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템빨-47화 (43/1,794)

제4장.

여느 게임이 그러하듯, Satisfy에서도 힐러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안정적인 파티 사냥과 레이드의 성공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존재였다.

그리고 Satisfy에서 힐러란 빛의 여신 레베카를 섬기는 사제들을 뜻했다. 오직 레베카를 섬기는 자들만이 힐에 정통할 수 있었다.

“둔파파 레이드에 가실 사제 2분 모십니다!”

“평균 150레벨 파티에서 사제분 모셔요~”

“사제님들! 제발 우리 파티로 와주세요! 아이템 습득 우선권 드립니다!”

사제의 인기는 상상불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사제의 숫자는 매우 한정적이었다.

레베카교의 사제가 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기 때문이다.

연애를 금함은 기본이오, 몇날며칠 기도만 올리거나 간헐적인 묵언수행, 금식을 진행해야 하는 등 고난의 연속이었다.

현실에서 직업이 스님인 사람들이나 레베카교의 사제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하여, 대부분의 유저는 레베카교의 사제가 되기를 꺼려했고, 레베카교의 사제는 대부분 NPC로 충당되는 실정이었다.

“후… 오늘도 사제는 없구만.”

“쩝, 또 신전 가서 돈 주고 고용해야하네.”

사제를 구하지 못한 파티들은 레베카 신전을 방문한다. 그리고 헌금이라는 명목으로 큰 금액을 지불하고 NPC사제들을 고용했다.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다보니 레베카교는 본의 아니게 막대한 재물을 쌓게 되었고, 청렴하기로 유명하던 레베카교의 고위성직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물욕에 지배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태를 주도한 것은 현 교황이었다.

온갖 술수를 부려서 다른 교황 후보들을 재치고 13대 교황으로 등극한 드레비고, 그는 처음부터 성직자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개인의 욕심을 충족시키기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교황이 된 후.

그는 시장의 섭리를 이해하고 사제들을 상품화하여 부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고위 성직자들에게 향음을 제공, 그들을 타락시켜서 그들과 함께 온갖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그로인해 레베카교는 시간이 지날수록 타락하고 또 타락해서 머잖아 퇴폐의 상징으로 전락할 것이 틀림없었다.

“답이 없네.”

여기, 한숨 쉬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린 아름다운 소녀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사벨.

교단 최강의 성기사를 뜻하는 레베카의 딸 중 1인이며, 라파엘의 창의 주인이다.

그녀는 교황의 방에서부터 쉴 새 없이 울려 퍼지고 있는 교성을 들으며 몸서리쳤다.

“누구보다도 신성해야할 존재가 매일 밤마다 개처럼 허리나 흔들어대고 있으니, 한탄스러울 따름이야.”

사제 카서스가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다.

“쉿. 성스러운 빛의 처녀의 발언이라기엔 부적절합니다.”

이사벨이 아미를 찡그렸다.

“그럼 뭐라고 말해야할까? 우리 교황님께서 밤새 성교에 열중하시느라 힘드시겠… 웁! 우읍!!”

결국, 카서스가 손으로 이사벨의 입을 막아버렸다. 그를 뿌리친 이사벨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교황성하 앞에서 대놓고 불만을 토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뒤에서라도 욕하고 싶은 건데, 이마저도 용납 못하겠다는 거야?”

“…성하폐하의 눈과 귀가 도처에 깔려있습니다. 부디 주의해주십시오.”

“칫…!”

두 사람이 아웅다웅하는 그때 마침 교황의 방문이 열렸다.

“소란스럽군. 내 욕이라도 하고 있었더냐?”

문이 열리고 등장한 교황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었다.

땀에 젖은 나신이 달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내일모레 환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게도 탄력 있는 피부와 건강한 육체가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이사벨과 카서스가 그에게 예를 갖추었다.

“교황성하를 뵙습니다.”

“이사벨, 그대는 언제 봐도 질리지 않고 아름답구나.”

빙그레 미소지은 교황 드레비고가 이사벨의 머리카락을 보물 대하듯 소중하게 어루만졌다.

그에 수치심을 느낀 이사벨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성격 같아서는 당장 교황의 손을 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최대한 분노를 삼켰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애원하듯이 말했다.

“성하, 설마 저마저도 성하의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는 저 창녀들 대하듯 하시려는 겁니까? 그게 아니라면 소녀가 찾아온 용무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허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설마 교단의 상징인 그대를 욕보이겠느냐?”

멋쩍게 웃은 교황이 이사벨의 머리카락으로부터 손을 뗐다.

상대가 교황이기에, 불쾌하다는 표정조차 짓지 못한 이사벨이 용무를 꺼냈다.

“야탄교가 신성의 방패를 갈취하려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했습니다. 신성의 방패에 암흑의 마력이 깃들 경우, 신성의 방패가 자랑하는 막대한 신성력이 모조리 암흑의 마력으로 전환되는 현상이 있더군요. 야탄교는 그 현상을 이용해서 신성의 방패를 자신들의 무기로 삼을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교황이 흥미를 보였다.

“빛이 있는 곳엔 어둠이 깃드는 법… 사실 신성력과 암흑의 마력은 궁합이 좋은 게 아닐까?”

“그들이 결단코 신성의 방패를 손에 넣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해야만 합니다.”

“모조리 회수하면 되겠군.”

신성의 방패의 제작법은 레베카교와 친교를 맺고 있는 일부 국가와 가문에만 전파 된 상황이다. 그리고 애초에, 신성의 방패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레베카교의 사제가 도움을 줘야만 했다. 대장장이 혼자서만 제작하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교단에서는 신성의 방패를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떤 사제의 도움을 받아 왜 제작했는지 모조리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고로 신성의 방패를 회수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제가 직접 성기사들을 지휘해서 각국, 각 가문으로부터 신성의 방패를 회수조치 하겠습니다.”

“그딴 시시한 일은 다른 이들에게 시키면 된다. 그대는 따로 해줘야할 일이 있어.”

“…?”

교황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내 어젯밤 신탁을 받았다. 레베카 여신께서 말씀하시기를, 조만간 당신의 딸 중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라 하더구나.”

“그게 무슨?”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불길함을 감지하고 표정을 굳히는 이사벨에게,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교황이 명령했다.

“린을 잡아오너라. 여신께서 말씀하신 배반자는 필시 그 아이다. 내 친히 그 아이에게 벌을 내릴 생각이다.”

이사벨은 납득하지 못했다.

“레베카의 딸은 오로지 레베카 여신과 교황성하께 충성합니다! 우리 중 배반자가 나타날 리 없어요!”

“린은 촌구석 신전에 처박힌 채 내 부름에 벌써 3번이나 응답하지 않고 있다. 필경 배반할 생각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러겠느냐?”

