은 없어요.”

“그럼 저건 뭐야? 그리드의 스킬이 변경된 건 예정 된 수순이었다는 거야?”

윤나희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파그마의 후예는 순수한 전투직업군이 아니잖아요? 다른 레전드리 직업에 비해서 전투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건데, 언제까지고 스탯 상승효과를 누리며 무한대로 성장시킬 순 없죠. 뭐… 지금 상태로만 봐서는 다른 레전드리 직업과 비교해서 전투능력이 밀릴 것 같지도 않지만…”

그리드가 비상식적으로 불운한 사람이었던 게 문제다.

슈퍼컴퓨터 모르페우스의 예측에 의하면, 파그마의 후예는 이미 3달 전에 레전드리 아이템 5개를 제작하고 스탯 상승효과를 덜 누려야만 했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워낙 재수가 없어서 레전드리 아이템을 못 만들었다.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저급 아이템들만 제작하기 일쑤였다.

그 탓에 그리드는 모르페우스의 예측보다 훨씬 더 오랜 기간 스탯 상승효과를 누렸으니, 결과적으로 불운이 행운으로 작용한 케이스다.

“운이 없는 건지 나쁜 건지 모를 사람이라니까…”

그리고 이때쯤 전 세계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Satisfy에 접속 중이었던 모든 유저들에게 충격적인 내용의 알림창이 떠오른 여파였다.

[파그마의 기술과 의지를 계승하는 존재가 등장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전설의 무구를 제작할 수 있는 그는 전설 그 자체입니다.]

속보, 속보, 속보!!

속보의 향연이었다.

각국의 언론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파그마란 누구인가?]

[파그마, 전설의 대장장이이자 검술의 달인으로 밝혀져!]

[파그마의 후예는 레전드리 클래스?]

[전설 그 자체라는 문구를 통하여 레전드리 클래스로 추정!]

[유일한 레전드리 아이템 제작자!]

[20억 유저 중 최초의 레전드리 직업 전직자가 등장!!]

[(칼럼)레전드리 클래스의 위력, 어느 정도일까?]

[대장장이 랭킹 1위 판미르, ‘난 파그마의 후예가 아니다’ 입장 표명.]

[최상위 길드들은 파그마의 후예를 찾기 위해서 이미 행동에 나서…]

[한때 잠시 화제가 되었던 특급 야파 화살의 제작자가 파그마의 후예?!]

[세 번째 에픽 직업 전직자, 카츠. ‘파그마의 후예? 레전드리 클래스라고 해봤자 대장장이에 불과하다. 이 몸 블러드 워리어 앞에서는 허접 수준. 돈 따위 질릴 만큼 줄 테니까 내 전용 대장장이나 되라’ 오만한 발언!]

공황수준이다.

에픽 직업 전직자들의 존재가 공표되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반응이 잇따랐다.

단 하나의 화제만 가지고 과열되는 분위기는 부적절하다고 판단한 S.A그룹이 조치에 나섰다.

“게임 내에 국가대항전 관련 퀘스트를 즉각 반영해. 사람들의 관심을 분산시키도록.”

임철호 회장의 명령이었다.

그리고 Satisfy의 모든 유저들에게 새로운 알림창이 떠올랐다.

[현실 시간으로 2달 뒤, 각국의 명예를 건 국가대항전이 개최될 예정입니다. 이에 참가자를 모집합니다. 게임 내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입증해보이세요.]

언론의 시선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게임 내에 각종 이벤트 퀘스트가 생성 중. 퀘스트에 참가만 해도 특별한 보상이?]

[S.A그룹이 직접 주최하는 국가대항전, 남한에서 개최 예고!]

[국가대항전 종목으로는 보스 레이드, PVP, 펫 마라톤, 미궁 돌파, 각종 제작 승부, 공성전 등이 있어…]

[임철호 회장. ‘국가대표로 선발되면 막대한 보상이 있을 것’ 인터뷰 화재.]

[(칼럼)최초의 레전드리 전직자, 파그마의 후예. 그 또한 이번 국가대항전에 참가할까?]

[파그마의 후예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파그마의 후예가 소속해있는 국가가 국가대항전 우승국 될 것.]

결국 또 다시, 각국 언론과 여론의 관심은 파그마의 후예에게로 집중되었다.

그리고 칸의 대장간.

당사자 그리드는 세상의 관심과 무관하게 바삐 지내고 있었다.

지슈카의 요청 때문이었다.

“야탄교와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아. 너의 능력이 필요해. 한 달 내로 길드원 전원에게 아이템을 제작해주기를 바랄게.”