결국 이사벨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그 아이가 성하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는 이유를 정녕 모르십니까? 성하! 성하께서는 정녕 신탁을 들으신 게 맞습니까? 과연 성하께서 신탁을 들으실 수 있는지 저는 솔직히 잘 모르겠군요!”

“주제넘구나!”

덥썩!

교황이 이사벨의 가녀린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살기등등하게 말했다.

“내 의지가 곧 레베카 여신의 의지이거늘, 나를 불신하는 게냐?”

이사벨은 어려서부터 쭉 교단에 의해서 키워졌다. 그리고 다른 사제나 성기사들과 마찬가지로 레베카 여신과 교황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강요받아왔다. 그건 일종의 세뇌였기에, 그녀는 천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에게 결코 반항할 수가 없었다.

“…믿겠습니다.”

이사벨이 컥컥거리며 간신히 말했다. 그제야 교황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소름 돋게도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이틀의 말미를 주겠다. 어서 린을 잡아오너라.”

쾅!

일방적으로 통보한 교황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내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카서스가 황급히 일어났다. 그리고 이사벨에게 다가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쩌시겠습니까?”

이사벨은 한동안 말없이 교황의 방문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겠어… 시키는 대로 해야지.”

린 또한 레베카의 딸 중 하나다. 교황이 쓰레기 같은 인물이며 교단이 타락할지언정, 그녀가 배반할 일은 결단코 없다. 지금 린은 썩은 교단을 바로잡는 게 불가능하자 회의감을 느끼고 잠시 방황하는 시기일 뿐이다.

이사벨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령 받은 이상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

괴로워하는 이사벨에게 동정어린 시선을 보내던 카서스가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보름달 너머를 바라보며 기도했다.

‘레베카 여신이시여… 타락한 교황에게 신벌을 내려줄 사자를 보내주소서…’

***

그리드가 윈스톤을 떠나고 벌써 나흘이 지났다. 그리고 그 나흘 동안 그리드의 레벨은 무려 130이 되어있었다. 모두 말락서스의 망토 덕분이다. 그리드는 윈스톤을 떠난 후부터 지금까지 쭉 말락서스의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이거 참 좋단 말이야.”

크르릉!

에트날 왕국과 사하란 제국의 경계선.

수아즈 산맥을 횡단하고 있는 그리드의 주변으로 또 수십 마리의 몬스터들이 모여들었다.

말락서스의 망토로부터 발산되는 피 냄새에 이끌린 것이다.

지난 나흘 동안, 그리드는 이런 방식으로 몰이사냥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하압!”

수아즈 산맥의 몬스터들은 평균 160레벨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그리드는 160레벨 몬스터들을 상대로 굳이 스킬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했다.

수련의 일환으로서, 그는 순수한 검술만 사용하여 몬스터들을 하나둘씩 베어나갔다.

크아아악~!

깨갱! 깽!

압도적인 스탯을 기반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있는 그리드의 육체는 경이적이었다.

그리드의 의지대로 움직이며, 그리드가 전사 시절에도 구현하지 못했던 검술들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끔 해줬다.

스카칵!

다인슬레프를 양손으로 쥔 채, 높이 도약하여 종으로 3차례 회전한 그리드가 원심력을 이용, 에티의 몸을 이등분 낼만큼 강력한 검격을 선보였다.

그리고 갈라지는 에티의 시체 너머에서 도끼를 휘둘러오는 트롤의 공격에 즉각 반응, 사선으로 몸을 기울여 회피함과 동시에 반격하여 트롤의 목을 날려버렸다.

그러는 사이 공중에서는 오우거의 대형 도끼가 꽂혀오고, 좌측에서는 에티들이 집어 던지는 바위덩어리가 3개 날아왔다. 우측은 거목이 가로막고 있다. 정면의 목 베인 트롤이 죽지 않고 재생하며 다시금 도끼를 휘둘러왔다.

챙강!

트롤의 눈 먼 도끼를 가볍게 맞받아친 그리드가 우측의 거목을 박차고 뛰어 올랐다. 그리고 오우거의 대형 도끼를 피한 뒤 오히려 발판으로 삼아 공중에서 가속, 직면해온 3개의 바위들을 다인슬레프로 모조리 부셔버렸다. 그리고 경악하는 에티들의 중심부로 난입했다.

파팟! 파파파파팟!!

묵색의 검광이 예측불허의 궤도로부터 생성되면서 에티들의 몸을 난도질했다.

펄럭이는 망토에 시야를 잃고 잠시 허우적거리던 에티 한 마리가, 그 짧은 사이에 전멸한 동족들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급기야 등을 보이고 도망치는 녀석을 그리드가 달려서 따라잡았다. 그리고 심장을 꿰뚫은 뒤, 그 죽어가는 에티를 하늘에서부터 하강해오고 있는 가고일을 향해서 집어던졌다.

퍽!

가고일이 신경질적인 발길질로 에티를 걷어찼다. 그 사이 플라이를 사용해서 이미 가고일의 머리 위까지 날아오른 그리드가 씨익 웃었다.

“안녕?”

캬악!!

깜짝 놀란 가고일이 기성을 내지르더니 급하게 광선을 쐈다. 워낙 근접해있었기 때문에 그리드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광선에 맞아버렸다. 그에, 가고일은 그리드가 돌덩어리가 될 줄 알고 신나서 까악, 까악 떠들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멀쩡했다. 그에 당황하는 가고일의 목을 다인슬레프가 베어버렸다.

“하핫!”

그리드는 계속 웃고 있었다. 싸우면 싸울수록 레벨이 오르고 경험이 쌓이면서 강해지는 게 체감되었으니 기뻤다.

“가자!”

지상에는 아직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남아있었다.

그리드가 인벤토리로부터 파브라늄을 꺼냈다. 지난 나흘 동안, 그는 노력해서 파브라늄과의 교감능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키고 있었다.

이제 파브라늄은 그리드를 자전하며 보호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리드의 의지에 감응하여 먼저 적을 공격하기도 했다.

피핏!

부메랑처럼 회전하며 날아간 2개의 황금 원반이 오우거의 양쪽 발목의 아킬레스건을 그어버렸다. 그에 나자빠지는 오우거의 몸 위로 낙하한 그리드가 일방적인 살육전을 개시했다.

싸우는 중에도 말락서스의 망토에 홀린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고,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헉… 헉…”

높은 체력 스탯과 끈기 스탯을 보유한 그리드의 스태미너는 비상식적일 정도로 높다. 하지만 하루 종일 싸우면 제아무리 그리드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를 사냥한 후.

만족스러울만큼 레벨을 올린 그리드가 벌러덩 대자로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손을 뻗으면 잡힐 것만 같이 가까워져 있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여행길에 말락서스의 망토를 입고 다니면 이동하면서 겸사겸사 레벨 업까지 할 수 있으니 좋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거야 원, 어딜 가나 몬스터들이 득실거려서 이동속도가 너무 느리군.’

전직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레베카교만이 아니라 쥬다르교와 도미니언교, 심지어 야탄교까지 찾아가야만 했다.

너무 여유를 부리다가는 퀘스트를 클리어하기까지 소요하는 시일이 너무 길 것 같았다.

내일부터라도 당분간 망토를 벗고 다녀야하는 게 아닐까? 그리드는 고민하다가 이내 생각을 고쳤다.

‘내가 자주 싸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이번 퀘스트 끝나면 결혼하고 대장장이 일 하느라 한동안 또 렙업할 시간 없을 테니… 그래, 이참에 아주 뽕을 뽑자.’

다음날.

날이 밝고 스태미너가 충전 된 그리드가 말락서스의 망토를 다시 걸쳤다. 그리고 산맥을 횡단하는 동안 몰이사냥을 계속 반복했다.

그 결과, 보통 사람들은 3일이면 횡단할 수아즈 산맥에서 그리드는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소요하게 되었다.

덕분에 짭짤한 아이템벌이를 하고 광렙업도 하는 등, 그리드는 즐거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이때.

그리드로 인해 고통 받고 있는 인물이 있었으니…

“그리드… 도대체 언제 돌아올 생각이냐…”

그리드가 사라진 칸의 대장간!

대장간 구석에 거구의 대머리 사내가 쭈그려 앉아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반트너였다.

그는 대장간 입구를 주시하고 앉은 채 폐인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드… 어서 와라… 어서… 당장 돌아와…”

기다림 끝에 드디어! 그리드가 내 아이템을 만들어줄 차례가 되었건만!

이 자식이 아이템을 만들어주기는커녕 퀘스트를 하겠답시고 사라져버리더니 벌써 열흘이 지나도록 감감무소식이다. 도대체 언제 돌아오려고 하는 건지 감조차 안 잡혔다.

“왜…! 왜 하필 내 차례 때…!”

이러고 있는 와중에도 그리드 덕분에 템빨 받은 폰과 이벨린은 광렙하고 있었다. 폰의 레벨은 반트너의 레벨을 아득하게 앞질러가고 있었고, 이벨린의 레벨은 반트너의 레벨을 거의 다 따라잡으려하고 있었다.

“제발 빨리 돌아와~~~!!”

칸에게 아이템 수리를 맡기기 위해서 찾아왔던 다른 길드원들이 반트너를 발견하고 쑥덕거렸다.

“쟤 저럴 시간에 렙업하면 될 걸 왜 저러고 있는 거야?”

“폰이랑 이벨린이 무기빨로 몬스터들 쓸어 담는 모습을 목격했나봐. 그 후로 회의감을 느껴서 사냥을 못하겠다고 하더라.”

“아니, 지는 그나마 우리보다 낫잖아? 그리드가 아이템 감정으로 도끼 강화시켜줬잖아?”

“그야 그런데… 그래봤자 공격력은 어중간하고 뭣보다 방어력이 약해서 레벨대에 맞는 사냥터에서 사냥을 못하고 있대.”

“거 참, 그러게 방어력에도 신경 좀 쓸 것이지… 수호기사 주제에 스탯은 죄다 근력에 찍고 무기에만 신경 쓰더니만 결국 망했네.”

그리고 어느 날, 반트너가 지슈카에게 제안했다.

“차라리 다음부터는 그리드가 퀘스트 할 때마다 길드원 전원이 우르르 다 같이 가자. 그리고 협동해서 퀘스트를 후다닥 깨주는 거야. 그러면 그리드는 퀘스트에 시간 낭비하지 않고 우리 아이템 제작에만 열중할 수 있잖아?”

“…그리드도 게임을 즐겨야지.”

“걘 대장장이잖냐! 본분을 지켜야지!”

“…….”

반트너의 심정 같아서는 그리드를 대장간에 가둬놓고 아이템만 만들게 하고 싶었다.

수아즈 산맥을 횡단한 이후, 그리드는 작은 산 2개를 더 넘고 대하를 건넌 끝에 롤링에 도착할 수 있었다.

롤링은 작은 마을이었는데, 이곳에서 남쪽으로 반나절만 걸으면 드디어 교황청이다.

“사방이 레베카 여신상이네.”

거리의 상점이나 주택마다 크고 작은 레베카 여신상을 모셔놓고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릴지라도 여신상 한두 개는 꼭 발견할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롤링의 주민들은 레베카 여신을 광적으로 섬기는 듯했다.

‘지리적으로 교황청과 가까이 위치한 마을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레베카교의 색으로 물든 건가…’

냐옹~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신상의 품에 기댄 채, 햇살을 쐬며 뒹굴고 있는 고양이들의 모습이 무척이나 평화롭게 보인다. 거리의 상인들과 주민들은 바삐 움직이거나 고성 지르는 일 없이 느긋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드는 덩달아 평온을 느꼈다.

‘어딜 가나 북적거리는 윈스톤과는 천지 차이군. 휴양지에 온 기분이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마음의 여유를 갖고, 여기저기 둘러보며 마을을 거닐던 그리드가 우뚝 멈춰 섰다.

‘내가 미쳤나?’

여기까지 온 이상 한시라도 빨리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건만! 관광 따위나 즐기며 시간낭비하고 있다니!

‘먹고 살만 해지니까 나태해졌군.’

사람이 나태해지면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는 법임을, 그리드는 경험을 통해서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당장 먹고 살만해졌다고 해서 방심했다간 언제 다시 빚쟁이 신분으로 전락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과거의 트라우마 탓에 초조함을 느낀 그리드가 걸음을 재촉했다. 그가 향한 곳은 대장간이었다.

[‘대장장이 장인의 기술’ 스킬 마스터 효과가 발동합니다. 중급 이상의 대장장이 기술 스킬을 익힌 대장장이 NPC가 당신을 알아보고 호의적으로 대할 것입니다.]

[‘파그마의 후예’ 직업 효과가 발동합니다. 고급 대장장이 기술 스킬을 익힌 대장장이 NPC가 당신을 알아보고 경배할 것입니다.]

대장간에 입장한 순간, 참으로 오래간만에 보는 알림창들이 떠올랐다.

한동안 윈스톤에 거주하면서 칸의 대장간만 들락거렸으니, 새로운 대장장장이와의 만남은 수개월 만이다.

과연 롤링의 대장장이는 중급 대장장이일까, 고급 대장장이일까?

그리드는 기왕지사 경배받고 싶었다. 한데…

“어서 오세요~”

대장장이가 그리드를 반겨주었다. 이제 갓 스물이나 됐을까 싶을 정도로 어린 그는 공교롭게도 하급 대장장이었다. 그리드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하고 평범한 손님 대하듯 했다.