“한 달? 야, 나도 이벤트 퀘스트에 참여하려면 시간 빠듯한데?”

“어머? 국가대항전에 참가하겠다고? 자칫 정체라도 밝혀졌다가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겠어? 파.그.마.의. 후.예.님?”

“…역시 귀찮아지려나.”

누구보다 신난 사람은 반트너였다.

“그리드! 내 갑옷부터다!”

[웨이브 아머의 제작법을 익혔습니다.]

<웨이브 아머>

등급:레어~레전드리

레어 등급 정보

내구력:420/420 방어력:531 이동속도:-8%

*현재 생명력이 90퍼센트 이상일 경우 받는 피해 40퍼센트 경감.

*베기 공격에 대한 방어력 15퍼센트 증가.

에픽 등급 정보

내구력:455/455 방어력:575 이동속도:-7%

*현재 생명력이 80퍼센트 이상일 경우 받는 피해 45퍼센트 경감.

*베기 공격에 대한 방어력 20퍼센트 증가.

*희박한 확률로 베기 공격 무효화.

유니크 등급 정보

내구력:493/493 방어력:631 이동속도:-6%

*현재 생명력이 70퍼센트 이상일 경우 받는 피해 50퍼센트 경감.

*베기 공격에 대한 방어력 25퍼센트 증가.

*일정 확률로 베기 공격 무효화.

레전드리 등급 정보

내구력:574/574 방어력:694 이동속도:-4%

*현재 생명력이 60퍼센트 이상일 경우 받는 피해 60퍼센트 경감.

*베기 공격에 대한 방어력 30퍼센트 증가.

*높은 확률로 베기 공격 무효화.

강철보다 몇 배나 가볍고 튼튼한 흑철을 재료로 제작한 갑옷입니다.

갑옷 전체에 물결무늬를 음각하여 적의 공격을 비껴나가게 만드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240 이상. 근력 500 이상. 고급 헤비 마스터리 2레벨.

무게:1,920

“어휴, 알았다, 알았어.”

드디어 본분으로 돌아온 그리드였다.

대장간에 틀어박혀 일에 치여 살게 되더라도 딱히 초조할 것도 없었다.

‘어차피 내가 지존인데, 뭐.’

다른 랭커들처럼 렙업하겠답시고 분주히 뛰어다닐 필요 없다.

당분간은 돈 버는 일에 집중하며 느긋하게 즐겨주리라.

초연해진 그리드는 무협지 속 은둔고수의 기분을 만끽했다.

한편, 신영우의 집 앞에 거대 리무진이 당도하고 있었다.

리무진의 주인은 영우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2월 말.

숙녀여고의 봄방학도 끝나가고 있다.

불과 며칠 뒤면 고교 2년생으로 새학기를 맞이하게 된 세희는 오늘도 열심히 공부 중이었다.

소녀다운 취미? 여행? 연애?

그녀는 일절 관심 없었다.

간단히 즐기는 여가활동이라고는 아침의 조깅과 저녁의 요가가 전부다. 그마저도 공부에 집중하기 위한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해 하는 것일 뿐.

그녀는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했다.

공부에 집착하게 된 계기?

오빠 영우 때문이다.

오빠는 공부에 조금도 재능이 없었고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지도 못했다. 유일한 장점이 끈기였건만, 대학교에 진학한 후부터는 나태해지기까지 하여 학업을 미루고 백수나 다름없이 지냈으니 앞날이 걱정이었다.

군대를 다녀오면 나아지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그 후가 더 가관이었다.

곧바로 복학해서 공부하는가 싶더니 Satisfy라는 게임에 빠져서 빚쟁이 폐인으로 전락해버렸다.

부모님은 근심걱정이셨다. 미래가 불투명해진 오빠 때문에 한숨이 늘어난 두 분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셨다.

‘내가 오빠를 대신해야해.’

어르고 달래도 소용없는, 워낙에 한심한 오빠를 보면서 자란 탓일까?

철 들지 않는 오빠에 대한 반동으로 세희가 일찍부터 철 들고 말았다.

중학생에 불과했던 그녀는 부모님과 오빠를 위해서 결심하게 됐다.

‘오빠를 대신해서 내가 열심히 공부할 거야. 내가 성공해서 부모님과 오빠를 책임질 거야.’

세희는 오빠와 달리 영민했다. 기본적으로 모범생이었던 그녀는 명문여고에 손쉽게 진학한 후 전국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는 중이다.

그녀의 궁극적 목표는 단순했다.