“찾는 물건이라도 있으십니까?”

실망감을 느낀 그리드가 한숨 쉰 후 용건을 꺼냈다.

“아이템을 수리하려고.”

“네, 금방 수리해드리겠습니다.”

그리드는 귀를 의심했다.

“뭐? 네가 내 아이템을 수리해주겠다고?”

하급 대장장이 따위가 전설의 대장장이님의 아이템을 수리하겠답시고 나대다니!

그리드는 가소로웠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예?”

“야, 야. 아서라. 나도 대장장이니까 내 아이템은 내가 직접 고치련다. 용광로만 빌렸으면 하는데 괜찮겠냐? 사용료는 지불할게.”

롤링의 대장장이, 렉터가 그리드를 경계했다.

“정말로 대장장이가 맞으십니까?”

그리드는 강철로 만든 건틀릿과 흑철을 덧댄 부츠, 그리고 엄청 무거워 보이는 헤비아머를 무장하고 있었다. 세상에 어떤 대장장이가 저런 차림으로 돌아다닌단 말인가? 그리드는 한 눈에 봐도 전사였지, 대장장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리드가 쯧쯧, 혀를 찼다.

“내가 대장장이가 아닐 거라고 의심하는 거야? 저급한 녀석답게 안목이 없군… 넌 대장장이로 대성하긴 글렀다, 야.”

“뭐, 뭐라고요?”

렉터는 이제 갓 20살 된 청년이었다. 아직 어리니, 그리드가 초면에 반말 찍찍 뱉어대는 건 백번 양보해서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함부로 독설까지 하다니?

수치심을 느낀 렉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에 미안함을 느낀 그리드가 몇 번 헛기침했다. 그리고 나름 위로해준답시고 신경 써서 말했다.

“하긴 네 미래를 내가 어떻게 알겠냐? 지금 당장은 네 안목이 썩어 문드러졌다고 해도 언젠간 대성할 수도 있겠지… 쩝, 잘 봐라. 흔치 않은 기회다. 나와의 만남을 주선해준 레베카 여신께 감사하며 내가 일하는 모습을 잘 지켜봐.”

“…?”

그리드는 더 이상 렉터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멋대로 용광로 앞으로 다가가더니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이봐요! 그거 함부로 다루면 화상… 헉?”

렉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드가 용광로의 온도를 비상식적으로 빠르게 상승시켰기 때문이다.

‘불을 저렇게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저게 가능한 건가!’

2년 전 돌아가신, 중급 대장장이었던 아버지조차도 그리드만큼 불을 쉽게 다루지는 못했었다. 그리드는 정녕 불의 화신 같았다.

렉터가 감탄하고 있는 사이, 그리드는 인벤토리로부터 모루와 망치를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템들을 하나하나씩 차례대로 수리하기 시작했다.

[이상적인 단검의 내구력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제작한 아이템입니다. 이해도가 100퍼센트입니다.]

[이상적인 건틀릿의 내구력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본인이 제작한 아이템입니다. 이해도가 100퍼센트입니다.]

[본인이 제작한 아이템의 경우, 이해도가 최대치일지라도 아이템 사용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페널티가 적용됩니다.]

[칸의 역작의 내구력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칸의 역작에 대한 이해도는 이미 100퍼센트입니다. 제작법을 익혔으며 페널티 없이 사용 가능합니다.]

[다인슬레프(모작)의 내구력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다인슬레프(모작)에 대한 이해도가 3퍼센트 상승하여 31퍼센트가 되었습니다.]

[서릿빛 오크 족장 투구의 내구력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에 대한 이해도가 7퍼센트 상승하여 85퍼센트가 되었습니다.]

[브라함의 부츠의 내구력이 최대치가 되었습니다.]

[브라함의 부츠에 대한 이해도가 3퍼센트 상승하여 6퍼센트가 되었습니다.]

아이템 이해도란 파그마의 후예에게만 존재하는 개념이었다.

파그마의 후예는 아이템을 사용, 감정, 수리, 분해함에 따라서 아이템에 대한 이해도를 높일 수 있었고,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된 아이템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 제작법을 습득하는 것이 가능했다.

다인슬레프의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될 경우, 그리드는 다인슬레프를 양산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아이템의 등급과 사용 조건이 높을수록 이해도 올라가는 속도가 더뎠기 때문에, 다인슬레프의 제작법을 언제쯤 익힐 수 있을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그래도 오크 족장 투구는 이해도가 꽤 많이 올라있었네. 흠, 이참에 이해도 100퍼센트에 도전해볼까?’

까앙!

완벽하게 수리한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를 모루 위에 올려놓은 채, 잠시 고민하던 그리드가 이내 망치를 세게 내리쳤다.

‘저자가 미쳤나보다.’

그리드의 아이템 수리 능력이 워낙에 탁월했기에, 구경하면서 연신 감탄하던 렉터가 화들짝 놀라며 황당해했다.

생긴 것은 비록 기괴할지라도, 성능 하나만큼은 기가 막혀 보이는 뼈 투구를 갑자기 때려 부수는 그리드의 모습이 마치 미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까앙! 까앙!

그리드의 거침없는 망치질로 인하여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가 순식간에 산산조각 나버렸다.

‘어째서 멀쩡한 투구를 저 꼴로 만들어버리는 걸까? 성정 한 번 난폭하구나.’

렉터는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그리드가 투구를 부셔버렸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리드는 투구를 부순 게 아니라 ‘전설적 대장장이의 분해’ 스킬을 사용, 재조립 가능한 형태로 분해한 것이었다.

“이음새 부분에 철사를 이런 식으로 박아놨었군… 조잡하기 짝이 없네. 이 부분을 보완해야겠어.”

투구의 구조를 완벽하게 파악한 그리드가 분해했던 투구를 다시금 조립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조립이 아니었다. 그리드는 조립 과정에서 투구의 단점들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가 최초의 모습 그대로 복원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에 대한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되었습니다.]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를 페널티 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릿빛 오크 족장 투구의 제작법을 습득하였습니다.]

“좋아.”

흡족한 표정을 지은 그리드가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를 장착했다.

[직업 특성의 효과로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를 장착하였습니다.]

[아이템 사용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해도가 100퍼센트가 되어 페널티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서릿빛 오크 족장의 투구>

등급:유니크(세트)

내구력:290/290 방어력:190

*치명상을 입을 확률이 25퍼센트 하락합니다.

*생명력이 15퍼센트 상승합니다.

*일정 확률로 대상을 공포에 빠뜨립니다.

*서릿빛 오크 족장의 세트 효과

-세트 3개 장착 시 근력 +50, 체력 +80

-세트 5개 장착 시 근력 +100, 체력 +200, 서릿빛 오크 족장으로 변신 가능

*서릿빛 오크 족장 변신

-서릿빛 오크족을 통솔 가능

-스킬 ‘회전 베기’ 생성

서릿빛 오크 족장은 북쪽 설원의 지배자라고 표현해도 손색없는 존재입니다. 그가 애용하던 이 투구는 설원 오우거의 두개골로 제작되어 흉측한 외관을 가졌습니다. 특히 왼쪽에 솟은 외뿔이 매우 위협적인 모양새입니다. 이 투구를 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본래 조잡한 감이 있었으나, 대단한 실력과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이름 모를 장인이 재조립하여 단점을 보완하고 기능을 강화시켰습니다.

사용 조건:레벨 150 이상. 근력 400 이상.

무게:800

“크… 역시 난 대단해.”

투구의 성능이 향상되었음을 확인한 그리드가 스스로의 솜씨에 감동했다. 그리고 투구를 쓴 채 렉터에게 시선을 돌리고 물었다.

“어떠냐? 투구가 왠지 좀 멋져진 것 같지 않냐?”

“히, 히익…”

렉터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기괴한 뼈 투구가 너무나도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뒷걸음질 치더니 급기야 엉덩방아 찧는 그를 보면서 그리드가 한숨 쉬었다.

“멋있어 보이는 건 내 착각이었군… 젠장, 역시 빨리 투구를 교체해야 돼.”

투덜거리면서 렉터에게 다가간 그리드가 10실버를 던져주고 말했다.

“내 풀무질과 망치질을 곁에서 잘 지켜봤겠지? 너는 오늘부터 장사 접고 한동안 내 풀무질과 망치질을 상기하면서 연습해라. 그럼 혹시 또 아냐? 지금은 네 실력이 저급할지라도 10년 후쯤엔 솜씨가 늘어서 중급 대장장이는 될지도?”

그리드는 장난으로 하는 말이었다.

설마 렉터가 자신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채, 낄낄거리며 대장간을 떠났다.

잠시 후.

정신 차린 렉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당장 대장간 문을 걸어 잠그더니 그리드의 조언(?)을 되새김질 하며 그리드의 풀무질과 망치질을 따라 연습해보았다.

그리고 훗날.

본래부터 재능이 있었던 렉터는 무단한 노력 끝에 지역을 대표하는 고급 대장장이가 됐다. 그리고 말년에는 제자들에게 기인과 만났던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며 그리드를 그리워했다.

하지만 그리드는 모르는 일이었다.

***

마을 중심부.

레베카 신전 앞에 선 그리드가 놀라워하고 있었다.

‘황금?’

이곳의 신전은 다른 지역의 신전들과 달리 규모가 작았다. 면적은 100평이 채 안 돼 보였고 단층짜리 건물이었다. 하지만 외벽이 모조리 황금으로 도색되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니, 화려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이거 뜯어가는 방법 없나…?”

힐끔힐끔, 남들 눈치를 살핀 그리드가 신전 외벽을 도색하고 있는 황금을 손톱으로 슥슥 긁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세게 긁어도 금가루 하나 떨어지지 않았다.

“썩을, 더럽게 잘 붙여놨네.”

그리드는 포기하지 않았다. 공짜로 금을 얻을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낑낑거리며 금을 긁어내는 그의 모습은 롤링을 처음 방문한 여행객의 티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으니…

한 중년 사제가 그를 발견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래간만에 봉이 찾아왔군.’

사제의 아이디는 동파오!

그는 중국인 유저였다.

연애를 금하며 묵언수행과 금식을 강요하는 레베카 교단의 고단한 율법을 잘 수행하면서 레벨을 무려 160까지 올린,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슬금슬금, 그리드의 등 뒤로 다가간 그가 인자한 미소를 짓고 물었다.

“형제님, 롤랑은 처음이신가 봅니다?”

“……!”

구석에 쭈그려 앉아 금딱지를 떼고 있던 그리드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쓸데없이 하하하! 크게 웃으면서 유난을 떨었다.

“아~! 예! 제가 여기 처음입니다! 이야, 이거 신전이 눈부시게 아름답군요! 레베카 여신님의 아름다운 자태를 연상하게 합니다! 하하하핫! 응?”

갑자기 나타나서 인사를 건네온 상대는 레베카교의 사제복을 입고 있었다.

그리드는 이자에게 꼼짝없이 도둑놈으로 몰리게 생겼다고 걱정하다가 문득 깜짝 놀랐다.

눈앞의 사제, NPC가 아니라 유저였기 때문이다.

‘사제로 전직한 유저는 처음보네.’

그리드 또한 레베카교의 사제로 전직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실제로 그리드가 Satisfy를 플레이하면서 만났던 레베카교의 사제는 모조리 NPC였다.

한데 눈앞에 나타난 중년인은 NPC가 아닌 유저였으니 놀라웠다.

‘아이디가 동파오… 중국인인가…’

왠지 식욕을 돋우는 아이디였다. 오늘밤 가족들과 함께 중국집을 찾아가 동파육을 사먹어야겠다고 다짐한 그리드가 질문했다.

“현실에서 직업이 스님입니까? 무슨 수로 레베카교의 전직 퀘스트를 클리어한 거죠?”

동파오가 허허, 해탈한 도인처럼 웃었다.

“현실에서 저는 속세에 물든 평범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다만 Satisfy에서만큼은 오로지 레베카 여신님을 섬기고 싶다는 일념을 가지고 온갖 욕망을 억누르는데 성공하여… 성스러운 빛의 사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와… 전 다른 건 몰라도 묵언수행이 엄청 힘들어 보이던데요. 어차피 연애야 못하… 아니, 연애야 안하면 그만이고, 금식도 죽지 않을 기간만큼만 하는 거니까 어떻게든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만 묵언수행은 영… 20일 동안 말 한 마디도 하면 안 되다면서요? 그걸 어떻게 견뎠습니까? 그리고 전직 퀘스트 성공해서 사제가 된다고 해도, 사제의 위치를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수시로 수행 퀘스트를 진행해야한다던데요? 그걸 다 견뎌 내다니 대단하군요.”

본래 그리드는 남의 일에 무관심한 편이었다. 하지만 사제 유저를 본 경험은 처음인지라 자연스럽게 흥미가 샘솟았다.

그리고 항상 불행하던 빚쟁이 시절에는 자신의 신세가 너무 처량하여 남이 잘 되는 꼴을 보면 배 아파하고 칭찬에 인색했지만, 이제는 빚쟁이 신분을 청산하고 나름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어서 마음에 여유가 생기다보니 남을 칭찬할 줄도 알았다.

그에게 동파오가 빙그레 웃어주었다.