최고의 대학을 졸업하여 좋은 직장을 얻고, 높은 연봉을 받으며 평생 부모님과 오빠를 부양할 계획이었다.

‘오빠는 나만 믿으면 돼.’

그렇게 생각하면서 계속, 계속 공부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오빠가 변한 것이다.

평생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오빠가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건 바로 Satisfy.

아이러니하게도 오빠의 청춘을 좀먹고 있던 게임이었다.

게임으로 성공해버린 오빠는 자력으로 빚을 청산해버렸다.

자신이 진 빚뿐만이 아니라, 보증 잘못 선 아버지께서 떠안게 되었던 빚까지 모조리 갚아버렸다. 그리고 부모님 편안하시라고 수억의 용돈을 드렸다.

어느 날 오빠가 말했다.

“1년 내로 100억짜리 빌딩 한 채 세울 거다. 집세 받아먹으면서 우리 가족 평생 편안하고 행복하게 살자.”

세희는 변화에 성공한 오빠가 자랑스러웠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허세가 있어…’

충분히 감당할 능력이 있어서 구매한 것이겠지만, 오빠는 그다지 외출도 안하는 주제에 무려 8억짜리 외제차를 구입했다.

벼락부자들은 경제관념이 부족하여 쉽게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다고 익히 들은 바.

세희는 오빠가 허세만 부리다가 금방 몰락하게 되는 건 아닐까 염려했다.

그리고 여자관계도 신경 쓰였다.

‘괜히 허세부리고 다니다가 꽃뱀한테 당하기라도 하면…’

8억 짜리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남자를 노려볼 여자는 길가에 돌멩이처럼 많다.

근데 그 남자가 연애경험도 없고 허술하기 짝이 없다면?

쉽게 요리당할 것이다.

“흐유… 언제까지고 나만의 오빠로 있어준다면 마음이 편할 텐데.”

심정 같아서는 24시간 오빠 곁에 붙어서 감시하고 싶었다.

이미 수년 전부터 오빠를 책임지겠다고 다짐해온 탓인지, 오빠에게 비정상적인 집착을 갖게 된 세희였다.

“응?”

책상 앞에 앉아있던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연예인이라도 왔나?’

남자, 여자, 아이 가릴 것 없이 꺅꺅 거리고 난리다.

세희는 소란의 정체가 무엇인지 확인해보고자 창가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미를 찌푸렸다.

“저 여자가 여긴 왜…?”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

금천구 XX동 000-0번지.

대표적인 서민 동네로 손꼽히는 그곳이 최근 매일 술렁이고 있었다.

채소가게 운영하는 신씨네 집 앞에 어느 날부터 고가의 외제차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던 탓이다.

차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주민들은 그 외제차가 무엇인지 대번에 알아봤다.

“저거 B사 13모델인데 한정판이야. 8억이 가뿐히 넘어.”

“와, 후덜덜하네. 신씨 아저씨 배추 많이 팔았나봐? 어떻게 저런 차를 끌고 다닌데?”

“신씨 아저씨가 아니라 아저씨 아들이 끌고 다니는 것 같던데…”

“잉? 맨날 츄리닝 입고 다니는 그 백수건달? 에이~ 백수가 돈이 어디 있어서 저런 차를 끌고 다녀?”

“로또라도 맞았나보지.”

“킁… 하긴, 저런 차를 빚져서 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정말로 로또 맞았나보네.”

“죽어라 일해 봤자 부질없어~ 인생은 한 방이라니까?”

“쩝… 나도 매주 로또 5장씩 샀는데 부족했나… 앞으론 매주 10 장씩 사련다.”

주말.

신씨네 집 앞을 오가는 주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했다.

봄 날씨 만끽하려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영우의 십삼이는 계속해서 도마 위에 올랐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 한 대의 차량이 진입했다.

주민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건 또 뭐냐…”

길이가 무려 8.5미터를 초과하는 대형 리무진이었다.

서민들로서는 가격조차 가늠할 수 없는 그 화려한 백색 차량이 공교롭게도 딱 신씨네 집 앞에 멈춰 섰다.

몇 달째 동네 사람들의 관심사였던 B사의 13모델이 초라해지는 순간이었다.

철컥.

차량에서 건장한 체격의 사내 3명이 내렸다. 2명은 주변을 경계했고, 나머지 1명은 뒷자석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한 여인이 등장했다.

길가에 늘어선 개나리꽃들이 뽐내던 아기자기한 미(美)를 한순간에 퇴색시켜버릴 정도로 압도적인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세상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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