“묵언 수행이 어렵기는 하지요. 하지만 레베카 여신님께 기도를 올리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가서 나름 도전해볼만합니다. 기도라는 행위 자체가 신성력 스탯을 올려주기 때문에,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수련도 되고 겸사겸사 좋죠. 한데 형제님께서는 무슨 일로 롤링을 찾아오신 겁니까? 이 근처에는 교황청 외에 특별한 관광지나 사냥터가 없어서 이곳을 찾는 분들은 거의 다 교황청에 용무가 있는 경우이던데…”

“저도 교황청 가는 길입니다. 퀘스트 때문에 교황을 만나야 해서.”

“허… 교황성하를?”

내내 반달을 그리고 있던 동파오의 눈빛이 순간 날카롭게 반짝였다.

‘레베카교인도 아니면서 교황과 만나는 퀘스트를 진행하다니? 심지어 나조차도 교황을 멀리서 구경해본 게 고작이건만… 이자, S급 이상의 퀘스트를 진행하는 듯하군.’

동파오는 그리드가 장착하고 있는 아이템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갑옷이나 건틀릿은 그저 그렇고… 망토는 꾀죄죄한 것이 영 쓰레기고… 악세사리라고는 소박해 보이는 반지 하나뿐인가… 하지만 부츠는 엄청난 고가품이군. 이자, 역시 고렙이야.’

롤링은 대륙의 중심부에서 동떨어진 곳이었다. 오는 길이 험난하고 몬스터가 득실거려서 어지간한 고렙이 아니고서야 자력으로 찾아오는 게 불가능했다.

정황상 그리드가 고렙이라고 확신한 동파오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꽤나 높은 목숨 값을 받을 수 있겠어.’

싱글벙글, 눈을 다시금 반달로 그린 동파오가 그리드에게 제안했다.

“마침 저도 교황청에 가는 길이었습니다. 형제님께서 괜찮으시다면 동행하시겠습니까?”

힐러와 동행할 수 있다면 물약 값도 아낄 수 있고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남들은 힐러와 파티를 맺기 위해서 돈까지 지불하는 실정인데 공짜로 파티를 맺을 수 있다니?

그리드는 이게 웬 횡제냐 싶어서 흔쾌히 수락했다.

“당연히 저야 좋죠.”

그렇게,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파티를 맺었다.

파티창에서 동파오의 레벨을 확인한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160레벨? 사제는 렙업하기 어려운 직업으로 알고 있었는데, 레벨이 대단히 높군요?”

“워낙에 수행 퀘스트가 많이 발생하는 탓에 레벨을 올릴 시간이 없기야 하지요. 하지만 사제는 직업의 특성상 파티를 구하기가 수월하여, 언제 날 잡고 레벨 높은 파티에 들어가서 사냥하다보면 레벨 올리는 게 의외로 빠릅니다. 한데 그리드 님… 레벨이 147이시군요? 의외로 낮으시네요.”

“하하, 사정상 레벨 올릴 시간이 거의 없어서요. 그나마 최근에 광렙해서 이 정도 올린 겁니다.”

“아, 네…”

동파오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고작 이 레벨로 수아즈 산맥을 혼자서 횡단했단 말이야? 오우거나 가고일을 요리조리 잘도 피했나보지? 운도 좋군… 제길, 최소 160레벨 이상은 될 줄 알았더니…’

동파오는 사제라는 신분을 이용, 고레벨 여행자들에게 경계심 주지 않고 접근해 로그아웃이 불가능한 특정 장소로 유인했다. 그리고 패거리들을 불러와 여행자를 살해 협박, 몸값을 뜯어내는 방식으로 거금을 벌어왔다.

‘147레벨이라…’

당연한 이야기지만, 사냥감의 레벨이 높으면 높을수록 높은 몸값을 뜯어낼 수 있었다. 147레벨은 애매했다. 평균 레벨에 비하면 높은 편이기는 했지만, 동파오가 바란 것은 랭커급 초고렙 유저였기 때문이다.

‘147레벨이면 죽어서 경험치 떨어뜨리더라도 사냥해서 금방 복구가 가능한 편이니… 굳이 비싼 돈 지불하면서까지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을 듯한데… 쩝, 푼돈밖에 못 뜯어내겠군. 돈을 뜯어낸 후에 죽여서 저 부츠를 떨어뜨리길 바라야겠어.’

그렇게, 두 사람은 교황청으로 가는 짧은 여정에 올랐다.

그리고 마을 어귀에서 그들을 주시하는 무리가 있었다.

“동파오가 사냥감과 함께 출발했다.”

“좋아. 천천히 식사하고 나서 뒤따라가면 딱이겠군.”

3명의 사내였다.

이들은 동파오와 한통속인 어쌔신 유저들이었는데, 그 면면들이 화려했다.

어쌔신 랭킹 5위 샤이와 11위 커브, 13위 스니퍼였다.

이들 셋이서 통합랭킹 51위 유저를 암살한 전력도 있었으니, 이들의 솜씨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리드는 상당한 거물들의 표적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리드는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른 채, 사제와 공짜로 파티를 맺었다는 사실에 들떠 있을 뿐이었다.

‘뭐지? 이게 무슨 영문이지?’

동파오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있었다.

본래, 롤링에서 교황청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평화로웠다. 성기사들이 규칙적으로 정찰을 도는 덕분에 도적을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몬스터와 짐승이 출몰하는 경우도 지극히 드물었다. 대륙에서 몇 안 되는 안전지대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한데 오늘은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몬스터들이 쉴 새 없이 튀어나왔다. 마치 무너진 댐에서 물이 쏟아지듯이, 밑도 끝도 없이 몬스터떼가 밀려와 그리드와 동파오를 습격했다.

“허억… 허억… 이 근방에 이렇게 많은 몬스터가 서식하고 있었을 줄이야…”

동파오는 녹초가 되어있었다.

롤링에서 출발하고 채 1시간도 걷지 않았건만, 벌써 100마리가 훌쩍 넘는 숫자의 몬스터들이 나타나 숨 돌릴 틈도 없이 싸우고 있다. 마나가 몇 번이나 고갈되어 마나 물약을 몇 병이나 소비해버렸고, 이제는 급기야 스태미너가 바닥나기 직전이다.

“헉헉! 이상합니다! 정말로 이상해요! 저는 이 길을 수백 번 가까이 이용했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헉헉!”

동파오는 현재 사태를 납득할 수 없었다. 죽여도, 죽여도 새로이 나타나는 리자드맨들에게 둘러싸인 채, 계속해서 상처를 입고 있는 그리드에게 연신 힐을 써주던 그가 급기야 울상 지었다.

“뭔 몬스터가 이리 많은 건지… 이상하다고!!”

앞으로 15킬로미터 가량을 더 이동해야지만 그리드를 목표 지점까지 유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기세로 끊임없이 몬스터가 나타난다면, 두 사람은 목표 지점에 도착하기 전에 목숨을 잃을 듯했다.

세상에, 안전지대로 알려진 이곳에서 몬스터 떼를 만나 죽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아마도 내가 최초일 것이다. 이 얼마나 억울하고 창피한 일인가?

동파오는 절망했다.

그리고 이번 사태의 원흉인 그리드가 슬그머니 망토를 벗었다.

‘힐셔틀이 이제 한곈가… 아쉽지만 휴식 시간이군.’

[말락서스의 망토를 해제하였습니다.]

말락서스의 망토가 피 냄새를 풀풀 풍기며 근방에 숨어 지내던 온갖 몬스터들을 자극, 유인하고 있었다.

그리드가 그 망토를 벗어 인벤토리에 집어넣는 순간, 거짓말처럼 몬스터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됐다.

하지만 동파오는 워낙에 경황이 없어서 그리드를 제대로 관찰하지 못했고, 이 사태의 원흉이 그리드라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드는 잔당 처리에 열중했다.

키야아아악!!

[거대 도롱뇽을 해치웠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도롱뇽의 쓸개’를 획득하였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진귀한 진주’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203,000을 획득하였습니다.]

[이란족 리자드맨을 해치웠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쓸만한 언월도’를 획득하였습니다.]

[파티장 그리드가 ‘사파이어’를 획득하였습니다.]

[경험치 255,000을 획득하였습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드란 계곡!

이곳의 몬스터들은 수아즈 산맥의 몬스터들보다 훨씬 더 강했다. 최소 레벨이 190이상으로, 그리드조차도 7마리 이상의 몬스터를 한 번에 상대할 경우 제법 곤욕을 치를 수준이었다. 하지만 동파오의 힐이 있었기에 몰이사냥을 가뿐히 성공할 수 있었다.

‘과연 160레벨 사제답게 엄청난 힐량을 자랑하는군. 큭큭, 저 힐셔틀만 있으면 교황청 가는 길까지 광렙할 수 있겠어.’

동파오와 파티를 맺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경험치를 획득한 그리드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겉으로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고 투덜거렸다.

“휴, 죽는 줄 알았네. 이렇게 몬스터가 많이 나타나는 지역은 또 처음 봅니다. 이 동네 원래 이래요?”

시치미 뚝 떼는 그리드에게 동파오가 도리도리 고개 저었다.

“당최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본래 이곳은 몬스터들이 출몰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전 이곳에 이 정도로 많은 몬스터들이 서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완전 소름 돋는군요… 후…”

동파오는 한탄하면서도 힐끗힐끗, 그리드의 손에 쥐어져 있는 단검을 훔쳐보고 있었다.

‘심연의 바다처럼 깊은 푸른색의 검기가 맴돌고 있는 것을 보아… 8강 이상 강화된 무기로군. 어마어마하다.’

그리드와 파티를 맺은 후.

그리드의 레벨이 147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동파오는 그리드가 혼자서 롤링까지 올 수 있던 이유가 순전히 운이 좋아서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함께 싸워보고 깨닫게 된 사실인데, 그리드는 레벨에 비해서 무지막지하게 강했다. 그가 수아즈 산맥을 혼자서 횡단할 수 있었던 이유는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강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강함의 비결은 저 8강짜리 단검일 테지… 단검 전사는 한손 검이나 둔기, 대검 전사에 비해서 공격력이 형편없이 부족해야 정상인데… 이자의 단검은 워낙 강화가 잘 돼서 어지간한 둔기 이상의 공격력을 발휘하니 막말로 사기군.’

단검은 공격 속도가 빠른 대신 공격력이 약하다. 한데 그리드는 단검이 워낙 훌륭했기 때문에 공격 속도와 공격력 모두 뛰어났다.

‘저만한 무기를 가지고 다니다니, 사실은 꽤나 부자일 게야. 좋아, 생각보다 많은 몸값을 뜯어낼 수 있겠어. 그리고 저 단검까지 빼앗을 수만 있다면…!’

‘휴식은 충분하겠지.’

동파오가 음흉한 미소를 짓는 사이, 그리드가 슬그머니 말락서스의 망토를 착용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동파오를 재촉했다.

“슬슬 이동하죠. 너무 지체하진 말았으면 합니다.”

“예… 한데 그 전에.”

동파오가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리드를 노려봤다.

그리드는 동파오가 말락서스의 망토에 대해서 눈치 챈 것인가, 긴장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에게 동파오가 말했다.

“아이템 분배… 파티장 분배 말고 순차 분배로 바꾸시지요? 형제님, 공평하게 합시다.”

“…그냥 파티장 분배로 유지하죠. 순차 분배로 하게 되면 한 명한테만 비싼 아이템이 쏠려서 공평하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에 반으로 나눠서 정산해드릴 테니 걱정 마세요.”

“아니, 하지만…”

그리드가 말하는 목적지는 교황청이다. 하지만 동파오가 계획하는 목적지는 교황청에 도착하기 전, 그리드가 죽게 될 장소였다.

지금 아이템 분배 방식을 바꿔놓지 않으면 아이템을 분배 받지 못하는 수가 있었다. 그래서 동파오는 파티 분배 시스템을 꼭 순차 분배로 바꾸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드는 막무가내였다. 이미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빌어먹을 새끼!’

동파오는 저절로 욕설이 나왔다. 하지만 이내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몸값 많이 뜯어낼 테니까 잡템 따위야 너 다 주마.’

걸음을 재촉하는 그리드를 보면서 동파오는 싱글벙글 웃기까지 했다. 제 명을 재촉하는 그리드의 꼬락서니가 웃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금방 사라지고 만다.

다시 길을 걷기 시작하고 채 5분이나 지났을까?

새로운 몬스터들이 구름떼처럼 출몰하였으니 동파오는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게 대체 뭐냔 말이냐!! 어디서 이 많은 몬스터가 자꾸자꾸 나타나는 거지?!”

“레베카교의 사제들은 고단한 수행 퀘스트를 수시로 반복한다고 했죠? 이 또한 레베카 여신께서 내리신 시련이 아닐까요?”

그리드는 메소드 연기를 구사하고 있었다. 본인이 몬스터를 끌어들이고 있는 주제에 아닌 척, 모르는 척을 진짜 잘했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동파오는 그리드를 눈곱만큼도 의심할 수 없었다.

“아닙니다! 몬스터를 사냥하는 시련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퀘스트가 뜨지도 않았고…!”

“흠… 일단 눈앞의 녀석들부터 처치하죠. 지원 잘 부탁합니다.”

“네…”

비싼 마나 물약을 또 여러 개 소비하게 생긴 동파오가 의기소침해졌다. 반면 그리드는 즐거워 미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짜로 얻은 힐셔틀이니까 써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써먹어야지!’

그랬다.

그리드는 힐러와 공짜로 파티를 맺게 된 김에 아예 뽕을 뽑을 작정이었다. 교황청에 도착하기까지, 동파오의 힐에 의지해서 무한사냥을 반복할 심산이었다.

동파오가 그리드의 목숨 값을 노리고 있는 이때, 되레 그리드는 동파오를 노예화시키고 있던 것이다.

그야말로 끼리끼리 만난 두 사람은 그렇게 계속해서 사냥을 반복하였고…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싸!”

“오오! 저도 레벨이…!”

롤링에서 출발하고 딱 12시간이 지난 시점!

그리드는 무려 3개의 레벨이 올랐으며 동파오도 1개의 레벨이 올랐다.

동파오는 의외로 신나있었다.

고작 2인 파티로 개떼처럼 몰려오는 고레벨 몬스터들을 사냥하다보니 레벨이 워낙 빨리 올라 만족스러웠다. 어지간한 고렙 파티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더 나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리드와 이곳에서 한동안 머물며 사냥만 하고 싶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랭커도 도전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곧 본래의 목표를 상기했다.

‘레벨보다야 돈이 더 중요하지.’

크라임 숲.

본래라면, 롤링에서 출발하고 3시간 내에 도착했어야할 이곳을 무려 12시간 만에 도착하고 말았다.

기다림에 지친 어쌔신들이 어찌나 분개하고 있을지 대충 상상이 갔다.

초조함을 느낀 동파오가 재촉했다.

“형제님, 우리 저쪽 동굴에서 잠시 쉬었다가 가도록 하죠.”

동파오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려본 그리드는 새카만 동굴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굳이 쉬어야 합니까? 이 기세로 레벨업하면서 곧장 교황청으로 직행하죠?”

동파오가 그를 설득했다.

“전사인 형제님과 달리 제 스태미너는 벌써 몇 번이나 한계를 맞이했습니다. 충분한 휴식이 필요합니다. 지금만 해도 마나 회복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힐을 몇 번 사용하지도 못할 지경입니다.”

“어쩔 수 없군요.”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파오의 인도를 받은 그리드가 동굴에 입장했다.

그의 눈앞으로 알림창이 떠올랐다.

[뱀파이어 공작 마리로즈가 봉인 된 공간입니다.]

[마리로즈의 사기(邪氣)가 당신의 마력을 혼탁하게 만듭니다. 모든 종류의 마법과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항하였습니다.]

“…?”

그리드가 어리둥절해했다.

“여기 레이드방 아니에요? 뱀파이어 공작? 남작급 뱀파이어만 해도 겁나 세다던데 공작급이라니? 우리 여기 있다가 피 빨려 죽는 거 아닙니까? 뭐 이런 위험한 공간에서 휴식을…”

동파오가 고개를 저었다.

“걱정 마십시오. 마리로즈는 2대 교황 크레이슐러와 레베카의 딸들에게 봉인당한 이후 지금까지 수백 년 동안 잠들어 있는 존재… 결코 깨어나지 않습니다. 지금 형제님이 걱정해야할 건 마리로즈가 아니라 바로 이들입니다.”

“…?!”

그리드가 깜짝 놀랐다.

동파오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아무 것도 없는 줄로만 알았던 어둠 속에서부터 3개의 그림자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동파오와 한통속인 어쌔신들이었다.

그리드가 혹 도망치지 못하도록, 순식간에 동굴 입구를 가로막고 선 그들이 동파오를 노려보았다.

“왜 이렇게 늦은 거지?”

동파오가 설명했다.

“이상하게도 계속 몬스터가 나타나더군. 녀석들을 처리하면서 오느라 이동 속도가 늦을 수밖에 없었다.”

13위 어쌔신 스니퍼가 믿지 않았다.

“몬스터? 거짓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라. 이 근방은 몬스터는커녕 늑대 한 마리 찾아보기 힘들잖아? 내가 이래서 중국인을 싫어해. 입만 열면 허풍에다가 뻥이야, 썩을!”

“거짓말이 아니라 진짜다. 정 못 믿겠으면 네가 이따가 직접 확인해봐라.”

“됐다. 알았으니 그만해라.”

11위 어쌔신 커브는 더 이상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사태를 진정시킨 그가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그리드에게 2자루 단검을 겨눴다.

“이봐. 죽어서 경험치 떨어뜨리고 싶지 않다면 돈을 내놔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어쌔신은 암살에 특화 된 존재다.

전직 퀘스트부터가 암살이며, 전직 후에는 몇 명을 암살하느냐에 따라서 갖가지 추가 보상을 받았다. 하여 어쌔신들은 필연적으로 꾸준히 암살을 진행했고, 그러면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뛰어난 대인전 실력을 갖췄다.

기본적으로 체술이 뛰어나기도 했기에, 마리로즈의 사기에 억눌려 모든 종류의 스킬 사용을 금지시키는 이곳에서 어쌔신은 가히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낼 수 있었다.

그리고 애초에 이쪽이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니, 커브는 자신이 그리드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한편, 대충 상황을 파악한 그리드가 동파오에게 질문했다.

“동파오님, 레베카교의 사제는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하는 게 아닙니까? 돈을 노리고 여행객의 목숨을 해치는 행위는 교리에 어긋날 텐데요? 이는 즉, 레베카 여신을 배반하는 행위이며 사제인 당신에게 치명적인 결과로 작용하지 않습니까?”

동파오가 고개를 저었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부분이지요. 레베카교의 사제는 사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늘 율법과 교리를 따라야하니 신용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우리는 퀘스트 기간에만 율법을 지키면 됩니다. 평소에는 무슨 악행을 저지르더라도, 교단에 발각되지 않는 이상 페널티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드는 납득하지 못했다.

“신성력 스탯은 신을 믿고 율법과 교리를 따를수록 더 강화되는 게 상식 아닙니까?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행동하기보다는, 기왕지사 사제로서의 본분을 지키는 편이 신성력 스탯을 높여줘서 장기적으로 좋지 않습니까?”

동파오는 그리드가 살고 싶어서 발악하는 것으로 보였다. 어떻게든 나를 설득하려하는 그가 측은하게 느껴졌다.

“형제님, 제가 아까 했던 말 벌써 잊으셨습니까? 우리에게는 기도라는 행위가 있습니다. 기도만 해도 신성력 스탯이 오르기 때문에 굳이 율법과 교리를 지킨답시고 개고생 하면서까지 신성력 스탯을 올릴 필요는 없지요. 그리고 제가 비록 악행을 저지를지언정 레베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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